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철학에대해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철학적으로 사색하는 법을 가르치지않는다. 철학은 다른 과목과는 다르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 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 P12

마르쿠스는 골치 아픈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빼앗으라고 제안한다.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자격을 빼앗을 것. 다른 사람은 나를해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나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신경쓰는 걸까? 생각은 당연히 내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서일어나는 일인데,
- P35

이러한 깨달음이 마르쿠스를 움직이게 한다. 마르쿠스에게는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르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마르쿠스는 이러한 차이를 알았지만, 늘 그렇듯 스스로에게 그차이를 다시 상기시켰다. "새벽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힘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한다." 스토아학파나 황제, 심지어 로마인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 P36

나는 궁금하다. 짧은 두 마디 말이지만 그 안에 모든 철학의 씨앗이, 그 이상이 담겨 있다. 모든 위대한 발견과 돌파구는 이 두 마디 말에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궁금하다.
- P42

미친 지혜는 사람들을 뒤흔들어 깨달음을 주기 위해 사회 규범을 내던지고 배척될 위험(또는 그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충격 요법의 원조다.  - P46

우주학자 칼 세이건은 "모든 질문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 이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도 이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모든 질문은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외침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지? - P50

궁금해하는 행위는 광활하며 아무런 제약도 없다. 이 궁금해하는 마음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동굴에서 살던 인류가 나뭇가지 두 개를 서로 비비기나 키다란 돌을 사기 머리 위로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지 처음으로 궁금해한 때부터 쭉 그래왔다. 시도해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법이며, 궁금해하기 전에는 절대시도해볼 수 없는 법이다.
- P55

"질문을 살아요?"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 P69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 P71

근대에 데카르트가 머리의 철학자였다면, 루소는 심장의 철학자였다. 루소는 격정의 지위를 드높였고, 감정을 용인되는 것으로, 이성과 똑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루소가 살았던 이성의 시대에 상상적 사고는 믿을 수 없는 수상쩍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2세기 후, 무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이성주의자는 "지식보다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 P104

루소의 자연주의에는 애초에 처방의 의도가 없었다. 자연주의는 사고실험이었다. 루소는 가정해보았다. 립스틱을 덕지덕지 바른 것처럼 사회가 마음껏 발라놓은 겹겹의 인위적 장식을 전부벗겨내고 더 진정한 자신을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 고지식한보험회사 임원 안에는 폭동을 이끄는 선동가가, 모든 직장인 안에는 등산가가 도사리며 자유롭게 풀려나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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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기 - 잃어버린 현대사를 찾아 떠난 여행, 타이·버마·라오스·캄보디아 편
정문태 지음 / 원더박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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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은 항상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주변은 기타 등등, 그 밖에로 불리운다.

수도인 서울은 서울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워지며,  나머지는 그 밖의 지방이다. 

때때로 지방의 이름이 고유명사로 불리워질 때도 있지만, 서울이 기타 등등 또는 그 밖에로 불리우는 일은 없다. 

이는 한 나라 안에서도 그러하지만, 국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동남아시아는 국제사회에서 그 밖이다. 이는 중심부가 아니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런 동남아시아 내에서도 중심과 그 밖은 또 구분되어진다. 

다수의 권력을 가지지 못한 민족이나, 그런 민족들이 주로 살고 있는 국경지역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밖의 지역이다. 

전선기자 정문태는  말한다.

국경선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다라고!


이 말은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다.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어지고, 발해가 멸망하고 난 이후 한반도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화를 꾸준히 강화해 온 역사다.

조선시대쯤이 되면 중앙집권화의 정도는 경이로울 정도여서, 세계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력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단적으로 조선시대에 지방관에 의한 반란이 한 번도 없었다는데서 그 통제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한국은 거란이나 여진같은 이민족의 귀화를 받아들이고 핏줄이 섞인다하더라도 그것이 민족간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조선의 테두리내로 귀화, 흡수, 혼합의 과정을 통해 체제 내화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중앙집권에 의한 질서, 단일민족- 순수한 단일민족이 허구라 해도 - 신화에 익숙하고, 그 중앙권력이 그어놓은 국경선은 우리에게는 분쟁의 선이 아니라 안전과 보호의 선으로서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했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38도선이라는 새로운 국경선이 생기고, 그것이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가져왔지만, 그 전쟁 이후 휴전선이라는 국경선을 경계로 한 두 체제는 빠르게 다시 체제의 안정과 중앙집권질서를 뿌리내리며 각자의 공간질서를 구축해낸다.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여전히 체제 내에서는 국경선은 보호와 안전의 선이다. 

그러니 국경선이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라고 얘기하는 정문태기자의 말이 선뜻 피부로 와닿기 힘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상황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한국인 독자는 이런 한국이라는 나라의 특성이 보편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먼저 벗을 필요가 있다. 

한국의 중앙집권과 국경선은 예외 중에서도 극히 드문 예외다.


발로 쓰는 글이 있다. 

오래전에 <전선기자 정문태>를 읽을 때도 그러했고, 이 책 <국경일기> 또한 발로 쓰여진 글이다.

누구도 근접하기 어려운 곳들을 직접 다니며 보고 듣고 사람들을 만나 취재하고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 이 책이다.

정문태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알려지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을 무수한 사람들의 삶과 눈물이 이 책 속을 관통한다.

이 이야기들은 정문태라는 기자가 아니면 누구도 쓸 수 없는 이야기이므로 이런 책에는 모든 가치 판단을 버리고 무조건 별 5개를 줄 수 밖에 없었다.

타이, 라오스, 버마, 캄보디아의 국경지대, 표지판도 없고 제대로 길도 나있지 않으며 안내자도 제대로 없는 마을들을 죽을동 살동 찾아다닌 기록들이 이 글이다.

심지어 이 곳은 여전히 분쟁 지역이어서 기자 자신은 담담하게 써내려갔지만 읽는 사람은 내내 마음을 졸이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고맙고 고마운 책이 되는 것이다.


이 곳의 역사는 얽히고 설킨 것들이 너무 많아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1950년 동남아시아의 공산주의 확장에 화들짝 놀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중국 국민당 잔당들은 이 곳에 와서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압박하며 아편 생산을 시작하고 이곳을 마약공장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을 타이공산당 박멸작전에 이용한 미국과 타이 정부에 의해 이들의 마약사업은 묵인되고 지금은 그들의 후손이 여전히 이곳에 대를 이어 살며 분쟁의 씨앗을 여전히 품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마약생산은 이제 지역 내의 온갖 정치세력의 주머니를 채워주며 지금도 국경지역 골든 트라이앵글을 마약생산기지로 악명을 떨치게 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들은 소수민족들을 두 국가의 경계선 아래 나눠놓기까지 하여, 국경선과 경비초소에 갇힌 사람들로 하여금 기본적인 생필품이나 먹거리를 구할 수도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 먹을 것을 들여오기 위해 국경선을 지키는 양국 군인들에게 언제나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국경선은 얼마나 저주스러운 것일까? 

국경선에 산재한 산악을 근거지로 하여 분리 독립 또는 자치를 주장하며 소수민족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

그들이 근 60여년을 싸우고 있는 이유는 싸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법적 보호장치도 없이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착취당하고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선택권은 없었고, 사실상 지금도 없다.

50년을 전쟁터에서 지낸 독립혁명 전사는 이제 도인의 풍모를 풍기고, 소수민족의 학교에서 어린 아이들은 여전히 "우리는 샨족을 지키는 전사가 될거예요."라는 꿈을 이야기한다.

대를 이어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이어질 수 있는 삶이 이곳의 소수민족들의 현재다.

버마(미얀마)정부와 휴전협정을 이야기하지만 약속이 지켜진적은 없으며, 실질적인 평화안을 내온 적도 없다.

힘을 가진 쪽-타이든 미얀마든 다수의 정권쪽은 휴전협정으로 잠시의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 그들의 정치적 이슈가 필요하거나 하면 또 다시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권력자들에게 소수민족의 목숨을 건 항쟁은 그저 자신들의 정치놀음을 위한 장기말일 뿐이다.

휴전 협정을 소수민족 누구도 믿지 않는 이유다.


현재 미얀마 민주화 투쟁에 대해 정문태 기자가 게재한 소수민족들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비감해진다.


“버마 사람들은 필요할 때만 소수민족을 찾는다. 1948년 독립 때도, 1988년 민주항쟁 때도, 2015년 총선 때도 늘 그랬다. 지나고 나면 그뿐이었다. 아웅산수찌도 민아웅흘라잉도 우리한테는 다 버마 사람일 뿐이다.” 

“흥분할 것도 놀랄 것도 없다. 우린 늘 겪어온 일이다. 소수민족 학살 군인정권 60년째다.”

“버마 시민이 보여주고, 국제사회가 나설 때 우리도 힘 보탤 수 있다. 버마 연방 바라보며 싸웠지만 버마 사람들이 돌려준 건 박해와 차별뿐이었다”(한겨레 신문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994475.html#csidx012cdf4f279bf458293c60e8d3db110



바다건너 남의 일인 우리야 쉽게 미얀마 민중과 소수민족 저항군들의 연합을 통해 지금은 군부정권에 대항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얘기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소수민족들이 걸어온 역사때문이다. 


책의 앞면에 저자는 "그 땅엔 비틀고 감춘 역사가 겹겹이 쌓였고, 모질게 해코지당해온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그러나 지레 절망 따위를 말하고 싶진 않다. 끝끝내 내릴 수 없는 깃발들을 본 까닭이다. 나와 당신, 우리를 닮은 '그 밖들'의 세상을 찾아 길 떠나는 여행자한테 이 책을 올린다라고 썼다.

그 밖들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계속되고 있고, 여전히 싸우고 있다.

그들 하나 하나 이름의 고유성이 살아나고, 자신의 몫만큼의 정당한 댓가를 바랄 수 있는 삶의 길은 여전히 멀다.

그럼에도 그들은 삶을 꿈꾼다. 

그들의 꿈에 관심과 지원, 연대를 꿈꾸는 것 역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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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1-06-12 07:5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 시대 열강들의 편의에 따라 그어진 국경선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정치,경제, 사회적 불안을 겪는 것이 사실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지역의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보다는 지정학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간섭을 행하고, 난민을 혐오하는 현실을 보면 진정한 세계 평화에 이르는 길은 참으로 먼 듯 하네요...

바람돌이 2021-06-12 13:32   좋아요 4 | URL
말씀하신대로 저 국경선들의 연원을 올라가면 말씀하신대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지역을 식민지배하면서 그들의 편의대로 그은 국경선이 있어요. 이 책에서 따로 얘기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온갖 분쟁의 씨앗을 다 뿌리고 간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지역 또는 아프리가 각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면서 자신들만의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것에 더 분노하게 되더라구요. 모든 현실의 문제를 풀어가는 원칙은 나와있고,어쩌면 답도 나와있는데 거기에 얽힌 이들의 욕심이 결국 문제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됩니다. 안타깝고 화나고 그러네요.

새파랑 2021-06-12 08: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발로 쓰는 글이라는게 참 멋져요. 작가님의 땀이 느껴지는 책일거 같아요. 소수민족의 아픔이 느껴지네요 ㅜㅜ

바람돌이 2021-06-12 13:33   좋아요 5 | URL
평범한 저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발걸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료를 모으로 정리해주면 이제 역사학자들이 나서서 이 지역의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는 일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페넬로페 2021-06-12 14: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분명 예전에 저는 이런 세상사에 관심이 많아서 마음 아파하고 분노하고 그랬는데 요즘 왜이리 인식과 의식의 부재에 갇혀있는지 모르겠어요 ㅠㅠ
그래서 이렇게 올려주시는 책들과 글들로 다시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리는것 같아요^^
더 관심가지고, 알고자하는 공부를 해야겠어요~~
바람돌이님의 글로 각성합니다^^

바람돌이 2021-06-12 14:27   좋아요 5 | URL
페넬로페님과 제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전사로 살수는 없는거고, 나의 자리를 더 확장하는게 꼭 맞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냥 지금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정도랄까? 이곳의 지인분들은 다들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것 같던데요. 그런 삶들이 모여 좀 더 나은 세상이 만들어질거라고 믿습니다.

붕붕툐툐 2021-06-13 00: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페이퍼만으로 관심이 팍팍 가는 책이네요! 발로 쓴 글이라 해서 그렇게 못 썼나 생각했던 제가 부끄럽습니다~ 인도차이나 반도라고 하나요? 저 나라들 다 제가 애정하는 나라들인데~ 국경 때문에 겪는 아픔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1-06-13 01:46   좋아요 2 | URL
앗 발로 쓴 글이라는게 그렇게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군요. 발연기가 연상되는걸까요?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잘 쓴 책입니다. 그런데 잘 썼다 아니다를 떠나서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땅의 사람들 이야기를 바로 현장을 보고 썼다는데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문태 기자님 아니면 누구도 못쓸 책이에요. 저는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희선 2021-06-13 0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수민족 하면 중국쪽에 사는 사람이 생각나고 여전히 중국 때문에 힘들다는 것밖에 모르는군요 중국 바로 밑이 동남아시아네요 중국과 가까운 쪽은 여러 가지 일이 있겠습니다 모두가 평화롭게 살면 좋을 텐데, 거기에도 힘을 가진 사람이 그걸 놓지 않으려고 거기 사는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나 싶네요 욕심을 버리면 좋을 텐데...


희선

바람돌이 2021-06-13 03:41   좋아요 3 | URL
사실 모든 심각한 문제들도 그 해법을 찾아보면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 욕심을 버리면 되는 건데 그 욕심이 인류 역사에서 한번도 버려진 적이 없다는게 문제겠죠. 그리고 그 욕심을 포장할 수 있는 언어적 수사들이 난무하는 것도요. 지구의 모든 곳의 평화를 기원하는거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속상하기도 하네요.

그레이스 2021-06-13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 봐야겠네요.
기사는 방금 읽었습니다.
세상에 눈뜨게 해주는 발로 쓰는 글!
이런 글들은 찾아서 읽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1-06-16 00:37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이 읽으신 책도 제가 늘 따라 읽는걸요. 서로 따라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어서 언제나 너무 좋아요. ^^
 

시위는 정부에게 우리가 반대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동료 시민들에게, 그중 가장 약한 이들에게 우리가 국가 정책에 반대할 수 있고 반대해야만 함을 보여준다.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성급한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집 밖에 나선다. 칩을 던진다. 걷는다.
- P286

상드는 여자들 편에 섰어야 했다. 여자들의 대의에 자신의이름을 빌려주었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오늘날 상드의 행적에 대한 논란도 더 적을 것이다. 그러나 상드는 어떤 전선에도서지 않으려 했다. 상드는 모든 관점을 가로질렀다.
- P296

클레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기를 그만두자 카메라도 클레오를 바깥쪽에서만관찰하기를 그만두고 클레오의 관점에서 세상을 재현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특히 여자는 스펙터클, 구경거리이기 때문에남자처럼 익명으로, 주위를 구경하면서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도전한다. 보이기만 하지 않고 스스로 본다는 것은 도시에서 여성의 자유가 시작된다는 신호다.
- P326

 파리에서 나는 뉴욕에서 내가 비운 자리와 비슷한 자리에깃들고 싶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자리, 집, 배우자, 아이들을 원했다. 뉴욕에서 다들 나한테 기대하던 것과 같은 삶을 프랑스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 자리가 생기기를 바랐고 내가 들어갈 만한 자리가 생기면 기쁘게 들어가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반항아가 아니었다. 그냥 나라만 바꾼 사람이었다. 나라를 집을떠나왔으나 나는 다시 자리를 잡고 정착하고 싶었다.
- P345

바르다는 페미니스트의 첫 번째 행위는 바라보고, 이렇게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시선의 대상이지만 또 나는 볼 수있다. 바르다의 영화가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과 세상 안의 우리 자리를 비스듬한 눈으로 보는 것. 우리는 이삭 줍는 사람, 플라뇌즈, 방랑자, 이웃이다. 객관성 따위는 없다. 프랑스어로 ‘객관적‘ 이라는 뜻의 오브젝티프(objectif)는 ‘렌즈‘를 뜻하기도 하는데, 렌즈를 통해서는 한 방향밖에는 볼 수가 없다.
렌즈를 우리 쪽으로 향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도, 병조차도 객관적으로 나쁜 것일 수는 없다는 게 사실이라면 위안이된다.
- P357

"나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국에서 임시 거주지에 정착하고 타자기와 공생에 들어간다." 그럴 수 있는 권리를 얻기가쉽지는 않았다.
- P390

내 도시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다른 어느 곳보다 더 나의 것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를발로 알아가지만, 우리가 도시를 떠나면 지형이 바뀐다. 그렇게되면 자신 있게 발걸음을 떼놓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게 좋은일일지도 모른다. 그냥 보는 것, 보면서 다른 것을 보기를 기대하지 않는 게 핵심이다.  - P413

여성의 플라네리, 즉 플라뇌세리(flâneuserie)는 우리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방식을 바꾸고 공간의 조직에도 개입한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공간의 평화를 흩뜨리고 공간을 관찰하고(혹은 관찰하지 않고) 차지하고(혹은 차지하지 않고) 조직할(혹은 조직을 와해할) 권리를 주장한다.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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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에서는 따라다니는 것의 가치가 낮게 평가된다.
따르는 사람한테는 무언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나약함, 어쩌면 변태성을 뜻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이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부추김을 받는다. 주도권을 쥐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내라고, 그러나 복종에는 전복적인 면이 있다. 칼의 작업에서도 드러난다. 일련의 제한 조건 안에서 우연의 기회를 만든다.
게다가 칼에게 통제권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는 있으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그저 미궁에서 ‘길을 잃은 느낌을 받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칼이 앙리B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한, 칼은 정확히 자기가 있어야 할곳에 있는 것이 된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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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사건을 기억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스』의여백에 이런 메모를 남겨놓았다. 나는 그렇다는 증거를 보고싶다. 책에서 읽는 것 말고 전에 있었던 무언가가 새겨진 흔적을 직접 보고 싶다. 도시를 책 읽듯이 읽고 싶다. 건물 앞쪽 표면에 아로새겨진 전쟁, 총알 자국. 누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말해주는 동판, 몽마르트르(몽마르트르는 순교자들의 산이라는 뜻이다.) 언덕 위 네오비잔틴 양식 웨딩케이크 같은 사크레괴르 대성당은 코뮌의 학살에 대해 신에게 사죄하는 건축물이다. - P154

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헤미안 상드에 환호하면서 더욱 흥미로운 상드의 일면, 일상적 급진주의자로서 상드를 놓치고 있다. 특히 상드의 자전적 글을 보면 역사의 틈새에서 일상적 혁명을 힘겹게 조금씩 이루어나가는 여자들과 해방적인 역할을 하는 도시를 만날 수 있다. 상드의 문제는 해방된여자가 어떤 모습인지를 좀처럼 상상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 P162

프랑스 여자들은 혁명이 자기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 기회라고 보았고, 혁명 세상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환영받았다. 심지어 혁명에 기여한 공로로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슨이유 때문인지(군과 관련된 여자들이 성적으로 방종했기 때문인지) 변절자라고 비난을 받았다.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 (1791)의 저자 올랭프 드 구주도 지롱드파의 지도자 롤랑 부인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일을 보면 선을 넘은 여자들을 자코뱅들이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 수 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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