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나찌 독일이 여성을 생물적인 역할에만 억압하기 위해 내세운 어린애, 부엌, 그리고 기도 Kinder, Kuche, Kirche’라는 슬로건을 연상했다. (옮긴이는 Kirche기도라고 번역했지만, ‘교회라는 번역도 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여기는 나찌 독일이 아니다. 여기는 여성들에게 모든 활동 영역이 열려 있는 미국이다. 그러면 왜 미국의 이상적인 여성상은 가정 밖의 세계를 거부하는가? 왜 여성을 하나의 노력, 하나의 역할, 하나의직업으로만 억압하는가? 얼마 전만 해도 여성들은 이 세계 속에서 남녀평등과 인간의 위상을 확보하려는 꿈을 가지고 투쟁했다. 그런데 도대체 여성들의 꿈은 어떻게 변했으며, 어떻게 이 세계를 외면하고 가정 속으로 되돌아갔을까? (여성의 신비, 90)

 

여성을 가정에, 부엌에, 아이들 양육에 가두어 두려는 시도는 21세기에 조금 다른 양상으로 바뀐다. 이제 가정은 아이를 입히고 먹이고 씻기는 장소일 뿐 아니라, 학교, 학원과 함께 교육의 장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경쟁이 칭송 받는 시대, 경쟁의 승자만이 박수 받는 시대에 최고 승자는 최고 지점에 도착한 사람이고, 사람들은 그 판단의 근거로 학교 이름을 사용한다. 아이가 어느 대학에 들어갔는가에 따라 엄마의 역량이 평가되는 시대. 그런 시대가 왔다.


엄마는 교육 매니저다. 요즘 엄마들은 우리 애가 영어를 못 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애는 문법에는 강한데, 작문에 약해요,라고 말한다. 요즘 엄마들은 우리 애가 수학을 어려워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 애는 연산은 빠른데, 도형에서 헤매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교육 매니저다. 아이의 성적이 곧 엄마의 능력이다. 3년 전인가, 임원아이들 엄마 모임에 나갔다. 순서에 따라 엄마들은 영어 학원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한 엄마가 아들이 다니는 영어 학원 이름과 레벨을 말했다. ㅊㄷ학원 bridge예요. 함께 있던 엄마들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쏟아낸다. ~ bridge예요? 영어 잘 하는구나. , bridge예요. 이제는 대학 이름도 아니고, 영어 학원 레벨에 따라 엄마 레벨이 결정되는구나. 강남 8학군도, 목동도 아닌 조용하고 평범한 서울 구석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평가하기 어려운 지표이다. 경제력과 교육수준이 높다고 해서 가정 폭력과 성폭력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한국의 여성 지위가 특히 제3세계와 다른 점은 교육 수준(최상층)과 노동 시장 진출(최하위)이 극도로 반비례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고학력 여성들은 비혼을 택하거나 노동 시장에 진출하는 대신 중산층 가정의 신화를 현실로 만드는데서 자아를 실현하려고 한다. 여성들은 가족 내 성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특히 자녀 교육을 인생의 목표로 삼으면서, 한국 사회 특유의 가족주의를 만들어낸다. 학벌, 계급, 부동산 문제 등 사회 부정의를 양산하고, 여성에 대한 혐오를 가중시킨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52)

 

누구든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다. 엄마들은 왜 아이의 영어 성적에, 학원 레벨에 집착하는가. 왜 사교육 확장의 주범이 되어 가는가. 왜 입시위주 교육의 확장에 적극적인가. 왜 그러한가.


사회가 그 역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하고, 학점과 스펙으로 가공된 인재만이 대기업의 높은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 지방대, 인문대, 여학생들은 가공할만한 그 벽에 가까이 가볼 용기마저 잃어버렸다. 서울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취업의 문이, 정규직의 문이 바늘귀처럼 좁아진 채로 10년 이상이다. 점프의 시작점은 대학 이름이다. 대학 이름에서부터 시작이다. 실력은 오직 점수로만 평가된다. 결국, 대학 입시가, 대학 이름이 평생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에서, 엄마들은 교육 전쟁에 뛰어들 수 밖에 없다. 압력은 외부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압박 또한 만만치 않다. 당신은 (집에서 놀면서) 애들 공부 안 챙기고 뭐해?


불합리한 사회를 한 번에 바꾸는 일은 요원하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고, 적응하려 노력한다. 엄마들은 두 팔을 걷어부치고, 학교와 학원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닌다. 초등학교 6학년에 고등학교 수학을 다 떼었다(떼었다,는 정확한 표현이다. 배웠다 혹은 익혔다,가 아니다. ‘떼었다유의어는돌렸다’)는 대치동 그 아이는 한 명이 아닐 것이다. 선행 학습과 바로 이어지는 선행 학습. 선행 학습 인생.


나치 독일은 어린애, 부엌, 그리고 기도를 여성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여성이 가정 이외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The Feminine Mystique이 쓰여질 당시, 미국 주부들은 마루바닥을 윤이 나게 닦으면서 넘쳐나는 기쁨에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고백하고는 했다. 쿠키, 케이크 홈베이킹, 일주일에 한 번씩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커튼. 깨끗하고 안락한 가정, 영양학적으로 완벽한 식사,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 여성을 하나의 역할, 하나의 직업으로만 규정하며, 그것만이 여성의 이며 소명이며 기쁨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역할과 임무에 충실할 수 밖에 없다. 현재는 그에 더하여 교육’, 정확히는 자녀의 명문대 입학이라는 특별 사명까지 주어졌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자아를 발견하는 유일한 길은 여성 스스로의 창조적인 작업에 있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어떤 직업이든 다 해답이 되는 건 아니다. 직업이 여성에게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방편이 되려면, 일생의 설계로서 진지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하며 사회의 일부분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의 신비>, 561)

 

 

결혼 후에 접촉하는 사회와 세계는 아무래도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땡땡땡엄마가 아니라, ‘땡땡땡으로 살려고 하면 무엇하겠는가. 그녀/그들의 핸드폰에, 나는 땡땡땡 엄마인 것을.

 

땡땡땡 엄마와는 가깝지 않을 게 분명한, 자아 발견과 창조적인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 일생의 설계와 사회의 일부분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땡땡땡 엄마 아닌 나, 땡땡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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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하릴 없이 큰애와 마주 앉아 인생 최고의 작가가 누구인지 이야기를 나눴다. 큰애는 조지 오웰, 베른을 말했고, 나는 독서 이력에서 어떻게 해리포터를 있느냐. J.K. 롤링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엄마 인생 최고의 작가는? 나는…. 샬롯 브론테, 레베카 솔닛 그리고 정희진. 샬롯 브론테? 제인 에어? 제인 에어, 오래가는 인생의 책이네. 그러게. 어떤 책도 제인 에어를 밀어내질 하네. 한계가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나한테 제인에어는 뭐랄까... 





















오늘 아침에는 이런 기사를 봤다. 



이시구로는 2015 뉴욕타임스 리뷰와의 인터뷰에서평생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샬럿 브론테가 최근 도스토옙스키를 밀어냈다 했다. “도스토옙스키가 광기에 주목한 것은 광범위하고 심오해 보편적 인간 조건에 대해 성찰케 했지만,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그의 감상주의라든지 즉흥적이고 두서없이 문장은 삭제됐어야 마땅했다. 나는 브론테의 소설제인에어빌레트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태생은 일본, 정신은 영국인간의 망각을 캐묻다>  2017. 10. 08. 조선일보]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로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보게 되고 읽게 되어서, 작품은 읽어봐야지 생각했는데, 브론테의 소설제인에어빌레트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문장을 보고 나니 분홍분홍한 애정이 마구 샘솟아 오른다. 정도 하트뿅뿅이라면 가즈오 이시구로 전작에 도전할 기세다. 



샬롯 브론테. 제인에어. 빌레트. 

가즈오 이시구로를 다시 보게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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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8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08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09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7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19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성주의는 우리의 공적인 삶과 더불어 각자의 사적인 삶까지도 비쳐주는 거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개인적인 경험과 가장 견고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가설들을 재평가하라고 촉구하기 때문이다. (285)  



여성주의/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어가면서 놀랄 때가 있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작은 , 작은 이야기들이 우리 삶의 특정 부분을 집어 말해주고 있다는 깨우칠 때다. 요즘에 자주 하시는 말씀은 아닌데,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엄마는 이야기 끝에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옮기곤 하셨다. “오죽 죄가 많으면 여자로 태어났을까.” 


초딩이었던 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죄로 연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여자이기에 겪는 죄의 무게에 대해 알지 했다. 엄마는 엄마의 고통만큼 말을 삶으로 받아들였다. 외할아버지는 여자로서의 삶, 쉽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사랑하는 딸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당부하고 싶으셨던 아닐까. 오죽 죄가 많으면 여자로 태어났을까.  



다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요점은 이것입니다저는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1981년부터 판사로 일했지만초기에는 함께 일하려는 ‘남자’ 판사도 드물었고 ‘남자’ 직원도 드물었습니다판사이지만 그냥 ‘판사 아니라 ‘여자’ 판사였기 때문이지요. ‘여자’ 판사는 종종 출산휴가를 한달도 채우지 못한 재판장의 전화를 받고 출근해야 했고사무실에서 반말 전화를 받기도 했고(그때마다 항의를 했지만 사과를 받은 일은 거의 없습니다), 때로는 법정에서 재판 진행권을 침해당하기도 했습니다판사인데도 그랬으니 다른 직종에서는 얼마나 심한 일들이 벌어졌을지 뻔하죠. ... 여성으로서의 자체가 소수자로서의 삶이었던 시대(지금은 다른가요?) 살아왔던 제게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는 것은 따로 계기가 필요하거나 배워야 필요가 없는마치 평상복처럼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129) 








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하나도 없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판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그녀가여자라는 . 그녀는판사 아니라여자 판사이므로, 사람들은(대부분 남자일 것이라 추정되는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분쟁의 최종 판단자로서 최고의 권위를 소유한 그녀에게 반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재판정에서 억지를 부린다. 그녀가 여자이므로. 



프랑스의 유물론적 여성주의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소개할 인물은 콜레트 기요맹 Colette Guillaumin이다. 기요맹에 따르면, 남성은 노동인구의 구성원이라거나 의사 결정자라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자리에서 저마다 갖는 사회적 가치에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규정되고 명명된다. 반면에 여성은 성별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규정되고 명명된다. (223) 



김영란 대법관의 개인적 경험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는, 일하고자 하는, 일하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해당된다. 그녀들은 직무가 아니라, 성별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규정되고 명명된다. 



엘렌 식수Helene Cixous 여성을 억압하고 침묵에 빠뜨리는 가부장제의 이항대립적 사고의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무너뜨리는 언어로 여성적 언어를 말한다. 또한 이런 종류의 언어가 이른바 여성적 글쓰기ecriture feminine 통해 가장 드러날 있다고 믿는다. 여성적 글쓰기는 자유로운 연상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된다. 여성적 글쓰기는 미리 정해진올바른구성법, 합리적인 논리 규칙(경험 인지에 관한 협소한 정의에 근거하여 다양한 종류의 감정적, 직관적 경험을 불신하는, ‘머릿속에서만 머무르는 논리), 선형추론 linear reasoning(x 다음에는y, y다음에는 z 온다는 식의 추론)등을 요구하기 마련인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글쓰기 양식에 저항한다. (228) 

 


여성적 글쓰기,라고 ,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나 다락방님이다. 자유로운 연상에 따라 유동적으로 구성되는 여성적 글쓰기의 전형이다. 가장 증거는 그녀의 글에 있다. 



이제 쓰고 등록버튼 누르려는데, 내가 쓰기 위해서 페이퍼를 썼는지 모르겠다. 

.  <till we meet again> 


.. 스티븐 소설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지? 두줄짜리 쓸라 그랬는데 이렇게 되어버렸네인생글이란 무엇인가….. 의식의 흐름…………… 

그럼 이만  <타고난 이야기꾼> 



















나는, 다락방님이 자신의 글쓰기 방법이 가부장제의 이항대립적 사고의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무너뜨리는 여성적 글쓰기의 형태라는 알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런 글쓰기 방법 혹은 형식이 의도적이었다면 그녀는 정말 영리한 틀림 없고, 의식하지 않고 이런 글쓰기를 계속해 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영리하다는 확실한 증거다.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아직 추석은 오지 않았지만, 여하튼 오고는 있다. 

추석 읽을거리를 대충 챙겨본다. 부족한 감이 느껴지려는 찰나, 들려오는 목/소/리/ 

염려 붙들어 매소서.  

신에게는 아직 2 성』이 남아 있사옵니다.  





가부장제는 그 정의부터 성차별적이다. 말하자면, 가부장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선천적으로 열등하다는 믿음을 조장한다. 이 같은 믿음은 이른 바 생물학적 본질주의 biological essentialism의 형식을 띠는데,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을 불변하는 본질의 일부로 간주하고 거기서 찾아낸 생물학적 차이들을 여성의 타고난 열등성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198쪽)

여성은 언제나 자신과 계급, 인종, 종교가 상이한 다른 여성이 아니라 자신과 사회적 계급, 인종, 종교가 같은 남성에게 전념한다. 사실, 같은 계급, 인종, 종교 안에서도 여성은 여성 대신 남성에게 전념한다.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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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29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글의 마력이 거기에 있었구만요...

단발머리 2017-09-29 17:01   좋아요 1 | URL
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자유로운 사유의 향연^^ 여성적 글쓰기 만세!!

다락방 2017-09-29 17: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기에 저 깜짝출연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비중이 높네요. 안그래도 올려주신 인용문의 여성적글쓰기를 보면서 ‘음..나인가...나 말하는건가‘ 했었는데, 저를 똭- 말씀해주셨네요. 저는 제 생각보다 영리한가봅니다. (으쓱)
이렇게 좋은 글에 이렇게 좋게 등장시켜주셔서 고마워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이 세상에서 최고 좋아요!!

단발머리 2017-09-29 17:52   좋아요 2 | URL
제가 더 많이 인용하고 싶었는데 지면관계상 .... 아쉽습니다. 본문을 찬찬히 더 길게 읽으면 읽을수록 확신하게 됩니다.
어맛! 다락방님 글쓰기다!!!

다락방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지고 똑똑하고 영리하다는 것 잊지 마시구요~~ 저를 좋아하는 것도 계속해주세요~~
영원하라!!!
뜨거운 우리의 우정과 사랑과 자매애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17-09-29 18:24   좋아요 2 | URL
절 좋아하시는줄 알았었었었...ㅠ ㅠ

단발머리 2017-09-29 18:48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귀 막으시고)
이 동네 최고 미녀 유부만두님~
제가 겁나게 좋아하는 거 아시지요!!!
우리의 우정과 사랑과 자매애를 끝없이 불태워봐요~~~ 활활 화르륵!!!

유부만두 2017-09-29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All the light~ 재밌어요!!!

단발머리 2017-09-29 18:49   좋아요 1 | URL
All the light가 뒤로 밀릴 가능성이 제일 높은 책으로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였으나, 유부만두님 격려에 먼저 읽어볼까?!? 하고 넘어갑니다^^

에디터D 2017-10-01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고 갑니다. 좋은 글에 어울리지 않는 댓글을 달자면 ‘무뚝뚝‘감자 진짜 너무 무뚝뚝하지 않던가요? 저도 책 보며 먹으려고 뜯었다가 독서마저 멈춰지던데요;;;

단발머리 2017-10-04 19:5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사실 그 무뚝뚝함에 좀 놀라기는 했습니다.
가족 중에 그 무뚝뚝함을 사랑하는 1인이 있네요 ㅎㅎ
목이 메이는 그 무뚝뚝함을^^
즐거운 명절 되시길요... 둥근 보름달, 이제 막 추석이 끝나가는 밤에~~~~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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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친구이며 굳건한 동지인 다락방님은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리뷰에서 린디 웨스트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페미니즘은 우리가 사랑하던 것들이 우리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아가는 기나긴 과정에 불과하다고 있다.’ 동의한다. 천천히 깨닫는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고 좋아하는 작가와 이별하는 시간은 슬프고도 아쉽다. 


<남자들은 자꾸 내게 『롤리타』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레베카 솔닛은 소설을 읽으며 감정이입하게 되었을 , 독자는 소설 인물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독자가 스스로를 길가메시와 동일시하거나 심지어 엘리자베스 베넷과 동일시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독자가 스스로를, 롤리타에게 동일시할 일어난다.(246) 저자는 여자의 이야기를 여자로부터 빼앗은 작품으로서, 독자가 남자의 이야기만을 듣게 된다는 관점에서 『롤리타』에 대해 언급했는데, 남자들은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겠다고 나타나서는, “당신이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다”, “ 책은 사실 알레고리다”, “당신은 예술의 기본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비난한다. (252)



사진, 에세이, 소설, 그밖의 것들은 우리 삶을 바꿀 있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예술은 세상을 만든다. 나는 한권의 책이 인생의 목표를 정해줬다거나 삶을 구해줬다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안다. 내게는 그렇게 삶을 구해준 한권의 책이랄 만한 없지만, 그것은 그저 수백 혹은 수천권의 책들이 나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249) 



나를 구해준 수백권(수천권은 아닌 같다) 중에 여자가 읽지 말아야 책이 다수 포진해 있음을 확인한 글은 <여자가 읽지 말아야 80>이다.

 


작가 에밀리 굴드Emily Gould 벨로, 필립 로스, 업다이크, 노먼 메일러는 “20세기 중반 여성혐오자들이라고 명명했는데, 『에스콰이어』 목록에 올랐고 목록에도 오를 남자 작가를 지칭하기에 알맞고 편리한 별명이 아닐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독서 금지 영역에 포함된다. ... 노먼 메일러와 윌리엄 버로스는 독서 금시 목록에서 상위에 오를 것이다. 아내를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쏘지 않은 작가들 중에서도 읽을 작가는 너무 많으니까 ...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모비 딕』마저도 여자가 명도 나오는 책은 모든 인간에 대한 책이라고 일컬어지는데 비해 여자가 부각된 책은 여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목록(『에스콰이어』 추천남자가 읽어야 최고의 80’) 좇는 독자는 제임스 M. 케인과 필립 로스에게서 여자를 배울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찾아가야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없는 남자들이다.(234-6)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필립 로스의 이름이 번이나 언급됐다. 『유령 퇴장』을 읽을 어떠했나. 나는 누구에게 감정 이입했나. 나는 누구였나. 내가 동일시했던 사람은 누구였나. 



나는 만찬회 같은 데도 참석하지 않고 영화 구경도 가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는다. 휴대전화나 VCR DVD플레이어나 컴퓨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계속 타자기의 시대를 살고 있고, 월드와이드웹이 뭔지도 모른다. 선거 같은 것도 더는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대개 밤늦게까지 글을 쓰며 보낸다. 독서도 하는데, 주로 학생 처음 접했던 책들을 읽는다. ...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주일 내내 글을 쓴다. 외에는 침묵한다. (15)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스스로를 네이션 주커먼에게 감정이입했고, 소설 속의 주커먼이라고 말할 , 그를 자신으로 여겼다. 나는 주커먼을 사랑한다. 그를 동경하는 나는,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주커먼이었고 주커먼이어야 했으므로. 나는 주커먼이 되기를 원했으니까. 



레베카가 말한다. 



나는 점에서만은 진지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물건처럼 이용되고 버려지거나, 쓰레기처럼 그려지거나, 침묵하거나, 아예 나오거나, 무가치하게 그려지는 책을 많이 읽으면,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술은 세상을 만드니까. 예술은 중요하니까. 예술은 우리를 만드니까. 혹은 망가뜨리니까. (255) 



이별을 준비하는 작가가 있기는 하다. 『남한산성』을 사랑하지만 다시는 『칼의 노래』를 읽고 싶지 않았던 나를, 나의 감각을, 느낌을 이젠 조금 믿어보려고 한다.   


아직 필립 로스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자각할 때의 슬픔은, 아직 필립 로스는 아니라고 말하는 나의 몫이다. 머리에 삶의 목적이 오로지 섹스인 인간, 섹스에만 특화된 존재로 그려진 종이, 바로 나와 같음을, 나와 같았음을 기억할 때의 절망 또한 나만의 것이다.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 필립 로스를 읽어야 할까. 『유령 퇴장』을, 『휴먼 스테인』을, 『울분』을,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포트노이의 불평』을, 『미국의 목가』를, 『굿바이, 콜럼버스』를, 『전락』을, 『네메시스』를, 『죽어가는 짐승』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바로 보기 위해서, 직시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까. 아니면 흐린 기억 속에 그를 묻어, 조금이라도 그를 소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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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14: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휴먼 스테인 읽으면서 얼마나 슬펐던지요. 글을 너무 잘썼는데, 그 잘 쓴 글로 페미니스트를 까는 거예요. 너무 잘써서 설득력이 있는거죠. 그 책으로 여자를 배우면, 페미니스트는 극도의 신경질적인, 젊고 예쁜 여자를 질투하며 자기 모순에 빠지는, 그런 존재인 거예요. 너무 슬펐어요. 그런데 이미 다른 사람은 필립 로스를 읽지 말아야 할 작가에 포함시켰었군요.

단발머리님, 그 감을 저도 믿으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제가 사람들이 다 좋다는 칼의 노래를 읽고, 정체를 뭔지 모르겠는 불편함에 시달리며, ‘김훈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을 때, 남들이 다 좋다 그래도 좋지 않았을 때, 그때 저에게 있었던 감을 저는 이제는 믿어야 하는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감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지금 분노의 포도가 슬퍼요. 여기에 대해 글을 적고 싶지만, 제가 오늘 일이 많아요. 흙.

제가 사랑하는 것들이 저를 미워하는 걸 깨달으며 슬퍼요. 페미니스트를 잘못 이해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중에 이미 아주 많이 글을 잘 쓰며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슬퍼요. 그래서 스티븐 킹이 더 좋아요, 단발머리님. 스티븐 킹이 세상에 얼마나 강간범이 많은지, 피해자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죄를 뒤집어 씌우는지를 말해줘서 너무 소중해요. 흙흙.

단발머리 2017-09-25 11:47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전, 휴먼 스테인을 읽을 때, 흑/백의 구도에 아주 집중하고 있어서, 솔직히 말씀하신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사실... 지금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기도 하구요. 아마 작품을 읽는 그 순간은, 저는 스스로를 흑인임을 속이고 싶어하는 백인.
그것도 백인 남자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크고요. ㅠㅠ

필립 로스는, 자기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의 인상을 작품에 옮겨 놓았을 테고 그 글은 너무 근사해서... 그래서 설득력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겠죠. 그래, 페미니스트는 이래. 아... 슬프네요.

제게 아주 오랫동안 불편했던 작가가 김훈이거든요. 전,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고.
일면 저도 그 비장한 문장을, 문체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최근에 문학계에서도 김훈의 시선에 대해 평론가가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도 하던데.
아무튼 이제 한 발짝 나아가야 할 시점이기는 해요.

우리의 슬픔이 이제 막 시작이라는 사실에 또 슬퍼지네요.
더욱 슬픈건 다락방님이 좋다고 하신, 스티븐 킹이 전 너무 무서워서... 그게 또 슬퍼요.
스티븐 킹을 읽지 않고 스티븐 킹을 좋아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요.
우린 오늘 슬프네요. 흙흙ㅠㅠ

munsun09 2017-09-25 12:09   좋아요 1 | URL
김훈 작가에 대한 두분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그 불편함이 싫어서 어느순간부터 읽지 않고 있어요. 필립 로스 작품 읽은지 좀 되는데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는지 오늘 알았네요.
독서에 있어서도 자기 나름의 고집이 어느정도 필요한 거 같아요. 많고 많은 책 중에 나에게 땅기는 거 읽는 다,가 제 독서론! 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쭉 밀어 붙이고 있어요. 주저리주저리^^

단발머리 2017-09-26 09:37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좀 더 믿어야해요. 저는 번역서를 읽다 어려우면 이해못하는 스스로를 탓하지 번역이 이상하다,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이제는 우리 나름의 생각, 판단, 고집도 그것대로 인정하고 비판적 독서의 새 장을 열어야겠어요.
(저... 너무 비장해요?!! ㅋㅋㅋ)
아무튼 굿모닝이예요~~
다락방님, munsun09님^^

AgalmA 2017-09-26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들레르도 여성혐오 대단했다고 하죠ㅎ; 유명한 작가 상당수가 혐의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죠. 그러면서 여성에게 매혹도 되니 미치겠지ㅎㅎ
남성이라는 상징적 본성이 아니라 각자가 그 시대를 살면서 가지게 된 젠더 인식이 반영된 거라 봐야 할 텐데 그 상태에서 작품을 쓰니 벗어나기 쉽지 않죠. 끊임없는 문단 내 성폭력도 그런 우월주의가 깔려 있어서이기도 하고요.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보란 말은 일종의 면죄부가 되기 쉽죠. 인식이 반영되지 않는 글, 작품이란 게 가능합니까. 입력된 정보로 움직이는 컴도 그건 불가능하던 걸요ㅎ 데이터축적으로 온갖 차별과 비하 발언을 하던 뉴스가 나오기도 했잖아요ㅎㅎ;
존 쿳시 <포> 읽었을 때 남성작가가 여성을 이렇게 깊게 이해할 수도 있구나 놀란 적 있습니다. 존 쿳시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대개 그랬어요. 환경적으로 많이 겪고 보다 보니 쿳시는 온갖 차별에 대한 반감을 작품에도 늘 드러내죠. 노벨상 받을 만 하다는. <포>는 꼭 읽어 보시길^^

단발머리 2017-09-27 10:53   좋아요 0 | URL
여성을 혐오하거나 지나치게 숭상하는 건 하나의 뿌리라는 생각이 요즘에 많이 들어요.
너무 좋으니까 너무 싫은 것 아닌가. ㅎㅎㅎㅎㅎ

존 쿳시의 작품은 <포> 밖에 안 읽어봤는데, 오래전에 읽었을 때는 큰 감동을 못 느꼈어요.
Agalm님이 노벨상 받을만하다 하시니,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AgalmA 2017-09-27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가 흑인 노예 프라이데이를 더 부각시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를 썼듯이 <포>도 남성 로빈슨이 아니라 여성 주인공을 부각했다는 게 첫번째로 중요했고요. 서술의 방식도 남성적 서사 방식-뚜렷한 줄기가 아니라 여성적- 호소, 내밀함을 잘 살려 냈다는 점입니다. 남성적-여성적 발화방식을 가르는 것도 차별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으니 감정의 섬세함을 더 다루려 했다 정도로 하죠^^

단발머리 2017-09-29 08:44   좋아요 0 | URL
아니.... 우리 선생님은 왜 Agalma님처럼 야무지고 정확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Agalma님은 페이퍼도 페이퍼지만, 댓글마저도 독서를 부르네요.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오늘 아침에 읽은 책에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글이 있더라구요.
감정의 섬세함, 여성적-호소, 내밀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기도 하구요.
오늘 아침에는 바람이 쌀쌀하네요~~~ 이제 정말 가을인가봐요^^
 

 

 

 

 

 

 

 

 

 

 

 

 

 

아침에 이런 기사를 읽었다.

 

19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서 교수는 온라인서점에 달린 한 댓글은 저보고 돈 벌고 여자들한테 인기 끌려는 생계형 페미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페미니즘이 돈 되고 인기도 끈다면 나만 할 게 아니라 같이 하자고 답글을 달아줬죠라고 말했다.

[<여혐에 열올리는 한남의 뒤통수를 강타하는 뿅망치’>,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12070.html]

 

역시 서민다운 답변이고 서민다운 댓글이다. ‘커밍아웃후 그가 쓴 다른 책들의 판매가 줄어들고, 그의 책을 불태우고 싶은데 전자책이라 태울 수 없어 안타깝다는 댓글 또한 있다고 하니, 그에게 환호했던 남성팬들 중 일부가 등을 돌리고 있는 건 사실인 듯 하다.

  

 

어젯밤에 읽은 단락도 떠오른다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의 한 부분이다.

 

  

그러자 누군가 클루이(전직 프로 풋볼 선수, 성소수자 인권 옹호자이며 페미니스트)에게 이런 트윗을 보냈다. “멍청한 년 뒈져라. 게이머게이트는 여성혐오가 아니야.” 저 말에 나는 루이스의 법칙(페미니즘에 관한 모든 댓글은 페미니즘을 정당화한다(영국 여성 저널리스트 헬렌 루이스 Helen Lewis2012년 트위터에서 유행시킨 말이다 옮긴이)의 한 변주를 덧붙이고 싶다. 여성은 공격받고 있지 않으며 페미니즘은 현실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할 생각으로 여성이나 여성을 위해 나선 사람을 공격하는 많은 남자들은 자신이 그 반대 명제를 쉽게 증명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고. (153)

  

 

 

 

 

 

그러게. 모르는 것 같기는 하다. 글은 결국 쓰는 사람을 가리키고, 글쓴이의 생각을 보여주는데, 글을 쓰고, 댓글을 쓰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드러나 버린다. 아닌 척 하지만, 아닌 게 아니라는 것. 여성혐오란 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여성의 목소리가 듣기 싫다는, 페미니즘은 과격하다는,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그런 말, 말들.

 

서민의 활약을 기대한다. 여혐, 여자가 뭘 어쨌다고의 판매 상승도 고대한다.

 

 

 

<사진 출처 : 한겨레신문 2017. 09. 22>


가끔, 참지 못 하고 본색을 드러낼 댓글들은...

기억하는 게 좋겠다.

 

페미니즘에 관한 모든 댓글은 페미니즘을 정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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