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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열쇠 - 철학
박이문 지음 / 산처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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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사유 방식을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철학에 대한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어렵고 딱딱한 그들만의 철학은 나에게 필요치 않다. 학문으로서 연구실에 박제된 철학은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용어와 개념에 대한 논리적이고 복잡한 진술들은 읽는 사람에게 중압감 내지 지적 허영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하면서도 사고의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철학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하다.

  철학자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적절하고 요긴한 책으로 볼 수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사유하는 인간에 대한 연구와 탐구에 전력을 다한 연륜과 깊이는 바로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하다. 적절한 언어의 선택과 개념에 대한 일관된 깊이는 현대인을 위한 철학 사전으로서 손색이 없다.

  우리 인간들 사유의 도구는 바로 언어이다. 언어의 개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철학이다. 인식의 틀과 사유 방식은 철학의 밑바탕이면서 동시에 완성된 하나의 학문영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많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겪으며 생각을 공유하고 그 생각의 간극을 메우는 일은 철학의 중요한 역할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며 사랑하며 배우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의 기저에 철학이 존재한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쉽고 명료한 철학에 대한 어원 풀이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동안 풀어나가야 할 나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사르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그 관계를 밝히는 일에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일은 철학자의 몫이지만 그 깊이와 넓이를 확인하고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사유하는 도구를 제공하는 일은 철학의 몫이다. 앎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역할은 언어가 존재하므로 가능하다.

  언어와 사유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가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에 의해 서술된 이 책은 단순한 철학 용어 사전과 구별된다. 일목요연한 연속선상에서 우리는 인류의 사상과 인식 방법에 붙여진 이름들에 대해 명징한 언어를 통해 확인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단순한 개념과 용어에 대한 지식들의 편린이 아니라 저자 박이문의 ‘주관’에 따라 해석되고 정리된 언어들과 만나게 된다. 득과 실을 판단하고 구별해서 취사선택하는 문제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특징이다. 나는 여기에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

  하나 하나의 개념들을 두 세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순서에 상관없이 찾아 읽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는 방식을 권한다. 본류에서 뻗어나간 지류들의 미묘한 관계들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 이후에 발간된 ‘과학’과 ‘종교’ 그리고 김성곤의 ‘문학’ 시리즈가 있지만 동일한 성과를 담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김성곤 교수에 대한 믿음으로 ‘문학’편을 다음 목록에 올려 본다.

  만물이 소생하기 시작하는 ‘생명’의 계절에 삶에 대한 욕망과 현실에 대한 치열한 인식보다 먼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실존의 문제는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매년 반복되는 계절의 흐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 속에 내던져진 존재는 감성적 비애를 자아낸다. 개인의 존재가 사회적 존재로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을 되짚어 본다.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는 길잡이’라는 부제가 붙은 박이문의 <사유의 열쇠>는 인간의 ‘정체성’을 성찰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인류의 지성사를 일별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 방에 들어가는 조그마한 열쇠 하나를 제공한다. 손에 잡힌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 무엇을 보고 어디에 앉아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는 물론 독자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진다.


060306-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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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73
이정은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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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섬>이라는 시 전문이다. 단 두 줄로 표현된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 속에는 부모와 형제는 물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성도 포함된다.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순간 영원히 분리될 원초적 ‘외로움’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 법이다. 어떤 타인과도 영원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사랑’에 관한 논의는 좀 더 쉬워 보인다.

모든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은은 <사랑의 철학>에서 그 이유를 결핍과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결핍과 불완전성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난 인간에게 ‘사랑’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들의 반쪽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운명이다.

사랑의 원동력은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결핍에 대한 자각이다. 왜냐하면 결핍을 자각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핍을 보완해 줄 대상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나의 결핍을 상쇄할 만한 풍족함과 장점을 지닌 대상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정이 에로스이므로, 에로스에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인 간의 ''차이''가 전제된다. - P. 63

물론 정신적 결핍과 불완전성은 육체적 욕망과 결합되어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환상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미’에 대한 본능적인 몰입으로 볼 수 있다. 내게 부족한 아름다움을 이성에게 찾는 노력은 가장 손쉬운 충족을 의미한다. ‘사랑’의 종류와 의미를 묻기 이전에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 자체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시도하는 노력은 재미있다. 철학적 의미의 ‘사랑’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철학>은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랑에서 ‘차이와 동등성’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많은 사회적 현상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이 등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된다. ‘동등성’을 무시하는 사랑은 곧바로 폭력이 된다. 무조건적인 ‘희생적 사랑’도 마찬가지 범주에서 파악될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차이를 확인하며 동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사랑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는 이렇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원리들이 숨어있다.

그러나 현실이 철학을 반영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은 모든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통상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과 에로틱한 사랑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인간들의 사랑에 전제나 규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든 상황과 개별성에 기초한 감정들을 일관된 틀 속에 집어 넣을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이러한 틀과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의 분열과 공존을 위해서 작가는 인륜성과 상호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보편적 사랑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다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일반적 과정과 지루한 반복 과정에 대해 관심을 가질 독자 또한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랑은 생명체의 감정이며 생명체의 활동이다. 사랑은 감성과 이성 모두와 연관되어 있는 활동이며, 유한한 인간을 무한으로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며,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고 인간의 고귀성을 드러내는 통일 작용이다. 인간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 담고 있는 생명성과 고귀성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 인간은 결핍을 극복하고 무한성과 만나는 고귀한 존재가 된다. - P. 94

‘사랑’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확인과 인정을 원한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드는 사랑에 대한 탐구와 관심은 평생 지속되는 관심의 대상이며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사랑의 의미는 모두의 가슴속에 각기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철학과 이성과 논리로 규정지을 수는 더더욱 없다. 다만, 흔히 우리들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부딪히는 ‘사랑이 뭘까?’하는 질문에 대한 가벼운 사색을 위한 지침서로 여겨질 만한 책이 바로 <사랑의 철학>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사랑’이 뭔지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060727-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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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e시대의 절대사상 004 e시대의 절대사상 4
이기상 지음 / 살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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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이 무언지 모른다. 그것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든 아니든 중요하지도 않다.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와 과학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큰 관심이 없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게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과거에 명멸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은 화석처럼 굳어져 박물관에 버려져도 아쉬운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문제를 생각해보고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제공한다면 대장장이의 생각이라도 존경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 철학은 그저 사유의 방식이며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나와 세상 사이의 창문과 같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담론과 인식의 틀을 제공했던 많은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도 결국엔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생존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와 삶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현실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살아온 시간과 쌓여온 세월들이 현재를 만들었고 미래를 위한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어떤 형태로든 모두들 내일과 태양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존재’란 무엇일까? 철학이 종교의 시녀 역할을 도맡았던 중세를 거쳐 과학적 실증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철학의 역할과 위상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철학의 문제를 ‘언어’에서 출발시킨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나 단 한번도 의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하이데거의 노력도 이러한 철학적 탐구의 과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존재’는 과연 ‘실존’보다 앞서는 것일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짧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길찾기이다. 길은 쉽게 찾아지지 않겠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길을 걸어가며 부딪히는 나무와 풀잎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멀리 바라 보이는 푸른 하늘이 삶이 과정일지도 모른다. 답은 없고 결론도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이 말해 줄 뿐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궁극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그 과정에서 작은 불빛을 제공한다. 저자 이기상의 말을 빌리자면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진다’는 한 문장이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이성적’이란 말은 ‘언어적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결국 모든 사유의 과정과 길찾기는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와 탐구도 ‘언어’에 의한 틈새 찾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주제 아래 이야기하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 혹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대개 인간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며 살고 있다. 스스로 결단내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본래적인가, 비본래적인가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에서 나오는 두 가지 존재함의 양태이다. 이 둘의 양태는 끊임없이 맞물려 있다. - P. 186

다시 말해 과거도 떠맡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을 미래로 던지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살듯이 그저 그렇게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면서 거기에서 통용되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 P. 192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 중의 하나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본래적 자아를 가지고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나 그러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옳지 못한 방법인가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물론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거나 사유의 방식조차 갖고 있지 못하는 나같은 우매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난감한 문제일 수도 있다.

철학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시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리들 삶의 모습을 일깨우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카데미즘에 갇힌 모든 논의들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 유용성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말도 아니다.철학의 흐름과 학문적 대상으로서만 이야기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통해 유럽철학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게 되었고 하이데거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사유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이 현재적 유용성으로 되살아나길 바랄 뿐이다. 한 평생을 하이데거 연구에 골몰하는 이기상과 같은 대부분의 학자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얼마만한 애정과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까 싶다. 대부분의 경우, 논의의 중심에서 동양은 제외되어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 몰두했던 ‘존재’의 개념과 ‘시간’과의 관계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보다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후대 철학자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대가의 사상에 감탄하는 개인의 관심이 아니라 사유 방식과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언어’에 관한 철학적 관심들을 읽어봐야겠다. 유리벽 안에 갇힌 철학적 주제들과의 적절한 거리두기가 힘겹다.


060728-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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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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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와 사고 방식의 총체적인 이름을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고 인간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행위를 철학이라고 정의해도 좋다. 그 중심에 항상 ‘인간과 사회’가 놓여 있기만 하다면. 우주와 자연의 순환 고리에 대한 의문들도 결국엔 인간의 호기심에 의한 끝없는 탐구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철학은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줄기찬 의문 부호이기도 하다. 어쨌든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가 궁금한 것은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을 가장 어렵고 따분하고 관념적인 학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학교 교육에서 비롯된다. 내가 중․고교를 거치면서 도덕과 윤리라는 과목을 통해 접했던 철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표적인 철학자의 주장과 철학사를 연대기적으로 요약 정리해서 암기하는 일이었다. 우리들 삶과의 관계를 묻거나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을 외워서 어쩌자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다른 과목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철학이 정말 쓸데없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시간이 이렇게 한참 흘러 이제는 모든 것이 철학으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책들 속에, 수많은 관계 속에, 수많은 시간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대한 고민은 이미 많은 철학자를 거쳐왔다는 사실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에게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어떤 철학자의 어떤 생각이든 ‘현재적 유용성’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렵고 딱딱한 ‘철학’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하며 의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의 핵심을 짚어내는 일은 호기심을 넘어 우리들 사유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지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그 방법을 찾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철학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좋은 책을 읽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가는 방법이 있겠지만 전자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문제는 좋은 책과의 만남인데 어렵고 긴 시간들을 감내하며 한 권, 한 권 우리 인류의 고전이 되어버린 책들을 읽어나가는 일을 즐기지 않은 한 용기를 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서를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해 줄 만한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참된 벗을 만나는 일처럼 행복한 일이다. 황광우의 <철학 콘서트>는 철학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특히 철학에 호기심을 느낄 무렵의 청소년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만한 책이다. 어설픈 요약본으로 쉽고 간편한 방법으로 한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안일한 욕망을 가진 논술 세대들도 이 책을 통해서라면 철학의 즐거움을 맛볼 만하다. 문학과 철학에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논술’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온다. 출판사들의 상업적 욕망과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불안감이 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출판 시장에서 제대로 된 책을 골라내는 혜안을 갖는 것이 더욱 어려운 실정임을 감안하면 <철학 콘서트>가 갖는 의미는 새로워 보인다.

한 권의 책이나 한 사람의 철학자를 제대로 소화해서 뱉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요약 정리를 넘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깊은 사색과 꼼꼼한 책읽기 그리고 오래 축적된 세상에 대한 올곧은 시선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황광우의 <철학콘서트>는 추천할 만한 책이다.

특히, 마르크스와 노자에 대한 부분은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은 글이다.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만한 열 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대표적 저서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해설은 독자들을 행복하고 편안하지만은 않은 철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런데도 그의 설명은 쉽고 재미있다. 직설적이고 구어적인 표현들은 가볍게 느껴지기 쉽지만 내용의 흐름과 탄탄한 문장은 그러한 우려가 오히려 장점으로 돋보이게 한다. 제한된 분량과 철학자들의 캐리커처는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수박 겉핥기식의 풍성한 시식 코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철학과 고전을 위한 에피타이저 정도로 선택한 독자라면 흐믓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한 권의 책을 통해 해결하고 싶은 얄팍한 욕망을 가진독자라면 이 책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책이다. 최근에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를 전폭적으로 신뢰할 순 없지만 고전을 읽는 나같은 우매한 독자에게 좋은 참고가 되듯이 이 책은 고전과 철학의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책이다. 황지우 시인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특별함을 더할 수는 없지만 그 형제들의 삶이 주는 의미는 또 하나의 작은 ‘철학 콘서트’이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의식을 결정한다.(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중에서 재인용) - P.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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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론
플라톤 지음, 최현 옮김 / 집문당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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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가 끝난 것은 언제일까하는 바보같은 의문이 든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보다 우수한 종의 선택적 생존이 이루어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간 이성의 정점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알고 싶은 대부분은 것들에 대한 사유는 이미 끝나 버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그 결과물들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아니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시간들 속에서 의미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에 플라톤을 읽는 것은 허망하다. 

도대체 2,500여년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원을 그리며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활은 편리해졌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더 바빠졌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결론은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다. 양적 질적 측면에서 눈부신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생 인류의 모습을 플라톤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플라톤의 <국가>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혹은 실현해야할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설득의 과정이다. 물론 그것은 ‘국가’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철인 정치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는 공산주의 사회와 가장 유사하다.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자 혹은 수호자들은 사유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다.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며 사사로운 재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책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내와 자식, 혹은 사유 재산은 공정하게 국가를 운영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며 그러한 덕성은 수호자 혹은 지배자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내도 자식도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급진적인 혁명적인 플라톤의 생각은 현실로 드러난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을 보라! 김지하가 ‘오적’이라 지칭한 사람들이 풍기는 악취와 썩은 하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혁명보다 힘겨운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기득권의 목숨 건 집단 이기주의에 맥을 못추고 있다.  

토마스 모어의 ‘utopia’는 ‘세상에 업는 곳’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상 국가’는 어쩌면 인류가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꿈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유사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양보하고 합의하는 나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부정적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가는 꿈같은 곳이 아니다. 철인 즉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제대로 된 나라가 된다는 것을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도 없다. 항상 그러하듯이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플라톤이 살아가던 시대의 가장 이상적 형태의 국가가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적 유용성을 갖는 의미만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철인이 통치해야 한다고? 김영삼은 우리에게 유일한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안다. 그것이 철인 정치이든 뭐든 간에 통치자의 역량과 진정성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방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믿는 모든 가치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가. 자기 나라의 작전통제권을 갖기 싫다고 다른 나라가 대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묻겠다는 사람들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올바른 판단과 이성이 필요한 철인에 의해 국가가 통치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어쩌면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형태와 제도 자체가 국민 혹은 시민들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억압적인 구조로 작용하는 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이제는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민 자치를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실현된다고 해서 모든 이 해결되지는 苛쨈? 유급제로 바뀐 그들의 입장과 겸직이 가?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권의 개입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우리는 대부분 외면해 버린다. 플라토의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먼저 국가에 대해가져야 하는 생각과 그 생각들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과 과정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인 글라우콘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 <국가>는 대화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어쩌면 집필 목적보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토지의 공적 개념이나 철저한 남녀평등 같은 개념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선각자나 철학자들의 몫은 전체를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읽어내는 힘에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공감을 얻을 수 없어도 우리가 나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그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의 영원한 사유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에서 인용한 ‘동굴의 비유’가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플라톤의 사상을 드러낸다. 참된 선의 실체인 ‘이데아’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과 연관지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든 그 논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데아와 현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예술 사이에 벌어지는 겹침과 펼침들이 중요하다. 그 사이를 뛰어넘는 사유의 틀을 마련하는 것은 플라톤 이후의 세대들이 짊져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데아’를 찾기보다 세 번째 모방인 ‘예술’을 통한 간접적이고 모호한 방식의 접근이 더 행복한 이유는 실체를 알기 위한 호기심도 없고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 성향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행복하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철학은 일단 자신만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론과 실제의 적용 문제, 즉 앞서 말했던 삶의 태도와 방식에의 적용 문제는 통합이 필요하다.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하다.

 06081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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