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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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복’이란 말이 내게 만들어준 이미지는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통영여중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진 청마. 딸 하나를 둔 채, 스물 한 살에 청상이 된 이영도를 사랑하게 된 청마. 그는 철벽같은 현실 앞에 좌절했을까?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그리움에 행복했을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니라’는 기막힌 아이러니는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는 정호승의 「또 기다리는 편지」조차 청마의 「행복」에 대한 변주로 들린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해가지고 을씨년스런 겨울 하늘과 아파트 지붕의 경계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개짓을 바라보는 이 푸른 시간이 어쩌면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루시드 폴의 ‘날개’를 들으며 밝음과 어둠의 경계를 내다볼 수 있는 이 작은 평화 외에 무엇이 필요할까?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은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 플라톤은 ‘고통이 없는 상태’라는 최소한의 조건을 제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일 게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작은 배움과 노력으로 성취할 수 것이 ‘행복’이라고 말했다.

  70년 전에 러셀은 ‘경쟁, 권태, 자극, 피로, 질투, 피해망상, 죄의식, 여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행복이 우리의 곁을 떠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열정, 사랑, 일, 폭넓은 관심, 노력’ 등이 우리를 행복으로 안내한다고 말한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간단한 행복론이다. 그러나 러셀의 이야기는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뻔한 관점으로 말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뛰어넘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종교적인 계명에 순종하거나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서는 행복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에 도달한다. 자신의 욕구와 관심에서 벗어나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불행의 원인을 ‘세상’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의 생존을 지탱해주고 나에게 행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외부세계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통한 교류 없이는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다.

  당신은 행복한가? 우리는 한 번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평생 우리를 지켜줄 행복에 대한 관점을 만들고 가치관을 세우는 일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네모난 틀에 갇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경쟁에서 이긴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수다스런 말로 행복해지는 법을 달콤하게 말하지도 않는다. 깊은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통찰로부터 길어 올린 사색의 결과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전해준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만 깃들기 때문이다. - P. 75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라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과로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걱정이나 불안이다. - P. 82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을 완전히 인식하면서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충족감을 주는 행복이다. - P. 119


  문장 하나하나가 벽에 붙여두고 음미할 만한 금언처럼 읽히는 책이다. 수학자이며 철학자로 행동하는 지성으로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세상의 모순과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냉철하게 인식했던 20세기의 가장 명민한 인간이었던 러셀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만큼 이성과 감성을 갖춘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타인과의 관계, 세상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나에게 러셀이 전해주는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조건은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하루에 3천 단어 이상을 사용해서 매일 글을 썼다는 러셀의 글은 깊고 아름답다. 나를 돌아보고 삶을 반성하게 하는 『행복의 정복』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 깊은 겨울, 한 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면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올바른 기분 전환 방법은 사고 작용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리거나 적어도 현재의 불행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돌리는 것이다. - P. 246


0912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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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1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범 옮김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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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가끔씩 무모한 도전을 할 때가 있다. 뻔히 질 줄 아는 게임을 하기도 한다. 무모한 도전이지만 신념과 가치 때문에 개인적 이익과 안전을 포기할 때도 있다. 인간적인 갈등이야 없을 수 없지만 부끄럽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가끔 무리수를 둘 때가 있다. 주로 철학책이 그러하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서문>이 그랬고, 비트겐슈타인의 <청갈색 책>이 그랬다. 하지만 끓어 넘치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다. 번번히 보기좋게 나가떨어져도 포기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래도 좀 나았는데, <형이상학>은 얼마나 이해하고 그 핵심을 만져보기나 했는지 의심스럽다. 책에 대한 평가는 어불성설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직접 만난다는 설렘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완역판이 아니라 발췌본을 먼저 대할 생각으로 가벼운 분량의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시리즈를 선택했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철학아카데미’나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배우고 익히고 싶다는 생각은 현실을 핑계로 훗날로 미루고만 있다. 함께 생각하고 앎을 나누는 공동체는 현실에 있음에도 쉽게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탓이리라.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나에게 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있음으로 시작된다. 나와 대상이 있다면 있음은 본질과 형상으로 구분된다. 보여지는 것의 실체와 운동 개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설명한다. 내 존재의 근원과 삶의 가치를 성찰하기 위해 가장 밑바탕이 되는 사유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이고 그 생각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책이 <형이상학>이다.

  사물의 실체는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며 그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유를 통해서만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는 스승의 한계를 뛰어넘으로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실재론과 유명론 사이에서 접점을 찾고자 하지만 내게는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모호하고 아득한 개념들의 유희들로 비춰진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개념을 밝히고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인데 추상적 사고를 위한 사고 훈련이 턱없이 부족한 탓일 게다.

  겸손한 마음으로 보다 잘 소화된 2차 저작들을 먼저 섭렵하고 다시 도전해 볼 일이다. 책을 통해 얼마나 지적 훈련과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을지 알수 없으나 스스로 노력하는 만큼의 성과는 분명히 얻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가끔씩 삶의 목적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은 미래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맥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존재의 근원’에 대해 성찰하고 싶은 욕망이 넘칠 때 또다시 도전하게 될지도 모를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뒤로 미룬다.

  ‘들어가는 말’에서 이 책을 옮긴 김재범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 닿아 중간에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 책을 내놓은 저자의 노력과 학문적 열정 그리고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가 나를 이끌었다. 짧지만 진정성이 묻어나는 모든 저자와 번역자의 수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 만물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호기심 내 존재에 대한 질문들은 곧 우리들 삶에 대한 질문이다.

  ‘A. 원리와 원인에 관한 앞 철학자들의 이론’이라는 첫 장은 최초의 철학사라고 불린다. 제 1 장 앎에 관한 탐구 첫 문장은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고 싶어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감각적인 앎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함이 이것을 입증한다’는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의 출발점이다. 서로 생각이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은 눈에 보이는 형상과 그것의 재료 사이의 관계와 운동 사이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진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적 삶의 태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말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것은 철학적 사유나 언어 이전의 문제일질도 모른다. 종교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겠으나 밤하늘에 떠 있는 희뿌윰한 달빛처럼 모호할 뿐이다. 내가 사는 이유와 방법이 타인에게 강요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 앞에 우리는 번번이 절망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도 깨우치지 못한 삶의 진리 혹은 존재의 근원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인 것을.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자세만큼은 유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만이라고 자각해야 할 것이다.


090630-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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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2 철학 콘서트 2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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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식은 보수적이다. 젊은 날 한번 익힌 사유와 가치의 체계는 평생 간다. 보수적인 당파의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진보적인 인사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한번 지어놓은 사유의 집을 부수어버리고, 그 폐허의 자리에 새로운 사유의 집을 짓는 일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특정의 사유 체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지독한 두려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 그가 곧 철학자다. - P. 113

  우리가 철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이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이다. 철학을 한다는 말은 의미 자체가 모순일지 모른다. 철학한다는 것은 앎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것을 말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철학은 어렵고 머리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어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이다. 개념을 이해하고 사유 과정을 통해 철학의 방법을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철학사에 관한 지식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트라이앵글에 갇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모든 학문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스승 플라톤의 차이를 안다고 해서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앎의 태도와 방법은 그 연원을 밝혀 알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 속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인류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것들을 더듬다보면 반드시 철학자들과 만나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찾아내지만 그 바탕에는 반드시 생각하는 힘이 전제되어 있다. 생각하는 방법, 생각의 대상,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삶 등 우리는 여전히 2500여 년 전의 철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지식의 범위와 크기가 조금 커졌을 뿐이다. 다람쥐의 쳇바퀴처럼 비슷한 일상과 생활 환경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만 관심을 가지며 살아간다.

  철학은 단순하게 말하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와 타인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정신이든 물질이든, 사람이든 자연이든 사회든. 돈에 소외되어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불행한 현실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한 고민과 몸부림은 계속된다. 누구나.

  안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지만 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생각해 왔는지에 대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학교는 여전히 헤게모니를 장악한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억압과 구속의 습속을 철저하게 길들이고 있다. 일제고사를 부활시켜 전 국민을 한 줄로 세워 등급과 계층을 고착화하고 내면화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괴감과 좌절감을 통해 자신의 한계와 위치를 인정한다. 입시가 끝나고 학교 정문에 내걸린 부끄러운 현수막에 이름이 오르지 못한 모든 졸업생은 행복하지 못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이런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공식을 암기하며 김소월 시의 특징을 정리한 참고서를 통해서만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교육의 방법과 목적과 방향에 대해 개떼처럼 떠들어대지만 현실은 완고하다. 결과는 참담하다. 점점 불행지며 점점 억압되고 점점 길들여진다. 모두 순종하라, 모두 한 줄로 서라, 20을 위해 80은 희생하라.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가 된다. 모두 공부만 해라. 수능 성적이 계급이다. 대학 간판이 평생을 좌우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돈이 최고다.

지식은 인류 사회 전체에 이득을 준다. 물질적 자산은 남에게 주면 줄어드나 무형의 지적 자산은 남에게 준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부와 권력은 유한하나 지식은 무한하다. 육체는 죽지만 지식은 영원하다. 지식의 기본은 타인을 배려하는 데 있다.(피타고라스) - P. 27

  피타고라스가 자다가 벌떡 일어나 통탄할 일이다. 황광우의 <철학콘서트 2>는 이렇게 시작한다. 수학책에서 이름을 얻어 들은 피타고라스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저자의 관점이 훌륭하다. 단순히 철학적 지식을 씹어 뱉어주는 친절한 안내자의 역할이 아니다. 피타고라스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의 생각과 노력들을 점검한다. 그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한 권의 책에서 10명을 다루다 보니 <철학콘서트>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약점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관되게 인류의 역사와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선입견을 지우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은 책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청소년들을 위해 쓰인 이 책은 몸만 어른이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철학 입문, 교양서로 손색이 없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중요한 것은 생각의 방향이다. 그리고 열린 마음이다. 순종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학교에서 가르친대로 살고 있는 사람은 유의해야겠다. 그것이 길이요, 진리요, 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책들이 더 많이 읽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대상이 인간이건 자연이건, 영웅은 투쟁한다. 그리고 정복한다. 투쟁과 정복, 그 이면에 있는 부정negation의 정신, 이것이 서양인의 정신적 특질의 원형이 아닐까?
…… 불의 앞에서는 목에 칼이 들어오더라도, 저항하라. 저항 정신은 자유인의 권리이자 덕목이다. - P. 37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가르침이 사실은 거짓이다. 영웅이 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저항할 줄 모르고 비판 정신이 없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와 같은 삶이 아니라 스스로 주인되는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은 철학자들에게 한 수 배울 수 있다. 그대로 살 순 없다. 적어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며 그러한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는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철학자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주저에 대한 해석과 영향을 밝히고 있다. 더 좋은 태도는 이 책을 통해 그들의 저서를 직접 만나는 일이다. 메모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겠다. 제목이야 어떠하든 철학은 우리의 삶에 등대처럼 오롯한 불을 밝혀 주기를. 평생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주변을 돌아보고 행복을 찾고 싶다면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즐거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철학자의 이름을 모른다고 해서 불행하지는 않다. 주변에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학문적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정 행복한 삶과 즐거움을 찾고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배움은 어디에나 있고 책은 최후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저자가 말한대로 내게는 책은 참 희한한 물건이다. 그래서 또 다시 시간 여행을 떠난다. 물론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 꿈을 꾸며.

책이란 희한한 물건이다. 사람의 뇌에서 이상한 전류가 흘러, 그 전류가 사람의 손끝에서 글자로 바뀌고, 글자들이 모여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담아낸다. 책이란 정신의 물질화다. 알라딘이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듯, 우리는 책이라는 독특한 물건을 타고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여행을 즐긴다. - P.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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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회전, 혹은 혁명 revolution [철학콘서트 2권]
    from 사필귀정 2010-08-16 01:53 
    혁명revolution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리고 믿는다. 그런데 정작 영어 단어 revolution의 유래는 잘 몰랐다.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가 꺼낸 말이었구나. 책을 보고나서 알았다. 언론이며 광고에서 발상의 전환이니, 생각을 뒤집니 하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라는 말을 상용어구 처럼 사용해서, 뭔가 흔하다고 생각했나보다. 흔하디 흔한(?) 위대한 과학자.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의식이 보편적이라서 오히려 나의 의식은 이 대단한 코페르니..
 
 
 
실용주의 살림지식총서 324
이유선 지음 / 살림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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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 속에서 대하는 용어의 개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상황과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컨텍스트는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컨텍스트가 본래 의미를 훼손하는 경우에 있다. 빈번하게 사용하다 보면 본래 의미를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사람들에게도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는 언론이 한 몫을 제대로 한다. 지역 방언이 아니라 계층 방언처럼 비슷한 부류의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나 특정 직업군의 사람들이 새로운 은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와 조금 다르다. 이미 존재하는 학술적인 용어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의 용어를 아전인수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곡학아세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겠다.

  실용주의는 철학 용어다. 퍼스가 처음 사용했고 듀이가 미국의 교육과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후 언어분석철학의 물결로 쇠퇴했다가 로티에 의해 다시 주목 받는다. 실천적 유용성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의미와 유사하다. 하지만 ‘프래그머티즘’이 나름의 원칙과 세계관을 가진 철학적 입장인데 비해 우리가 사용하는 실용주의는 특정한 태도를 말한다. 어떤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삼으면서 이념이나 원칙 같은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

  이쯤 되면 어디서 많이 듣던 흘러간 옛 노래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언론에서 혹은 특정 정치인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실용주의가 사실은 철학적 개념인 ‘프래그머티즘’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진짜 실용주의가 무엇이고 그것을 주장했던 철학자들이 대한민국에서 주창되고 있는 실용주의를 듣는다면 까무라 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실용주의적 태도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천적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공통분모도 있고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다소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 적용대상과 범위에 대해서도 우리가 동의할 수 있을까? 이유선의 <실용주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실용주의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책이다. 표면적으로 실용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책이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시의적절한 신문 시평(時評)처럼 읽힌다. 이념과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통탄할 일들이 벌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혹은 직설적인 화법으로 점잖게 타이르는 듯하다. 때로는 날선 비판의 목소리로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학문적 입장에서 철학사상을 오도하는 현실에 분노했을 것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실용주의의 참모습을 알리고 싶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각자가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현실은 달라진다고 믿는다. 그것을 아는 것이 먼저라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추천할 만하다.

  살림지식총서의 한계라면 제한된 분량과 피상적인 논의의 수준일 텐데 오히려 머리 아프고 복잡하지 않다는 장점을 지닌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실용주의’ 책이다. 핵심을 짚고 흐름을 파악하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개괄적인 수준에서 혹은 교양 수준에서 얄팍하다 싶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성이나 실용성 측면에서 뛰어나다.

  실용주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태동과 전개 과정을 살펴 본 다음 실용주의적 관점들을 소개하나.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실용주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당연하지만 마지막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이 뼈에 사무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제도와 규범을 넘어서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실용주의자가 꿈꾸는 다원주의 사회는 이런 상상력이 억압되지 않고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사회이다. - P. 19

인간의 삶을 끊임없이 개선시키는 것을 지식의 목표로 간주하는 실용주의자들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태생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에게 진보는 인간의 보편적 본성을 구현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극복해 나가는 실천의 문제이다. - P. 49 

  좌와 우, 보수와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집어치우자. 모순된 말이지만 그리고 ‘실용주의’를 받아들이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제대로 된 실용주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나간다.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고 단순한 돈벌이를 위한 실용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실용주의를 실천하자.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만을 강조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나 현실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안에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가 창조해 낼 수 있는 삶의 모습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각자 소중한 삶의 가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는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삶의 모습이다. 저자의 말이 실용주의라는 철학적 개념에 대한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헛된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용주의적 태도만으로 사람들의 삶을 유린하거나 왜곡된 개념으로 국민들을 호도하는 짓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워낭소리’를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 했던 것이 우리의 저력이 됐고 외국인도 이에 놀라고 있다”(한겨레신문, 기사등록 : 2009-02-15 오후 07:20:08 권태호기자)고 말하는 대통령이 특목고와 자사고 확대를 통해 교육 기회 불균형의 초석을 다지고 있다. 영어 광풍과 암묵적 고교 등급제, 편법 본고사의 부활을 조장, 묵인하는 실용주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연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란 무엇인가? 허리띠 졸라매고 ‘대한민국의 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재벌의 광고 속에는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실용주의는 도대체 무엇인가? 과거로 회귀하는 급행열차는 오늘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가짜 실용주의자도 가라. 실용주의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실용주의자가 되자.


090215-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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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본 현대 한국 철학사
강영안 지음 / 궁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한국적 철학의 풍토는 척박하기만 하다. 얇고 빈약한 사상의 토대를 둘러보면 관객의 입장에서 비판과 냉소를 보내는 것과는 다른 허전함이 느껴진다. 대부분 서양 사상의 번역 소개에 바빠 보인다. 지식인의 지도를 그려나가며 철학자들의 역할과 한계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적 토양의 기저에는 항상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토대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개인적인 소회이긴 하겠지만 풍부한 지적, 학문적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인의 관점에서 토로하는 불만일 수 있으나 철학의 대중화와 글쓰기에 힘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문제는 단순하게 논의될 수 없다.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문제도 있고 전공자라 할지라도 대중화와 일반화는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철학자들의 논의에 관한 일반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도 쉽지 않고 철학자들의 주저를 번역서로 읽어나가는 데는 한계가 느껴진다.

  그래서 나의 경우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철학의 기초이론>과 <철학에세이>로 철학에 입문했다. 지금도 입문 수준이지만 김용석, 강신주, 김용규, 남경태의 책들이 길잡이가 되었고 강유원, 이정우, 이기상, 김용환, 박홍규 등의 해설서를 통해 서양철학자들의 철학을 조금 맛보거나 번역서를 무턱대고 읽어보는 등의 노력으로 안개 속을 헤매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첫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접근과 깊이있는 관심분야를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 게으르고 아둔한 탓도 있겠지만 정규교육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암기했다가 사라져버린 지식 이외에 생활 속에서 적용하거나 접근할 만한 ‘철학하기’를 배울 수 없다. 때때로 난감하기만 하다.

  강영안의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는 한국 철학사에 대한 개설서이다.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한국 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사적 전개 과정을 더듬고 있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서양 철학이 도입된 후 이 땅에서 철학을 한 첫 세대들이 철학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 그리고  현대와 탈현대 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이성과 전통에 대한 한국 철학자들의 이해 정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대강의 얼개이다.

  우리나라의 철학의 출발은 불행하게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세계사의 전환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적 자각이 이루어졌고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에 해외 유학파와 경성제국대학 졸업생들의 배출과 함께 형성된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근대교육을 받았고 철학의 기본적인 도구인 어휘와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저자는 현실지향적 철학의 태도와 근대화, 이성적 경향과 감성적 경향을 띤 현실 파악 태도에 대해 실제 철학자들의 저서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분석철학에 대한 관심과 반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해석학과 현상학에 대한 논의를 집중적으로 설명한 2장, 전통, 근대, 탈근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3장까지의 이 책의 주된 논의이다. 4장은 철학 용어에 대한 고찰로 서양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어떻게 한국어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일본에서 번역 수용된 용어와 개념들이 한국어로 정착되는 과정을 상세히 살피고 있는 4장은 전공자가 아니라서 대강의 과정과 흐름만을 훑어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철학자든 일반인이든 한국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어렵지 않게 정리하고 있어 읽을 만 했다. 현대 철학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으며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논의의 중심과 핵심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전반적인 흐름이 어떠했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책으로는 충분하다.

  그 다음은 또다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학문에 기본적인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1차적 기능이 아닌가 싶다. 분석틀을 제공하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일은 모은 학문 분야에서 요구되는 일이고 그것의 현실 적용문제는 2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지적 호기심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다. 철학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영원히 무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앎과 삶’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존재에 대한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표현하는 방법과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이고 철학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실존적 고민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생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0812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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