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어린이를 위한 세 가지 무기

8월 1일 제주 한라도서관에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다니는 30명의 어린이들과 역사적인 책놀이 첫 번째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들과 20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만난 일은 없어서 떨리고 무서웠습니다. 얼마 전 경북의 동성초등학교 어린이들과 2시간짜리 '책놀이 가족오락관'을 했을 때의 '카오스'(?)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번 프로그램은 도서관에서 주최하고 일주일 만에 마감이 될 정도로 지역의 부모님들께 큰 관심을 받아서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아이들의 동기 부여가 어느 정도 되었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인드 컨트롤을 단단히 했습니다.

우선 세 가지를 머릿속에 떠올렸습니다. 첫 번째로 한 생각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자."입니다. 아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척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알아주는 사람, 자신에게 관심 가져주는 사람, 말 걸어주는 사람, 친구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내가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준다면 아이들도 분명 친구처럼 나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이들을 존중하자"입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을 하면 아이들의 자존감이 커지고 책놀이 프로그램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강제하지 말고 아이들의 의견을 최대한 듣고 반영해서 책놀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을 어린이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장기기억보다는 작업기억으로"입니다. 사실 아이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작업기억'이었습니다.

작업기억은 정보를 저장하는 뇌의 일부분으로 임시기억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낯가림을 시작하는 생후 7개월쯤부터 개발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어른에 비해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어른의 배에 가까운 시냅스 연결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시냅스(synapse)란 두 신경 세포 사이나 신경 세포와 분비 세포, 근육 세포 사이에서 전기적 신경 충격을 전달하는 부위입니다. 두 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의 집중력을 유지하고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해서는 거의 실시간으로 아이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피드백을 주어야 합니다. 시냅스 연결이 활발하지 않은 저 같은 어른들에게는 무척 어려운 과제입니다. 저는 두 시간 동안 일어날 몇 개의 활동을 아주 헐겁게 정하고 아이들이 살을 채워가도록 했습니다.

 

 


어린이를 놀이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 기자회견 놀이를 통해 스타의 역할과 질문 하는 기자 역할을 번갈아 하면서 아이들을 서로 마음을 열고 발표력과 질문력을 기릅니다.

나에게 찾아온 어린이들은 대개 엄마가 도서관의 안내문을 보고 등록한 경우입니다. 아이들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책놀이에 오기 싫었는데 엄마가 오라고 해서 왔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주인공이고 어린이들이 조연인 채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관건은 어떻게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 것인가입니다. 저는 2회차 공지를 어린이들에게 미리 했습니다.

"내일은 책놀이 운동회를 할 거에요!"

'운동회'라는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운동회를 할 거냐고 막 물어봤습니다. 저는 천천히 말하며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켰습니다. 몇 개의 놀이는 선생님이 만들었는데 여러분들이 만든 놀이도 함께 했으면 좋겠다며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청팀과 백팀으로 두 팀을 나눠야 하는데 팀을 어떻게 나누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자리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은 다음에 차근차근 말하라고 안내를 해주었더니 손을 번쩍 듭니다. 이렇게 해서 네 가지 주장이 나왔습니다.

조현철 : 저는 이렇게 딱 반 잘라서.
이한결 : 저는 여자 남자 나눠서 하면 좋겠습니다.
윤기현 : 대표를 정해서 팀을 뽑으면 좋겠습니다.
문서현 : 종이에 자기가 원하는 팀을 적어서 나누고 팀이 적으면 다시 정하면 돼요.


네 명의 후보를 앞으로 오게 한 다음에 자신이 주장하는 이유를 친구들에게 설명하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깊이 고민하면서 차분히 단어를 고르며 친구들을 설득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제가 다 대견해 보였습니다.

이한결 : 저는 이한결입니다. 저는 여자 남자로 팀을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여자 남자로 팀을 나누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조현철 : 저는 조현철입니다. 저는 손으로 반띵해서 청군 백군 정하면 좋겠습니다. 쉽게 쉽게 해요.
윤기현 : 윤기현입니다. 저는 남자 여자 대표를 정해서 팀을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남자 여자가 잘 섞이면 좋기 때문입니다.
문서현 : 저는 문서현이라고 합니다. 저의 의견은 자신이 원하는 팀을 적어 투표를 하면 좋겠습니다.


한결이는 여섯 표를 받았고, 현철이는 세 표를 받았습니다. 기현이는 설명을 잘 했는지 무려 16표를 받았습니다. 서현이도 예상을 뒤엎고 15표를 받았습니다. 이 때 어린이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현철이가 자기 의견에 자기가 손을 들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현철이는 절대 그런 적 없다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자기 주장을 관찰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경쟁했던지 제가 다 긴장되었습니다. 저는 현철이와 서현이를 남겨 놓고 나머지 어린이들을 자리로 돌려보냈습니다.

"여러분! 두 친구가 들어갔고 두 친구가 남았죠. 이제 결선투표를 할 거에요. 한 번의 발언권을 더 줄 거에요. 친구들을 잘 설득해 봐요."

어린이들은 최대득표제도에 익숙하지만 저는 프랑스식 결선 투표제를 소개했습니다. 최종 득표수에서는 기현이가 앞섰지만 2위를 득표한 서현이에게 부당할 수 있고, 책놀이에 참여한 모든 어린이의 대표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결선투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말을 아이들에게 다 할 필요는 없지만 '결선투표'라는 방식이 어린이들에게 흥미로운 자극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남은 결선투표의 후보들이 자신의 주장을 조리 있게 설명했습니다.

윤기현 : 저는 주장을 정해서 팀을 뽑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팀원을 뽑을 수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못 뽑으면 안 좋은 것도 있지만, 주장이 뽑으면 그 사람이 좋아서 할 수도 있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문서현 : 저는 투표를 해서 자기 팀을 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친구라도 열심히 활동하다 보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선투표답게 어린이들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을 갖췄습니다. 어린이들은 '중복 투표'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리가 있었습니다. 많은 후보들이 나왔을 때는 중복 투표를 하면서 좋은 주장을 고를 수 있었지만, 최종 후보가 정해진 상황에서 중복 투표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현이의 주장이 마음에 드는 아이들은 오른쪽 벽에, 서현이의 주장이 맘에 드는 아이들은 왼쪽 벽에 서도록 했습니다. 최종 결과는 문서현 14명, 윤기현 11명(5명은 결석)으로 문서현 어린이의 주장이 최종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서현이의 의견대로 투표지를 만들고 이름과 팀 이름을 쓰도록 했습니다. 남자 아이들은 백팀을, 여자 아이들은 청팀을 많이 써서 결과적으로 남자팀 여자팀이 되었지만 어린이들이 주장하고 동의하고 결정하는 팀 정하기는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서현이는 "왠지 과학적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각 팀의 대장을 가위바위보로 뽑고 대장 인사를 시켰습니다.

청팀 대장 인사 : 저는 남광초등학교 3학년 문서현이라고 합니다. 청팀을 어떻게 이끌고 싶냐면, 다른 사람을 이상하게 취급하지 않고 서로 믿으며 이기고 싶습니다. 박수!!!
백팀 대장 인사 : 저는 이한결입니다. 저는 백팀을 어떻게 이끌 거냐면 저도 승복하고 즐겁게 게임을 하도록 이끌도록 하겠습니다.


아이들과 책놀이를 하기 전에 머리말("1년을 기다린 어린들과의 책놀이, 궁금해요?")에서도 어린이들은 민주주의가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실제 확인을 해봤더니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팀을 뽑는 방식, 팀장을 정하는 방식, 주장하고 투표하는 방식 등 민주주의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놀이로 구성했더니 무척 친숙하게 따라왔습니다. 말 그대로 민주주주의 놀이는 어린이들에게 딱 맞는 놀이였습니다.

 

 

 

▲ 기자회견이 거듭될수록 질문의 질이 좋아졌고 전반적으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다경이는 기자회견문을 미리 정리해 와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기자 회견 놀이

오늘 처음으로 진행한 책놀이는 '기자 회견 놀이'입니다. 기자 회견 놀이는 인터뷰 놀이를 응용한 방식입니다. 자기 소개와 가족 소개, 책 읽기 습관이나 고민 등을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둘러볼 수 있고, 궁금한 질문을 하면서 서로 친해질 수 있습니다. 책놀이의 첫걸음은 '마음 열기'입니다. 마음을 열어야 책을 제대로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인데, 김연아나 류현진 같은 스타들 기자회견 하는 거 봤어요?"
"가끔 가다 한번씩 봤어요."
"여러분 기자 알아요?"
"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지만 TV도 많이 보고 미디어에 노출되었으니 기자회견 놀이는 어렵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있을 때는 스타가 되는 거고, 거기 있을 때는 기자가 되는 거에요. 나는 몇 학년이고 어떤 책 좋아하고, 부모님이나 가족 중에서 소개할 사람 소개하고 좋은 점, 자기 자랑, 책 관련된 고민 얘기하면 돼요. 처음에는 내 소개, 내 소개할 때 뭐뭐 들어가요. 이름, 자기 초등학교, 학년, 자랑, 그 다음에 가족도 들억가겠죠. 가족 얘기하면서 가족이랑 친한지 싸움 잘 하는지 칭찬 많이하는지 '우리 엄마는 칭찬 많이해요.' '꾸중 많이 해요.' '잘 놀아줘요' '아빠랑 식물원도 갔어요.'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처음에는 무대에 가서 자기 소개하는 것을 어색해 했지만 질문을 자주 주고 받으면서 친숙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윤기현입니다.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부설초등학교에 다니고 3학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은 만화책이고 싫어하는 책은 교과서입니다. 저는 독서록 쓰는 게 귀찮습니다. 엄마 아빠 동생입니다."
질문 공세가 시작됐습니다.
"동생이랑 친하게 지내고 맘에 들어요?"
윤기현 : 아니요.
"동생 칭찬 해준다면."
윤기현 : 우리 정현이는 그림을 잘 그려요.
"교과서 중에 어떤 게 제일 싫습니까. (이한결 어린이)
윤기현 : 수학입니다. 어려운 것도 있지만 좀 그래요.
"교과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윤기현 : 체육.
"이한결 : 체육 중에서 어떤 체육을 가장 좋아합니까?"
윤기현 : 축구입니다.


기자 회견 놀이를 하면서 어린이들은 질문을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질문은 그 자체로 요약능력을 높여주는데, '좋아하는 반찬은 무엇입니까?' '싫어하는 과목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하면서 어린이들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나 접점을 찾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질문을 하면서 자신이 싫어하는 반찬과 좋아하는 과목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감정이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할까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린이들이 서로 친해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습니다.

다경이는 종이에 기자회견 내용을 빼곡이 써와서 읽기도 했습니다. 기자회견이 차차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점점 더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질문의 내용 또한 제가 추가 질문이나 연결된 질문을 했더니 아이들이 곧잘 학습하며 수준 높은 질문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구분이 없어지고 모두들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와 질문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어린이들과의 첫 번째 만남을 통해서 저는 자신감을 얻었고, 아이들과 함께 친구가 되며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책놀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이 뿌듯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몸으로 뛰어 노는 '책놀이 운동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강연장을 빠져나가는 어린이들의 표정에서 설렘이 읽혔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지역의 육아 카페에 후기를 올렸더니 책놀이 참여 어린이의 엄마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울 아들 너무 재미있었다고 하던데요^^ 자신있게 나가서 자기 소개했다고.. 내일 책가지고 재미있는거 할꺼라고 벌써 들떠 있네요^^;"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만, 성공적으로 첫 번째 만남을 하고 나니 긴장이 풀리고 허기졌습니다. 상으로 스스로에게 맛난 점심과 복숭아 한 봉지를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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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일~8월 23일까지 제주 한라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방학 특집 책놀이 프로그램 이야기를 10회 연재합니다. 아이들과 현장에서 책놀이를 하고 싶은 분들께 작은 선물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ㅡ 기자 말

오래 준비한 만남

해님이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입니다. 남새밭에 심어 놓은 고추는 더 맵고, 여름이 더운 해의 겨울은 무척 추우니 또한 걱정이 됩니다. 바다로 산으로, 그리고 캠핑장으로 가족들이 피서를 즐기러 떠났지만 동네는 한적합니다. 벌겋게 달궈진 놀이터에도 학교 운동장에도 아이들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도서관이나 수영장에서 주로 여름을 나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피부가 보얗습니다. 가끔 검게 그을린 까무잡잡한 아이들은 무척 건강해 보입니다.

어린이를 만나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은 1년 전 여름부터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 동네에서 소문난 개구쟁이 말썽쟁이였습니다. 지금은 시골길에서도 아이들을 구경하기 힘들지만, 제가 어린 시절에는 골목마다 자리를 잡아 놓고 구슬치기, 오징어 땅콩, 자치기 같은 것을 하면서 놀았습니다. 바닷가에 가면 게도 잡고 미꾸라지도 잡으면서 놀고 헤엄치기도 했습니다. 풀밭에 가면 메뚜기도 잡고 지네도 잡고 삥이라고 부르는 풀도 따먹고 산딸기도 따먹었습니다. 비료 푸대를 들고 동산에 가서 썰매타기도 했죠.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남자 아이를 둘 낳고 기르면서 변화가 생겼습니다. 집안의 두 아이가 내 맘 속의 아이를 깨우니 우리 집에는 세 명의 아이가 놀고 있습니다. 내 맘 속에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아이는 다른 가족의 어른들 속에 잠들어 있는 아이를 깨우는 일을 합니다.  엄마 아빠 맘 속의 아이가 깨어나면 아이들은 좋은 친구 한 명을 더 얻게 되니 반가운 일입니다. 내 맘 속의 어린이가 완전히 깨어나 친구 맞을 준비를 마치고 나면 어린이들과 함께 재밌게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를 만나는 일은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누가 나에게 뭘 믿고 아이를 맡기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요즘 어린이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습니다. 차곡차곡 1년을 기다렸습니다. 부모님들을 만나 책 놀이를 하면서 간접적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고 아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조금씩 부모님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어린이들에게 간접적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부모님의 입을 통해서 아이들의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엄마, 회사 가지 말고 책 놀이 더 배우고 오면 좋겠어"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습니다. 어린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자 힘이 났습니다. 지역 신문이나 주간지 등 사용할 수 있는 지면을 얻어 어린이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글을 계속 남겼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제 고향 제주의 한라도서관에서 방학 특집 어린이 책놀이 프로그램을 10회 진행해달라고 의뢰해 온 것입니다. 신나게 계획을 짜면서 어린이와 만날 날을 기다렸습니다.

어린이 관찰 보고서

이 글은 어린이들과 마주 앉아 책놀이를 하고 싶은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요즘은 육아에 대해서 무척 진지한 성찰이 이루어져 있어 반갑습니다. 육아(育兒)라는 말 자체가 '어린이를 기름'이라는 뜻이다 보니 어른의 입장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성인으로 자라나 사회의 인재가 될 때까지 기른다는 생각은 물론 대견한 일입니다. 그 갈래도 여럿입니다. 최신 기법을 소개하는 육아법에서부터 "육아는 철학이다"는 고찰이 담긴 접근 방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는 생각에 입각해 부모가 제대로 된 모습을 아이들에게 비춰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 전 유명한 육아 전문가의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된통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모자란 사람(어른)이 정신적으로 뛰어난 사람(어린이)를 가르친다"며 일장 호통을 친 선생님은 "도대체 누가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라며 일갈했습니다. 어린이들이 처한 상황을 절박하게 대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지만 굳이 부모를 죄인으로 만들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이는 어디에 있지?" 어른으로 시작해서 어른으로 끝나는 말의 향연 속에서 어린이들은 꽤나 심심하고 재미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어린이들과 실제 놀이를 하면서 충분히 녹여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어린이로 돌리고 한동안 들여다 보았더니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1년간 어린이의 모습을 관찰하며 저는 '미래'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린이를 관찰하며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 아이들은 타고난 논리학자, 민주주의자로서 유전자에 논리와 민주주의가 새겨져 있다.
- 아이들은 창의력 또한 타고 났다. 밖에서 주입하는 방식의 교육은 창의력뿐만 아니라 학습능력과 독서력, 판단력 등 기본적인 두뇌 능력을 낡은 것으로 만들 뿐이다. 아이들에게 있는 것을 자극해야 한다.
- 어린이들은 무척 진지하다. 어른들이 어린이의 반만큼이라도 진지하다면 이 정도로 단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 욕구 단계에 이미 진입했다. 즉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넘어서 소속/애정 욕구, 존경 욕구, 자아 실현 욕구의 상위 욕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패러다임은 2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낡았다고 할 수 있다.
- 아이들은 놀이의 천재다. 책으로 노는 방법을 알려주면 재창조를 곧잘 해낸다.
- 아이들에게 교육자의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고 발견자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어른들은 주연의 자리에서 조연의 자리로 내려오고 어린이가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입장에 머물러야 한다.

모든 활동의 시작은 '인간 이해'입니다. 정치, 예술, 교육 등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의 정치가 답보 상태에 있다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물어보면 금방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이와 책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어린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하는 문화활동과 교육활동은 비전과 목표를 가지고 실제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비전과 목표는 바로 어린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아울러 어린이를 만나는 태도 또한 여기서 나옵니다.

어른들이 걸어다니는 과거라면 어린이는 걸어 다니는 미래입니다. 현재란 과거와 미래가 만난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의 작용은 다릅니다. 과거가 지배하면 미래는 과거를 닮아갑니다. 미래가 주인공이 되면 미래의 본래 모습을 점점 발견해 갑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어른이 충실히 조연에 머물러야 합니다. 많은 가정의 어른들은 이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부모가 되었다고 해서 자기 중심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어린이를 만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공을 들인 것은 나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30년을 뛰어넘는 것처럼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미래의 어린이 만남 프로젝트

아이를 낳는 순간 과거와 미래의 만남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떤 만남이어야 하는가는 무척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지금까지 어린이와 어른이 만났던 방식을 되돌아봐야 하는 까닭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30년 후의 인간에게 30년 전의 인간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만나는 책놀이는 이것을 거부합니다. 그 대신 30년 후의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는 게 책놀이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미래의 어린이 만남 프로젝트'입니다.

어린 시절의 꿈과 우정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은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세계를 파괴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꿈이며, 세계를 파괴로부터 구하는 것도 어린 시절의 꿈입니다. 어린 시절 입었던 마음의 상처는 점점 자라나 세계에 상처를 입힙니다. 거대해져버린 세계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과와 용서, 화해가 적절한 때를 찾을 때 지구는 안도합니다.

어른과 어린이들의 만남이 가장 극단적인 파괴를 불러온 작품은 <몬스터>입니다. <몬스터>는 공산주의 시절 구동독 정부가 어린이를 인간 병기로 만들기 위해서 입에 담지 못할 훈련과 약물치료 등을 진행하는데, 그 중에서 한 아이가 수용소의 모든 어린이와 어른들을 죽이고 '몬스터'로 완성되고 그 쌍둥이 동생과 정의로운 외과 의사가 이를 막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실제로 아기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어린이의 완전한 박탈'은 세계의 종말로 이어질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읽고 나는 어린이와 만나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완전한 박탈'만큼은 아니더라도 박탈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나는 방식은 어른이 결정합니다. 부모님들을 만나면 아이의 자존감 문제를 걱정합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걱정하는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박탈된 어린이'를 보게 됩니다. 어린이는 존중 받고 있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를 존중하는 부모들은 아이의 자존감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와 만나는 일의 첫 번째 원칙은 그래서 '존중'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어린이를 존중하자"가 목표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주인공인 어린이가 발견할 수 있도록, 어른은 충실한 조연이 된다" 입니다. 어른과 어린이의 관계는 '연결'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어린이와 어른의 연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설국열차에 탄 착한 어른들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어린이를 위해 길을 열어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차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혹한 계급 구조를 만들어낸 것은 어른이지만, 그 감옥으로부터 나오는 방법을 모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미래의 인간인 어린이들을 돕는 일입니다. 나는 <설국열차>를 보고 어린이들의 '남궁민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이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른이 마치 어린이가 된 것처럼 해야 합니다. 책놀이를 진행할 때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생기고, 때로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도 생기는데 어린이들을 윽박지르지 않고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른은 어린이의 연장입니다. 저는 어린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단 한 가지 능력을 더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어린이를 만나는 열쇠이자 '만남의 조건'입니다. 보들레르가 '천재성'이라고 표현한 어른의 조건입니다.

"천재성이란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이제 튼튼한 기관과 제멋대로 축적된 재료들을 모두 정리해주는 분석적 정신을 갖춘 마음껏 되찾은 어린 시절에 지나지 않는다."(보들레르)

보들레르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지성인들은 어린이를 지향점으로 삼았습니다. 맹자, 공자, 예수, 아리스토텔레스 등 인류의 스승에 따르면 어린이란 단지 어릴 적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면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인 것이죠. 어린이들이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어린이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가 가능한 어른이 될 때 어린이들과 책놀이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본격적으로 책놀이를 하기에 앞서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매 회 2시간씩 10회에 걸친 만남의 시간 동안 어린이들과 함께 놀 놀이를 준비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준비한 프로그램대로 100% 진행되지도 않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게 중요합니다. 어린이들이 놀이의 방법을 결정하고, 아예 바꿔버리기도 하고, 새로운 놀이를 즉석에서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과 함께 놀 기회를 받은 어른인 나는 이것을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결코 나의 철학과 교육 사상을 어린이들에게 전수하는 것은 책놀이 프로그램의 목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의 눈빛과 반응을 살피면서 재미가 없다면 다른 놀이로 바꿔줘야 합니다. 대개의 교육 프로그램은 '장기 기억'에 의존합니다. 장기 기억이란 2시간 분량의 내용을 기억하고 그대로 진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책놀이는 장기 기억을 포기하고 작업 기억에 의존합니다. 작업 기억이란 아이들의 눈빛과 반응, 행동과 말에 끊임없이 반응하면서 관심과 흥미를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으로 현재까지 다섯 차례의 만남을 진행했고 아직까지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앞으로는 현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책놀이로 어린이들과 어떻게 만났는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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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면 영화가 시작되는 독특한 영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영화 <설국열차>를 보고 나서 되돌아가는 길은 씁쓸했다. 그리고 허무했다. ‘용두사미’ 작품으로 규정하고
페이스북에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글을 올리고 났더니 한 페친이 의외의 호평을 한다. “설국열차 괜찮던데. 봉준호
감독이 10년 전에 꽂힌 작품이라던데.” 좋았던 반응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나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겨울 열차를 타는
상상을 했다. 눈이 쌓인 평야를 달려가며 아무도 안 밟았을 것 같은 숫눈 구경을 하는 맛이 일품이다. 기차는 같은 레일을 쓰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만 같을 뿐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제각각이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그렇지가 않다. 오로지 달리는
것만을 목표로 달리며 그 외에는 죽음뿐이다. 그 날 밤 잠자리에 누웠지만 내 마음 속의 ‘겨울 열차’는 멈추지 않았다. 영화는
용두사미가 아니었다. 사두용미. 용의 꼬리가 너무 커져서 숨이 막힐 듯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과 메시지, 그리고 봉준호
감독이라는 사람의 숨결이 거칠에 몰아치는 설국 속에서 나는 온몸을 다해 헤쳐 나왔다. 이 글은 영화를 보고 나서 탔던 상상의
겨울 열차에서 내가 보았던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영화가 끝나면 시작되는 독특한 영화이며, 봉 감독의 전
작품을 통틀어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는 결론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 누가 타고 있는가

상상의 겨울 열차를 타고 가면서 문득 한 가지 물음이 스쳤다.

“가만! 열차에 누가 타고 있었지?”

앞 칸과 꼬리칸, 그리고 여러 가지 편의시설 칸에 담긴 사람들은 자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차는 인도의 카르텔처럼 엄격한
계급 사회의 압축판이다. 하지만 이것은 설명 장치일 뿐이다. 그보다 높은 차원에서는 ‘균형’이 있다. 인위적인 인구 수
조정(학살), 반란, 꼬리 칸과 머리 칸의 짬짜미. 하지만 이것 역시 설명 장치일 뿐이다. 이런 설명 장치에 기대
<설국열차>를 디스토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섣부른 추측일 수 있다. 영화에는 봉준호의 메시지를 머금고 있는 메신저들이
존재한다. 바로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기존의 세계 위에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축하며 대결을 펼치고 끝내 승리한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심지어 아이들은 설국열차의 목표마저 바꿔 버린다. 그러니까 영화에 펼쳐진 모든
설명장치들은 어린이로 대표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들이다. 여기서 ‘어린이’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어린이 관찰 보고서와 설국열차의 어린이

나는 세 살, 다섯 살 두 아이를 키우는 아빠다. 그리고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독서 책을 쓴 이유로 많은 가족과 어린이를
만나서 오랫동안 관찰했다. 내가 관찰한 어린이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아이들은 타고난 논리학자, 민주주의자로서 유전자에 논리와 민주주의가 새겨져 있다.
2. 아이들은 창의력 또한 타고 났다. 밖에서 주입하는 방식의 교육은 창의력뿐만 아니라 학습능력과 독서력, 판단력 등 기본적인
두뇌 능력을 낡은 것으로 만들 뿐이다. 아이들에게 있는 것을 자극해야 한다.
3. 아이들은 어른들과 다른 욕구 단계에 이미 진입했다. 즉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넘어서 소속/애정 욕구, 존경 욕구,
자아 실현 욕구의 상위 욕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교육 패러다임은 2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낡았다고 할 수
있다.
4. 아이들은 놀이의 천재다. 책으로 노는 방법을 알려주면 재창조를 곧잘 해낸다.
5. 아이들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어른들이 기존의 사고로 깨지 못하는 세계를 깨워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어린이다. <왕의 귀환>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아이들은 곧 주인공으로 귀환할 것이다.
6. 아이들은 온몸이 거울과 같다. 짝퉁을 비추면 짝퉁이 반사되고, 창조를 비추면 창조가 반사된다.

<설국열차>에서는 적어도 3~6까지의 관점이 녹아 있다. 회고해 볼까? 설국열차의 세계는 어른이 만들었다. 단지 죽지 않기
위해서 열차 안에 꼭꼭 숨어 있는 것이지 목표 따위는 애초에 없다. 균형 따위도 없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세계다.
영화의 출발은 디스토피아다. 철저한 어른의 세계에서 어린이들이란 한낱 “고기가 맛있다”거나 “좁은 공간에서 작업을 시킬 수
있다”는 효용성을 가지고 있다. 앞칸과 꼬리칸이 공유하는 관점이지만 균열이 생겼다. 꼬리칸의 사람들이 어린이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앞칸은 꼬리칸에서 어린이를 공급받는 입장이었던 데 반해, 꼬리칸은 어린이를 낳는다. 낳은 자식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꼬리칸 사람들에게 어린이들은 희망이다. 그래서 소중히 여긴다. 열차에는 많은 어린이들이 산다. 트레인
베이비(train baby)들은 앞칸 승객들이 낳은 아이들로 어른의 세계의 완벽한 복제물이다. 실제가 되어 버린 짝퉁의 세계를
충실히 반영하는 거울이다. 엔진칸에서 노역을 하는 어린이들은 작업장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이 역시 착취의 세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열차가 전복되고 두 아이가 짝퉁의 세계에서 실제의 세계로 넘어왔다. 아이들은 기꺼이 실제의
세계로 들어간다. 발견된 것은 코라콜라 광고에 나오는 북극곰이 전부인 가시밭길이지만 온몸이 세계의 거울인 아이들은 반영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봉준호)


도스토옙스키와 봉준호의 아이들

봉준호 감독의 최근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가족’이다. <괴물>, <마더>는 가족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족
테마가 전면에 배치해 있다. <설국열차>에도 가족 테마는 왕성한 힘을 발휘하는데, 이번에는 ‘괴물’에서 선을 보인 ‘어린이’가
전면에 등장한다. 가족과 어린이를 예술작품에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는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있다.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쓴 유작으로서 작가의 치열한 작품 인생을 훌륭하게 종합해낸 역작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에는 <카라마조프 씨네 아이들>의 주제와 설정을 빌려 쓴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커티스가 윌포드의 문 앞에서 “아기
고기의 맛을 알게 되었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등장인물 이반 카라마조프가 동생 알료사에게
들려주는 터키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터키인들은 음탕한 쾌감을 느끼면서 아이들을 괴롭혔다는데, 어머니의 배를 칼로 갈라 태아를 꺼내는가 하면 심지어 어머니의
눈앞에서 젖먹이를 위로 집어던진 뒤 총검을 받아내는 짓까지 한다는 거야. 어머니들의 눈앞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데 쾌감의
핵심이 있는 거지. 그런데 나의 흥미를 아주 자극하는 명장면이 있어. 한번 상상을 해 봐, 젖먹이가 부들부들 떨고 잇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고, 그 주위를 여기로 들어온 터키인들이 에워싸고 있는 거야. 그 녀석들은 즐거운 장난거리 하나를 생각해
냈어. 그 녀석들은 갓난애를 웃기려고 얼러 보기도 하고 웃어 보기도 하는데, 결국 성공해서 갓난애가 깔깔 웃게 됐어. 이
순간, 터키 녀석 한 놈이 갓난애의 얼굴에서 불과 4베르쇼크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갓난애를 향해 권총을 겨누는 거야. 아이는
즐겁게 깔깔거리면서 권총을 잡기 위해 고사리 손을 내뻗는데, 갑자기 이 예술가는 아이의 얼굴 정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서 작은
머리를 박살 내는 거지..” -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식들의 투쟁 이야기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를 죽인 것에
대해서 대가를 갚는다. 특히 마지막 법정 장면에서 변호사의 연설 장면은 소설의 주제와 같은데, 변론의 골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한낱 노리개로 여기고 스스로 가족을 파괴하기 때문에 미래가 위태롭다는 주장이다. 설국열차에서 봉준호 감독이 의도한 주제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주인공 알료사는 아버지를 놀리는 아이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서 싸우다가 죽은 한 소년을 추모하면서 어린이가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풍긴다. 그러니까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디스토피아 현실과 유토피아 미래의 혈투다. 꼬리칸의
어른들이 혈투를 주도할 때는 싸움의 목적이 명확치 않았지만 어린이가 주도하는 순간 싸움의 목적이 명확해진다. 예컨대 “리포드의
열차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린이는 이런 답을 내놓는다. “열차는 멈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봉준호와 헐리우드 봉준호의 차이점

커티스가 윌포드 문 앞에서 문을 박차고 깨부수려고 하는 ‘오버 액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나는 마치 베드신을 보는
듯한 야릇함을 느꼈다. 커티스가 윌포드 문 앞에서 발악하는 순간 커티스의 역할은 끝났다. 커티스의 목표는 열차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머리칸에 있는 자를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커티스는 ‘기억’을 상징한다. 설국열차의 어른에게 부여된 쓸 만한
역할은 기억이다. 길리엄과 남궁 민수 역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꼬리칸의 어른들은 왜 어린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가? 그것이
미래이고 생명임을 믿기 때문이다. 낮고 차가운 곳에서 고난을 겪으면서 어른은 아이들과 ‘연결’된다. 이것 역시 봉준호 감독이
설정한 유토피아의 한 열쇠일 것이다.

끝으로 헐리우드 봉준호와 봉준호의 차이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설국열차>는 헐리우드 문법에 충실한 영화다. 퀘스트와 액션이
있고 영웅이 등장한다. 헐리우드 영화는 구도 자체가 무척 단순해야 한다. 단순한 구도 속에서 세계관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영화가 끝난 후 영화가 시작되는 방식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특성이 동양과 서양의
관객들을 설득하고 보편타당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양과 서양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한 방법이기도 하다.
요컨대 형식적으로 메시지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룬 봉준호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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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선설과 성악설..은 없다]




사람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구성하는 첫 번째 화두입니다. 맹자부터 그리스 철학자, 프랑스 등 대륙 철학자는 성선설을 대표하고 영국철학자 그 중에서 홉스는 성악설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저는 본성에 관해서 논의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가지고 본성에 접근하는 자세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든 말이든 집이든 각 사물이 충분히 발전했을 때의 상태를 우리는 그 사물의 본성이라고 한다."(정치학(숲), 20쪽)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사람은 본성에서 시작해 본성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습니다. 공자는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 의해 서로 멀어지게 된다."(논어, 양화2)고 했습니다. 두 할아버지의 의견을 종합하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존재의 기반을 죄다 잃어버립니다. 성에는 '선'도 붙일 수 없고, '악'도 붙일 수 없게 됩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본성이 아니라 본능이며 그 중에서도 두 가지 기본적인 욕구인 '생명욕구'와 '안전욕구'의 차원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즉 본성이란 단지 생겨먹은 대로 묘사할 수 있을 뿐 선하다 악하다를 평가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하느님(또는 신)을 나쁜 하느님 좋은 하느님으로 말하는 것과 같죠. 
생명욕구는 번식욕구를 포함해 생명을 낳고 기르는 모든 적극적인 욕구를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안전욕구는 나 스스로의 안전을 먼저 욕구하는 것이 첫 번째이며, 그 나머지는 나의 가족이나 친구 등 구성원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따라서 생명욕구와 안전욕구는 빈번하게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성선설, 성악설 논의는 본성과 본능을 구분하지 않은 데서 오는 오해에서 근거한 주장이므로 실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본성과 본능의 사전적 의미(국립국어원)

본성(本性)「명사」
「1」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 ≒체성「1」.
「2」사물이나 현상에 본디부터 있는 고유한 특성. ≒성진01(性眞)ㆍ실성03(實性)ㆍ체성「2」.

본능(本能)「명사」
「1」『생물』어떤 생물 조직체가 선천적으로 하게 되어 있는 동작이나 운동. 아기가 젖을 빤다든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행동 따위이다.
「2」『심리』어떤 생물체가 태어난 후에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



성선설과 성악설..은 없을 뿐만 아니라 악의적인 면죄부다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들어 성선설과 성악설의 허무함을 증명했지만, 여기서는 <중용>의 말을 토대로 성(性)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생각해 봅니다. 중용은 性을 설명하기 위해 '열렬하다' 또는 '성심과 성의를 다하다'는 의미의 誠을 차용하죠. 이미 그런 상태를 誠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誠을 흉내내는 존재(誠之者)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야만 겨우 따라잡을 수 있죠. 중용 22장에는 "오직 천하제일의 지극한 열렬함이 있어야지만 그 본성을 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선설과 성악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오만함도 함께 드러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극적으로 추구해야 본성에 도달할 수 있는데, 팔짱 끼고 서서 성이 선하느니 악하느니 하는 것은 한가한 짓이라는 통렬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토대는 성악설인데, 이것은 면죄부입니다. 인간은 악하다는 면죄부는 원래 악하니까 악해도 된다는 이상한 정당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방해합니다. 


결국 지금의 세계는 진지하지도 않은 유치한 세계, 성찰하지 않는 골 빈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환경 위에서 진보와 보수가 현란한 춤을 춘다. 내가 진보와 보수의 정파에 대해서 웬만하면 언급을 자제하는 까닭. 



"시인은 느낌과 현실 사이의 거리, 원대한 야망과 하찮은 결과 사이의 괴리를 가늠하는 능력 때문에 불행해진다."(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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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허황될지 모르지만 오랜 연구의 대상이 바로 시간을 뛰어넘고 살기였다. 지금까지 정리된 것은 다음과 같다.

1. 인생을 80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100배 정도 되는 시간을 탐험하면 나의 1초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역사적인 1초를 살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책에서 시간을 버는 게 가장 빠르다.

2. 물리적인 24시간과 무관하게 잘 지내는 방법은 얼마든지 많다. 어떤 경험과 감각을 시간 위에 올려놓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24시간을 누릴 수 있다.

3.사람이 평생 동안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시간에 대한 사용 권한이다. 만약 시간 사용을 반납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반납 기한을 정해야 한다. 무턱대고 시간의 사용권을 양도해 버리면 결국 0이 되어 돌아온다.

4. 만화 드래곤볼에는 ‘시간과 공간의 방’이 나오는데, 거기서의 1년은 밖에서의 하루와 같다. 죽음을 임박해 두거나 극적인 순간에는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방 경험을 한다. 훈련을 하면 일상에서 그 방을 불러낼 수 있다. 다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에 대한 집중력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자신들이 매달려 있는 시간에 대한 집중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 먹기 위해 사는 것과 같이, 단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5. 나누는 시간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수록 시간에 대한 감각과 집중력이 길러진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함께 경기장에 함께 가서 응원을 하거나 함께 놀이를 하면 영원한 순간을 공동으로 소유한 셈이 된다. 그 순간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환기된다. 그 때 비로소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6. 화학에서 ‘들뜬 상태’라는 용어가 있는데 자신의 짝을 기다리는 결여의 상황이다. 미디어는 현대인을 세뇌시켜 만족을 모르고 항상 배고프고 내몰린 감정을 느끼도록 부추긴다. 우선 자신을 이유 없이 조급하도록 하는 공기를 느끼고 이를 걷어내면 지금까지 나의 손을 잡았던 시간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로소 볼 수 있게 된다.

7. 당신이 연출가가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일정한 시간 안에 담을 수 있는 재료는 무궁무진하고, 자기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쓸만한 재료도 차고 넘친다. 시간 안에 이런 게 많이 섞여 있을수록 생생해진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시간은 지구의 모든 생명이 똑같이 가졌던 속도다. 눈을 감고 수많은 시간의 연출자들을 느껴 보라. 기록된 자들은 마냥 평범하게 시간을 떠나보내진 않았다. 시간이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의 기억을 남겨두려고 인생을 걸었다. 그 열정을 느끼라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시간을 함께 만드는 공동 연출가로서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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