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사라 베르나르는단지 취재의 대상이었지만, 곧 자신이 미디어에 얼마만큼의 영향력이 있는지를 파악한 그녀는 무대에서 사생활의 일부분을 살짝 노출시키면서 새로 발표하는 작품의 홍보에 적극 이용했다.
미디어 시대에 PR 마케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꿰뚫고 있었던것이다. 자신의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팔았고, 캘린더, 연극 포스터, 브로마이드용 사진을 팔았다. 더 나아가 상품의 선전에 자신의 이름과 이미지를 써서 커다란 광고탑이 되기도 하고, 잡지나신문을 장식하기도 한다. - P47

뮈샤와 아르 누보의 가장 위대한 점은, 다른 미술 사조가 그랬던 것처럼 특권층이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했VAIRAUG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르 누보의 가장 궁극적인 아름다움은 바로 그 대상에 있다.
이 새로운 예술은 더 이상 ‘그들만의 세계‘에 갇힌 엘리트의 예술이기를 거부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으며 모두에게 공감되고 사랑 받는 예술, 그것이 바로 아르 누보의 정신이었다.
- P60

그리고 곧 시작될 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분위기와 맞춰 시대의 새로운 모더니즘은 비효율적인 장식이나 형식을 버리고,
가능하면 심플하고 기능적이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계 친화적인 직선미와 기하학적인 취향에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바로 아르 데코Art déco 의 시작이었다. 아르 데코는 가능한 간결하고 소박한 선과 기하학적인 형태, 편안한 중량감을 강조한다.
화려한 장식보다는 그 제품의 본연의 구조에 중점을 두고, 눈에확 드러나는 대비가 가능한 강렬한 색상을 주로 사용했다.
- P63

처음 뮈샤의 그림을 보았을때의 감동은 어느덧 사라지고 그 통속성 때문에 언제나 일상 속에 있는 사물의 취급을 받았다. 대중의 심리란 그런 것이다. 폭발적인 인기가 사그라지고 그 유행이 시들해진 아르 누보의 말기에, 대중들은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스토리텔링이 많은 아르 누보를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정말 그랬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던 유미주의(탐미주의) 문학이 지나친 미에의 집착 때문에피로감을 주었던 것처럼, 수많은 장식과 흐르는 곡선이 넘쳐나서 아름다움에 취하게 되는 아르 누보는 어느덧 대중들에게 식상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름 자체가 새로운 예술이었던 아르 누보가 더 이상 새롭게 느끼지지 않는 시대가 온 것이다.
- P63

이러한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간을 물질에 의존하게 하는 소비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욕망이 등장한다. 바로 사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상품에 대한 강력한 소유욕‘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국박람회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행사라고 할 수 있다.  - P139

개인적으로 파리에서 살면서 수차례,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전해주는 이 공화국 정신을 생생하게 목격할 때가 있었다. 공공연한 인종차별주의를 표방하는 국민전선(F.N.)에 대한 반대 시위가 그랬고, 최근의 샤를리 엡도 사건 이 그랬다. 이런 류의 사건이 있을 때 마다 항상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후손" 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 뛰쳐나오는 프랑스인들의 공화국 정신이바로 이 벨 에포크 시대에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완성되는 과정을 기록하는 이 일도 내겐 무척이나 큰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
수많은 프랑스인들의 결점과 가끔의 어이없는 부조리들을 참아줄 수 있을 만큼 말이다.
- P155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1863~1937)은 교육혁신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교육학자였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유학 시절 스포츠가 청소년의 이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체험한 그는 프로이센과의 전쟁(1870~1871)에 패배한 프랑스의문제는 바로 나약한 신체와 두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 전 세계패권전쟁에서 약진하는 미국과 영국의 힘이 바로 스포츠 교육에있음을 깨닫고, 이를 프랑스 교육시스템에 적극 수용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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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9-19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 님 명절 연휴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세요 명절 연휴가 가면 구월 얼마 남지 않고 가을이 깊어가겠습니다


희선

scott 2021-09-19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해피 추석~


∧,,,∧
( ̳• · • ̳)
/ づ🌖
 

남편의 아버지가 아부다비에서 일하고 계셨고 그 덕분에 우리가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를 그곳에 마련할 수 있었어요. 그나마 저희는 운이 좋은 편이에요. 다만 친정 어머니와 형제들을 예멘에남겨두고 떠나야 했기에 제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했었죠. 제가조국을 떠날 때 파괴되어 가던 예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사람들은 폭격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야 했어요. 그때의 감정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친정 가족들은요?"
"친정 가족들은 제가 예멘을 떠나고 반년 뒤에 예멘에서 나와 사우디를 거쳐 말레이시아로 갔어요. 예멘에 있을 때 온 가족이 한 집에 모여 매일 얼굴을 맞대고 지냈던 때가 그리워요."
- P126

아랍 무슬림은 이렇게 생각한다. 아랍인 무함마드는 알라의메신저로서 선택된 신성한 존재이자 무슬림으로서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최고의 인격체라고, 동시에 무지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아랍인을 무지에서 이성의 세계로 안내한, 그래서 결국이슬람 문명의 토대를 마련하여 세계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인이라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함마드에 대한 풍자는 더욱더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슬람에서는 사람의 우상화를금하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성화도 그리지 못하게 한다. 즉, 무슬림에게 있어서 무함마드 풍자는 알라에게 죄를 짓는 행위이자선지자 무함마드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이다. 종교를 떠나 무함마드에 관해 공부하고 알아갈 때 아랍 세계에 더욱 깊이 들어가아랍인들의 마음의 빗장을 여는 ‘열쇠‘를 쉴 수 있다.
- P150

"모든 사람은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다. 바로 내가 낮에 꿈을 꾼 자였다." - P164

사우디 재정 수익의 80퍼센트 이상이 석유 판매 수익이다. 그러나 석유 산업에 관여하는 사우디 노동력은 10퍼센트도 되지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거대화된 국가는각종 공공 부문에서 국민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고, 국민은 그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앉아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데 큰기여를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노동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현상이 산유국에 사는 사람들 개개인에게 숨어 있던 게으른 본성을 자극한 건 아닐까? 사우디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아온 한한국계 청년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형, 사우디에서는코앞에 있는 마트도 안 나가요. 전화해서 배달하죠."
- P193

와하비즘과 전통적인 아랍의 관습으로 인해 나타나는 사우디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남녀의 엄격한 구분이다. 이는 극도의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조성해 왔다. 사우디에서는 남성 후견인 제도 마흐람 Mahram‘ 때문에 여성들은 혼자서 출국하거나 교육받을 수 없었고, 취업이나 결혼 또한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 P202

없었기 때문이죠. 주말에도 집 안에 갇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집 밖에 나가도 특별히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이 없을뿐더러, 가족의 허락 없이 나갔다가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매를 맞기 일쑤였거든요. 그런 우리에게 탈출구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이에요..
한국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어요. 같은 우울함을 경험했던 어머니들이 딸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오히려 딸들을 응원하게 되었죠. 리야드에서 열린 BTS 공연 때도 많은 팬이 어머니와 함께 왔었어요. 최근 몇 년 사이에 인터넷의 발달과 한류의 바람, 거기다 사우디의문화 개방이 맞물려 생긴 현상이에요. 아, 35년 동안 사우디에서문을 닫았던 극장이 2018년부터 다시 문을 연 건 아시죠? 이제점점 우리가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상상할 수없던 일들이 지금 사우디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 P209

보다 골이 깊었다. 독립 국가를 꿈꾸었던 쿠르드인은 이를 묵살한 영국에 분노를 품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아가던 수니 - 시아 쿠르드는 멜팅폿 안에서 하나가 되기는커녕 인위적으로 조성된 이라크라는 하나의 정치 체제 안에서 더 큰 파이를차지하기 위해 상호 견제의 긴장감을 한순간도 늦추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강한 중동을 원치 않았던 영국이 오히려 이러한분열을 원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P223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사담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다. 그리고 수십 년간 삭혀 왔던 시아 수니 간의 갈등, 시한폭탄이 폭발해 버렸다. 그동안 사담 후세인 정권하에 억눌렸던 시아파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았다. 반면 사담 후세인의 죽음과 함께 정치계에서 축출된 수니파 세력이 정치적인 배제에 불만을 품고 과격한 반정부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수니파는 알카에다, IS 등 수니파 테러 세력과 규합해 정부에 대항했다.  - P225

지금도 뉴스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이라크의 아픈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영국의 철학자 마이클 오크숏MichaelOakeshott의 말을 빌려 이라크의 상황을 표현하자면, 이라크는 출발점도 없고 예정된 목적지도 없이 ‘수평을 유지하면서 마냥 떠있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끝없는 항해를 하고있다. 이라크 국민은 어딘가에 빨리 정박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 P228

아랍 역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묘한 민족적 요소들이 있어더욱 판단하기가 어렵다. 사담 후세인, 그는 정말 나쁜 놈이었을까? 질문의 답이 궁금해 샤르자대학교 역사학과 나집교수님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교수님은 자신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라며 신중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야. 각자의 시각에서 본인의 의견만 있을 뿐이지." - P266

오늘날 아랍에미리트 국민은 과거에 선조들이 겪었던 힘겨운삶과 희생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각 토후국의 통치자들도 국민을 향해 "옛 선조의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며 부단히 역사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는 선조들을 기억할 만한 유형 문화재가 거의남아 있지 않다. 실제로 에미리트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것은 ‘고난의 삶을 통한 인내와 끈기‘라는 정서적 유산뿐이다.
어떻게 하면 과거를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이를 위해 두바이의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무형의자산을 형상화해 현대 건축물에 반영하는 것이다.
-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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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서관이 사라진 결정적 사건이 로마의 이집트 지배였다고 생각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서적을 이교도의 것으로 간주해 배척하고 없애 버렸지. 인간이란 참 어리석지않아?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학문과 예술의 축적물을 또 다른 인간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불태운다는 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난은 7세기,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P50

현대 사회에서 그 후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동시에이슬람 사회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가며 그들의 위치를 잘다지고 있다. 카이로 같은 수도권에서는 이집트 기독교인의 생활 수준이 꽤 향상되어, 재능만 있으면 차별 없이 좋은 직업을갖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콥트교인인 사라 박사 또한 의사 집안을 일구고 이집트 사회에서 보란 듯이 상류층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이 땅의 이집트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같은 언어를 쓰는 국민으로서 같은 동네, 같은 건물에서 이웃으로 살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 P62

"최근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예멘 난민이 전 세계를 유랑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자신의머릿속에 박혀 있던 문화적 프레임이 완전히 깨지고 있지요."
이것이 예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맞아요. 언젠가 내전은 끝나겠죠. 그때 세계의 곳곳에서 활동하던 우리 다음 세대들이 예멘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예멘으로 자연스레 유입되겠죠? 이것이 예멘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틀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어요."
- P84

아랍인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과 음성, 몸짓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아랍에서 수사학인 발라가 Balaghah가 발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레바논계 미국학자 필립 쿠리 PhilipKhur는 세계에서 아랍인만큼 문학적인 표현에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말과 글에 감동하는 민족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랍인은기쁨, 슬픔, 분노 등 마음속 감정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호소하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을 청자의 가슴에도달시키려 한다.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다. 박사 과정에서같이 공부하는 친구 아스마는 과제를 할 시간이 없다며 수업 중에 큰 소리로 교수에게 자주 호소한다.
CC교수님, 제가 애도 봐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신 거 아시죠? 제가 어머니 돌보랴 아이들 밥하랴 과제 할 시간이없어요! 제 상황이 너무 애처롭지 않은가요? 우리 어머니도 너무 불쌍해요! 그런데도 과제를 해야 한다고요?"
- P101

 이슬람 전파의 시작은 메카와 메디나였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랍인들은 이슬람의 기치 아래 사막을 발판 삼아주변으로 계속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이들은 사막 가장자리에거점 도시를 건설했고, 그 거점 도시에서 출격한 아랍인들은 주변 지역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중동학의 권위자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사막을 바다에, 군사 도시를 항구 도시에 비유했다. 즉 아랍인들은 사막의 출구에 항구(군사 도시)를 설치한 후그곳을 기지 삼아 ‘낙타‘라는 배를 타고 주변 영토로 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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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는 경험론자였다. 그는 우리의 감각을 통해, 오로지우리의 감각만을 통해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감각이 완벽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밖에 다른 믿을 만한 지식의 원천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착각을 한 것이거나무언가를 팔고 있는 것이다.
- P194

에피쿠로스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쾌락은 더 증가할 수 없으며(눈부시게 밝은 하늘이 그보다 더 밝아질 수 없듯이) 그저 다양해질 뿐이라고 생각했다. 새로 산 신발 한 켤레와 스마트워치는 더 많은 쾌락이 아닌 더 다양한 쾌락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의 소비문화전체는 다양한 쾌락이 곧 더 많은 쾌락을 의미한다는 전제 위에세워져 있다. 이 잘못된 동일시가 불필요한 고통을 낳는다.
- P200

어린 나이부터 베유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꼈다.
여섯 살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베유는 "지금 전선에서싸우는 가여운 군인들에게는 설탕이 전혀 없다"며 자기도 설탕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아파트에 난방을 하지 않았다. 난방용 기름을 살 여유가 없는 노동자들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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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6-29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읽으시는 군요!!! 전 주문했는데 언제 받을지,,,어떤가요???
 

어떤 사람은 소로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소로가 되는 데 성공한다. 대부분은 억지로 소로를 떠안는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소로를 억지로 떠안았다. 나는 소로처럼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다 해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자연인이 아니다. 내 삶은 간소함의 모범이 못 된다.
은둔하려는 성향이 있긴 하지만, 은둔을 한다면 호텔방에서 하고싶지, 수도 시실과 빵빵 터지는 와이파이가 없는 좁은 오두막집에서 하고 싶진 않다. 나는 즉시 《월든 을 내 머릿속의 시베리아로 유배시켰고, 그곳에서 《월든》은 《모비딕》과 《카라마조프가의형제들》, 적분학과 만났다.
- P111

내가 철학에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레슬리에게 알리고,
소로는 어떤 방법으로 다루는 게 좋을지 묻는다. 혼자 사는 법‘
이나 간소하게 사는 법‘처럼 평범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면서.
"보는 법이오." 레슬리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보는 법이오?"
네. 레슬리가 말한다. 나머지, 즉 간소한 삶, 고독, 자연주의는더 큰 것, 바로 시력을 위한 것이었어요. 소로는 우리에게 앞을 보는 법을 가르쳐줘요.
- P117

소로는 이런 인식론적 난제에 엮이길 거부했다. 그는 이렇게주장했다. 신뢰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감각은 우리가 가진 전부인데, 최대한 잘 사용하면 되지 않나? 소로의 철학은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라는, 아웃사이드 인outside-in 칠학이었다.
소로는 초월주의자로 간주된다.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초월주의는 다음 다섯 어절로 요약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하지만 소로는 보이는 것을 더욱 굳게 믿었다. 실재의 본성보다는 자연의 실재에 더 관심이 있었다.  - P119

소로에게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소로는 느끼지 않고는 보지 못했다. 어떻게 느끼느냐가 어떻게 보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느냐도 결정했다. 소로에게 보는 것은 감정적일 뿐만 아니라 상호적인 행위였다. 에를 들어 장미를 보면소로는 장미와 대화를 주고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협력하기도 했다.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 다소 미진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 안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이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어떤대상을 볼 때 그 대상도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낀다. 이들 모두가미친 것일 리는 없다.
- P121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 게 아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시력을 향상시킬 수 없다. 보는 것의 역학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무엇을 보는지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보는가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한다. 《베다》에서 말하듯,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 P134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 P153

다른 철학자들이 저 바깥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한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내면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 P175

책만 열면 바로 해답이 있는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쇼펜하우어는 대답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놓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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