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는 한번 더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산이 그림자처럼 보였다. 멀어서 갈 수 없는곳이었다. 안개 낀 하늘 속에 서서히 녹아 드는 푸르른 산 어딘가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놓고 온 기분이 들었다.
- P95

우리 시대에서 평화를 찾아 헤매는 전설 속 비둘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비둘기는 불안에 떨며 지친 날개로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가끔 밤에 악몽에서 깨어나면 허공에서푸드덕대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어둠 속을 쫓기듯 날며 어딘가로 정신없이 도망지는 소리 말이다. 우리의 온갖 암울한 상념이 비둘기의 날개를 타고 떠다니며, 우리의 온갖 소망이 비둘기의 불안속에 일렁이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떨며 나는 길 잃은 비둘기,
일찍이 신뢰를 저버린 전령이었던 이 비둘기는 이제, 인류의 선조노아에게 우리의 운명을 알리려 한다. 수천 년 전에 그랬듯이, 세상은 누군가 손을 내밀며 이제 시험은 끝났다고 선언해 주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 P175

"안녕히 가시오!" 저 위 창가에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환한 얼굴은 착한 망상이라는 흰 구름에 사여 살포시 우리의 역겨운 현실 세계 위로 솟아 있었습니다. 그 얼굴이 쫓기듯 거리를 바삐 오가는 퉁명스러운 사람들 위에 둥둥 떠있던 광경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오래된 속담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괴테가 한 말일 겁니다. "소장가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 P259

그런 대담한 행동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을 틈도 없이, 그 무엇‘은 마술사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어떤 의지는 그들을 밀쳐서 떨어트립니다. 바로 그렇게,
저는 당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맑은 정신으로 따져 보지도 않고카지노에서 출구로, 출구에서 테라스로 그 불행한 사람을 뒤따라간 것입니다.
- P297

이 무서운 우연이 아니었더라면 저 역시 버림받고 망가진 사람이 얼마나 열렬히, 얼마나 필사적으로, 얼마나 거친 욕망을 품고,
살아 있는 붉은 피를 한 방울이라도 더 빨아 마시려 드는지를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20년 내내 온갖 마성적인 힘과는 거리가먼 삶을 누렸던 저로서는 자연이란 것이 종종 얼마나 기막히게 탁월한 솜씨로 열기와 냉기를, 죽음과 삶을, 도취와 절망을, 찰나의순간에 농축해 놓는지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에는싸움이 벌이졌고, 대화가 오갔으며, 열징과 분노와 미움이 가득했고, 맹세하는 사람은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렸습니다. 천년과도같은 밤이었습니다. 이 밤에 우리 둘은, 하나는 죽을 작정을 하고다른 하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채, 서로 부둥켜안고 낭떠러지로비틀거리며 떨어졌다가 죽음과도 같은 혼란을 겪은 후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서, 다른 감각과 다른 감정을 지니고 태어났던것입니다.
- P309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한번 마음에 담았던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낸다면, 어쩌면 사라지지 않는 강박관념과 끊임없이 그때를 회상하는 증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아마 내일그리로 가서, 내 운명을 마주친 바로 그 카지노로 들어설 수 있을것이고, 그 사람도 나 자신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과거 위에 육중한 무게의 돌을 올려놓고 과거가 되살아나지 않도록 막고 있는데, 이야기를 하고 나면 그 돌을 영혼에서 떨쳐낼 수있을 것 같았습니다.  - P347

나, 츠바이크라는 악기에 달린 모든 현이 처음으로 열렬히 소리를 내게 되면서 이전에 기회 닿는 대로 만든 작품에 깃든 유희적 요소는 이후 열정으로 변모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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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자책감이 들 것 같아서요. 지하철 안에서 그 여자에게 그렇게 접근한 것 말이에요. 당신이 그 여자를 궁지로 내몰았을 지도 모르잖아요. 한두 싱거상만 더 기다렸더라민 그 여자도 정신을 추슬렀을지모르죠."
- P46

계단참에 이르렀을 즈음 그녀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당신이 여자를 궁지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고 한 거, 진심이 아니었어요."
"천만의 말씀, 진심이었소."
내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 말이 옳을지도 모르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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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2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4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탈주자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잭 리처 시리즈 두번째 책

음 솔직히 1편인 추적자보다는 못하다.

사건의 스케일은 더 커졌는데 개연성은 조금 떨어지는듯하달까?

물론 다음 시리즈를 못읽게 하는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이런 시리즈를 읽는데 가장 핵심은 캐릭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편에서 잭 리처는 끊임없이 망설인다.

1편에서 굉장히 주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던 모습이 매력이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상황에 계속 끌려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무기들에 대한 지나치게 상세한 묘사는 좀 질릴 정도다.

예를 들면 총알이 발사되고 표적을 맞히는 과정을 너무나도 상세하게 오랫동안 설명하는 것 같은...

아니 독자가 저격수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이게 글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잭 리처가 총알이 날아갈 때 총의 반동과 공기의 흐름과 중력과 발사자의 심장이 뛰는 것까지 다 주절이 주절이 생각하고 있는것은 아니지 않을까? 이런 장면이 지나치게 많아 지면서 흥미진진하게 읽던 흐름이 끊겨버린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런 묘사도 좀 더 내용속에 개연성있게 녹아들었으면 좋겠는데 어떨지는....


또한 이 시리즈의 패턴이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여성주인공의 등장인 듯한데 - 아 진짜 매편이 그런걸까?

그렇다면 저자는 진짜 헐리우드 영화화되기에 딱 좋은 전략을 구사하는 것일게다.

이번에도 아름답고 용감하고 지적인 여성이 나오고 둘이 끌리는 것까지는 이해가 간다. 

1편에서 사랑하는 여성을 만났지만 어차리 잘 안되었고, 뭐 그러면 새로운 사람에게 끌리는거야 뭐 당연하겠지.

그런데 끊임없이 망설이던 그들의 감정 교류가 폭발하고 섹스로 이어지는 과정이 아 진짜 당황스럽다.

하필이면 잔혹한 살인 현장에서 여자 주인공이 토하고 눈물 콧물 빼고, 남자 주인공이 힘겹게 시신을 묻어준 바로 그 자리에서 섹스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물론 많은 경우 감정적 붕괴를 겪은 사람이 그것을 잊기 위해 격렬한 섹스를 대용품으로 이용하기도 한다지만,

나라면 일단 방금 누군가의 잔혹한 죽음을 겪은 충격에 정신을 못차릴 거 같고, 거기다 나 방금 토해서 입해서 토냄새 작렬일거 신경 무지 쓰일거 같고, 그리고 땀냄새 폴폴 풍기는 상태에서 숲속에서 뒹굴어야 하는 섹스라니....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런 섹스 진짜 가능하냐고요. 

순간의 광기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우리의 남자 여자 주인공 모두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들이라는게 또 개연성을 말아먹는다.

심지어 마지막에 이 여자주인공의 선택도 조금 뜬금없달까?


이 오래된 시리즈가 절판인데다 내가 가는 우리동네 도서관에는 없어서 옆동네 도서관까지 멀리 찾아가서 초기에 나온 2편, 3편, 4편을 한꺼번에 빌려다 놨는데 다음편에서도 이러시면 실망이에요라고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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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2-02-14 0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잭 리처 안보는 1인 입니다. 말씀하신 이유들 및 여러가지로요... 제2의 하루키 같다랄까, 여하튼 남들 다 좋아하는데 저만 매력을 못느끼나봐요😓

바람돌이 2022-02-21 01:24   좋아요 0 | URL
이런 시리즈는 호불호가 강하니까 충분히 이해갑니다. 저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도 매력이 안느껴지는 시리즈 많거든요. ^^ 하루키 같다는건 뭘까? 지나치게 다작이란걸까? 음.... 그건 좀 궁금하네요.

단발머리 2022-02-14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저는 이 책은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밑에 두 문단 읽다보니 저도 바람돌이님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이런 섹스 진짜 가능하냐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어쩌죠. 바람돌이님 리뷰 읽고 나니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저도 읽고 싶단 말이지요 ㅎㅎㅎ 읽고 나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2-21 01:26   좋아요 0 | URL
아 그런데 3편 원샷은 좋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사라진 내일은 더 좋을듯하고요. ^^
저런 섹스는 그야말로 미친 순간이라고밖에 말 못할거 같은데 사실 둘다 약간 미치기 일보직전이긴 해요. 저라면 그래도 안될듯싶지만 사실 저렇게 미칠정도의 긴장감에 몰려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일수도요. ㅎㅎ

다락방 2022-02-14 10: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바람돌이 님의 이 리뷰 읽고 저는 뭐라고 썼나 찾아보고 왔거든요. 왜냐하면 읽었다는 기억은 잇는데 어떤 감상을 써놨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나서요. 근데 제가 쓴 페이퍼 보니까 저는 이 책 엄청 좋아했네요 ㅋㅋㅋㅋㅋ 페이퍼 읽다가 내용도 생각났고요. 여기 초반에 납치되어서 나쁜 놈들이 여자 강간하려고 하나 그러니까 잭 리처가 그녀를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 막 이러더니 쇠사슬도 막 끊고 그러지 않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엄청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그렇지만 바람돌이 님의 섹스론에 한 표 입니다. 숲속 섹스도 싫고요(뒷수습 하기 짜증남) 토한 후 섹스도 싫습니다. 양치 후의 섹스를 적극 권장하는 바입니다. 흠흠.

잠자냥 2022-02-14 11:0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다부장님 평은 어땠을지 궁금했습니다.

다락방 2022-02-14 11:08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한 평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숲속 오바이트후 섹스..에 대한 평 말씀이십니까?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2-02-14 11:32   좋아요 0 | URL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는 영생교마니아 독서폭 졸라 넓으신 똑똑한다부장!

바람돌이 2022-02-21 01:29   좋아요 0 | URL
그 쇠사슬 끊는 장면 좀 헐크같지 않나요? 아 저는 어릴 때 보던 헐크가 막 변하는 장면 생각나서 몰입이 좀 힘들었어요. ㅎㅎ 이게 1편과 4편은 1인칭 시점이고, 2,3편이 3인칭 시점인데 지금 4편 사라진 내일 읽다보니 1인칭의 매력이 확 더 느껴지네요. ^^
 
마지막 숨결 - 개정판
로맹 가리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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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읽고 최애 작가가 되었고,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던 <자기앞의 생>에 또 열광!

<유럽의 교육>에서는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절망을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한줄 희망을 놓지않던....

그러나 <레이디 L>을 읽으면서 잠시 손에서 떠나보냈던 작가!

<레이디 L> 전반에 걸쳐 흐르던 그 지독한 냉소를 좀 견디기 힘들었었다.

읽는 책마다 같은 작가가 쓴게 맞나 싶을 정도여서 오히려 매혹적인 작가가 로맹가리이다. 

최근 새파랑님 서재에서 로맹가리 유고작품집인 이 책의 매력적인 소개를 보고 다시 로맹가리에 불이 붙었다.


로맹가리 사후 그가 잡지 같은 곳에 발표했으나 책으로 묶이지 못했던 단편이나 미완결작으로 남은 그의 유고를 찾아내어 한권의 책으로 묶은 일곱 개의 이야기가 여기 이 책에 담겨있다.

왠지 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남긴 유산을 안는 느낌이라 애잔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읽은 책은 첫 이야기부터 강렬하다.

<폭풍우>는 남태평양에 사는 한 부부와 이 섬을 찾은 이방인의 이야기다.

폭풍우가 오기 전 미칠 것같은 후덥지근한 더위에 대한 묘사는 과연 로맹가리라고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모든 문장이 무엇인가 일어날 듯한 긴박한 감정과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문장이랄까?

그럼으로써 폭발하는 마지막 대사는 제목 그대로 폭풍우가 세상을 몰아치듯이, 독자의 감정을 몰아친다.

이 소설의 내용이 실제 상황이라면 자업자득이라며 냉소할지도, 또는 쌍욕을 퍼부을지도 모르겠지만,

로맹가리의 소설로 이야기를 읽노라면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첫 이야기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다음 이야기인 <마지막 숨결>은 미완성작이다.

이 책의 역자는 미완성작이지만 충분히 완성된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쉰셋이라는 나이에 한 때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레지옹 도뇌르 3등훈장을 수훈했으나, 이제는 구세대로 밀려나버린 주인공은 어쩌면 로맹가리가 인지하던 자신의 모습과 겹친다.

이 글을 쓰면서 어쩌면 로맹가리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꼭 생물학적인 죽음을 가리키지 않을 수도 있다.

적을 향한 돌격을 노래하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 자유를 위한 투쟁에 젊은 시절을 바친 전사에게, '자유를 위한 투사'가 무슨 락그룹 이름이냐고 묻는 세대와의 간극은 극복하기 힘든 거리다.

한 인간이 시대에 따라 자기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어가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나 젊은 시절 강렬한 기억과 경험을 가졌을 경우에는 더더욱.....

힘든 시절을 산 어르신들이 자꾸 내 때는 말이야며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그때 만들어진 자신의 가치관과 현재의 가치관의 충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과거의 한 지점에 박제되어버린 그의 연인 '일로냐'는 그런 과거 회귀의 극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과거의 유산이 현재를 이기지는 못한다.

주인공 남자는 그래서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의 손으로 닫고자 한다.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자신을 스스로 죽이기 위한 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고용한 살인청부없자가 그의 방에 나타났더라면 아마도 이 단편은 그 자체로 완결되었을 것이며, 그것은 사라져가는 한 세대에 대한 완전한 닫힘. 애도의 추모사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그저 평범한 추모사말이다.

그러나 로맹가리는 그런 쉬운 마침표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을 결심하고 뒤돌아선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으로 인해 과거에 대한 마침표는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인생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부딪힘으로 항상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

어쩌면 이 작품은 미완성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어지는 3작품들은 분량도 많이 짧고, 내용이 어떤 특별한 상황 - 예를 들면 레지스탕스 추모의 날이라든가 뭐 이런 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상황들 -을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 느낌이라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 글들이었다.

또한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사랑스러운 여인>역시 사랑스러운 여인의 캐릭터가 너무 작위적이라 공감수치가 확 떨어지는.... 이 글들은 작가가 굳이 책으로 이 이야기들을 펴내지 않은 이유를 알려준달까?


하지만 유고집이라는걸 염두에 두고 읽을 때 가장 아쉬운 글은 역시 마지막에 실린 <그리스 사람>이다. 

정말 미완성이라는걸 나타내듯이 곳곳에 인물들의 이름이나 행동이 종종 정리되지 못하고 헷갈리고 있기까지 하다.

또한 장면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작가가 각 장면들을 따로 쓰고 그 이어지는 부분은 나중에 보충하려고 써놓은 딱 초고 그대로인듯한 글이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솔직히 이걸 작가가 제대로 정리했더라면 꽤 긴 이야기가 되었을거 같은데 이야기는 한 순간에 탁 끊어진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예고편을 본 느낌이랄까? 

마지막 문장에 한 문장을 더 써 붙인다면 To be continued.......


로맹가리는 자신의 유서에 마지막 말로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라고 썼다.

<그리스 사람>은 결국 작가로부터 버림받은 작품이다. 

민주주의를 처음 만든 나라에서 벌어지는 군부쿠데타와 독재,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저 수영을 잘한다는 것만으로 의도치 않은 일에 휘말리는 주인공 빌리와 그에 엮이는 사람들.

그냥 봐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쏟아질 수 있을것인가?

<마지막 숨결>처럼 이야기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결말이 내려졋을것이라는 기대를 와장창 깨면서 진정한 미완으로 남아버리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밤은 고요하리라>와 <노르망디의 연>을 얘기하면서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무슈 가리 아 정말 이건 아니잖아요. 

아예 쓰지를 말든가, 이건 끝내셨어야 당신 자신을 완전히 표현한게 될거란 말예요. 

그의 유서의 저 말을 이해하기 위해 로맹가리가 언급한 책들을 찾아야겠다. 



다음에 보기 위해 로맹가리의 유서를 적어둔다.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하리라>라는 내 자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말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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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13 21:00   좋아요 9 | 댓글달기 | URL
저의 소개로 읽으셨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도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작품이 <그리스 사람> 이었어요. 딱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ㅋ 저도 어서 레이디L, 밤은 고요하리라, 노르망디의 연을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폭풍우>와 <마지막 숨결>은 정말 좋더라구요 ^^

로맹가리가 그렇게 가서 너무 안타까워요 ㅜㅜ

바람돌이 2022-02-13 21:17   좋아요 6 | URL
새파랑님 소개로 제 보관함에 넣은 놓은 책이 이 책만은 아니라죠. ^^ 그리스 사람은 진짜 아쉬웠어요. 로맹가리는 어쨌든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그의 죽음조차도....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와의 사랑을 그린 책에 보면 로맹가리가 자살한 해가 딱 그들의 아들이 미성년자를 벗어난 때였어요. 저는 어쩌면 로맹가리가 훨씬 전에 자살을 결심했지만 그의 아들이 미성년을 벗어나길 기다렸다는 느낌도 들더라구요. 그리고 진 세버그와 헤어진 이후 진 세버그가 딸을 출산하는데 - 아마도 로맹 가리의 아이는 아니었던듯요. - 그럼에도 그녀의 아이의 법적인 부친을 자임해요. 작가들이 보면 일상에서는 무책임한 경우가 진짜 많은데 로맹가리는 어쩌면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을듯해요.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 안타깝기도 하고요.

페넬로페 2022-02-13 21: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 바람돌이님과 새파랑님, 두 분께서 로맹 가리의 세계로 절 인도하시네요.
새들은 페루에서~~와 자기 앞의 생은 정말 같은 작가가 쓴 책이 맞나 싶었어요.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어요^^

바람돌이 2022-02-14 01:03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소개하신 새벽의 약속 저도 보고 왔어요. 지금 그 책은 제 읽어야할 책들 쌓아놓은 책탑속에서 제 손길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저도 빨리 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2-02-13 22: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로씨야 출신 유대인이
프랑스로 건너가 레지스탕스-
외교관 그리고 작가에 이르는
다양한 변신을 했다는 점만으
로도 그야말로 소설 같은 삶
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전히 로맹 가리의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는 점도 놀랍네
요.

바람돌이 2022-02-14 01:05   좋아요 1 | URL
유럽 작가들 볼 때 그들의 삶에서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지만, 우리나라 작가들과 딱 비교되는 지점이 저런 글로벌입니다. 자신이 온갖 배제의 경험을 뼛속까지 느끼고, 어떤 사회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경험들이 작가적인 성숙과 사유의 깊이로 이어지는 걸 자주 느껴요. ^^
저는 로맹가리의 읽어야 할 책 아직 아주 많습니다. 다 읽은 분이 부럽지 않은 이유는 로맹가리를 읽을 즐거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

책읽는나무 2022-02-14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책 주문을 하면서 로맹 가리 책을 사다 모으리라 다짐하고 장바구니 넣었다가 막판에 다시 보관함으로 빼버린 로맹 가리였는데, 좀 아쉽네요^^
담달부터 다시 로맹 가리 책을 시도해야 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2-21 01:17   좋아요 1 | URL
로맹가리는 실망하지 않으실겁니다. 굉장히 다양한 스타일로 책을 쓰는 작가라 작품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워낙에 글을 잘 쓰는 작가라서요. 저는 한때 로맹가리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요즘 좀 뜸해졌어요. 그런데 이 책이 또 저에게 로맹가리 불을 당기네요. ㅎㅎ

다락방 2022-02-14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폭풍우> 읽고 대충격 받았던 게 떠오르네요. 너무 충격 받아서 ‘헉, 이제 이 여자 어쩌지?‘ 했던.. 휴. 로맹 가리, 대단해요.

잠자냥 2022-02-14 11:05   좋아요 2 | URL
아니 전 이거 사둔지만 몇 년째인데! <폭풍우> 궁금해서 오늘 챙겨갑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2-02-14 11:09   좋아요 2 | URL
아이참, 너무 기대하셨다가 실망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요! ㅎㅎ

잠자냥 2022-02-14 13:45   좋아요 2 | URL
잘 읽었습니다. 그 여자 이제 어쩌죠….;

다락방 2022-02-14 13:58   좋아요 2 | URL
엄청 빨리 읽으셨네요. 아놔 ㅋㅋ 책귀신 잠자냥 님.
저도 그 단편 읽고 진짜 계속 그랬어요. ‘이제 이 여자 어떡하지?‘ 으으...

잠자냥 2022-02-14 17:09   좋아요 2 | URL
어쩜 좋아요. 어휴 그놈도 참….

바람돌이 2022-02-21 01:17   좋아요 0 | URL
그놈 나쁜 놈!!! ㅎㅎ

희선 2022-02-16 0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는 제대로 끝맺지 못한 소설을 책으로 묶은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네요 죽은 사람이 말이 없는... 죽기 전에 그때까지 쓴 것만으로도 쓸 건 다 썼다 생각했던가 봅니다 쓰던 것도 다 쓰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런 것까지 마음 쓸 여유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바람돌이 2022-02-21 01:19   좋아요 0 | URL
그럴수도 있을거 같아요. 자신의 미완성작이 출판으로 묶여 나온다는건 어쩌면 좀 발가벗겨지는 느낌이랄까 그런게 있을것도 같네요. 에휴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하나라도 더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게 행복이니 아이러니하지요.
 

인생이란 기묘한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체하고 싶어 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리처는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고 추측하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 P71

하지만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은 그녀의 눈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용모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지성이나 성격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의 무릎 때문이었다. 그래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녀의 배짱과 그녀의 품위. 아름답고 용기 있는 여자가 익숙하지 않은 장애와쾌활하게 맞서는 모습은 리처에게 있어 용감하고 고결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취향에 맞았다. 그녀는 어려움과 맞서고있었다. 잘해내고 있었다. 불평하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결국 도움을 받게되었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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