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조건 - 철학이 진실을 구별하는 방법
오사 빅포르스 지음, 박세연 옮김 / 푸른숲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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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두 가지 유형의 무지, 즉 근거 없는 잘못된 믿음과 믿음의 부재가 존재한다. 이는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인 것과 정보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의 차이다. - 180쪽


우리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는 자동차 백미러의 경고를 때때로 잊는다. 시야각을 넓히기 위한 착시현상은 일상에도 나타난다. 현상은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과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기 쉽다. 소설가 이현은 단편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에서 “나는 진실의 반대말이 주로 거짓이나 가짜라고 배워왔는데, 살면서 오히려 무지에 더 가까운 개념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스웨덴의 저명한 언어철학자 오사 빅포르스는 이를 증명하듯 무지의 반대말로서 진실이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과연 ‘진실’ 따위가 존재하느냐는 냉소적 태도도 좋고, 진실 그 자체를 갈구하는 종교적 몰입도 좋다. 다만 사실fact와 진실truth 사이의 거리만큼 먼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할 조건에 대해서는 한번쯤 살펴봐야 하는게 아닐까.


포스트 트루스post-truth(탈진실, 진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믿음이 여론 형성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현상)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대안적 진실alternative truth’이라는 말은 트럼프 당선 이후 일상적인 허위의 세계를 근사한 포장지에 불과한 게 아니라 또 하나의 진실을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온갖 가짜 뉴스와 추측성 보도, 편집과 일방적 프레임으로 언론의 기능을 상실한 몇몇 레거시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분노에 가까운 불편함을 설명하기 어렵다. 어이는 집을 나가고 헛웃음이 나지만 정치적 성향에 따른 이념 논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어차피 객관적 거리가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진실의 세계는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우리는 왜 지식에 ‘저항’하는가. 아니 그 전에 지식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1. 이론적 지식theoretical knowledge : 무엇을 알고 있는지knowledge that, 알고 있는”과 “2. 실천적 지식practical konwledge : 방법을 알고 있는지knowledge how, 할줄 아는”으로 나눈다. 이론과 실제의 거리만큼 추론과 경험의 세계는 타협할 수 없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경험론자들과 ‘논리적으로 그게 가능하냐’는 주장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우리는 ‘의심’ 이외에 믿을 구석이 없다. “지식은 우리 모두가 협력해 만든 창작물이다. 즉, 각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온 인식적 노력이 누적된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사고는 왜곡되는가. 거짓말과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원인을 교육 현장에서 찾는다. 구성주의가 교육에 미친 영향을 꼼꼼하게 살핀다. 비판적 사유의 부재가 악惡이라고 선언한 한나 아렌트의 말은 언제나 옳다. 진실 고수holding true를 위해서는 인식적 불평등epistemic injustice을 극복하고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을 이겨내는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가 요구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는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비판적 사고, 출처 비평, 전문가 신뢰, 토론과 팩트체크’를 제안한다. 


저마다의 상식이 다르다. 각자 선악의 기준이 다르고 공정과 정의를 보는 관점도 다르다. 내로남불이 본능이라는 핑계에도 한계가 있다. 진실의 조건마저 상대적이라면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개별적 사실을 확인해야 할까. 언어의 명징함, 개념의 정확성, 비판적 사유의 엄중함이 우리를 구원케 하리라. 진실의 반대말이 무지라면 겸손과 반성적 태도가 자신을 한발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지금 생각한 대로 살고 싶다면 말릴 수는 없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사는 대로 생각하는 증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분야는 다르지만 최근에 쏟아지는 논의는 개별적 진실, 즉 대안적 진실을 주장하는 이들의 태도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서로 궁금해하는 게 아닐까. 우리라는 카테고리 안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분야별로, 쟁점마다 진실을 서로 다르게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최소한 내 생각과 믿음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기본이 아닌가. 


우리는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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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 ‘신이 죽은’ 시대의 내로남불
허경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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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옳은 것만큼이나 잘못된 것을 진실하게, 진심으로, 열렬히 믿을 수 있다. - 182쪽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신,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진실’이라고 믿음 앞에서 계속 흔들린다. 각자의 기준과 판단으로 선택하고 결론 짓는 일이 반복되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다른 생각 앞에서 당황한다.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정하겠다는 똘레랑스의 정신을 실제 삶에 적용할 생각은 별로 없다. 옳고 그름, 선과 악, 밝음과 어둠, 좋음과 나쁨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보이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진리는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 또는 진리는 없고, 해석만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사실은 없고 관점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니체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복잡, 다변한 세상에서 사실과 진리는 순간에 머문다. 일시적 현상에 불과한 듯 세상은 혼란스럽고 목소리 큰 놈들의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허경이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신경 쓸 것 없다. 왜 우리가 각자의 내로남불과 편향성을 수정하지 못하는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니 어쩔 수 없다는 면죄부가 가능한지, 문명 발달과 이성의 힘으로 합리적인 토론과 공론의 장에서 합의가 불가능한 이유가 무엇인지 쉼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럴 수 있을까. 승리가 선이고, 성적이 모범이며, 재산이 인격인 사람들의 태도는 바뀔 수 있을까. 사람들의 관점, 편견, 인식틀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지는 논증이 아니다.’ 논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믿음이 타당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어떤 사건, 사태에 관한 누군가의 믿음이 얼마나 견실한가의 문제와 그 사람이 믿는 내용이 옳은가의 문제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근대 이후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사라진 ‘객관적 사실’ 운운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심지어 타인을 설득하고 수용하지 않는 상대를 비난한다. 

이렇게 심각한 상황을 연인, 가족, 친구, 동료, 이웃과의 대화에서 매일 마주하지만 웃으며 넘어가고 애써 외면하거나 그저 서로 다른 것 뿐이라며 위로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와 “너는 맞고 나는 틀리다”는 동어반복에 불과할까. 허경이 풀어내는 <2021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내가 믿는)는 ‘일반적 인식론의 무의식적 대전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려는 의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운 건 사람들은 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신념’에 가득한 채 세상을 살아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과 남의 행위에 대한 판단에 일관성이 결여된 경우를, 곧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재는 잣대가 다른 경우’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담론이다. 내로남불 담론의 한복판에 선 정치권의 주류 세력인 보수와 진보,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날리는 펀치가 허공을 스칠 뿐일 수도 있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에게 의심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감정적 선동에 익숙한 사람들, 무비판적 뉴스 소비자들, 팬덤 정치의 수혜자들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이 좀더 진실에 가깝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싸운다는 도덕적 정당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윤리적 기준ethical standards, 자유freedom의 평등equality, 공정fairness과 정의justice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그 기준을 정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저자는 이 지점을 톺아보기 위해 칸트의 정언명령, 홉스의 리바이어던, 로크의 통치론,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 J. S. 밀의 자유론을 들고 나왔다. 성인중심주의자, 19세기 백인 유럽중심주의자, 제국주의자, 오리엔탈리스트인 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물론 다른 고전의 한계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지만 시대 상황과 사상가들의 환경을 고려해서 이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 양상을 고찰하는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오히려 개인과 개인사이의 대화 국면, 삶의 목표과 가치에 대한 개인의 선택, 동일한 사건과 상황에 대한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장면에서 더욱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맞을까. 아니,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인가. 나는 왜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아갈까.

흔들림없는 편안함. 어느 침대 회사의 광고 카피다. 인간은 흔들리는 존재의 가지 끝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자유를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하는 세금 같은 것이다. 처음 바닥을 찍을 때 견디지 못하면 그 다음 바닥이 불안하다. 어차피 파도는 밀려온다. 아무리 발버둥 우아한 자유형으로만 헤엄칠 수 없다. 때로는 숨을 참고 수면 아래로 내려가 고요한 잠영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바닥을 발을 딛고 힘차게 떠오르고 싶을 때까지 그대로 있는 순간은 즐길 수는 없을까. 소리가 없는 세상, 침묵과 정적이 주는 편안함이 수면 위의 소란한 세상과 맞닿는 지점의 경계는 분명한가. 너는 맞고 나는 틀릴까. 

나는 ‘철학이 건강한 불편함을 지향한다’고 믿는다. -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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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 - 철학의 개념과 번역어를 살피다 메멘토 문고·나의 독법 2
신우승.김은정.이승택 지음 / 메멘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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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책은 없지, 누가 이걸 좀 써줬으면 좋겠는데, 이 분야를 좀 정리하는 사람은 없나... 책을 읽다 문득문득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많다. 번역본을 느낄 때마다 느끼는 한계 때문에 원서에 대한 욕망이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발번역에 분노하고 비문에 고개를 젓는 대신 원문을 읽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숨 쉬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누군가 대신해주길 기다린 건 아닐까 싶다. 게으른 독자의 탐욕을 채워줄 출판사, 번역가, 전문가의 노력에 기대고 산지 오래다.


너무 늦었지만 꼭 필요한 책을 만나 읽는 내내 반가웠고 논의의 출발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대 한국어로 철학하기는 ‘철학’의 자리에 문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등도 놓여야 한다.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를 최재천이 ‘통섭統攝’으로 번역하면서 벌어진 논쟁부터 의학, 법학 용어에 이르기까지 일본식 한자어로 중역된 거의 모든 분야의 용어들이 때때로 낯설고 이해를 방해하며 오독의 여지를 남긴다. 언어는 사물과 개념을 확정하고 의미를 포착하는 도구다. 한국어에 대응하는 마땅한 단어가 없으면 지식 체계가 어그러진다. 어떤 개념에 상응하는 정확한 용어는 학제 간에 통합과 발전의 기본적 토대다. 필자와 독자 사이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거나 모호한 지시 대상은 대상을 흐리게 하고 문해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처음 번역되는 개념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합의 없이 번역가, 학자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용어는 그대로 정착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혼란과 갑론을박의 비용은 상상하기 어렵다. 특히 철학이 그렇다. 누구나 쉽게 원전을 읽고 자기만의 ‘철학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2차 저작물에 의한 해설과 설명이 없으면 접근 자체가 쉽지 않아 철학은 ‘난해한 것’,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을 만들었다. 물론 지식은 일차적으로 체계적인 개념의 구조물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익히며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지만, 일상에서 활용되는 의미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된다면 철학은 아득히 멀고 흐릿한 성안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책 전체 분량은 많지 않다. 철학 용어 14개를 골라 신우승이 문제를 지적하고 새로운 용어를 제한하면 김은정과 이승택이 반론을 한 후 신우승이 다시 정리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주장-반론-재반론’의 과정이 흥미롭고 각자의 생각이 보태져 논의가 확대된다.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제안된 용어가 정답은 아니다. 이 책은 이런 논의의 촉매로서 충분하다. 이런 논쟁은 계속 이어져야 마땅하며 궁극적으로 한국어로 철학하기가 가능해져야 한다. 철학뿐 아니라 사회학, 심리학, 의학, 법학, 역사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다. be동사가 없는 한국어에서 ‘존재’는 ‘이다’와 ‘있다’로 번역해도 충분할까. 객관적, 형이상학, 인식하다, 공리 등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일은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기분이 든다.

철학이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면 그 도구인 언어부터 명확해야 한다. 논리적인 사고, 이성적 판단은 수많은 생각과 생각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사유의 도구인 언어는 발화된 순간 청자에게 이해와 오해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행동으로 증명되고 결과로 나타나기 전까지 그 숱한 혼란은 모두 개념의 혼란과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짧지만 강렬한 책은 ‘필수’적이며, 독자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준다. 책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신우승, 김은정, 이승택은 공교롭게도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원과 박사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니 출발선에서 습관적으로 개념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이 아니다. 질문과 의심의 학문인 철학에서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 논쟁이 이런 식으로라도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싶다. 함석헌 등 순우리말로 철학하기 운동을 벌인 선배들이 없지 않으나 오히려 낯선 순우리말이 철학에서 멀어지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서양 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과 개념이 어떻게 갈무리되는지는 오로지 번역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정확하고 분명한 한국어가 통용됐으면 좋겠다. 게으른 독자의 소망은 누군가에 의해 조금씩 이뤄질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이렇게 고민하고 땀 흘리는 분들의 수고에 경의를 보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읽고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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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를 권하다 -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5
이진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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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말처럼 21세기의 메가트렌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개인화individualization가 되었다. 개인주의는 근대의 발명품인 ‘낭만적 사랑과 연애’의 전제 조건이다. 21세기에 다시 유행하는 건 더이상 몰개성적 집단주의와 전체주의가 설 자리를 잃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특히 코로나 감염병이 가져온 비대면, 비접촉 시대의 생존 방식으로 개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 잡을 거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그간 숱하게 쏟아져 나온 개인주의 예찬과 독려에 이진우가 힘을 보탠다. 제목처럼 개인주의는 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생존을 위한 옵션이 아니라 자기 삶의 기본값으로 설정해야 한다. 니체와 한나 아렌트를 소개하며 방송을 탄 저자의 말솜씨는 글솜씨 못지않다. 기막힌 문장을 쓰는 작가의 어눌한 말투에 놀란 적도 있고 달변가의 쓰디쓴 문장을 읽어본 적도 있다. 말과 글을 두루 갖추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강의라도 한 문장씩 자신의 속도와 호흡에 맞춰 ‘읽는’ 행위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말을 ‘듣는’ 행위와 분명하게 차별화된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오디오북이라는 말이 생경하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해보면 내면의 욕망과 지향점은 물론 자존감과 콤플렉스까지 고스란히 들여다보게 된다. 오래 사귀고 깊이 아는 관계는 그만큼 불편하기도 하고 감내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적당한 거리 두기는 코로나 시대 이전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다. 자기감정을 쏟아내는 친구, 배려와 헌신을 요구하는 연인, 사랑과 봉사를 원하는 가족, 우리가 남이냐고 묻는 선후배, 가족처럼 지내자는 직장 동료 등 선을 넘는 오지라퍼들은 타인의 불편함보다 자신의 만족감이 우선인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참견과 조언은 백지 한 장 차이다. 관심과 스토킹은 받는 자가 판단한다. 사적인 질문과 호기심을 친근감으로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의 불편함을 고려하지 않는 모든 말과 행동은 폭력이다. 침묵은 금이 아니라 때때로 무시와 분노의 표현이다. 이 모든 말과 행동이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허용된다는 착각이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다.

이진우는 일상에서 맺는 모든 관계의 출발을 ‘자기 사랑’이라고 본다. 심리적 생존을 위해 ‘미니멀 자아minimal self’를 제안한다. 그러나 한국은 개인이 없는 사회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근대사회에 비해 개인화되었음에도 진정한 개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개인’이란 권리의 주체로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사회학자 송호근은 우리가 아직 성숙한 시민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시민사회의 시대에 한국에는 ‘비시민’이 넘쳐난다”고 진한단다. 시민 정신이 없는 시민은 사적 영역에 웅크린 이기적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는 ‘개인’이 보편화되어야 사회가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90쪽)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이기주의의 포장지로 사용하는 ‘개인주의’는 권리의 주체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가진 사람과 거리가 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으려고 이웃에게로 가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을 잃고 싶어서 이웃에게로 간다. 그대들 자신에 대한 그대들의 그릇된 사랑은 고독을 감옥으로 만든다.”라고 말했다. 고독을 감옥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코로나 이후, 즉 비대면, 비접촉 시대의 개인주의는 이웃과의 교류에 자기만의 방식과 타인에 대한 배려, 역지사지의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스타에는 불행이 없다. SNS는 언제나 정의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타고 흐르는 지식과 정보는 오히려 개인의 눈과 귀를 가린다. 이진우는 생각하는 나를 ‘이성적 사고의 산물로 계획하고 구상하는 콘셉션concetion’으로, 느끼는 나를 ‘자기 자신과 만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인 지각인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표현했다. 대체로 인간관계는 퍼셉션으로 결정되며 중요한 선택과 판단의 순간에도 콘셉션이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노멀크러시normal crush’를 꿈꾸는 사람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평범한 것에 반발하다’는 의미지만, 숨은 뜻은 ‘사회가 정한 기준을 따르기보다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것’이다. 과시적 소비 욕망이나 보여주기 위한 컨셉이 아니라면 개인주의자는 특별함과 평범함의 가치를 전복하는 사람이다. 이진우는 ‘모난 돌이 먼저 정 맞는다’는 속담을 “정상성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특출나고 다르면 한국 사회에서는 그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둥글둥글하고 모나지 않은 조약돌 같은 사람만이 집단에 수용된다. 개성을 추구하다가는 당장 타인의 시선에 걸려 배제되고 매도되며 경멸당한다.”라고 해석한다. 튀지 마라, 왜 너만 그러느냐,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왜 남 생각은 안 하느냐, 너가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일상에서 개인을 죽이는 말로 활용되는 수많은 조언과 충고를 견뎌낼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 과연 이진우가 권하는 ‘개인주의’는 얼마나 효용 가치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앞섰다. 밤하늘을 보며 잠시 생각해 보자. 누구나 알고 있지만 쉽게 바뀌지 않고, 누군가 고쳐줬으면 내가 나서기는 싫은 일들에 대해.

압축 성장이 만든 기형적 한국 사회에서는 시민사회가 이중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은 겉으로는 오랜 시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시민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이룩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시민이 없는 국민국가 형태다. 시민이란 행위에 책임을 지며 공공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구성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 공공의 가치나 이익에는 별 관심이 없다. - 개인주의를 권하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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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인본주의 1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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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하늘에 별을 보며 저 별은 어디서 반짝이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 건 아마 일곱, 여덟 살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겨우 수백만 년 전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던 호모사피엔스가 현대 문명을 이루며 사는 2022년이지만 모든 인간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진화 과정을 단기간에 증명한다. 부모의 보호와 양육 없이 생존할 수 없는 느릿한 인간의 성장 과정은 슬프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돌이 지날 무렵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호모 에렉투스의 삶을 시작한 순간의 환희를 선물한 기억으로 부모는 평생 자식을 바라본다. 애착 관계를 지나 사춘기에 접어들며 독립된 개체로 세상 속으로 나아갈 무렵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자각하고 세계에 눈을 뜬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왜 태어났을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세상은 어떤 곳이며 세계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너무나 자연스런 생각의 갈피를 접으며 인간은 조금씩 성장한다. 밤하늘의 별이 뜬 곳이 궁금하다가 어둠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저 어둠은 어디까지 계속되는지, 반짝이는 별이 있는 곳은 어디인지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네 언어의 한계의 세계의 한계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 한마디에 발이 묶여 아주 오랫동안 비틀거렸다. 결국, 한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오감에 의한 감각적 세계가 아니라 언어로 명명된 대상 너머로 확장될 수 없는 것인가. 언어가 없는 세계는 인지할 수 없다는 말인가. 눈 앞에 맹점에 존재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세계를 구성하는 범위와 한계를 밝히는 과학 이론은 증명할 수 없는 실재 세계를 어떻게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세계 너머에는 어떤 어둠과 빛이 있을까. 진화론, 양자역학, 불확정성 원리, 엔트로피 법칙이 말하는 세계의 진실은 생명의 미시적 영역부터 세계의 구성 방식을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호기심과 존재론적 의미를 말해주진 않는다.

명민한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당신과 우주에서 시작해 유물론과 구성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이제는 새로운 리얼리즘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라는 요구는 낯설지 않다. 철학사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기만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한 이야기도 아니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한 응답은 철학적 증명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과 확인에서 비롯돼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세계관으로 세계를 본다고 해서 정답을 얻을 수도 없다. 종교와 예술의 측면에서도 이 문제에 접근하지만 이제 모든 철학의 제문제를 해결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발언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적 삶이 가능하도록 ‘나도 너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반성과 성찰의 삶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 살 더 나이를 먹고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현명해지거나 어떤 깨달음을 얻을 거라는 착각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더 편협한 세계에 갇히고 자기만의 기준이 더 단단해진다. 의심과 질문이 없는 삶은 쓰레기가 된다는 발언에 반감이 생긴다. 바로 저것이 문제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 ‘just look up’이 아니라 《돈 룩 업don′t look up》을 외치며 현실에 안주하고 선악을 판단하며 선전선동에 속는다. 강물에 손가락으로 금을 긋듯 지나가는 시간을 구별하기 위해 나이와 연도를 새기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삶을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살펴보면 엄청난 희극이다. 가까이 다가가 각자의 비극을 확인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원근 조절에 실패하고 거리 두기를 평생 몸에 익히지 못한다. 진화심리학이 안내하는 자연선택과 변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 채 오늘도 각자 발밑에 땅바닥만 툭툭 차기 일쑤다. 그러다 어느 순간‘툭’하고 끈이 떨어진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실제로 인간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오류와 착각에 빠져 살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무지함이 어느 정도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대개의 경우 자신이 무얼 모르는지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이 뼈에 사무치는 이유다.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는가. 진화 과정에서 인간의 욕망과 행복은 매우 단순하게 세팅되었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자연선택의 명령은 너무 단순하고 확실해서 반감을 일으킨다. 존재론적 질문과 철학적 사고가 어쩌면 인간의 본성과 너무 동떨어진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한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어진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타인을 알고 싶다는 생각은 오만에 불과하다. ‘인생의 의미는 인생 그 자체, 곧 무한한 의미와 대결을 벌여 가는 일이며,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여기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항상 운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 운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고 인생의 무한한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길을 잃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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