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언어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이데올로기지만, 최근 양성평등이라는 말처럼 반대 진영에 의해 완벽히 전유된 경우는 드물다. 그 효과도 엄청났다. 지난 30여 년간의 여성 운동의 경험과 역사는 재검토가 불가피해졌고, 많은 여성 운동 단체들이 전망을 모색하느라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여성주의는 성차별이 있는 현실을 다시 증명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8)  

 

 

 

 

 

마지막 문장은 우리의 현실이다. 왁싱샵 살인 사건이 그 증거이고, 몰래 카메라 역시 그렇다.

 

강남 왁싱샵에서 혼자 일하던 여성 업주, 여성 사장은 왁싱 시술 후에 미리 흉기를 준비해온 남성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가해자가 범행 전 봤다는 인터넷 방송에서 BJ는 해당 왁싱샵을 여성 혼자 있는 외진 곳이라 강조한다. "왁싱 도중 섰다"는 자막을 비롯해 피해자를 철저히 성적 대상으로 봤다. 가해자는 범행 당시 성폭행을 시도하기도 했다.

강남 왁싱샵 여주인 피살 피의자 30검거 <서울신문. 2017-07-06>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706500049&wlog_tag3=naver>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호프집 화장실, 여행지 숙소에서 촬영된 몰래 카메라 영상은 성인사이트에서 거래된다. 돈을 내고 여성의 몸을 본다. 성관계 몰카도 있다. 성관계 촬영 및 유포에 동의할 여성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남성 얼굴만 모자이크 처리하고, 여성의 얼굴은 그대로 노출된다. 성관계 몰카 콘테스트에 자신의 여자친구, 아내와의 성관계 몰카 영상을 올린다. 회원들끼리 평가해 순위를 매기고 영상을 공유한다.

관음의 나라... 몰래 찍고보고관음에 중독된 사회 <한국일보. 2017-08-05>

<http://www.hankookilbo.com/v/0854834a7edb4cdcb875078de1f0f929>

 

사람들은, 남자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여자라서 죽은 것은 아니라고. 여성 혐오 범죄는 아니라고. 여혐 살인은 아니라고. 서재에 올릴 수도 없는 글이라 링크만 건다.

 

[기자수첩] ‘여혐에 가린 왁싱샵 살인사건 <오피니언 2017-08-04>

<http://news.g-enews.com/view.php?ud=201708041712296812a8b5e7c93c_1&md=20170804171526_F>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피의자는 여성을 혐오해서 살인을 저지른 게 아니고, 사건의 본질은 살인이라는 거다. 사건이 여혐으로 공론화 됐을 때 살인이라는 본질이 가려져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여험이 공론화 되었을 때가 두려운 건 아닌가.

 

몰카를 찍어 올린 가해자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장난이었다고 대답하며 죄책감이 아예 없다고 한다. “자신이 올린 몰카 촬영물에 대한 반응이 쏟아질 때 영웅이 된 듯한 느낌을 즐긴다고도 말한다. 몰카 촬영물은 그대로 돈이 된다. 포르노물보다 더 많은 수요자가 있다고 한다. 유통되는 것은 여성의 몸이다. 돈만 내면 동의 없이’ ‘몰래촬영한 여성의 몸을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간단히 관음의 문제, ‘엿보기 심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강남 왁싱샵의 여성 사장은 처음 본 남자에게 살해당했다. 여자였기 때문에. 여자 혼자 운영하는 1인 사업장이었기 때문에 범죄의 표적이 됐다.

 

성관계 몰카의 피해자 여성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에게 이용당했다.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를 사랑해 남자를 안고, 자신을 안아주는 남자와 함께했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됐다.

 

강남 왁싱샵 사건이 분노를 일으킨다면, 계속되는 몰카 관련 기사들은 절망을 안겨 준다.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남자를, 말 그대로 사랑을 나누는남자를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자로 태어난, 그 사람들은 어떡해야 하는가.

 

 

여름은 독서의 계절인데, 내게는 독서의 계절이 아니었다. 6월부터 2의 성을 읽고 있는데, 많이 읽은 날은 50, 보통은 10쪽 내외로 읽어가고 있다. 너무 더울 때는 며칠 동안 읽기를 쉬기도 했다. 2의 성을 읽다 보면, 더 덥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 진짜 더 더웠다.

 

페미니즘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 중의 하나이다. 페미니즘을 읽고, 새로운 안목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배우는 이 시간들이 소중하다. 하지만, 그것에만 매이고 싶지는 않다. 페미니즘 관련 좋은 책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어 기쁘기는 한데, 워낙 읽는 속도가 느리다 보니 도대체 따라잡을 수가 없다. 다른 책들도 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잊고 있었다.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다른 책들에게 피난을 간다.

  

 

 

 

 

 

 

 

 

 

 

 

 

 

짧은 피서의 끝에 만난 책은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책을 들고는

펴서 읽는다.

멈출 수가 없다.

멈출 수가..

없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7-08-18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미니즘 도서 계속 읽다보니 인류애도 사라지지만 스스로 되게 지치고 우울해지더라고요. 기운을 내기 위해서라도 제가 좋아하는 소설을 더 읽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기력을 회복하고나면 다시 페미니즘 도서로 가야할 것 같고요.

얼마전에 트윗에서 강남역이나 왁싱샵 살인사건, 여성혐오살인사건에 대해서 ‘남자들은 남자들도 죽이는데 그러면 남성혐오냐, 살인이지 여성혐오가 아니다‘ 이런 개소리(미안합니다, 제 서재도 아닌데)를 보았어요. 와 너무 빻아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생각하는 남자가 많다는 데 너무 절망적이더라고요. 사람들이 아무리 설명해줘도 몰라요....진짜 버릴 건 버리고 가야할 것 같아요. 고쳐쓸 수 없는 건 굳이 고치려 애쓰다가 기운 빠지는 것 같아요.


지치고 힘들고 우울하고 절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서로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며 함께 나아갑시다. 저 역시도 과거에 진짜 혐오발언 많이 했었고요, 지금도 어느 순간 또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혹시 내가 그러고있진 않나, 자기를 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바로 완벽한 어떤 인간이 되는 건 아니지만(물론 성차별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에게 완벽을 바라죠),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후퇴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저도 제2의 성 사서 조금씩 읽어볼까봐요.
단발머리님, 제가 여기서 힘차게 응원하고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단발머리 2017-08-18 10:26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저도 메인 텍스트는 페미니즘으로 하되^^ 중간 중간 소설도 더 많이 읽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기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정말 인간사 오만정이 떨어지려고 해요.

여혐,에 대한 남자들의 예민하고 적극적 반대는, 여혐을 인정하는 순간, 예전부터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계속되고 있는 그 동안의 모든 차별과 억압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여혐 살인이 아니고 그냥 살인 사건이라고 말해야, 여혐을 근간으로 하는 대화, 문화, 관습등이 존속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은 말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참....
그 말을 여자들만 알아듣는 이 상황이 뭐랄까...
분노 7.3, 절망 1.9의 배합으로... 나머지 소수점은 희망으로 남겨두고요 ㅠㅠ

서로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며 함께 나아가요.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요.
사랑한다는 말 뒤로 숨겨진 거짓과 속임을 고발하면서요.
손을 잡아요, 우리^^
다락방님 손은 아기 손 같아.
너무 부드러워.
자꾸 잡고 싶어~~~
손을 잡아요, 우리...

다락방 2017-08-18 10:29   좋아요 0 | URL
자, 여기요. (손을 내민다)

단발머리 2017-08-18 10:32   좋아요 0 | URL
헤헷^^ (내민 손을 잡는다)

syo 2017-08-18 17:54   좋아요 0 | URL
(두 사람이 잡은 손 위에 슬쩍 손을 올려본다. 두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손을 아랫방향으로 밀면서) 아자, 아자, 화이팅!

단발머리 2017-08-18 22:46   좋아요 0 | URL
(슬쩍 올라온 손을 덥석 잡으며)
아자, 아자, 화이팅!!

블랙겟타 2017-08-18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성으로 살아온 저는 공중화장실에 들어가 몰카가 설치되어 있는지 의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밤길에는 누군가에게 ‘조심해서 다니거라‘라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누군가에겐 신경이 곤두서고 혹은 두려움에 휩싸인 경험을 한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몰지말라며 억울해 하기보다 남자는 이것부터 인정해야합니다.
이 상황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젠더 이슈에 남성쪽에서 오히려 반발이 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17-08-22 11:30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님 같은 남성분이 많지 않을거라 생각해요. 블랙겟타님 본인의 생각이 바른 생각이지만, 사실 희귀한 생각임을 아셔야할것 같아요. ‘보통의 남자‘에게는 급진적인 생각일 수 있을테니까요.
젠더 이슈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이 과도하다는 블랙겟타님 지적에 동의합니다. 강한 피해의식을 넘어 여서혐오로까지 발전하고 있으니까요. ㅠㅠ

블랙겟타 2017-08-22 14:48   좋아요 1 | URL
저도 제가 가진 생각이 아직 주류가 아닌 소수라는 걸 인정하고 있어요. ㅜㅜ
제 스스로도 책이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 한채 나이를 먹어왔다면 ˝뭔 호들갑이야..˝ 이라고 치부해버렸을 수도 있었겠구나라는것을 느끼니깐요. 이런 과도한 반발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론 건드려선 안되는 ‘역린‘이라도 건드린것인지.. 한꺼풀 벗겨지면 마치 숨겨져있던 나약함이 드러날 것 같은 공포가 오히려 더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단발머리님도 어떤 현상을 접할땐 무척이나 지치기도 하고 답답함을 많이 느끼시겠지만.. 저도 늘 응원 하고 함께 할께요.

단발머리 2017-08-25 12:47   좋아요 1 | URL
현대 사회에서 남성 혹은 개인 소외의 원인은 여성들이 아니지요.
자본주의 혹은 국적없는 힘, 금융 자본의 힘들이 개인들을 억압하고 있구요.
남성들은 자신들의 몰락의 원인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폭력적으로 비열하게 대응하는 거고요.

보내주신 응원 감사합니다.
남자로서, 소수로서, 페미니스트가 되어 버리신 블랙겟타님께도
제 응원을 보내드립니다. 아자, 아자, 화이팅!
 

 

 

남편이 소유한 재산이 막대할수록 아내는 그만큼 더 가혹하게 예속된다는 점을 주목하자. 언제나 여자의 예속이 가장 확연한 것은 부유계급에서이다. 오늘날에도 가부장제 가족형태가 존속하는 영역은 부유한 지주계급의 가정이다. 남자는 자기가 사회적·경제적으로 강력하다고 느낄수록 더 권위적인 가장 역할을 한다. 반대로 공통의 빈곤은 부부를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 (134)

    

 

 

 

  

  

 

 

 

 

 

 

 

 

 

 

 

2의 성의 이 단락을 풀어낸 책이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이다.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고학력자 여성들이 피지크 57 Physique 57과 소울사이클SoulCycle을 광적으로 추종하면서, 직업 대신 완벽한 몸매 가꾸기에 집중하고, 원하는 명품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아이들의 학업과 학교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행태를 실제 그 지역에 거주하면서 기록한 보고서다. 저자는 가끔 연구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녀들처럼 명품백을 얻기 위해 돈과 시간을 들이고, 그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파크 애비뉴 여성들의 특이한 행동의 원인을 저자 웬즈데이 마틴은 두 가지로 추정한다. 첫 번째 이유는 그 지역만의 불균형한 성비 문제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이 둘인 환경에서,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또는 내가 선택한 이성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외모에 집착하고, 육아에 올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과 일치한다. 보부아르의 표현대로라면 남편의 막대한 재산에 대한 예속, 웬즈데이 마틴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 호모 사피엔스의 의존성. 경제적 무능력 혹은 취약성이 여성의 예속을 가능케한다는 주장이다.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 243)

 

 

선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곱씹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그런 생각이 불쑥 찾아 올 때가 있다. 이를 테면, 지금까지 내가 (사회적 고용관계에 의한)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저질체력인 나는 직장과 가정, 회사일과 가사노동 사이를 하염없이 헤매고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지 않아 남편과 나의 권위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겠지만, 그 차이가 뭘 의미하는지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너무 바쁠 것이기 때문에. 이중노동의 프레임 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채, 더 유능한 커리어우먼, 더 부지런한 워킹맘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을테다.

 

지금의 나는, 2의 성을 통해 경제적 취약성이 여성의 예속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통해 남편과 나의 권위 사이의 심연 같은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돈을 벌어야할 텐데, 일을 찾아야 할텐데, 하고 생각한다. 2의 성,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고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왼쪽도 오른쪽도,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이쪽도 저쪽도, 피하고 싶은 선택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17-08-1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성 장바구니 담고 갑니다 :-)

단발머리 2017-08-16 20:58   좋아요 1 | URL
반가운 댓글입니다. 초딩님~~
사유의 깊이와 책두께에 비해 가격은 무척 착합니다. 저와 함께 <제2의 성>의 매력에 빠져보아요~~~^^
 

 

 

 

 

 

 

 

 

 

 

 

 

 

 

 

나는 그 부재하는 공통성을 찾아내야 한다. 위치 A와 위치 B와 나 사이를 삼각측량하듯 가늠해서. 부재하는 공통성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 자체로 형상을 지닐까, 아니면 형상은 존재하지 않을까? 만일 후자라면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형상화해야 할까? 

간단한 일 아니겠느냐, 누군가 말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크지는 않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모호한 구석이 없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그리고 바로 귓전에서 들린 것 같았다. ...

 

뻔한 일 아니겠느냐, 또 누군가가 말했다. 목소리는 역시 바로 귓전에서 들렸다.

뻔한 일? 나는 나 자신을 향해 따져 물었다. 대체 뭐가 뻔한 일이란 말인가?

멘시키 씨에게는 있고 여기에는 없는 걸 찾아내면 되지 않는냐, 누군가 말했다. 변함없이 또렷한 목소리였다. 마치 무향실에서 녹음된 목소리처럼 잔향이 없다. 소리 하나하나가 명료하게 들린다. 그리고 관념을 구상화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억양이 결여되어 있다. (310)

 

  

 

And so the prayer narrowed itself down to that simple entreaty Please tell me what to do repeated again and again. I don’t know how many times I begged. I only know that I begged like someone who was pleading for her life. And the crying went on forever. ...

    

Then I heard a voice. Please don’t be alarmed it was not an Old Testament Hollywood Charlton Heston voice, nor was it as voice telling me I must build a baseball field in my backyard. It was merely my own voice, speaking from within my own self. But this was my voice as I had never heard it before. This was my voice, but perfectly wise, calm and compassionate.

 

The voice said: Go back to bed, Liz.

I exhaled. (18p)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에게 들리는 소리는 외부의 소리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나와는 다른 존재의 소리다. 모호한 구석이 없는 또렷한 소리다.

 

Eat  Pray  Love에서 저자가 들은 소리는 자신의 목소리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차분하고 다정한 소리다.

 

두 경우 다 혼자 있을 때, 조용할 때,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들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있을 때, 온 신경을 다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을 때, 들린다.

너의 목소리 혹은 나의 목소리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사단장 죽이기 1 - 현현하는 이데아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신간이 나온다고 다 찾아 읽지는 않는데, 이번 신간은 유독 눈길이 간다. 집 근처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모두 <대출중>인 데다가, 허용인원 초과라 읽을 날짜를 가늠할 수 없다. 기다릴 수 없어 주문했다.

 

 

“ ... 전 누구나 인생에서 그렇게 대담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포인트가 찾아오면 재빨리 그 꼬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쳐서는 안 돼요. 세상에는 그 포인트를 붙들 수 있는 사람과 붙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다 도모히코 씨는 전자였죠.”

 

대담한 전환. 그 말을 듣자 문득 <기사단장 죽이기>의 광경이 떠올랐다.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는 청년. (175)

 

 

대담한 전환. 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하루키의 삶이 생각났다. 대담한 전환의 시기에 그 꼬리를 붙들고, 단단히 틀어쥐고, 절대 놓치지 않아 소설가가 되었다. 오늘에도 소설을 쓰는, 팔리는 소설을 쓰는, 소설 때문에 독자를 줄 세우는 그런 소설가가 됐다.

 

청소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틀고, 알라딘 샤르트르 글라스에 오미자를 한 잔 따르고, 얼음을 동동 띄우고, 군옥수수맛 꼬깔콘을 꺼낸다.

 

하루키 읽을 준비 끝.

2017 여름,의 중간쯤이라고 할 때,

현재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황.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17-08-05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디 부러운 여름독서타임이로군요!^^
사르트르 글라스에 얼음 띄운 오미자차와 꼬깔콘과 하루키!
뭔가 오묘한 조화로군요.하루키키키

기사단장은 평이 반반이긴 하던데 (제 북플에 올라오는 알라디너분들 위주에요!^^) 그래도 하루키니까,읽어야지 않을까?싶어 저도 매번 도서관 가서 검색중인데 매번 퇴짜!!!!ㅜㅜ
신간이나 유명책들은 대출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구입할까?고민중인 책들이 많아요.
여튼 책 읽기에 몰입도가 가장 좋은 계절인 여름독서(물론 단발머리님처럼 쾌적한 환경이 갖춰져야겠죠?^^)
덥겠지만,응원합니다^^

단발머리 2017-08-10 21:41   좋아요 0 | URL
제일 자랑스러운건 물론 샤르트르 유리컵이구요.
(설거지할 때 너무 조심하느라 불편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루키죠.

전, 하루키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많이 읽지도 않았구요.
제가 좋아하는 건, 하루키 스타일 같아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떠나 살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쓰고 달리고 수영하고... 그런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1권을 마쳤는데, 아직까지는 ‘역시 하루키‘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도 이번에 하루키 구입하게 된 동기가 ‘허용 인원 초과‘였거든요.
동네 도서관 5군데에서 2권씩 주문해도 그러더라구요.

전 작년에 덥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요. 더위를 안 타는데도 진짜 덥더라구요.
차라리 올해는 포기 모드. 이제 여름은 계속 더우려나봐 ㅠㅠ
책읽는나무님도 무더위 잘 견디시기 바래요~~~~

쇼코 2017-08-1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저는 하루키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책은 이상하게; 당겨서 구매했어요. 그런데 정작 사놓고 읽지는 않고 있었는데 단발머리님 발췌해 놓은 부분을 보니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저도 샤르트르 글라스가 있어요. 먼가 반갑네요. ㅎㅎ 기사단장 죽이기를 안주삼아 샤르트르 글라스에 씨언한 맥주 마시면서 하루키와 찐한 이야기 나누어 볼랍니다. ㅎㅎㅎ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단발머리 2017-08-14 17:57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쇼코님~~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니까 딱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요.
저는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을 아주 잘 읽었습니다. 뭐랄까요, 역시 하루키! 하면서요.
반갑습니다. 앞으로 자주 뵈요.
쇼코님도 하루키 단상 올려주시구요.^^
 

  

 

  

  

 

 

 

 

 

 

 

 

 

 

병원에 있으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근데 다른 가족들과 있었던 일은 잘 떠오르질 않아요. 엄마도, 오빠도, 그리고 동생인 현정이도 희끄무레한 안개 속에 묻혀 있는 것만 같아요. 기억 속에서는 아빠와 저, 오직 두 사람만 도드라져요. 그때 아빠가 뭘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선물을 사왔는지 다 생생해요. 다른 가족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아마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을 거야. 아마 옆에서 웃고 있었을 거야. 아마 집에 없었을 거야. 그들은 모두 아마의 영역에 속해 있어요. (14)

 

 

몇 회였던가. <알쓸신잡>에서 김영하는 문학 또는 소설의 역할이 감정을 전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자신은 소설 속에 무엇인가를 숨기거나 감춰두지 않는다고 했다. 감정을 전하고 싶다고, 감정을 전하기 위해 쓴다고 말했다.

 

<오직 두 사람>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감정이라면 울분이다. 울분. 답답하고 분함 또는 그런 마음. 화자가 바보 같다고 여겨질 때도 여러 번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어린애 같을까.

 

 

내 인생은 뭐가 남았지? 아빠와의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빠를 기쁘게 해주려 공부해서 아빠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아빠가 권해준 전공을 선택했고, 주말마다 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보란 듯이 예술사를 전공하는 학자가 되지 못해 늘 미안했고, 아빠가 친구들에게 자랑할만한 직업을 갖지 못해 언제나 부끄러웠어요. (32)

 

 

아빠가 원하는 대로 노력하는 인생. 아빠의 계획대로 사는 인생. 아빠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남자 친구하고나 할 만한 일을 아빠와 하나하나 해나가는 인생. 아빠의 기분을 헤아리고, 아빠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먼저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인생. 본인이 중독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아프고 힘든 시간을 얼마만큼 보내고, 아빠를 피해 미국까지 도망쳐서야 이젠 아빠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인생. 아빠와 진짜 이별한 후에야 인생의 또 다른 발걸음을 준비하는 인생. 무언가 처음으로 해 보려는 인생.

아빠와 어느 정도 선을 그어야겠다고 결심했던 날,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를 맞이하는 장면은 김애란의 단편 <건너편>의 그 장면과 꼭 같다.

    

 

바깥은 여름

 

 

 

 

도화가 이별을 준비할 때면 두 사람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생겼다. 이수가 새 직장의 면접을 앞두고 있거나, 도화가 승진을 하거나, 이수의 생일이거나, 누가 아픈 식이었다. 미래를 예측해 결론 내리기 좋아하는 도화는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빤히 읽혀 울적했다. 과음한 이수는 하루종일 앓을 것이다. 술과 담배 냄새로 이불을 더럽히고 땀에 전 몸으로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두통을 호소하겠지. 그러다보면 우리는 오늘도 헤어지지 못할 것이다. (94)

 

 

 

 

 

나이트, Night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이 책도 생각난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이송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난 엘리 위젤의 자전 소설 나이트. 같이 수용소로 끌려온 엘리의 아버지는 병을 얻게 되고, 나중에는 음식조차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갈증 때문에 계속 물을 찾는 아버지는 엘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시끄럽다고 독일 병사에게 맞게 될까 두려워,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엘레는 아버지의 애달픈 외침에 응답하지 않는데...

 

 

I woke up at dawn on January 29. On my father’s cot there lay another sick person. They must have taken him away before daybreak and taken him to the crematorium. Perhaps he was still breaking . . .

 

No prayers were said over his tomb. No candle lit in his memory. His last word had been my name. He had called out to me and I had not answered.

I did not weep, and it pained me that I could not weep. But I was out of tears. And deep inside me, if I could have searched the recesses of my feeble conscience, I might have found something like: Free at last! ... (112)

 

 

아버지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 나를 보호해준 유일한 존재이고, 또한 현재는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힘이다. 오랫동안 의지해왔던 종교적 신념 혹은 사회적 약속 그 자체이며, 이름을 아는. 또는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친밀한 어떤 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는, 내 아버지다. 아버지와 영영 이별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


마침내, 자유다!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모는 존재 자체가 억압이다라고 말했더니, 친구는 화를 냈다. 부모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왜 부모가 억압이냐고 했다. 친구 말이 맞다. 친구네는 부부 사이가 각별하고, 가족끼리 터놓고 이야기하고, 공부를 포함해 대부분의 일에 관해 아이들에게 강압하지 않는다. 서로 말이 잘 통하고, 서로를 좋아하는 유쾌한 분위기의 가정이다. 그러니 부모는 존재 자체가 억압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나로 말하자면, 컴퓨터 화면을 굳이 온몸으로 가리는 큰애 때문일 수도 있겠고, 학교에서의 일을 물을 때마다 , 아니에요~”를 연발하는 둘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아이들이 나를, 나의 존재를 억압으로 느낄 수 있다고, 그렇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이며, 오늘 내가 넘어서야 할 사람. .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며, 그 사랑에 근거해 내게 희망을 품는 사람.

나의 장점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단점 또한 잘 알고 있는 사람.

한 때는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떨어져 있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되는 사람.

죽는 그 순간까지 나를 이기는 사람이자,

결국에는 나에게 지게 될 운명을 가진 사람.

 

 

김영하는 어떤 감정을 전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난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부모라는 억압에 대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8-03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는 존재 자체가 억압이라고 생각하는 1인.ㅎㅎ 그리 억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요~

단발머리 2017-08-03 23:13   좋아요 1 | URL
저의 부모님은 제게 억압적이지 않으셨어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요...
걱정은 제가 억압적인 부모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거죠.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시는 쑥님이 계셔서 왠지 반가운 마음입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