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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집 밖에 나갈 자유를 갈망한다. 가고, 오고, 튀일리정원 벤치에 앉고, 무엇보다도 뤽상부르에 가서 상점마다 장식된진열창을 구경하고 교회와 박물관에 들어가고 저녁에는 오래된 거리를 배회하고 싶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게 그거다. 이런 자유가 없다면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
- P30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프랑스 여러 도시를 상징하는 여자의 동상이 있다. 스트라스부르를 나타내는 동상은 자메 프라디에(James Pradier)가 조각했는데모델이 빅토르 위고의 애인 줄리에트 드루에라고 하기도 하고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애인 루이즈 콜레라고도 한다. 그러니이 동상은 스트라스부르의 알레고리일 뿐 아니라 위대한 예술가의 애인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나애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훤한 대낮에 파리 한복판에앉아 있으나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가 서로 차지하려고 애쓴 도시로 추상화된 여자들이다."
- P35

여성은 도시의 심장에 몸을 던지고 걸어선 안되는 곳을 걷는다. 다른 사람(남성)은 아무 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걷는 그 한복판을 걷는다. 위반의 행위다. 여자라면 고어텍스를 입고 쭈그려 앉지 않아도 전복적일 수 있다. 그냥 문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된다.
- P41

플라뇌즈는 밖으로 여행을 떠나고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간다. 가정이나 소속 같은 단어가 그간 여성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음을 의식하게 한다. 플라뇌즈는 도시의 창조적 잠재성과 건기가 주는 해방 가능성에 긴밀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진, 재능과 확신이 있는 여성이다.
플라뇌즈는 존재한다. 우리가 앞에 놓인 길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영역을 밝혀니갈 때마디 존재한다.
- P44

나는 제리코 유료도로로 차를 몰고 가며 가건물 같은 건물들을 보면 화가 난다. 우린 더 나은 것을 누릴 수 있지 않나? 인간은 어디에 데려다 놓든 잘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환경은중요하다. 환경은 결정적이고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어떤존재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결정한다. 우리 아버지가 건축계에서 스승으로 생각하는 루이스 칸(Louis Kahn)은 학생들에게 보 처럼 생각하라, 보처럼 느끼라, 무엇이 너를 미는지 무엇이 너를 끌어당기는지 생각하라고 말했다. 그게 건물을 통해 생각하는 방식이라고,
이게 내가 도시를 통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 P59

나를 걷게 하라. 내 속도로 걷게 하라. 삶이 나를 따라, 내주위에서 흐르는 것을 느끼게 하라. 극적인 일을 보여달라. 예상하지 못한 둥근 길모퉁이를 달라. 으스스한 교회와 아름다운상점과 드러누울 수 있는 공원을 달라.
도시는 우리를 달뜨게 하고 계속 가고 움직이고 생각하고원하고 참여하게 한다. 도시는 삶 그 자체다.
- P65

훨씬 좋아요." 울프에게 혼자 도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상상해보지 못한 자유였고, 울프가 본격적으로 작가가될 수 있었던 계기가 이사였다면 글쓰기의 소재를 제공해준 것은 산보였다. 거리에는 울프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울프는 머릿속에서 장면들을 그려보았다. 주변에서 보는 삶이 "거대하고 불분명한 재료 덩어리 같았고 "나에게 전달되어 그것에 상당하는 언어가 되는 듯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궁금해하다 보니 "삶 자체를 종이 위에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삶의 열정"인 도시를 계속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되었다. - P127

전에는 시선의 대상이었지만 거리 산보자가 되면섹스나 젠더에서 벗어난 관찰하는 주체가 된다. 우리는 익명성의 외투를 두르고 종종 알 수 없는 도시처럼 우리도 알 수 없는존재가 된다. - P137

자기만의 방』에는 조용하고 분리된 개인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 나오는 게 아니다. 이 글은 여자가 방 밖으로 나갔다가 부딪히게 되는 경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지금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여성과 허구, 여성과 역사에 대해 대담한 질문을 던지는 지적 무단침입이기도 하다. - P138

문화는 존속하기 위해 불가해한 것을 필요로 한다. 불가해한 것은 논리와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한다.
우리는 불가해한 것을 여성에게 투사해왔고, 여자는 수 세기 동안 여자에게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도남자와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 분투한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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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즐기는 여성들을 (좋게 말해) 부담스러워 하거나노골적으로 혐오하는 말들을 간혹 만난다. 이는 단지 여행으로 발생하는 소비에 대한 혐오만은 아니다. 세계 속의 한 인간으로, ‘독립적인 미물‘로 살아가고자 하는 단독자에 대한 경계심이 있다. 꾸준히 억압당한 여성의 신체는 발과 입이다.
말하고 돌아다니는 여자.
- P243

여성=몸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와도 연결된다. 구찌 가방을 주면샤워하러 가는 여성의 모습(영화 〈극한직업)이 유머로 소비되는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교환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성의 몸으로 향하는 길을 돈과 ‘물뽕‘으로 다져놓은 세상에서 몸의 흥분은 없다. 몸의 지배만이 있을 뿐이다.
예술이 반드시 무엇이어야 한다고 정의하긴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이 억압의 도구이며 폭력의 구실이 되어선안 된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저질러온 폭력이 얼마나 많은가.
- P266

게다가 지금까지 완벽한 사람을 본 적 없다. 식민지에 저항하면서 여성을 차별하고, 여성의 권리를 말하며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 높이며 인종차별을 하고, 인종차별을 비판하면서 계층에 무지한 사람들을 얼마나 쉽게 만나는가. 나는? 나는 어떨까. 나는 과연 이모든 구도에서 자유로울까.
- P269

도룡뇽 살리겠다고. 도룡뇽은 상징이다. 도룡뇽에서 시작해인간이 물, 흙, 동물 등과 연결된 존재라고 여기기보다 ‘고작도룡뇽 안에 갇혔다. 법적으로 패소했지만 지율 스님이 사회에 남긴 화두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에 대해, 인간과 인간 아닌 것에 대한 분리는 인간의 종류도 끝없이 분리한다. 정상적인 인간과 정상이 아닌 인간.
- P280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한국 바깥에서 여러 이민자들에게 감정이입하며 그들의 활동에 눈길을 두는 만큼, 한국 내에서도 다양한 이민자와 난민들의 활동에 관심을 두었을까. 어쩌면 나는 한국에서의 나의 위치, 곧 ‘한국에서 태이나 부모 모두 한국인인 한국인‘이기에 상대적으로 ‘몰라도 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 P330

아시아태평양난민권리 네트워크 APR RN에서는 "우리를빼고 우리를 논하지 말라" 라는 구호를 사용한다. 이 구호는난민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소수자에게 적용할 수 있다. 여성을 빼고 여성에 대해 말하는 자리, 성소수자를 빼고 성소수자에 대해 말하는 자리, 장애인을 빼고 장애인에 대해 말하는자리 등, 그들을 빼고 ‘우리끼리 모여 있는 자리가 많다. 우리‘가 모여 ‘그들‘을 정의한다. 존재를 압살하는 폭력이다. 저항예술은 이처럼 ‘정의당하는 존재가 그 정의의 틀을 부수고나와 스스로 말하는 행위다.
- P331

응우옌은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서 글을 쓰는 방식에대해 고민하며 토니 모리슨의 문학을 많이 연구했다. 주류 사회가 원하는 글을 쓰지 않기, 주류 사회에게 자신의 존재를설명하지 않기. 이것이 모리슨과 응우옌의 공통점이다. 응우옌은 미국에 화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입은 여성으로 베트남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서구남성의 시각을 비꼬며 식민지가 ‘여성‘으로 재현되는 방식을비판한다.
- P340

보편, 평범, 정상은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이 개념들은 다른 세계를 적당히 배척하며 그 지위를 얻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보편적인 삶, 평범한 인간, 정상적인가정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이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이지 않은 삶, 평범하지 않은 인간, 비정상적인 가정이라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보편성과 정상성은 때로 권력과 연결되어 있다. 보편이 무엇인지 생각하기에 앞서 누가이 개념을 지배하는가 생각할 필요가 있다.
- P347

백인 낙서‘으로 시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 없는 위치에 있는 이들은 제 목소리가 가진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정체성 문제가 계급 문제가 된다는 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은 채 정체성‘과 ‘계급‘을 산뜻하게 분리한다. 여성의 비정규직화, 흑인의교육, 성소수자의 의료문제 등이 계급과 무관한 정체성 정치‘
일 수는 없다. 경제 문제와 정체성 문제를 별개의 문제로 바라보는 이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 P355

다시 지오바니의 <자아여행>을 본다.

내 허락에 의하지 않고선
난 이해될 수 없다

아무리 봐도 굉장히 멋진 오만이다. 보편에서 밀려난 존재들은 이러한 오만이 필요하지 않을까. 내 허락 없이 함부로나를 정의하지 말라고,
- P359

‘의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차별에 대해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의도를 과하게 변명하는 행동은 언제나 자신이 이해받는 위치에 있길 원할 뿐 스스로 이해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는 지독한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나온다. 의도, 의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라는 말, 진짜 지겹다. 결과에 대한 무책임일 뿐이다. 사람은 자기 의도를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에서 폭력적이 되기 쉽다. 나의 의도만을 변명하는 게 아니라.
나로 인해 타인에게 벌어진 길과를 반성하고 책임질 때 아주조금이라도 성숙해진다.
- P362

군복무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위해 국방부에 한 줄의 청원도 넣지 못하면서 여성에게 억울함을 해결할 방법이뭐냐고 묻고, 묻고, 묻는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지않는다. 오히려 그 억울함을 빌미로 지속적인 권력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억울함은 폭력의 얼굴이 된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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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는 서평집이 또 하나의 대세인지 자꾸 서평집을 읽게 된다. 

제법 읽었던 서평집들 중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와우! 멋지다.

미친듯이 줄그어 가면서 읽고 있다.

정희진씨의 서평집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와 연달아서 읽어 약간 비교가 되는데, 그 비교는 일단 다 읽고 하기로 하고.....

내 입장에서는 이라영씨의 이 서평집이 좀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고통과 소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지적 작업은 왜 위험한가. 타인의 고통이 세상에 더 잘 들리도록 목소리의 연대를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의 방음벽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른다. ‘나는 몰랐다‘라는 뻔뻔한 항변은 앞으로도 알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타인에게 고통의 방음벽을 놓는 행위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그저 이기적인 인간의 간접적인 폭력 행위에 불과하다. - P20

나는 분노한다.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읽고, 보고,
쓴다. 수시로 우울하다. 우울함과 잘 살아가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분노와 우울을 오가는 와중에도 오만이 싹튼다. 내오만을 다스려 무지를 발굴하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몸을움직여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그 ‘북우먼‘들처럼 나도 꾸준히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 믿는다.
- P28

2017년 가을 전미도서재단의 평생공로상을 받은 애니 프루는 수상 소감에서 오늘날을 "카프카적인 시대A Kafkaesquetime" 라고 말하며 입을 열었다. 암울하며 모순으로 가득 찬 부조리의 시대라는 뜻이다. 믿고 싶은 가짜뉴스를 신뢰하며, 불리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소외와 차별의 역사에 일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폭력에 무디어지고 있다. 이 모순의 시대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 P40

의사가 아는 사람이라면 환자는 ‘알려진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 발화 권력을 가진 주체들은 ‘아는 사람‘이지만 약자와 소수자들은 그들에 의해 ‘알려진 사람‘이 된다. 사회의 소수자들이 알려진 사람이 되지 않고 스스로 발화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 P53

여성의 성폭력 생존기도 일종의 트라우마 회고록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저항서 사다. 질병이 흔적을 남기, 폭력도 사람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자‘라고만 하지 않고 피해 생존자‘ 혹은 ‘고발자‘라고 하는 이유는그의 삶을 ‘피해‘ 안에 가두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는 극복과 치유의 대상으로 머무르기보다 적극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이야기다. 말하지 않는 피해자가진정한 피해자가 되는 문화를 휘청거리게 하기 위해서는 기를 쓰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꾸는방식이다.
- P60

법과 관습을 지배하는 남성 권력이 여성의 신체를 오직재생산과 성애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언어를 통제한 채 어떻게 착취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몸과 언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이 공통적으로 몸과 언어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압제자에게 깔린 몸과 언어를 구출하러 끝없이 깊고 깊은 해저를 탐험하기로 한다. 불태워진 ‘마녀‘들은 부활할 테니.
- P74

나를 집어삼키려는 폭력적 욕망 앞에 굴하지 말고 놀아야 한다. 노는 여자와 정숙한 여자를 분리하는 사회에서 정숙한 여자는 안전한가. 그럴 리가. 정숙한 여자는 남편, 아버지, 오라등 가족관계에 있는 남자들이 ‘알아서 지배하도록 사회가 나버려둘 뿐이다. 노는 여자가 안전할 때까지 여자들은 제 자신을 실험할 권리가 있다. - P108

돌아다니는 여자에게는 언제나 소문이 따라온다. 남자라무슨 관계일까, 가서 뭐 했을까, 여자가 말이야…... 그러거나말거나, 오늘도 여자들은 설치고 돌아다닌다. 도시를 유당하는 만보객은 대체로 남성이었다. 런던을 돌아다니며 제 언어로 도시를 스케치한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산책기‘가 반가운까닭도 여성의 돌아다님이 남성보다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쁜 발에 머물지 않고 여행하는 발, 노동하는 발, 곧제 길을 찾아 나서는 발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움직이는 몸에서 움직이는 생각을 발견한다.
- P125

여성의 미덕은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사라지라는 뜻이다. 가장 훌륭한 여자는 죽은 여자다. 여성의 피해 경험이 사회를 전복시키는 발화로 작용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영원한
‘피해자의 자리에 처박아두고 관음하기 위해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피해자 되기‘를 부추긴다.
- P134

2003년 떠난 노동자 김주익의 유서에도, 2004년떠난 노동자 김춘봉의 유서에도, 그리고 또 다른 노동자들의수많은 유서에 "나 한 사람 죽어 ~할 수 있다면"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들은 죽음으로 목소리 내고자 했다. 살고 싶어서 죽은 사람들이다.
내 슬픔은 누구에게 등을 보이는가. 내 슬픔은 누구의 얼굴을 바라보는가. 이름 없이 공적인 얼굴을 상실한 자들을 애도하고 싶다. 1991년 부산에서 한 노동자는 팔에 다음과 같이적고 투신자살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고 미경이다."
그는 권미경이다.
- P159

인간은 순환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대를 통해 말을 이어갈 수는 있다. 누군가의 고통 끝에 있는 문을 닫아버리는 애도가 아니라 활짝 열고 그 고통의 청취자이며 용감한 목격자가 되는 애도를 이어갈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렇게 타자를 통해 순환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 P165

인정받기에 대한 불안을 잠재울 용기가 없으면 은둔할 수 없다. 대부분은 ‘셀러브리티‘를 욕망하지는 않더라도 ‘노바디 obvity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에 비하면 ‘무명인‘, 곧 ‘나는 아무나다‘라고 말하는 자세는 내면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단단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 P193

여자 인생의 서러움을 쏟아내며 서러움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서로의 서러움을 위로하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한다. 때로 이런 형태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유통된다. 가부장제에서 수용 가능한, 가장 안전한 페미니즘의 형태다. 서러움에 대한 공감으로 분노를 해소한 뒤 다시 가부장제에서 마련한 제자리로 돌아가 성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올바른 여성들. 싸우면서 식구들 밥은 다 챙겨주는 태도, 그야말로 ‘빨래터 수다‘로 한풀이를 할 뿐 남성에게 아무런 불편함을 주지않는 목소리가 가부장제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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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1-05-07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분의 작가도 꽤 아픈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 같네요.
정희진 작가의 글과 비교해 보는 즐거움도 있을 것 같아요.
즐건 불금, 주말 되세요. 바람돌이님.^^!

바람돌이 2021-05-07 11:34   좋아요 2 | URL
아직 불금까지 5시간 남았습니다. ㅎㅎ 정희진 작가와의 입장차이 이런건 잘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하는 톤이 다르고 방식이 다른 것 같아요. 전 지금은 이라영 작가의 화법이 좀 더 끌리고 있습니다.
모나리자님도 즐거운 불금, 주말 되세요. ^^

공쟝쟝 2021-05-09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앗 보기만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사놓고 못읽는 책이예요. 여기서 인용된 책들을 거의 안읽었기 땜시롱! 오늘 날씨 좋아요 ^^ 리뷰 기다릴게요 ㅎㅎ

바람돌이 2021-05-12 08:56   좋아요 2 | URL
미국 여성작가로 한정해서 리뷰를 했더라구요. 그런데 이 책은 본격적인 리뷰라기 보다는 제 생각엔 리뷰를 빙자한 작가의 에세이랄까 좀 그런 느낌입니다. 저는 그래서 더 좋았구요. ^^
 

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삶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 P102

왜 때리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폭력이다.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때릴 수 있으니 때리는 것뿐이다("They do because theycan"), 단지 그뿐이다. 대신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믿지 않는가? 왜 국가는 이 문제를 사소하게 다루는가? 왜 우리는 언제나 이 문제가 "사소하지 않다"고 외쳐야 하는가?
- P103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다. 자기가 먹은 밥그릇은자기가 치우는 것이다. 자기가 입은 옷은 자기가 빨래하는 것이다.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개인) 미달‘ 이다. 그러므로
‘주부‘나 ‘아내‘는 정체성도, 직업도, 지위도 될 수 없다. 아내가뭄은 모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반대로 어느 누구도 아내를 가질‘ 특권은 없다는 뜻이다.
- P113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다. 나는평소 숱한 사람이 사상가들을 언급할 때 마르크스, 프로이트,
푸코, 루소…… 그리고 페미니스트 식으로 나열하는 데 분노한다. 남성들은 ‘개인‘으로 호명되는데, 어째서 페미니즘은 한 덩어리로 간주되는가? 이는 마르크스 한 사람과 모든 여성이라는식의 발상이다.  - P150

성매매, 성폭력 제도의 본질적 공통점은 남성의 성은 남성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지만 여성의 성은 여성의 몸에서 분리된다는 점이다. 남성의 성은 남성 개인의 몸에 소속되어 있다. 여성의 성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 가족, 그리고 그녀의소유자인 남성의 자원이거나 상징이다. 남성의 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대상화된다. 유통, 기부, 거래, 순환 등 교환 가치를 지닌다.  - P170

거듭 강조하건대 알선업자들이 다루는 것은 상품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강제냐 아니냐 혹은 협의의 강제성이냐 광의의 강제성이냐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문제는 강제성 여부라기보다는 전쟁에서의 철저한 성별 분업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제성 담론은 여성 인권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게 만드는 ‘맥거핀‘이다. 왜 남성의 성은 여성을 위해 강제든 자발이든 봉사하지 않는가? 왜 국가는 알선업자든 남성의 성을매매하는 제도는 만들지 않는가? 이 질문이 황당한가? 자발적
‘담요 부대‘는 납치든 여성의 성을 종군(從軍)의 상수(常數)로놓는 전제부터 문제시하는 논의를 시작하자.
- P171

한국 사회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이미 신채호의 맥락을 떠나 주로 우리가 침략당한 사건을 상기하는 데만 동원된다. 피해자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역사‘, ‘민족‘, ‘미래‘가 모두 복수(複數)의 의미라는 점에서 이 언설은 주장되어야 할 정언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할 머리 아픈 문제다.
- P187

팬데믹의 원인은 ‘돌봄 노동‘(살림)을 비하하고 ‘자연 파괴 (죽임)를 추구해 온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팬데믹의 대안으로 돌봄 윤리에 관심을 보이지만, 이런 흐름은지금 여기의 ‘여성 해방‘ 과는 거리가 멀다. 팬데믹의 결과로 또다시 여성들이 강도 높은 보살핌 노동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내용은 그 자체로도 재평가해야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이 공적 영역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P203

마지막으로 ‘성노동‘, ‘성노동자‘ 용어에 대한 나의 분노를 분명히 하고 싶다. 이 책에 나와 있듯이 성노동은 미화된 용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노동이다. 성산업에 종사하는 일은 당연히 노동이다. 그러나 "노동이어야 한다. 노동으로 인식되어야한다."는 전혀 다른 논리다. ‘성노동‘은 성매매의 핵심, 즉 왜 이노동이 여성에게만 부여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성매매를 성폭력으로 환원하는 입장에도 동의하지 않지만, 폭력을행하는 것도 당하는 것도 노동이다. 성산업에서 여성이 하는 일은 중노동이고 위험한 노동이다. 여성이 사망해도, 공권력도 가족도 나서지 않는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성노동‘ 담론이 여성혐오에 근거한 무지의 산물인데도 한국 사회에서 그럴 듯하게통용되는 이유는 ‘노동의 신성화‘라는 서구 근대 이데올로기를벗어나지 못하는 식민주의 인식 때문이다.
- P214

저자는 "당시 매춘 여성이 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딸들의 어두운 숙명이었으며, 누군가 그만두어도 같은 길로 굴러떨어지는 딸들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성매매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문제를 (여성이 아니라) ‘인민‘의 고통이라는 차원에서본다. 그러나 오히려 성매매의 근본 원인은 왜 프롤레타리아 남성들은 가난하다고 해서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팔지 않는지, 그리고 왜 남성의 성은 국가의 통제 대상이 되지 않는지를 질문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성을 파는 여성, 성을 팔아야 하는 여성의 존재는 바로 여성이 ‘인민‘의 범주에 들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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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책, 알려진 책, 많이 팔리는 책에 서평이 몰리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서평(크리틱)이 가장필요한 책은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 혹은 별 내용이 아닌데 많이 팔려서 비판으로 판매량을 줄여야 하는 책이다. 물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희망한다. 서평이 많이 쓰이고 비평서가 많이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다.
- P11

할지 모르겠다. 공부. 자기 언어를 갖는 것은 피억압 집단에게가장 필요한 투쟁이다. 남성, 백인 문화는 피억압자의 언어를두려워하고, 이는 여성 혐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여성들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페미니즘의 대중화가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제 페미니즘은 가치관이 아니라 자기 계발의 하나가 된 것뿐일까.
- P14

사회의 ‘크기‘는 고통에 대한 태도와 그것을 품을 용량(capacity)으로 가늠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해 한글판 제목대로
"피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그릇에 온전히 담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 P28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다는 것.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문화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 흑인의 몸은 백인의 것이다. 백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간, 고문, 살인, 감금이든 모두 합법‘적‘이다. 압도적 폭력을 마음으로, 평화로,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해자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 편에서 박수를 치는 것과 같다 - P36

나는 용서를 이야기할 때 전제되어야 할 것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내 글은 비관적일 뿐 아니라 이 책과 무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조악한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나는 용서 지향적 사회보다 평등한 복수‘가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먼저다.
- P57

이 책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와 ‘인간관계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은 것‘의 차이를 알려준다. 무병장수는 행복의 조건이 아니다. 아프더라도 이해와 돌봄의 인간관계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건강과 그렇지 않은 상태의경계, ‘잘 아플 권리‘, 고통은 삶의 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방식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 P68

나는 예전에 세월호 사건을 두고 "잊지 말자."라는 말이 누구의 관점인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는 그 사고와 무관한 이들의 다짐이다. 유가족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당사자가아닌 이에게는 망각이 필연이고, 당사자에겐 기억이 필연이다.
"잊지 말자." 대신 유가족의 시각에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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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4-2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6페이지 밑줄 저두 그었어요. 68쪽두. :) 잘 자요 바람돌이님

바람돌이 2021-04-27 23:25   좋아요 0 | URL
앗 찌찌뽕!!!
같은 생각을 발견할때의 기쁨으로 잠들겠습니다. 수연님도 잘 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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