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읽는 동양고전] 1. 뭔가 불편한 육아서
지금은 다섯 살이 된 첫째 아들 민준이가 태어날 때 나는 노자를 읽었습니다. 그 전에도 노자를 읽은 적이 있지만 노자의 마음을 잘 몰랐는데, 아빠가 되고보니 가슴에 새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전에는 없던 경험과 시간과 감정이 쌓였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육아서로 읽기 좋습니다. 노자의 초상화를 보면 백발노인이지만 얼굴만큼은 아기 표정 같은데, 아기를 이상향으로 생각하고 철학을 펼쳤기 때문입니다.
중후한 덕을 품은 이는 갓난아이와 같으니, 독충이 쏘지 않고, 맹수도 덮치지 않으며 독수리도 할퀴지 않는다. (노자, 도덕경)
여성, 어린 아이, 약한 것, 부드러운 것, 낮은 것과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이야기는 뭔가 어른스럽고 아빠에게 필요한 양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학생이었을 때는 전혀 모르던 세계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한 사람의 아빠가 되니 문득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양철학의 황홀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다른 부모들처럼 육아서를 찾아 읽었습니다. 뭔가 관심 있는 주제가 생기면 파고드는 성격이라 육아서에 만족하지 못해 아동심리학에 관한 책들도 뒤적였습니다.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동양인은 정서와 직관이 무척 발달돼 있습니다. 그만큼 논리적 과정과 실험방식에 대해서 낯설죠. 육아서는 대부분 서양 심리학에 의존하며, 아동심리학은 서양의 것인데 동양 사람들이 서양 문화에 압도적으로 의존하는 점이 불편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그렇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 느낌을 잘 압니다. 나를 동양고전으로 밀어넣은 사건 역시 이 느낌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시 쓰는 걸 좋아해서 시집을 읽다가 기형도라는 시인을 만나서 빠지게 되었습니다. 기형도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읽다 보니 싫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들어 있는 시작메모처럼 기형도 시인은 서양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나는 서양식 건물에서 회색빛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벙거지를 입더라도 동양의 산천을 누비고 싶다는 생각에 동양고전을 뒤적거렸습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 나의 시인은 기형도가 아니라 백석이 되었습니다. 백석이 동양사람의 정서를 잘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백석의 시인에는 동양고전이 많이 나오죠.
육아서가 불편한 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육아서와 아동심리학에 ‘철학’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자기계발서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육아란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곧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을 담아내지 못하는 육아서는 불편합니다. 부모님들이 육아서를 읽고 나면 괜히 죄 지은 것 같고, 미안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마땅히 ‘육아철학’이라는 분야가 세워져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육아철학’을 표방합니다. 결국 나는 서가에 꽂혀 있는 육아서와 아동심리학, 발달심리학 책들을 다 치워버리고 심리학의 고전들을 읽어나갔습니다. 프로이트, 윌리엄 제임스, 에이브러햄 매슬로. 육아를 논한 동양의 심리학자들보다 서양의 심리학자들에게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철학과 심리학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의 심리학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읽었던 심리학 고전의 저자들이 동양철학을 깊이 탐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슬로는 <존재의 심리학>에서 노자 철학을 심리학에 적용할 때의 한계를 이렇게 고찰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때때로 도교의 무위(let-be)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인간에 대한 나의 입장은 도교의 무위를 수정한 것으로, 이런 입장을 '원조직 무위(helpful let-be)'라고 공식화할 수 있다. 즉 사랑과 존중의 도교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장 및 성격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장에 대한 두려움, 느린 성장 속도,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 병리적 특성 및 병리적 이유 또한 인정한다. - <존재의 심리학>(문예출판사), 160쪽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동양철학에 주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자는 아니지만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이 점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때부터 동양고전을 육아와 심리학에 접목해서 연구를 해봤더니 노자 도덕경뿐 아니라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사마천 사기, 한비자, 손자병법 등 모든 동양고전은 육아의 지혜를 모아놓은 보물창고와 같았습니다. 나는 한 번도 동양고전을 육아의 관점에서 읽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아이를 생각하면서 논어의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이가) 행동하는 이유를 살펴보며,
(아이가)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관찰하며,
(아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지를 고찰하면 (아이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
- 논어2-10
子曰: 「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 」
두 살 터울의 아들 형제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날마다 싸우는 소리, 맞아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면 화부터 나기 쉬운데, 화를 내고 아이를 혼내는 까닭은 궁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궁금하면 혼내지 않고 물어봅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나서 혼을 낼지 판단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기소이(視其所以), 행동하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싸우는 모습을 잘 관찰하면 또봇 장난감이 형에게만 있고 동생에게는 없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장난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자주 싸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아이의 물건이 차이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춰 주고, 각자의 물건에 대해서 구분을 지어 주면 싸울 일이 훨씬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기소유(觀其所由), 시간을 두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살펴봅니다. 세 살 민서는 헝겊 인형을 좋아하고 이야기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다섯 살 형 민준이는 장난감 칼과 또봇 장난감, 곤충 그림책을 좋아합니다. 각자 좋아하는 것을 잘 살펴서 채워주면 집중을 잘 하고 책도 곧잘 읽습니다. 각자가 좋아하고 편안해하는 것을 고찰하는 찰기소안(察其所安). 여기서 ‘편안하다’는 것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육아를 위해 동양고전을 읽어보려는 것도 육아서와 서양 심리학이 주는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양철학은 그 자체가 마음공부이기 때문에 오래된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논어보다 더 오래된 <시경>이라는 책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지닌 것을, 내가 이를 헤아려 안다’(他人有心予忖度之)라는 대목도 있습니다.
요컨대 아이 아빠가 동양고전을 읽게 된 까닭은 동양고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심리학이면서 오래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심리학자들도 진지하게 탐구할 만큼 심리학적인 가치가 충분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동양의 문화를 지배한 언어를 가지고 육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동양고전을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동양고전이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점도 매력 포인트입니다. 즉 문학과 심리학과 철학이 유기체처럼 뭉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 동양고전이므로, 아이들과 엄마 아빠들에게는 훌륭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담아서 우리의 언어로 육아를 이야기할 때입니다. 우리는 '느낌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