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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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를 꿈꾸며’중에서

  프랙탈 구조는 전체 구조가 부분 속에 나타나고, 부분의 자기 증식이 전체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무한 반복의 구조 속에서 순환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증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물론 개인적인 감동과 사색이겠지만 한 번 날개 짓으로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붕새보다 길가의 핀 풀꽃의 흔들림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정의할 수는 없다. 객관적일 수 없는 일에 기준을 마련하는 일만큼 무모한 일은 없다. 사람마다 다른 소리의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침묵은 소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음의 반대편, 잡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침묵이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분명한 하나의 소리이며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물론 그 침묵은 무언의 말과 보이지 않는 메시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평화의 경지이며 무소음의 세계이고 정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뜻한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니 모든 사물이 그 자리에 정지화면으로 멈추어 선 상태를 말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한 소리 없음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를 가로지르는 침묵에 대해 깊은 사색과 다양한 관점을 소개한다.

  침묵의 모습은 어떠한지에 대해 시작해서 인간을 둘러싼 말과 침묵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고 침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말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소통과 의미의 전달이 사실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발성 기관을 통해 언어로 표현되는 입말만이 소리라고 정의한다면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침묵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나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바람소리를 통해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소리가 만들어내는 생의 감각을 절감한다. 우리에게 소리는 삶의 조건이며 이유이고 확인이다.

  하지만 영원히, 끊임없이 소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다. 만약 침묵이 없다면 소리도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침묵은 휴식이고 안정이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침묵’에 대한 집중력과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이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수많은 작가들을 보아왔지만 <침묵의 세계>의 저자는 집요하다. 깊은 사색과 오랜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면 쉽게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갸웃거리며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침묵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자아, 사물, 역사, 형상, 사랑을 주제로 침묵을 이야기하던 저자는 자연과 농부로 시야를 넓히고 ‘詩’와 침묵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조형 예술은 물론이고 잡음어로 표현된 소리와 침묵의 관계는 마치 살아 있는 대상과의 한 판 승부를 보는 듯하다. 라디오는 침묵의 절대악이 아닌가! 저자는 주제에 걸맞게 ‘라디오’가 지닌 속성을 통해 침묵을 돌아본다. 침묵이 없는 세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침묵의 관계는 제목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 logos와 pathos의 세계를 넘나드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의 전부가 아니지만 저자에게 신앙은 곧 하느님과 일치한다. 어쨌든 이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은 말에서, 즉 소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더 큰 세계를 감싸고 말과 소리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훨씬 더 큰 의미로 여겨진다. 한계를 말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에 대해 저자 막스 피카르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침묵은 단순하게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둠은 침묵과 닮아있다. 하루에 두 마디만 하고 살았던 학창 시절도 있었지만 침묵하고 싶을 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창밖에 내린 어둠은 대체로 말이 없고 소리를 흡수하며 휴식과 안정을 준다. 침묵에 대해 한번쯤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아니 우리 주변의 모든 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면, 내가 뱉어내는 말들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책 이상이 된다. 소리없는 세상은 침묵조차 소음일까?


081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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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레꽃 2009-03-1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보고 갑니다. 친구의 추천으로 이 책을 찾게 되었는데 '인식의 힘'님의 글을 읽으니 책이 확 당겨지네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 참 인상적입이다.

sceptic 2009-03-24 23:02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즐거움으로 가득하시길...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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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성에 내재한 의미만큼 상징하는 바도 다르고 그것에 대한 태도 또한 다르다. gender와 sex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큼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은 각양각색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점이든 개인적 관점이든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일 수 있겠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1~3>에서 인간의 ‘성’을 철학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책들은 미셸 푸코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4권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후 출판을 절대 반대했던 유언에 따라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쨌든 뭔가 미진함이 남아 있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성’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1권에서 저자는 전반적인 흐름과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직 전 단계로 전반적인 환경과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성의 역사 1>보다 ‘앎의 의지’라는 부제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철저하게 억압적인 시대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을 필두로 억압의 가설이나 성의 장치들 그리고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성’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성sexualite과 섹스sexe의 개념 차이에 대해 구별하며 번역자의 용어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단순한 성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개념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규정된 개념이다.

  이 개념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프로이트가 사용했던 성생활이나 그와 관련된 내용과는 다르게 이면에 숨어 있는 권력과 앎의 의지와 연관지어 사용한 용어인 ‘성sexualite’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에게는 억압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렇게 17~18세기를 거쳐 근대에 확립된 성의 개념과 기독교적 억압 요소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었는지가 ‘앎의 의지’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과연 ‘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걸어왔는가? 그렇게 고착된 개념들과 태도는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가? 그것이 미셸 푸코가 탐구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이라는 동물종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역사와 철학의 접점 속에서 끊임없이 정교해지는 억압의 구조였다. 질서와 절제를 미덕으로 한 기원후 1~2세기 혹은 기원후 4세기 경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된 논의들과 저작들 속에서 먼지 묻은 ‘성’에 대한 개념들을 끄집어내는 저자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 ‘성’을 바라본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역사가는 통시적 관점에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혹은 ‘성’과 관련된 사건 혹은 현상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한계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미셸 푸코는 한 발 나아가 문헌들을 뒤적이며 그들이 주장했던 연애, 결혼, 가정, 동성애와 관련된 의미망들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상쇄되지도 서로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뒤쫓고 서로 겹치며 서로 재활성화한다. 쾌락과 권력은 복잡하고 확실한 자극과 선동의 매커니즘에 따라 서로 연관된다. - 1권, P.70

  근대로 이행과정에서 성은 어둠 속에 침잠한다. 그것은 섹스를 ‘비밀’스런 것으로 운명지어버린 과정에 놓여 있다. 그래서 오히려 끊임없이 증폭되고 오해되고 억압받아 온 것은 아닐까? 기독교적 윤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원후 1~4세기 문헌들을 고찰하려는 미셸 푸코 태도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 발원지를 찾아 변형 혹은 왜곡 된 사적 과정을 고찰하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만 쾌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을 통제하는 권력과 지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교묘하게 비틀고 가리고 헤집으며 자유로운 사유 방식을 택하는 저자의 개방적 태도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론에 익숙하고 주장을 준비하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둥절하게 1권이 끝나 버린다.

  쾌락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가?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우선 저자가 ‘도덕’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도덕’이란 단어의 모호성은 다들 알고 있다. 이것은 가족, 교육기관,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규제체제를 통해 개인이나 그룹들에 제시되는 행동규칙과 가치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2권, P. 41

  쾌락의 활용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형식면에서 서론과 결론을 갖추고 있다. 세 권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양생술과 가정관리술, 연애술과 진정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전 기독교 시대의 쾌락에 대해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와 로마에서 논의됐던 쾌락의 종류와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을 논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적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의 삶에서 쾌락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오해에서 비롯되는 관계 설정. 그것이 도덕과 결합될 때 빚어지는 억압의 메커니즘과 교묘한 틀이 숨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1권이 1976년에 발간되고 8년이 지나 2권과 3권이 출판된다.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보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을 저자를 생각하며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더없이 궁금해진다. 4권으로 출판 예정이었던 ‘육체의 고백’을 기다려 보면 조금은 궁금증이 풀릴 듯도 하다.

성적 활동이 이와 같이 도덕적 평가와 구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원죄의 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 2권, P. 64

  인류가 활용해 온 쾌락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적 윤리로서 악이나 원죄로서 바라보아서는 결코 그 의미와 삶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결혼과 가정, 연애와 소년애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고찰은 그 갈피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읽어내야 한다. 미셸 푸코는 문장들 사이에 여백과 생략이 많다. 결론짓고 정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것들을 모조리 독자에게 숙제로 남긴다. 아니 그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 달라는 주문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가능성과 상상력과 사유의 단초들을 열오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마지막 3권에서 내세운 주제는 ‘자기 배려’이다. 그런데 이 자기 배려는 협소한 이기적 관점이 아니다. 국가의 관점에서 영속적인 사회를 유지하려는 태도나 어떤 질서 그리고 자연 질서와 합일되는 전통 속에서 자신의 쾌락을 꿈꾸게 하고 있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진 시대, 근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그 자연스럽고 질서 정연한 전통과 결별한 것은 아닐까? 육체적 관점과 아내, 그리고 소년들을 통해 ‘성’과 사랑이 지닌 의미와 질서들을 일별하는 것이 3권의 내용이다.

  교양 있는 인간형이란 자신의 육체는 물론 조화롭게 계발된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치적 인간으로 이상형은 이렇듯 쾌락을 조절하고 아내는 물론 다른 소년들과의 관계 들이 국가의 정치적, 문화적 개념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들이 오늘에 되새겨져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과 논의들 속에서 진정한 쾌락은 자신에 대한 배려와 관계들 속에서 맺어지는 ‘절제’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억압과 권력의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주체적인 삶이 주는 행복에서 우리는 한 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연이 성적 쾌락에 부여한 상위기능, 성적 쾌락이 전달하고 따라서 소모시켜야 할 물질의 가치, 바로 이런 것들이 성적 쾌락을 질병에 근접시키는 것이다. 1, 2세기의 의사들이 그 같은 양면성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과거에 입증된 것보다 더 발전되고 더 복잡하며, 더 체계적인 병리학을 기술하였다. - 3권, P. 135

  의사들과 철학자들의 공모로부터 기독교의 윤리는 시작되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왜곡된 종교는 인간의 삶의 황폐화한다.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육체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종족이 보존되고 또 하나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성’이 문화와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양상으로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탈근대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아야 할 문제는 아닌가? 아니면,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시각과 통찰을 위한 인식 도구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가?


080108-0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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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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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셸 푸코의 이름을 처음 본 순간 그 의미와 무관하게 코를 간질이는 맵싸한 풋고추가 생각났다. 강렬한 자극만큼 그의 인상 또한 선명하다. 단 한 올의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 헤어스타일(?)이 민망했기 때문이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우선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와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외계인에 가까운 느낌으로 그를 만나면서 글을 통해 만난 그는 더욱 그러했다. 프랑스인 특유의 난해하고 복잡한 문장, 상징과 은유가 풍부한 표현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철학자의 글들에 비해 좀 나은 편이지만 역사적 관점, 특히 17~8세기 고전주의 시대의 관점에서 발원한 그의 사유의 세계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감시와 처벌>을 거쳐 <광기의 역사>를 통해 이번엔 <성의 역사>를 만날 차례다. 순서와 무관하게 시간 날 때마다 한 권씩 손이 가는 이유는 탁월한 안목 때문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가르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침에 찡그리며 눈을 뜨고 피곤에 지쳐 밤에 잠이들 때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생각’하며 보내는지 모르겠다. 일상에 대한 반추, 일을 하기 위한 고민 이외에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유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미셸 푸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68혁명의 불명예를 안고 있지만 행동하는 양심과 실천하는 지식인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현재적 유용성에 대한 사유의 밑거름이다. 삼십대 초반부터 정점에 달한 그의 사유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이기도 하다. 불과 몇 백년을 거치면서 우리의 ‘신체’와 ‘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탐구하기 위해서 그를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신체에 깃든 규율과 통제, 절차, 질서 등은 근대적 일상을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군대와 학교에서 병원과 직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들의 모습은 하나의 병영을 방불케 한다.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움직이는 우리들의 신체는 이미 보이지 않는 감시와 통제의 눈길을 벗어나기 어렵다. 시선은 하나의 권력이다. 무언의 억압과 규율을 만들어낸다. 신체를 조절하는 것은 효과적이고 특별한 장치들이 동원된다. 벤담이 개발한 판옵티콘과 광인을 다루는 수용소와 병원이 그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 자체가 역사적 관점으로 판별해야 하는 변곡점이 되고 개인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의 한계는 점점 좁하지기만 한다.

  양운덕의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들을 통해 천착해온 ‘신체’와 ‘권력’이 빚어내는 근대의 주체 문제를 거론한다. 권력을 보는 과점이나 근대적 신체를 만드는 규율의 기술, 신체를 훈련 시키는 권력 장치, 생명을 관리하는 성의 문제 틀에 대해 핵심적인 관심사를 설명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서구 역사에서 계몽은 진리의 진보와 자유의 역사를 결합시키는 시도였다. 즉, 계몽은 진리의 성장이 바로 주체의 자유를 확대시킨다고 믿는다. 푸코는 이런 믿음에 따라서 계몽에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는 태도가 바람직한지를 질문한다. - P. 84

  푸코의 질문의 핵심은 항상 냉소적이고 풍자적인 문장의 뉘앙스에 놓여있다. 대안을 제시하거나 이것이다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 그의 태도는 판소리의 창자와 유사하다. 슬쩍 빗겨서서 딴지 걸고 돌아서 시침떼고 정확하고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놓지만 방향을 제시하거나 굵고 강렬한 목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참 맥빠지는 게릴라 전술같은 글쓰기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푸코는 스스로를 주체로 아는 개인들을 말하고, 행위하고, 사고하도록 만드는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면서 고고학적이며 계보학적인 비판적 방법을 사용한다. - P. 85

  필연적 역사라고 믿는 것들 사이에 구멍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성이라고 부른다.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기도 하고 인연이 되기도 한다. 현재 사회 구성원들의 기계적인 작동원리와 역사 원칙들은 그렇게 우연적이 것들과 필연적인 실제 사이의 경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미셸 푸코는 그 경계를 밝히거나 그 언저리를 보여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아닐까? 이제 그의 글을 좀 더 신경써서 읽어 볼 차례이다.


0801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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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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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습관적인 독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책이 주는 지적인 이미지와 교양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조차 모호할 수도 있다. 책이 인간에게 주는 기능과 역할을 진부하게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갈 때마다 헤어나지 못하고 책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도피하고 싶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책의 표지를 접어놓아야 불안하지 않은 상태는 중독이다. 알면서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나무라지 않으니 더욱 큰일이다. 책만 읽는 바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때때로 쓰고 싶은 헛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 때가 오려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운 일은 책을 쓰는 일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다. 쉽게 가자면 고전을 섭렵하면 된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맞는 말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과 고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불과한 책들이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진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쓰레기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멈출 줄 모르는 나는 활자중독증이다.

  중독의 쾌락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과 같은 길고도 엽기적인 제목의 책이 내게 그런 즐거움을 준다. ‘18’을 ‘씨팔’로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인지 아니면 남경태의 의도적 오류인지 모르겠다. 남경태가 이번에는 철학에게 ‘서사구조’의 옷을 입혔다. 스토리가 있는 철학은 대중화의 또 다른 신 개발품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찌 보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책들 중에 독자들은 보기 좋은 몸부림을 선택하면 된다. 내게 남경태의 저작들은 보기 좋고 입에 달며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개념어 사전>이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철학>과 같은 맥락이다. 똑같은 제품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는 다른 법이다. 내게는 아주 매력적인 제품들이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독학의 한계는 극복하기 어렵다. 개별 철학자들의 주저들을 한 권씩 섭렵하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이지도 않고 퍼즐처럼 한 조각씩 제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만하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소설’의 옷을 입고 등장한 ‘서양철학사’라면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은 주제별 철학 개념 사전에 가깝다. 18개의 철학적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주체, 인식, 타자, 지식에서부터 행복, 매체, 텍스트, 언어, 사랑, 욕망, 이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에서 시작해서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대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핵심 쟁점들을 선별한 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열여덟개의 ‘스토리’에 있다. 14세기 수도원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젊은 수사가 미래의 종교와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등장하기도 하고 저자와 편집자, 기자와 방송국 PD의 푸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애 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 일기 형식의 나레이션과 독백이 이어지기도 한다. 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고 파괴적인 형식들이지만 독자들의 깔깔한 입맛을 돋우는 진미 역할을 한다. 결코 가볍고 식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저자의 노력과 고민이 여실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나의 스토리가 정리되면 뒤이어 이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쾌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남는다. 철학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든 대상을 관찰하든 그 관계에 대한 인식론이든. 그렇다면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저자에 의해 선별되고 편집된 개념만을 전해 들어야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책의 한계로 치부한다면 속 편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요약정리에 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 명의 철학자 혹은 한 시대의 철학을 간단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기심과 궁금증 혹은 오해와 단정을 피하기 어렵다. ‘더 읽을 책’ 목록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는 했지만 갈증은 심해진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그거였다면 대 성공이다!

  저자의 말대로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론 생각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에 대한 주체성을 확립하고 행동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거창하게 접근했는지 항상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변했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7121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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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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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졌고 특수성과 보편성 측면에서 고민거리가 줄었다.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속내를 폭로하거나 까발릴 것도 없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지식인의 역할은 행동과 실천만 남은 것일까? 그런 논리라면 모든 지식인은 활동가나 혁명가가 되어야 하나? 직접 움직이지 않는 지식인은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거나 사이비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사르트르가 3일간 강연했던 내용을 고스란히 살려 낸 책이 이번에 새로 발간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고등학생까지 읽힐 목적으로 어려운 용어와 인용한 사람들에 대한 각주까지 상세하게 안내되어 있다. 가장 쉽고 이해하기 쉽게 펴낸 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내용 자체의 어려움은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친절한 해설이 따라붙지 않는 다음에야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번역본이 보여주는 용어상의 한계는 ‘세계-내-존재, 준-의미작용, 비-지식’과 같은 철학용어는 그 자체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사용된 맥락보다 먼저 개념이 잡히지 않으니 문맥 속의 의미를 잡아낼 뿐이다. 하이데거를 위시한 실존주의 철학이 성행했던 시기의 용어와 개념들은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존재’라는 개념 자체도 ‘be’동사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개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물론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차용되면서 발생하는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거칠게 훑고 넘어가도 사실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동양사람인 일본인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사르트르가 강연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롭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 아니라 패전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우리 시각으로 보면 지독한 ‘빨갱이’였던 사르트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그 의미와 약발이 떨어지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의 어법은 강경하고 거칠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그가 살아온 삶이 그러하듯이 올곧은 선비의 모습이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힘은 강연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만큼 분명하고 단호하다. 3일간의 강연을 통해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기능’, ‘작가는 지식인인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강연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듯이 지식인은 불안한 존재다. 지배계급(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위치한 중간자의 입장으로 지배자의 특수성과 피지배자의 보편성을 모두 간직한 모순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다. 결국 지배계급에 기대어 살아가 수밖에 없는 이들은 피지배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목표와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두 계급 사이의 모순과 갈등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노동자 계급의 포괄주의와 보편성은 지식의 전문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특수성에 기댄 지식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 삶의 외적 모순을 극복하고 내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기능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보편주의에 기초한 지식인의 전문성은 결국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지만 소수자에 의한 다수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더욱 강력해졌으면 네트워크를 형성해가고 있다. 서서히 그 전모가 밝혀지는 검은 괴물 그룹 삼성이 그 증거이다. 산업자본은 현대 사회의 지배계급이다. 맑스주의에 기초한 사르트르의 사유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자본의 증식과 거대화를 예견한 듯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르트르의 사유 방식은 거칠지만 설득력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인간은 ‘상황속의 존재’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과연 지식인인가? 지식인의 기능에 충실한가?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지식인인가? 지식인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생충처럼 자본에 달라붙어 있거나 왜곡된 시선을 선전하는 사이비 지식인은 없는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참된 지식인을 만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작은 소망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07112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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