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연대기
D 지음, 김수정 외 감수 / 동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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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의 연대에 작은 힘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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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 처음 만나는 페미니스트 지리학
레슬리 컨 지음, 황가한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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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지리학자라는 저자의 직업명칭이 확 눈길을 끈다.

거기다가 제목도 얼마나 도발적인가?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라니....

이 책의 원제는 <Feminist City>이다. 여성주의 도시쯤으로 해석될 이 구절을 저렇게 바꾸어놓았으니 흥미를 유발하기에는 성공적이라고 생각은 드는데 책의 내용을 보면 원제가 맞지 않나 생각이 든다.

어쨌든 페미니스트 지리학이라는 이 생소한 분야가 나의 흥미를 확 끌었던건 맞다.

원래 지리학에 관심이 많고, 특히 도시와 도시의 삶을 좋아하며 이제 페미니즘에도 집중된 관심을 가지게 된 현재의 나 말이다.


완전히 모르던 새로운 내용은 없으나 딱히 관심을 갖지 않았던, 또는 무지해서 무시했던 여러가지 도시체계의 불합리함, 반여성주의, 반인종주의 등등을 아우르는 내용으로 인해 새로운 관점과 나의 시야를 튀우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래서 항상 뭔가 새로운 분야의 책을 처음 시작하는 것은 늘 좋다.

거기에는 모르던 것에 눈이 번쩍 뜨이는 신기함이 있고, 나의 생각의 지평을 확대하는 신선함이 있으며, 내 삶의 태도를 다시 정비하게 하는 그럼으로써 내가 사는 곳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를 만드는 힘이 있다.


흔히 헐리웃 영화를 보면서 나에게 항상 동경이었던 삶의 형태가 있다.

교외의 넓은 부지에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마당의 큰 나무에는 아이들이 올라가서 놀 비밀 아지트가 있으며 때로 날씨좋은 밤이면 마당에 텐트를 치고 별을 보며 잘 수도 있는, 그리고 2층의 단독주택이 있는 그런 미국 중산층의 심볼같은 집 말이다. 

집은 커녕 내 방 하나 가져보는게 소원이었던 어린 나에게 저 영화속의 집들은 그야말로 드림하우스였다. 

그런데 실제로 미국인들에게도 이런 교외의 주택은 드림하우스였단다.

저 드림이 희망이 아닌 허상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교외의 주택은 분명히 사회적 경제적 성공의 상징이었지만 이 주택은 직장에서의 거리가 멀고, 각종 편의시설에서의 거리 역시 너무 멀고,집을 관리해야 하는 노동이 엄청남으로 인해 성인 중 한명은 밖에 나가서 일하고 다른 한 명은 집 안에서 일하는 이성애자 핵가족을 모델로 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이는 대부분 남성이고, 교외의 주택에서 혼자 남은 노동 모두를 감당해야 하는게 여성임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교외 주택에 사는 중산층 여성들의 우울을 다룬 영화나 콘텐츠들이 한 때 왜 그렇게 많았는지도 이해가 된다. 여성을 삶으로 부터 고립시키는 그럼으로서 가부장제를 강화시키는 삶의 방식이라는 교외주택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도시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여성친화적인 아니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좀 더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

여기서 저자가 제시하는 관점이 <교차적 관점>이다.


우리는 안전한 도시의 형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사적인 안전 조치가 포함되지 않은다는 것은 안다. 안전한 도시는 범죄 예방이나 적절한 조사를 경찰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해보이는 겉모습을 위해 성노동자, 유색인, 젊은이, 이민자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백인 여성 특권층의 필요와 욕구를 중심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적 변화가 부정적 지배를 무너뜰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가장 취약한 계층의 필요와 관점에서 출발하는 교차적 접근법이 요구될 것이다. 여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미는 것이 표준 관행이 될 것이다. 사적 공간의 폭력과 공적 공간의 폭력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가 증가할 것이다. (249쪽)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연구해온 저자의 학문적 입장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저자가 행복하게 만나는 지점이 나는 이 <교차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서울의 홍대앞, 가로수길, 서촌 같은 곳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지고 있는 구도심과 외딴 지역이 개발되면서 정작 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던 이들은 땅값과 임대료의 상승으로 쫒겨나고 대자본이 들어와 지역을 차지하는 현상은 지금 우리 나라에서도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서구에서는 여기에 더해 구도심의 독특한 지역들이 개발되면서 백인 중산층들이 이곳을 돈으로 점령하고 이곳에 살던 이들은 더 외진 곳으로 교외로 밀려나면서 삶의 질이 더 낙후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뭐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들이다.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얼마나 많은 판자촌들이 밀려났던가 말이다.

어떤 특정 계층의 안전을 강화하는 것이 도시 내의 모든 계층의 삶의 안전을 강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여성들이 도시에서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이 설치하자는 CCTV는 어떠한가?

그것은 약간 으슥한 곳의 위험도를 줄일 수는 있지만 성매매 여성이나 이주자 여성들에게는 오히려 공권력에 의한 폭력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낙후된 동네에 새로 이사온 중산층 여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문화센터를 만들자 도시의 안전도가 증가한 것 같지만 문제는 그곳에 있던 그나마 가난한 여성들을 지원하던 센터와 그들이 안전하게 잠시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은 사라졌다는 문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또한 남녀의 두가지 젠더에만 익숙한 우리에게는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더 다양한 성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트랜스잰더, 젠더플루이드(성별이 유동적으로 전환되는 젠더, 다양한 젠더 사이를 짧으면 분 단위부터 길면 연단위까지 변화), 논 바이너리(남녀의 이분법을 거부하는)등등.... 

모르는 것은 때로 죄가 될 수 있다. 이들의 존재를 모르면 인정할 수 없고 배려할 수 없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고, 행동하고, 시위를 한다고 할 때도 그 대열 안에서도 소외되는 소수자들은 분명히 있다.

그런 이들을 소수자로 남지 않게 하는 힘은 역시 알아야 하고, 앎으로써 연대의 첫 발자국이 시작되는 것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것은 결국 여성친화적인 도시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도시의 계획과 건설, 배치에 성평등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제설정책같은걸 실시할 때 자가용 선호자가 아니라 대중교통 이용가능자가 어느쪽이 더 많은지 고려해야 한다. 그러면 골목길이 우선적으로 제설작업이 되어야 한다. 중심도로가 아니라..... 

돌봄노동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고 있다. 이성애자 핵가족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더더구나 한국 사회에서는 그 속도가 무서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계층과 나이와 성별, 인종의 돌봄노동은 점점 늘어날 것이고, 이러한 추세에 대한 공공서비스와 편의시설을 배치할 수 있는 마인드를 지녀야만이 도시의 슬럼화를 방지하고 살고싶은 도시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에서 이런 문제제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다.

모든 것이 땅값이라는 자본의 논리로 치환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없는 형편이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누군가가 알고 논의를 시작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그리고 싸우고 건의하고 시위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세상은 바뀌어 가는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때로는 그냥 거리로 나가야 한다.

권리란 강의실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혹은 선거 정치를 통해서도 쟁취하거나 지킬 수 없다. 모든 일은 현장에서 일어난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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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8-14 17: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지도 폭력이 될 수가 있음을 한번씩 절감합니다. 관점을 재점검하고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책이 그래서 필요한것 같아요. 찜해두었었는데 꼭 읽어볼래요!! *^^*

바람돌이 2022-08-14 18:11   좋아요 3 | URL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무식한데 신념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한민국 상황을 보면 딱 맞는 상황이라는 생각이.....ㅠ.ㅠ 이 책 어렵지 않으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미미님도 좋은 독서 되시기를..... ^^

그레이스 2022-08-14 2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차적인 관점이라는 말 이해가 되네요. 도시문제는 정말 여러 방향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바람돌이 2022-08-15 20:50   좋아요 2 | URL
맞아요.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워낙에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 어떤 문제도 쉬운건 없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문제제기를 하고 다른방법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의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파랑 2022-08-15 07: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표지 보면서 왜 원제랑 번역제목이 완전 다르지? 이 생각 했었는데 저만 그런게 아니었군요. 페미니즘과 지리학이라니 신선한거 같아요~!!

바람돌이 2022-08-15 20:51   좋아요 3 | URL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분야다보니 제목을 좀 강렬하게 한것 같아요
사실 저도 저 제목에 끌렸거든요. ㅎㅎ

희선 2022-08-16 02: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시도 여러 사람을 생각해야겠군요 그런 거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저 아파트 짓기에 바쁜... 그게 다가 아닐 텐데... 앞으로는 거기에 사는 사람을 생각하고 도시를 만들면 좋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2-08-18 12:42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는 도시는 무조건 돈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느낌이 많잖아요. 그런데 진짜 앞으로는 도시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요구, 도시환경 등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을거 같아요.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여성 친화적 도시를 구상하려면 사회 운동의 역할을 반드시고려해야 한다. 주변화된 집단에게 투쟁 없이 뭔가 - 자유 권리, 인정, 자원 - 가 주어지는 경우는 아예 없거나 매우 드물다. 투표권이든, 버스에 탈 권리든, 권력의 공간에 들어갈 권리든간에 사람들은 항상 변화를 요구해야 했다. 그 요구는 때때로 시위운동의 형태를 띠는데 페미니스트들의 요구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여전히 불완전할지언정) 내가 즐기는 자유가, 매기 넬슨 Maggie Nelson의 표현을 빌리면, <다양한 젠더를 가진 엄마들>의 대담한 행동에 의해 생겨났음을 안다. 그 엄마들은 도시와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것, 즉 직장, 교육, 문화, 정치 등에 대한 접근권을 요구하기 위해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싸웠다. 현재와 미래의 여성 친화적 도시에 관한 나의 생각 한가운데에는 이 역사의되새김과 그 안에서 내가 있었던 곳 찾기가 있다. 우리가 가진 것중에 싸우지 않고 얻은 것은 없다. 우리가 앞으로 얻을 것 중에도싸우지 않고 주어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 P182

솔직히 말하면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고 젠더플루이드와 바이너리는 거의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확실히사용되지 않았던 개념인) 시스젠더 여성인 나에게 TBTN 운동의 <여성만 허용>이라는 특징은 흥분과 우월감의 요소였을 뿐이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환영받을지 환영받지 못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치 내가 우리의 소음 때문에 영업을 방해받았을성 노동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또 그 동네 여자들과 그들이 이 <되찾기>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 P186

성폭행, 아동성폭력, 가정 폭력 같은성폭력 생존자들의 경험그리고경찰 가혹행위, 인종차별, 성차별같은국가폭력 및 기타제도화된 폭력의 생존자들의 경험을 기리는 민중 행사 (…………)이 행사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모든 젠더를 환영한다. 184또한 이 행사는 휠체어접근가능하고 수어 통역, 도우미, 아이 돌봄서비스가 제공된다. - P188

 도시의 젊은 여자인 나에게만 다른 규칙을 적용하는 시스템. 그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성폭력으로 벌하겠다고 위협하는 시스템, 그런데 행진과 시위는 나에게 받아쳐도 된다고 받아치는 게 좋다고, 받아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도시에 요구하는 사항을 말로 표현할수 있는 수단이었다. 또 그것은 특정한 행동, 감정, 심지어는 <잡년) 같은 폄훼하는 말을 되찾는 것이 나에게는 가능한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나를 압박했다. 바꿔 말하면 나는 도시의 페미니즘 정치가 얽히고설킨 권력관계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 P193

때로는 그냥 거리로 나가야 한다!
권리란 강의실이나 소셜 미디어에서 혹은 선거 정치를 통해서도쟁취하거나 지킬 수 없다. 모든 일은 현장에서 일어난다. - P212

<성희롱은매일 여자들에게 어떤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P223

반면에 가정 폭력, 지인에 의한 성폭행, 근친상간, 아동학대,
그 밖의 <사적인> 그러나 훨씬 만연한 범죄들은 대단히 적은 관심을 받는다.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러한 관심도차이는 여자들의 공포를 바깥으로, 집과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핵가족 같은 가부장적 제도를 강화하고 여자들이 안전해 보이는 겉모습 때문에 이성애적 관계에의존하게끔 만든다. 여기서 생기는 악순환이 무엇이냐 하면 집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경험된 폭력을 예외적인 일인 것처럼보이게 만들어서 더욱 관심 밖으로 몰아낸다는 것이다. - P224

「여성학 개론」에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반복해야 한다. 여자들의 공포가 가진 사회적 기능은 여성에 대한 통제다. 공포는 여성의 삶을 제한한다. 그것은 우리의 공적 공간사용을 제한하고, 직장을 비롯한 경제적 기회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를 - 이것이야말로 <진짜> 모순인데 - 남성 보호자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이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 묶여 있고 핵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가사 노동을 책임지는 이성애 가부장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탱한다. 그것은 남자라는 집단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현상(現狀)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시스템이다. - P225

우리는 안전한 도시의 형태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거기에 사적인 안전 조치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안전한 도시는 범죄 예방이나 적절한 조사를 경찰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해 보이는 겉모습을 위해 성 노동자, 유색인, 젊은이, 이민자를 저버리지 않을것이다. 백인 여성 특권층의필요와 욕구를 중심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적 변화가가부장적 지배를 무너뜨릴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가장 취약한 계층의 필요와 관점에서 출발하는 교차적접근법이 요구될 것이다. 여자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믿는 것이표준 관행이 될 것이다. 사적 공간의 폭력과 공적 공간의 폭력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대한 이해가 증가할 것이다. - P249

여성 친화적 도시는 그것을 실현하는 데 청사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슈퍼 페미니스트 도시 계획가가 나타나서 모든것을 무너뜨리고 새로 시작해 주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시가 어떻게 사회를 (젠더, 인종, 성적 지향 등과 관련하여) 조직하는 특정한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는지가 보이기 시작하면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도시 공간을 사용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대안적 공간을 만드는 데는 끝없는 선택지가 있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고 키우는 법만 배울수 있다면 작은 여성 친화적 도시들이 곳곳에서 싹트고 있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출세 지향적 프로젝트다. 사실은 완성의 유혹에 저항하는 <완성> 계획이 없는 프로젝트다. 여성 친화적 도시는 도시 세계에서 다르게 살기, 더 잘 살기, 더 공정하게 살기에 관한 현재 진행 중인 실험이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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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남성의 경험을 <표준>으로 삼음으로써, 여자들이 도시에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고 어떤 일상 경험을 하는지를거의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남성의 전통적인 성 역할을 뒷받침하고 돕게끔 설계되어 왔다. 이것이 내가 말한 <남자들의 도시>의 의미다. - P17

그 반대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덜 명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도시는 건설된 순간부터 사회관계, 권력, 불평등에 영향을미친다. 물론 돌, 벽돌, 유리, 콘크리트에는 자유의지가 없다. 이것들이 의식적으로 가부장제를 유지하려 애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형태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한계를 결정짓는 데 기여한다. 또는 어떤 것은 정상적이고 올바른 것, 어떤 것은 <부적절하고 잘못된 것으로 보이게 하는 데 기여한다. 한마디로 도시와 같은 물리적 공간은사회 변화에 있어서 <중요하다>. - P29

지리적으로 고립되고, 집이 상대적으로 넓고, 자가용이 여러 대 필요하고, 육아를 위탁할 곳이 없기 때문에 여자는 아예 직장에 다니지 못하거나 아슬아슬하게 살림 및 육아와병행할 수 있는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남자가 직장을 그만두거나 더 나쁜 조건의 직장으로 옮기는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오랜 남녀 임금 격차를 감안할 때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남자를 희생하는 것은 어차피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교외는 이성애자 가족 내에서, 또 노동 시장에서 특정한종류의 성 역할을 후원하고 그것이 당연해 보이게 만든다. - P59

지리학자킴잉글랜드 Kim England는 역할이 공간의 실제 외형에까지 고착되어 있다. 따라서 거주지역 및 업무 지역의 위치, 교통 체계, 전반적인 도시 구조는 어떤 종류의 행위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의해 일어나는지에 관한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의 기대를 반영한다>라고 말했다. 모든 형태의 도시 계획은 <전형적인 도시인에 대한 일련의 가정, 즉 그들의 이동 패턴, 필요, 욕구,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도시인은 남자다. 그는 한가정의 가장이자 남편이며 비장애인, 이성애자, 백인, 시스젠더다. 따라서 교외와 비교했을 때 설사 도시에 이점이 더 많다 하더라도 여자가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이라는 <투잡>을 병행하기쉽게끔 도시가 세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 P60

반면 유럽에서는 <성 주류화>의 관점으로 도시 계획 및 예산결정에 접근하기 시작한지가 더 오래되었다. 이 말은 모든 계획,
정책, 예산 결정이 성평등이라는 목표에서 출발해야 함을 의미한다. 예를들어 정책 입안자들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것이 향후에 성평등을 촉진할 것인지 저해할 것인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그 결과 도시는 이 결정이 말 그대로 사회를 지탱하는 돌봄노동에 이로울지 해로울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P77

반면에 스톡홀름 같은 도시들이 채택한<성평등적 제설 정책>에서는 인도, 자전거 도로, 버스전용 도로,
어린이집 주변을 우선으로 청소한다. 왜냐하면 여자, 어린이, 노인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가능성이 더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모가 아이를 데려다주고 나서 출근을하므로 이쪽을 먼저 치우는 것이 타당하다. 스톡홀름 부시장 다니엘 헬덴Daniel Helldén은 캐나다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기존의 제설 방식은 자가용 선호를 더욱 강화하지만 스톡홀름의방식은 모두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도록 독려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기획은 현상(現狀)을 답습하는 대신 <그들이 바라는 변화된 도시>를 추구한다." - P79

돌봄이 중심인 도시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유색인 여성, 장애인 여성, 퀴어 여성, 싱글맘, 노인 여성, 원주민 여성, 특히 이정체성들이 교차하는 여성들의 필요와 요구와 욕구를 기반으로한 미래는? 주택 디자인에서부터 대중교통 정책, 동네 설계 용도 지역 지구제에 이르는 모든 것에서 이성애자 핵가족을 중심에 놓는 행위를 그만둘 때가 왔음은 확실하다. 도시 계획가들과건축가들 또한 백인 비장애인 시스젠더 남성을 표준으로 삼고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그 변주라고 가정해선 안 된다. 이제는 주변과 중심이 뒤바뀌어야 한다. 교외에 거주하는 나이 많은 과부의 삶과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 중인 동네의 임대 주택에 사는저소득 레즈비언 엄마의 삶은 굉장히 다르겠지만 그중 한쪽이공공 서비스와 편의 시설에 접근하기 쉬워진다면 다른 한쪽도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편리한 대중교통, 눈을 치운 인도,
저렴한주택, 깨끗하고안전한 공중화장실, 가까운 동네 공원, 생활임금, 공용 부엌 같은 시설은 다양한 가정의 짐을 덜어 줄 것이며 환경 지속성 같은 다른 중요한 목표에도 기여할 것이다. - P86

우정은 도시에서의 자유를가능케 했고, 도시의 거리는 우리의 유대를 더욱 강화해 줬다. 단순히 우리가 부모님에게 반항했다는 것, 규칙을 깼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밤의 도시에서 공간을 차지한다는 것 - 이동성과 관련된 사회 규범 및 성차별적 제한을 근거로 여자애들이 대개 배제되는 시간에 도시의 공공장소를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를 성장케 한, 어쩌면 변화시키기까지 한 경험이었다. - P100

따라서 보다 더 고차원적인 질문은, <어떻게 해야 평생 우리를 지탱해 주는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할 가능성을 넓히게끔 공간, 특히 도시 공간을 새로이 창조하거나 기존 공간의 용도를 바꿀 수있는가>이다. - P127

만약 전통적 이성애 가부장제에 따른 가정 형태가 대부분의삶에서 규범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면 도시 미래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는,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의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하지 않을까? 여자들이 감정적 지지만을받기 위해 서로의 우정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육아, 노인 돌봄,
운전, 주거, 간호와 같은 필수적인 일들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서로 의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도시가 그런 관계를 뒷받침하는 인프라를 당연히 갖춰야 하지 않을까?  - P129

우리는 가장 평범한 장소에서도 안전하지 않고, 가장 흔한상황에서도 평등하지 않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 (・・・・・・) 이것이 내가 흑인 소요객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소요는 백인의 전유물이다. 백인 구역에 있는 흑인은 어디를 가든 대가를 지불해야한다. 카페, 식당, 박물관, 가게. 심지어 자기 집 현관 앞에서도이것이 우리가 심리적 지리를 활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는 정처 없이 돌아다닐 때도 경계를 늦춰선 안 되며 거기에는 정신적 비용이 따른다. 흑인은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다(테주콜, 페이스북, 2018년 4월 18일). - P147

가정의 요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고 가사 및 돌봄노동이 여성에게만 편중되어 과부하가 일어나다보면 방해받는 것이 더욱 짜증나게 느껴진다. 나는 내가 공공장소에 앉아서책을 읽으면 결국 내가 뭘 읽는지 궁금해하는 남자가 나타나리라는 걸 알고 있다. 물론 내가 남자와 함께 공부하거나 글을 쓰기위해 앉아 있을 때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거다. 혼자 있는 여자는 남자들이 언제든 방해해도 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 사실은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공공장소에 있는 여자가 남성 동반자나 결혼반지 - 물론 동성 - P152

배우자의 존재를 상징할 수도 있는―같은 확실한 표지에 의해임자있는 재산임이 표시되지 않으면 만만한 대상이 된다.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원치 않는 남자의 접근을 가장 빨리 차단하는 방법은 남자 친구나 남편이 있다고 말하는 거란 사실을 남자들은 여자의 거절보다 다른 남자의 재산권을 훨씬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 P153

도시 여자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이 증가하면서 1870년대에는파리에서 백화점 시대가 막을 열었다. 백화점은 그야말로 여자들을 위해 설계된 품위 있는 공공장소였다. 여자들이 거리의 불미스러운 요소와 접촉하는 것을 제한하는 동시에 그들이 그토록열심히 추구했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에밀 졸라Émile Zola의 1883년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Au Bonheur des dames』은 세계 최초의 백화점을 모델로 창조한 허구의 백화점 이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엿본다. 여자 판매원들의 작당 모의, 사장의연애 사업, 소상공인들의 경쟁 및 갈등 속에서 졸라의 책은 소비를 위한 구경거리가 어떻게 여자들의 감각을 즐겁게 하도록고안되었는지 보여 준다. 즉 쇼핑의 공간은 (적어도 서양에서는) 여자들이 공공장소를 차지하는 것을 허락받은 최초의 공간 중 하나였다. - P155

누군가가 도시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권력을가진 자가 누구고, 도시와 관련된 자신의 권리가 생득권이라고생각하는 자는 누구고, 항상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자는 누구인지를 말해 준다. 그것은 기존 사회의 차별 구조를그대로 반영하기에 계급 간 격차의 좋은 지표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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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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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책에서 무엇을 봐야 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나?

저자가 말하듯이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 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할 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 268쪽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거대악인 전쟁을 잘게 잘게 쪼개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여성들의 증언이 필요한걸까?

증언을 읽어가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모르긴 해도 이 증언을 청취하고 다시 쓴 작가의 고통은 이루 말하기도 어려웠을것이다.

듣고 쓰는 그 모든 과정은 결국 전쟁을 다시 체험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 이 증언을 썼고, 독자인 나 역시 고통을 참으며 이것을 읽어냈다면 그에 대한 응당한 무언가의 대답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싶은거다.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 또는 주체로서의 여자, 여성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전쟁이라는 단어는 남성적인 단어로, 전쟁터를 떠올릴 때는 참호와 그 참호속에서 총을 든 남자들의 이미지를 떠올리는게 일반적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여자의 이미지는 전쟁 피해자를 떠올릴 때 간신히 떠오르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기 여자들이 있다.

전쟁의 피해자가 아니라 조국수호전쟁이라고 불리운 전쟁에 대부분 자신의 조국을 또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와 대의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갔던 여성들이.....

그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지만 대부분은 이제 사춘기를 막 지나고 성인이 되기 전의 문턱에 도달했는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들은 왜 전쟁터로 달려갔을까?

그것도 어리다고 안된다고 하는 것을 무릅쓰고 고집을 피우고, 온갖 청원을 해대면서까지....

그런데 이런 질문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쟁터로 달려갔을지 너무 짐작이 잘 되니까 말이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다.

이 시기까지 소련은 세계 유일의 사회주의 국가로 스탈린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회주의조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으로 넘쳐나는 국민을 가진 그런 나라다.

물론 당연히 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국가의 모든 능력을 동원한 국가주의 교육가 세뇌였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마르케스의 표현대로 1950년대까지 마릴린 먼로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폐쇄적인 환경 때문이기도 했을 테고......

저 상황에서 자란 어린 청소년 아이들이 어떤 마음일지는 눈에 훤하다.

내가 바로 그런 교육의 시대를 거쳐왔기 때문이니 말이다.

유신시대 시골마을에서 자란 나는 아침이면 새마을 노래에 잠이 깨고, 동네 공터에 모여 6학년 오빠가 든 깃발을 따라 줄서서 학교가던 시절을 거쳤으며, 대통령이 오후에 우리 마을을 자동차로 지나간다고 아침부터 전교생이 찻길에 나와 태극기 흔드는 연습을 하던 그런 시절을 살았다. 

웅변잘하는 친구가 토해내던 때려잡자 박살내자 공산당에 열렬히 박수를 치고 감탄하던 반공키즈, 그게 나였다.

아마도 내가 열 몇살의 사춘기 시절에 북한과 남한이 전쟁을 다시 벌였다면 나 역시 전쟁터에 지원해서 나가지 않았을까?

아 어쩌면 이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기도 한것 같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소녀들이 조국수호전쟁에 나간건 마음으로 치면 일제시대 독립운동하러 간 것과 비교되는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들의 마음으로는 그러할테다.

그 이념이 숭고한 사회주의 체제 보호였든, 독재정권의 국가주의 보호였든 독립운동이든 이념과 집단세뇌는 엄청나게 힘이 세다.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특히나 어린 청소년에게는 더더욱.(그 극단의 예가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용감한 사회주의의 병사들이 악의 무리 독일군을 무찌르고 세계를 평정한다는 환상은 현실의 전장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그 아이들, 그 여자 아이들은 전장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들의 증언은 무엇을 본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대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30여년이 지나서야 나오는 증언은 바로 기억에 관한 것이다.

그 기억의 지점이 남자들과 여자들의 증언이 다르다.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 198쪽


남녀의 차이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남자들은 전쟁의 기억에서 전투의 상황, 어떻게 돌격했는지, 아니면 어떻게 기습을 받았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런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많은 전쟁체험담들이 이런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여자들은? 피해자가 아닌 군인으로서 참여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독자적으로 담은 책은 내가 알기로 이 책이 유일하다.

그녀들은 어떤 것들을 기억할까? 부부가 모두 참전했던 저 인용문의 남편은 아내의 기억은 감정에 대한 것이라고, 강렬했던 감정에 대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전쟁터에서 많은 여성들이 느꼈던 그 강렬했던 감정들을 가만히 따라가본다.


전쟁의 소리를 기억하는 이, 으르렁 쾅쾅 쨍쨍.... 그 소리들은 참전소녀들의 젊음이 끝나는 소리에 다름아니라고 느낀다. 전쟁을 겪고 난 이후에는 다시는 천진난만했던 그 젊음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 전쟁의 소리를 자신의 청춘의 장송곡으로 느껴야 하는 어린 소녀들에게는 어쩌면 삶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아름다운 것이 있을리 없다고 여겨지는 전쟁터에서 죽은 동료의 시체가 너무 아름다워 더 슬퍼지는 이들이 여성이기도 하다.

친구가 죽었는데 야 임마 너는 죽었는데 왜 이렇게 잘생겼냐라고 하는 남자병사는 상상이 안가는데, 너는 죽었는데 어쩜 이렇게 예쁘니라며 오열하는 여자병사는 쉽게 상상이 간다. 그들은 전쟁에서 결국 아름다움의 생각을 잃어가리라 생각하니 더더욱 처연해진다.

더 이상 하이네의 시를 읽지 못할거같다는 소녀는 어떠한가?

전쟁이 끝나고 남자들이 전쟁의 영웅으로 대접받는 상황에서 오히려 전선에서 남자병사들을 꼬셨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에 상처받는 여성들

전선에서는 전우였고 동지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 끔찍했던 기억들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연애나 결혼상대로 고려되지 않는 참전 여성들.(이들은 아직도 낭만적인 사랑을 꿈꿀 수 있는 어린 소녀들이고, 또한 이 시대는 여전히 결혼이 여성의 당연한 삶의 종착역이라는 관념이 일반적인 시대이니 이런 상황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짐작이 된다.)


전쟁의 기억을 안고 산다는 것은 여성에게 어쩌면 "두개의 세상, 두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133쪽)을 의미한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평생동안 계속되는 전쟁의 기억과 그것을 잊은척 모르는 척 살아가는 그런 두개의 삶.

이런 두개의 삶이 한 인간의 내부에서 통합되지 못하고 영원히 분열된 채 살아간다는 것의 고통.

내가 나일 수 없는 삶의 고통이 그들의 기억 전체에 각인되어 있었으리라.....


작가가 말한 거대한 역사를 작은 역사로 쪼갠다는 것의 의미가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개별화된 고통, 개별화된 기억, 개별화된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것에 역사의 의미가 있다.

개별화된 것들 자체가 역사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어쨋든 시작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다양한 고통을 모두 같은 고통으로 아파하지 않는 역사서술을 어디에 갖다 쓰겠는가?

역사서술이 무엇에 기반해야 하는지, 우리가 누구의 말을 더 들어야 하는지, 역사의 그 거대한 파도앞에 소외되는 사람이 왜 없어야 하는지 그렇게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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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8-10 13: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고통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기억들을 한데 그러모으고 목소리를 청취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 전쟁터에서의 기억은 몇십년이 지난다고 해서 사라질 것 같지도 않고 꿈으로든 현실의 어떤 순간이든 나타날테죠. 그 기억들을 끌어안고 산다는 게 어떤건지... 바람돌이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2-08-11 14:58   좋아요 0 | URL
증언의 의미는 시간이ㅠ너무 지나버리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거겠지요. 늦지 않게 전쟁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목소리를 청취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가 전쟁의 결을 더 섬세하게 체험하고 전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는데 이 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또 힘들지만 이 책을 읽었다는 생각도 들구요. 어쩌면 당사자에게는 아픈 그 순간을 한번 더 사는 고통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8-10 14: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절절하게 읽힙니다.
힘겹게 읽었던 지난 달의 시간들이 다시 떠오르는 듯 합니다.
전쟁 중일 때는 누이~누이 하면서 아껴주던 상황들이 전쟁이 끝나고 나니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여자가 아니라고 내처졌다는 증언들은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 것이고, 또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었네요.

바람돌이 2022-08-11 15:04   좋아요 1 | URL
읽기는 지난달 말에 겨우 읽고 리뷰는 이제야 썼네요. 글을 잘 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책에서 느낀 감정이나 이런 것들을 좀 추스릴 시간이 필요했던거같아요.
나무님 저도 이 에피소드 읽으면서 많이 가슴아팠어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이란게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이 누구나 있다는걸 생각하면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하더라구요.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둘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통을 같 겪었던 사람과 함께 연대해서 그 고통을 같이 이겨나가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아예 외면하고 피하는 것 그러니까 그 순간을 기억나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을 피해버리는것요. 무엇을 선택할지 쉽지는 않을거 같아요. 단순히 개인의 성향뿐만 아니라 내가 격은 기억이 얼마나 강렬한가에 다른 트라우마의 크기도 선택에 많은 영향을 끼칠거같구요

mini74 2022-08-10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인지 이 책 읽고나니 인터뷰에 응해준 여성분들께 제가 다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전쟁을 말하고 기억하는 건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다시 체험하는 ㅠㅠㅠ 복기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나 두려움 아픔이 옅어지진 않을거 같더라고요. 바람돌이님 이 리뷰 넘 좋습니다 ㅠㅠ

바람돌이 2022-08-11 15:12   좋아요 1 | URL
하하 감사합니다. 예전에 제가 급하게 자동차 문 열다가 뒷차가 와서 제 차 문짝을 들이받은적이 있거든요. 당연히 제 잘못이고 들이받은 분이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긴 했는데 신기한건 그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자동차 문 열때마다 자동으로 그 때 생각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러면서 한번 더 차문 뒤쪽을 보고 문을 열게 된다는... 트라우마라는게 이런거겠죠.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온몸이 기억하며 고통을 되새기는.... 그런 분들의 증언이기에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로서는 기억해내고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얘기해준 분들이 더 많을것 같기에요.

희선 2022-08-11 0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를 지키려고 갔지만, 돌아온 뒤 다시는 예전처럼 살기 어렵겠습니다 이건 남성이나 여성이나 다르지 않겠지만, 여성은 더 힘들겠지요 이런 건 거의 알기 어렵기도 하죠 작가가 여성을 만나고 쓰는 게 힘들었겠지만, 써서 다행이기도 해요


희선

바람돌이 2022-08-11 15:14   좋아요 2 | URL
작가 역시 이런 증언을 다 듣고 정리하고 다듬는 과정이 그 고통을 자신이 다시 체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책뿐만 아니라 체르노빌이나 아프간전쟁 소년병들의 목소리를 남기는 작업싸지 참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새파랑 2022-08-11 12: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승자만의 기록이 크게 언급되지만 이런 소외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발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더 실질적인 삶의 이야기니까요~!!

바람돌이 2022-08-11 15:17   좋아요 2 | URL
이런 소수자나 약자들은 목소리 자체를 내기가 어려울듯해요. 그걸 들어주겠다는 사람도 얼마없을테고.... 이렇게 묻힌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서 이 작가처럼 묻혀버릴 이야기들을 끈질기게 듣고 기록하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기도 하네요.

희선 2022-09-08 0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 님 또 축하합니다 힘이 없는 사람 이야기는 쉽게 잊히지만 그걸 기억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2-09-08 22: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희선님도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mini74 2022-09-08 0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축하드려요 ~ 벌써부터 무슨 책 사실지 궁금한 ㅎㅎ

바람돌이 2022-09-08 22: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미니님 알라디너 tv까지 2관왕 축하드려요.
들어온 적립금은 어제 다 쓰고 추가까지 해서 다 쓰고 이젠 하나도 없네요. ㅎㅎ 다른 분들 책탑이 워낙에 거대하다 보니 저의 소소한 책탑은 요즘 좀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

거리의화가 2022-09-08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달의당선 축하드립니다!^^* 이 책으로 당선되셔서 저도 기쁘네요~

바람돌이 2022-09-08 22:17   좋아요 2 | URL
화가님도 다이브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이 책은 또 지난달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여서 저도 더 기쁘네요.

새파랑 2022-09-08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
돌이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또 책구매 하시겠네요~!!

바람돌이 2022-09-08 22:18   좋아요 2 | URL
글쎄말예요. 벌써 다 썼고, 두 박스 책 주문햇는데 한박스는 오늘 왔다는...... ^^
새파랑님도 아르망스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