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1. 영업 비밀과 별천지  

영업 비밀을 이렇게 많이 이야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싫어할 수도 있겠다. 나는, 이런 신세계를 처음 알게 되어 무척 신기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은 (캐릭터 + 욕망) / 방해물 = 이야기 (37쪽)

인데, 이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40쪽)

로 구체화될 수 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라 할 수 있는 무기력의 양대 산맥은 현대 연애와 암 선고인데,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것이 현대소설의 본질이라는 것(53쪽),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야기 작법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지점이 있는데, 이것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르며,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91쪽),는 것 역시 금시초문이다.

전통적인 이야기 작법에서 플롯은 3막Act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플롯은 ‘막-시퀀스-장면-비트-액션’의 순서로 구성되며, 플롯의 이런 체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건 액션, 즉 행동이라고 한단다. 역시나 처음 듣는 이야기다. (101쪽)

소설은 물론이요, 영화에서도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에만 집중하는 나로서는 이 모든 정보의 세계는 별천지요, 신세계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는, 쓰고 고치고, 또 쓰는 소설가들은, 참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2.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

훌륭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남들보다 많이 말하면 된다. 십 년 이상 소설을 써보면 알겠지만, 소설을 잘 쓴다고 말할 대의 ‘잘’도 그런 뜻의 부사다. 훌륭하게 쓰지 않아도 잘 쓰는 거다.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가 된다. (187-8쪽)

 

많이 쓰기만 하면, 잘 쓰는 소설가라고 한다면, 무조건 다작의 작가가 최고의 작가이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는 한국 대표는 조정래 선생이고, 미국 대표는 스티븐 킹. 비슷한 이야기의 변주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인간사, 내용이 피차 비슷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질 보다는 양. 양이 최고다. 김연수는 말한다.

난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를 발표했을 때, 읽어보지도 않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일단 두꺼우니까. 오랜 팬에게는 질보다는 양이다. 질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잘 느껴왔으니 이제는 양, 오직 긴 글, 다음 작품이 나올 때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긴 글만이 필요하다. (38쪽)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모든 독자의 마음이다. 두꺼운 책, 오랫동안 읽을 수 있는 긴 글을 써 주는 작가가, 좋다.

 

3.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내용을 쓰는 사람일까, 문장을 쓰는 사람일까? 물론 정답은 내용과 문장을 동시에 쓰는 사람이다, 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 소설을 쓴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가는 문장 ‘만’을 쓰는 사람에 가깝다. 소설을 쓰겠다면, 돈을 아껴서라도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구입해서 집에 비치하기를. 책꽂이에 일렬로 꽂힌 세계문학전집의 교훈이란 내가 새롭게 쓸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진실.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수없이 많은 책을 썼다. 거기에 무슨 새로운 내용을 더 보탤 수 있을까?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이다. (191쪽)

 

책꽂이에 일렬로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보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작가 지망생에게 김연수는 말한다. 새로 쓸 수 있는 건 오직 문장뿐이다. 새로운 이야기보다는 새로운 문장이다. 소설가로서 자신의 목표는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것뿐이라고 말했던 김영하도 생각난다.

새로운 건 오직 문장뿐이고, 완전한 새 우주로서의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역시 문체, 오직 문장뿐이다.

 

4.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그러니 생각하지 말자. 구상하지 말자. 플롯을 짜지 말자. 캐릭터를 만들지 말자. 일단 한 문장이라도 쓰자.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199쪽)

내 경험으로 보자면, 하루에 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세 시간동안 최대한 느리게, 거의 쓰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느리게 쓴다. ....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글쓰기지만, 그럼에도 하루 세 시간을 소설에 할애하면 얼마간 글을 쓰게 된다. 5매 정도라면 최고다. 하지만 한 줄도 괜찮고, 아예 쓴 게 하나도 없어도 상관없다. 세 시간이 지나면 읽고 쓰던 걸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외의 시간에는 소설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게 좋겠다. ... 글을 얼마큼 많이 써느냐가 아니라 소설을 생각하며 세 시간을 보냈느냐 아니냐로 글쓰기를 판단하니 결과적으로 나는 매일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됐다. 그렇게 매일 소설을 쓰게 되면 가장 느리게 쓸 때, 가장 많은 글을, 그것도 가장 문학적으로 쓸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232-3쪽)

 

소설가 지망생에게 필요한 정보라면 책 앞부분의 플롯 짜기, 캐릭터 만들기, 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적 조언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일단 한 문장을 쓴다. 쓰고 또 쓴다. 시간을 정해서 쓴다. 하루에 3시간을 투자한다. 그 시간에는 오직 소설만 생각한다. 5매 정도면 최고다. 최대한 느리게 쓴다.

소설가가 되는 건 의외로 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쉬운 방법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운 문장을 쓰는 사람은, 하루 3시간씩 소설을 생각하는 사람은, 소설을 쓰는 사람, 소설가가 된다.

김연수 자신이 어떻게 그 시간들을 견뎌왔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다른 책 [청춘의 문장들+]에서 읽을 수 있다.

소설을 쓴다기보다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어요. 하루 종일 그렇게 일해도 석 달이면 돈이 다 떨어져요.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2007년쯤 책을 내면 1만 부가 팔리는 작가가 될 수 있었어요.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따지면 7년만이죠. ... 정말 이젠 괜찮겠구나, 라고 생각한 건 2009년이 되어서였어요. 그러니까 한 10년 걸리더군요. 그 10년 동안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소설이 아닌 다른 글부터 써야만 했던 시절이에요. 진입 장벽이 엄청나게 높은 거죠. 이 나라에서 전업작가가 되는 일은 대통령 되는 일만큼이나 어려워요. 10년 단위로 두 명만 대통령이 되는데, 그런 식인 거죠. (94쪽)

 

소설을 쓰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것보다, 생활을 위해 원치 않는 일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소설 쓰는 바로 일이니, 소설 쓰기는 이렇게 어렵고도, 이렇게나 쉽다.

 

5.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나는 어릴 때부터 ‘제일’이란 단어에 집착했다. 웬만큼 친해진 친구에게, 후배에게는 항상 물어봤다. “너의 제일 친한 친구는 누구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야?”,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이 정도는 알아줘야 내가 그 친구/후배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의 책,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산문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 난 이런 거에 집착한다.

이제 나온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이다.

혹시나 이뤄질지도 모를 어떤 삶이 내 인생의 목적지가 아니라 어쩌면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 현실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일지도 모른다고. (251쪽)

 

내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현실. 그런 현실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직 불혹에 닿은 나이가 아니다. 나는 아직 젊고, 나는 아직 철들지 않았으며, 나는 아직도 ‘할 수 있다’와 ‘하면 된다’의 주문에 솔깃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것.

내게 남겨진 시간 속에서, 내가 원하는 그것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이 곳이 나의 마지막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그러한 것처럼 여기에서의 삶도 그럴 수 있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여야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아서,가 아니고, 어쩔 수 없어서,이다. 선택한 것,이 아니고, 선택당해서,이다.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핵심이다.(262쪽)

 

그것을 아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지금, 바로 나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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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4-12-0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진짜 빛나는 문장이네요~ 청춘의 문장들, 을 읽지도 않고, 이 문구를 벤치마케팅 해 갑니다... (저의 카톡 상태 메시지로~ ㅎ )

단발머리 2014-12-03 08:42   좋아요 0 | URL
우아.... 제가 icaru님 핸폰 번호를 알아야 카톡상태 메시지에서 확인을 할텐데요.
심히, 매우, 참담히 아쉽습니다.
이 책 좋아요. 산문집인데, 여러번 읽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앞쪽은 재미있고, 뒤쪽은 좀 스산하긴 한데, ㅋㅎㅎ 좋아요.

서니데이 2014-12-0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오래 읽으면서 리뷰 쓸 생각이었는데, 단발머리 님이 미리 쓰셔서 전 포기.^^

단발머리 2014-12-03 08:41   좋아요 0 | URL
우앙~~~ 포기하지 마시고, 예쁜 리뷰 올려주세요, 서니데이님~~
저는 이 책 좋아서 막 줄을 치면서 읽었거든요.
신랑이 너, 공부하냐? 그러더라구요? ㅋㅎㅎ
 

 

1. 다락방님의 전방위적 도움을 받게 될 때

나는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처음에는 다락방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알라딘서재를 통해 ‘단발머리님, 이 페이퍼 좋아요.’하는 다락방님의 칭찬을 받았다. 다음책과 그 다음책으로는 무엇이 좋을지 좋은 책들을 추천받았고, 카드와 책을 선물받았다. 좋은 음악을 전달받았고(*^^*), 진분홍 진달래꽃 사진을 문자로 받았다. 그 중에 가장 반가웠던 건 다락방님의 진분홍 진달래꽃 문자와 그리고, 이 책이었다.

 

 

 

 

 

 

이 책을 통해 좋은 책들을 추천받았고, 웃고, 또 웃었다. 여기저기 색색의 펜들로 줄을 그어 가며 읽은 이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은, 이렇다.

 

내가 원하는 건 타고난 재능이지 성실함이 아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런 내 생각이 좀 달라졌다. 돌이켜보니 사람들은 블로그를 하다 트위터로 옮겨가고 또 재미있게 하다가 그만두고는 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났고, 열심히 글을 쓰다가 잠수를 타는 사람들도 허다했다. 그런데 나는 그대로였다. 계속 읽고 썼다.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친한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사람들이 둥지를 틀어도 나는 계속 거기 있으면서 하던 대로 했다. 나는 그야말로 ‘성실’했다. 성실함의 생생한 증거였다..... 내가 그토록 듣기 싫어했던 성실하다는 말이 어쩌면 재능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재능이 비록 내가 원하는 쪽으로 나타난 건 아니지만, 타고나는 건 내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가 성실함을 타고났다면, 이제는 성실함을 무기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문장력을 구사하는 대신, 타고난 이야기꾼이 되는 대신, 타고난 성실함을 살려보자! (84-5쪽)

 

타고난 문장력과 생활밀착형 이야기, 그리고 끝없는 개그로 나를 마구 마구 웃겨주는 다락방님은 성실하다. 아주 성실하다.

나는 아마도, 알라딘 서재에 사람들이 들고 나고, 들고 나고, 들고 나고, 또 들고 난 뒤에 들어온 사람일테다. 내가 들어갔을 때(들어간게 맞나 모르겠지만^^ 제대로 들어왔나요?) 다락방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다락방님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알라딘서재 초기 멤버님들은 다락방님에 대한 ‘절대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어려울 수 있겠다. 다락방님은 알라딘서재의 ‘공공재’이기 때문이다. 다락방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읽고 쓰면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또 읽고 쓴다. 다락방님의 글을 다 의미있지만, 특별히 밀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일요일 저녁에서 월요일 아침에 올라오는 글들이 아주 좋다.

다락방님의 첫 번째 책이 2쇄를 찍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른 알라디너들의 마음과 똑같이 무척이나 기쁘다. 역시, 사람들은 다, 보는 눈이 있다.

저번주에는 다락방님 페이퍼에서 <비커밍 제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나도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착한 이모이며, 손톱이 예쁘고, 성실한데다, 친절하기까지한 다락방님은 <굿 다운로드>로 다운로드하면 무료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서둘러 다운로드에 성공해 이 재미있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참, 전방위적 도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50대가 결정하는 20대의 삶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여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오만과 편견]을 읽을 때도, [에마]를 읽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조금 다른 측면이 보였는데, 그건 당시 남자의 상황도 여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부자집 귀부인의 조카 위슬리는 여자의 경제적 여건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남자의 청혼이 거절되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 표현은 정확하다. 경제력이 충분한 남자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톰 리프로이의 상황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와 결혼했을 때 경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없고, 그 결혼은 그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후원자 외삼촌의 반대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물론, 외삼촌은 자신의 조카가 더 나은 집안, 더 나은 형편의 집안과 결혼하기를 원할 것이다. 연인 관계였으나, 제인보다 나은 형편의 여자와의 결혼을 원한 남자 집안의 반대로 그들의 결혼이 좌절되었던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 ‘결혼’을 통한 경제적 부의 확장은 당시 남녀 모두에게 강요되었다는 것이다.

톰은 제인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아낀다. 그녀 없는 삶은 지옥같다고 말한다. 그녀와 도망치자고 말한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같이 살기 위해, 도망치자고 말한다.

하지만, 톰이 진심으로 그것을 원했다 할지라도,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톰이 실제로 그런 마음을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톰의 가족을 걱정한 제인 때문에 두 사람의 짧은 도피 여행이 끝나는 걸로 그려진다. 그게 좀 더 영화적일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에, 현실은 좀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톰이 어떻게 외삼촌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외삼촌은 자신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그의 유일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외삼촌은 그의 혈육일 뿐 아니라, 직장 상사이다. 어떻게 톰이 외삼촌의 의견에 반하는 결혼을 할 수 있겠는가. 제인이 영화 속에서 말했던 것처럼, 어떻게, 어떻게 애정 있는 결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땅 파서 매일 감자만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니다. 땅이 있어야, 소유한 땅이 있어야 감자도 심을 수 있다. 아니다. 땅도 있어야 하고, 집도 있어야 하고, 감자씨도 있어야 하고, 곡괭이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톰은 그런 게 하나도 없다.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한 톰에게 애정 있는 결혼은 불가능하다. 집안과 집안의 결합, 인수합병 사업에 다름 아닌 결혼에 애시당초 애정이 끼어든다는 것,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50대가 20대의 삶을 결정해버리는, 그 결정에 의해 사랑이 좌절된 이 아름다운 커플을 보고 있으려니,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지난 대선에서 2,30대에서도 박근혜를 지지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4,50대에서도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대선은 명백히 ‘세대별 대결’의 구도였다. 40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50대는 확실히 박근혜를 지지했다. 6,70대는 아예 논외로 하고 말이다.

50대의 지지를 업은 박근혜 정부는 자신들의 공약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도 못하는 것 같다. 아니면, 원래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정규직의 해고 요건 완화로 입이 떡 벌어지게 하더니, 무상교육을 지방정부의 일로 떠넘기는 모습에서 최고로 경악했다,고 말해야겠지만, 앞으로 더한 장면이 연출될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

50대가 결정하는 20대의 삶. 살인적 대학등록금, 비정규직 일자리, 연애할 수도, 결혼할 수도,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사회. 어쩌면 오늘 우리가 사는 환경이, 애정 없이 결혼만이라도 할 수 있었던 제인 오스틴의 시대보다 더 잔인할 수도 있겠다.

 

3. 제발 밤에는 일찍, 일찍 주무세요.

내가 말하고자 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앤 해서웨이가 도서관 장면에서 입고 나왔던 베이지색 바탕에 자잘한 꽃무늬 드레스와 톰과 춤출 때 입었던 풍성한 연두색 드레스가 참, 곱다고, 예쁘다고 쓸 예정이었다. 그리고, 톰을 연기했던 제임스 맥어보이의 매력에 반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써야겠다.

냉담한 듯 하면서도 유혹하는 뜨거운 눈빛과 자연스러운 몸짓, 감미로운 음성,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당신을 보면서. 아.... 나는 아쉽다. 정말, 길이가, 길이가 아쉽다.

나는 키가 크다. 입에 붙은 말로 한국 여성 평균 키보다 10센티가 크니, 난 키 큰 여자다. (생각보다 한국 여성 평균 키는 작다. 평균이잖는가) 하지만, 나는 키가 큰 걸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도, 그렇게 불만을 갖고 있지도 않다.

나는 그냥, 키가 컸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해서, 쭈욱, 나는 키가 컸다. 나는 항상 키가 컸기 때문에 내가 키가 크다는 걸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남자들을 만날 때도 키 큰 남자를 각별히 좋아하지도 않았고, 키 작은 남자들을 각별히 싫어하지도 않았다. 나는, 일단, 나는 키가 크니까. 그래도, 아... 만났던 남자애들을 돌아보니, 나보다는 커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나보다는 커야 되는데.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제임스 맥어보이는 앤 해서웨이보다 쪼금, 아주 쪼금 키가 크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톰이 영화 속에서 영화처럼 나타나, 두 사람이 아름다운 춤을 추는 그 멋진 장면에서도 정말이지, 그에게서는 꼬마신랑 느낌이 팍팍나서, 난 감정이입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인생을 한결같이 키 큰 사람으로 살아온 1인으로서, 매력덩어리 제임스 맥어보이에게 말하고 싶다.

도대체 밤에 뭐, 하셨나요? 일찍 자면 키 크는데. 일찍, 일찍 주무시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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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2-0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좋아요` 누르면 너무 뻔뻔해 보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능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저,
키 작아요. -0-

단발머리 2014-12-01 12:56   좋아요 0 | URL
앗!!! 저 아직, 사진을 안 올렸어요. 이따가 제임스 보러 놀러오세요.

좋아요~ 눌러도 안 뻔뻔해 보입니다용~~~ 작가님!!!

저는 키 큰 여자지만, 여자는 키 작은 여자가 아담하니, 이뽀요*^^*

아무개 2014-12-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알라딘에 정붙이게 된게 다락방 님의 전방위적인 도움이 컸어요.
단발머리 님께서 다락방 님을 애정하는 마음 ..압니다!^^

비커밍제인을 저는 폰으로 다운 받아 놓은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 못보았네요.
남자주인공이 이 사람이였군요. 흠...왜 하필 이렇게 작은 남자를 ...


단발머리 2014-12-01 14:21   좋아요 0 | URL
이히히... 아무개님도 다락방님의 전방위적 도움의 수헤자시군요,.
제 마음도 이해해주시고, 히히... 감사해요.

남자주인공 멋있어요.
밑에서 두번째 사진에서 슬쩍 바라보며 미소지을때, 다락방님 버전으로, ˝까악!!˝ 한 번 해 주셔야돼요.
아쉬운건, 길이지요. 프로필 확인했더니, 저랑 키가 똑같더라구요.
저, 이번에 건강검진에서 0.6센티미티 더 컸더라구요. 제가 더 커요. 엉엉T.T

그렇게혜윰 2014-12-0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공재님 아니 다락방님의 책...몰랐어요ㅠㅠ 공공재 활용을 제대로 못했네요...송구합니다ㅠㅠ
참고로 전 크지도 작지도 않아요...ㅋ

단발머리 2014-12-01 14:3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책인지 모르셨군요.*^^* 컴퓨터로 읽어도 좋지만, 역시 책은 손으로 잡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는게 제맛이지요. 다락방님 책, 완전 좋아하실 거예요.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으시다니, 매우 축하드립니다. ㅋㅎ

서니데이 2014-12-0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의 글을 읽고 보니 영화속 사람들이 입은 옷이 예쁜데요, 저 시대에는 하얀색 옷이 많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잘못알았나봐요,
(그런 설명이 없었으면 사진을 보지 않아 몰랐을 거예요^^)
그리고 제가 예쁜 사람이 되어 기뻐요, ^^ 요즘기준으로는 많이 예쁩니다, 저는^^

단발머리 2014-12-02 11:29   좋아요 0 | URL
예쁜 옷 아주 맞아요. 좀 불편하기도 할 것 같은데, 일단 예뻐는 보입니다.
서니데이님 작품도 완전 이뻐요~~~
게다가 서니데이님 요즘 기준으로 많이 이쁘시다니, 막 부럽사와요~~

무해한모리군 2014-12-0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댓글에 좋아요는 어플에서만 되는군요! 좋아요 좋아요 ㅎㅎㅎ

단발머리 2014-12-02 11:28   좋아요 0 | URL
헤헤.... 그래서 저는 댓글 밑에 댓글을 달기도 합니다.
아직 북플은 잘 모르겠어요. @@

[그장소] 2015-01-13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사수궐기..대회~!! ㅎㅎㅎ
살짝 짐심어린 질투!연인사이 가로질러 가는
얄궂음을 시전하다!!^^;

단발머리 2015-01-14 19:24   좋아요 0 | URL
헤헤헤.... 많아요, 저처럼 다락방님 사모하는 사람.
질투 저한테만 주지 마세요.
반가워요, 그장소님.

[그장소] 2015-01-14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핫~^^ 질투는! 길가는 연인들 사이 비집고 가기..모드..정도임..하하하♥

단발머리 2015-01-17 10:01   좋아요 0 | URL
좋아요... 그정도는 괜찮습니다. 헤헤

[그장소] 2015-01-1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핫~(づ_ど) (づ_ど)

단발머리 2015-01-17 10:05   좋아요 0 | URL
브이 V!!!
 
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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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참혹한 짓이다.                                                                                                    - 신형철

그런 사람들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는, 4월 16일과 17일, 18일과 19일. 꽃다운 아이들이 죽어가는, 그 시간들을 함께 살아냈다. 그 날들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아직도 살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웃고 있지만,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아이들은 깨어나지 않은 긴 잠을 자고 있다.

그 시간들, 우리 모두가 함께 했던 그 시간들, 그 길고 긴 절망의 시간들, 차마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길고 긴 밤의 시간을 다시 보내는 것, 그 시간들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하지만, 차가운 바다에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의 가족들과 ‘아이들을 살려내라’는 외침 대신 ‘진상을 밝혀달라’고 단식을 강행했던 유가족들과 청와대 앞 아스팔트 바닥에서 76일을 농성했던 유가족들에게, 그들에게는 4월 16일 뿐이다. 자신의 아이가 침몰하는 배 위에서 사라진 그 날로 그들의 시계는 멈춰버렸다.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말들은 바람처럼 흩어지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그만 하라,고. 이제 그만했으면 됐다,고 말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일상으로, 일터로. 삶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마침내 그의 딸이 뭍으로 올라왔을 때 사람들은 다행이라며, 그간에 수고가 많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쉬라고 말했다.

돌아가다니 어디로.

일상으로.

사람은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는 없다. 언제까지고 끔찍한 것을 껴안고 살 수는 없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안심할 수 있지. 잊을 수 있지. 그런 이유로 자 일상이야, 어떤 일상인가, 일상이던 것이 영영 사라져버린 일상, 사라진 것이 있는데도 내내 이어지고 이어지는, 참으로 이상한 일상,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고 우는 정치인들이 있는 일상, 그들이 뻔뻔한 의도로 세월을 은폐하고 모욕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 진상을 규명하는 데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 마련되지 않는 일상, 거리로 나와야 하는 일상, 거리에서 굶는 아내를 지켜봐야 하는 일상,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과 같은 마음으로 초코바, 초코바, 같은 것을 자신들에게 내던지는 사람들이 있는 일상. (92-3쪽)                                                           <가까스로, 인간> 황정은  

희망이 없다고, 4월 16일 이후로 세계가 존나 망했다고 말하고 다니던(96쪽) 황정은은 7월 24일 서울광장에서 유가족을 대표해 한 어머니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를 듣고서 자신의 절망을 돌아본다. 다 같이 망하고 있다고,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은 있는 힘을 다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97쪽) 안산에서 출발해 하루를 걸어 서울광장에 당도하는 유가족들과 그들에게 진심어린 박수를 치는 사람들. 압도적인 검은 것 위에 세월이 마냥 막막하게 떠 있지 않도록 하는, 그 팔꿈치들의 간격을 말이다.

 

언론은 종일 가능성과 희망을 떠들었다. 에어포켓이며 골든타임, 정부가 구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속보들이 매체를 장악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 구조대원 726명과 함정 261척, 항공기 35대가 집중 투입된 사상 최대 규모의 수색작전을 벌인다는 기사도 있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거짓말이었다. 구조는 없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장을 통제한 해경은 적극적으로 골든타임의 구조를 가로막았다. 해군과 119구조단, 각지에서 모여든 민간잠수사들 ..... 어느 누구도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 수 없었다. 심지어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명령을 내린 통영함도 현장에 투입되지 못했다. 이는 감히 해경이 저지할 사안이 아니었다. (49쪽)

                                                                                              <눈먼 자들의 국가> - 박민규     

 

세월호에 대한 의문은 파도 파도 끝이 없다. 일본에서 18년이나 운항된 낡은 배가 무리한 개조와 증축으로 배의 무게 중심이 높아졌고,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평형수가 상당량 빠진 상태였고, 선장은 비정규직이었고, 일등 항해사와 조기장은 출항 전날 채용된 직원이었다. 세월호는 국내 이천 톤급 이상 여객선을 통틀어 유일하게 유사시 국정원에 우선 보고해야 하는 배였고, 안개가 짙은 밤, 다른 여객선의 출항이 모두 취소된 상황에서 세월호만 유일하게 출항했다.(47-8쪽) 학생의 신고로 해경이 출두했지만, 선장을 포함한 선원들만 구조한 해경은 끝내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다. 배는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아무도 구조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국민을 속였던 언론은 이 모든 비극의 원흉으로 유병언만을 고집했고, 백골 상태로 돌아온 유병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당은 지방선거에서 ‘살려달라’,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고, 여당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여당의 자세는 달라졌다. 피해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줄 수 없다는 여당은 진상규명에 미온적이었다. 7시간의 미스터리를 밝히지 못하는 청와대도 마찬가지였다. 야당은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렇다.

진심으로 대통령께 고하건대 아직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당신도 분명 그 꽃다운 아이들을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실 구석구석을 수색해 단 한 사람도 빠뜨리지 말고 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비서실장의 말 그대로, 누가 보기에도 생각보다 배는 너무 일찍 넘어갔다. 그러나 아직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라건대 각하, 지금 당신에겐

 

저 불쌍한 유가족들을

구조할 기회가

아직은

 

아직은 남아 있다는 말을 진심으로 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은 마지막 기회이다. 역사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단 한 번도 진실이 밝혀진 적 없는 나라에서 이 글을 쓴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고 이곳에 발붙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탔기 때문이다.

내릴 수 없는 배다. (62-3쪽)

                                                                                                   <눈먼 자들의 국가> - 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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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술자리에서 아끼고 사랑하는 친한 동생들에게만 들려준다는 경제학자의 ‘생활밀착형 조언’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전해주는 고급 정보다.

작가 선택에 있어,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유머’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소비가 불편한 ‘일상’을 만들어라> 같은 진지한 챕터에서도 나는 이런 구절에 밑줄을 긋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아내에게 이번 달에는 쓸 데가 많으니 용돈 좀 더 달라고 하고, 아내는 이번 달은 정말 돈이 없다고 안 넣어주는, 그런 삶을 산다. (131쪽)

 

교육에 대한 부분은 많은 부분,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게다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불안하니까, 답답하니까, 아이들을 학원에 보낸다. 이 학원, 저 학원 돌리고, 돌리고 돌린다. 아쉬운 건, 학업 때문이 아니라, 보육 내지는 안전의 이유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낼 수 밖에 없는 가정에 대해서는 대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석훈씨가 책임지실 일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래는, 우석훈이 말하는 ‘학원 안 보내고 공부 잘하게 하는 법’이다. 

 

<교육비를 줄여야 자녀가 똑똑해진다>

경제에서는 적절한 투자가 줄면 그에 따른 손실이 발생한다고 전제한다. 교육도 일종의 투자라고 하면 마찬가지 분석이 가능한데, 사교육에 대해서만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사교육 지출을 줄이면, 오히려 자녀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 일단 행복해지고, 편안해지고, 그리고 다른 것들을 더 해볼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으면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데, 만약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교육을 받았다면 이 과정이 고통스럽기는 할 것이다. (223쪽)

국어를 공부하는 방식에서.... 한 가지 요령이라면, 굳이 양서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줄이고 흥미 위주로 읽어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난독’이라고 부르는데, 어려운 책을 읽어냈다는 뿌듯함보다는 책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보는 게 더 중요하다. 참고로 선진국 학생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소설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수험서다. (234쪽)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말 어휘력의 일부가 외국어 어휘력의 총합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말 단어보다 더 많은 영어 단어를 알 수는 없다. 우리말로도 모르는 고급 단어를 영어로 알기를 기대하는 것,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국어 실력의 하위단계가 영어 실력이다. (237쪽)

 

 

2.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극한의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육체적 고통보다 더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말한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내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말이다.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그리고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그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121쪽)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는 불굴의 정신력보다 더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은 ‘인간은 자신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이 중요한 일에서조차 한 치 앞도, 단 5분 뒤의 일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결정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책에서 얻은 가장 강한 메시지다.

트럭이 도착하자 주치의가 열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 중에 우리 둘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뽑힌 열세 사람은 트럭에 올라타고 우리 둘은 뒤에 남아야 했다. 놀라고 화가 나고 실망해서 우리는 주치의에게 따졌다. 그는 너무 피곤하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노라고 변명했다. ... 그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의 신이 우리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인간의 결정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이 특히 생사와 관련된 문제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우리 수용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우리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로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또 다시 테헤란에서의 죽음을 생각했다. (114-5쪽)

 

3.

인문학 열풍은 열풍 단계를 넘어, 이제는 계절풍의 양상이다. 여러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같다. 나도 2년 전쯤에, 수유너머 등에 인문학 강좌와 글쓰기 수업등을 알아보았으나, 곧 포기했다.

1) 아이들이 학교에서 너무 일찍 돌아오니 낮 시간은 불가능하고 2) 밤수업은 신랑 스케쥴과 줄다리기를 해야 하고 3) 한자 까막눈이라, 중국 고전 수업이 막막하고 4) 수업 뒤풀이의 술자리가 부담스러웠다. (나는, ‘모든 것’에 ‘자유’를 외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자유‘에 대해 극렬 반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이 책은 세 명의 엄마, 평범한 전업주부들이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게 됐는지, 공부를 시작하고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 말한다.

오기가 생겼다. 자기 계발서 실천 방법의 하나부터 백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시도했다. 새벽 5시, 알람 소리에 잠이 깨면 비몽사몽인 뇌를 세뇌했다. “아, 행복해!”라고 세 번 읊조린다. 외계인을 보듯 황당해하던 남편도 좀 지나자 그러려니 했다. 충분히 세뇌되었다 싶으면 누운 채로 가볍게 체조를 하며 오늘의 할 일을 머릿 속에 띄웠다. 이불의 유혹을 떨치고 일어나, 일정표에 할 일들을 꽉꽉 채우며 예상 소요 시간까지 꼼꼼히 계산해 넣었다. 삶은 점점 바쁘게 돌아갔다. (홍미영, 84쪽)

 

나는 실제로 이런 식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홍미영씨가 다람쥐 쳇바퀴에서 탈출한 것에 대해서는 환영한다. 자기계발서가 계속 팔리는 이유는, 자기계발서가 하라는 대로 해도,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력하는 개인을 속이는 사회가 문제다.

이제, 자기계발서를 내려놓고, ‘진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진짜 공부, 아무도 강제하지 않으나, 스스로 원해서 하는 공부.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건 없는 것 같아요. 목표가 있든 없든 장단점이 있으니까요. 아무튼 공부하다 보면 기회는 얼마든지 옵니다. 지금은 그냥 소박하게 공부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손자에게 좋은 책을 골라 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고요.” (131쪽)

 

4.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는 오직 [초조한 마음], 그 아름답고 위대한 소설 한 권으로 고마운 시리즈다. 랭보 시집을 읽으려 했다기보다는, 대산세계문학총서의 최신간을 손에 쥐기 위해 이 책을 대출했다. 아름다운 시가 많은데, ‘첫날밤’의 일부를 옮겨본다.

 

 

 

 

- 나는 그녀의 가냘픈 발목에 입 맞추었지.

그녀는 부드럽고 당돌한 웃음을 터뜨렸지,

맑은 트릴로로 연달아 터지는

명랑한 수정 웃음.

 

작은 두 발이 속옷 아래로

얼른 도망쳤지. “그만 좀 해요!”

처음으로 허용된 대담함을,

웃음으로써 벌주는 척했던 것! (운문시 ‘첫날밤’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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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9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1-20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4-11-1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석훈씨가 책임지실 일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모든 것’에 ‘자유’를 외치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자유‘에 대해 극렬 반대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ㅋㅋ
유머코드가 있는 저자의 책에 유머코드가 종횡무진하는 독자분 되시고, 진지한 책에서 그러하네욥니다~ ㅎ

단발머리 2014-11-20 12:02   좋아요 0 | URL
저는 유머에 대한 강박이 좀 강한편이예요. ㅋ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예를 들어, 아이의 반모임에 나가더라두요.
5분 내에 엄마들 다섯 명을 웃기겠다, 뭐, 이런 결심을 숱하게도 합니다.
저, 우스운 사람이예요. ^^

다락방 2014-11-20 12:03   좋아요 0 | URL
5분 내에 엄마들 다섯 명을 웃기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4-11-20 12:04   좋아요 0 | URL
ㅍㅎㅎㅎ 첫 모임에 못 웃기면, 다음을 기약합니다.
두번째 모임에서, ˝** 엄마, 유머코드 특이한데.... 하핫!˝ 하면 식구들한테 1박 2일 자랑합니다.
저, 소박한 사람입니다.
 

 

 

아침부터 멘붕.

 

꽃핑키님 페이퍼를 통해 알사탕 1000개 소식을 듣고.

주문해야지, 하며 이틀을 보내고.

 

오늘 새벽 1시까지도 알사탕 1000개였는데,

아침에 들어와 장바구니 결제하려고 하니,

 

알사탕 300개. 허걱!!!  

 

 

 

 

이미 미리보기로 24페이지까지 읽은 몸,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는데.

알사탕 700개 밤새 어디갔느냐.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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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4-11-1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리보기를 읽다가 그 다음이 궁금해서 그냥 바로 샀어요. ^^;

단발머리 2014-11-18 16:13   좋아요 0 | URL
저도 사려고요,....
알사탕 300개를 부여잡고요. 흐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