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통 사람 이야기. 죽음이 찾아드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한 채 섣부른 지식으로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모욕하는 경우야말로 식자우환이라 할 수 있지요. (29쪽)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읽고 아무리 오래 함께 읽어도 소용이 없더군요. 독서량이 많거나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독서 모임에서 큰 배움을 얻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 그렇습니다. (67쪽)

 

한 개에 천 만원이 넘되 천 만원을 선납해도 금방 가질 수 없는 에르메스 버킨백을 사는 것보다는 김영하의 신간 산문집 『읽다』를 사는 편이 낫다. 재화의 소유가 제공하는 기쁨은 그 재화를 소유하기 직전이 최고점이고, 김영하의 산문이 주는 기쁨은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까지 유지되기 때문이다.

     

 

 

 

 

 

가방, 반지, 귀걸이, 목걸이, 시계, 블라우스, 스커트, 코트. 이 밖에 다른 어떤 물건을 사는 것보다야 책을 사는 게 낫다. 더 긴 시간동안, 더 진한 감동을 간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분야에 관한 것이든 지식의 소유에만 한정된다면 그건 진정한 앎과는 구별될 것이다. 많은 책을 사고 많은 책을 읽더라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보통 식자우환이라 하던데, 간단히 말하면 아는 게 병이 되는 형국이다. 나부터 그러지 않은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아, 다행이다. 나는 아는 게 적어 이런 경우가 별로 없다. 신난다.

독서란 결국 다른 사람, 즉 책을 쓴 저자의 이야기를 듣는 지루한 과정을 활자-독자의 형태로 변형한 것인데, 만약 저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비판적 독서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예 듣지 않는다면, 저자의 논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저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기 전에, 그/그녀의 주장과 이야기에 귀를 막아버린다면 어떨까. 다독하는 그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나 화려한 독서이력을 자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책을 통해 새로운 변화를 이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어디까지나 ‘즐거움’ 때문이다. ‘즐거움’을 위한 독서, ‘즐거움만을 위한 독서’을 지향한다고 할 때, 이것이 아주 자랑스럽고 뿌듯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실 자체를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다. 나에게 독서는 ‘즐거움’을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는 ‘재미’요, 또 다른 말로는 ‘놀이’이며, 그 밖에 또 다른 말로는 ‘도피’이다. 하지만, 김이경 작가의 이 말, 진지하고 차분하며, 잘난 척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소탈하게 펼쳐 내놓는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책을 읽었으므로, 내가 그녀의 이 말을 들었으므로. 내 생각은 조금 변한다. 변하고 있다.

심심풀이 삼아서 재미로 있는 거라면 대충 읽어도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깨우고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읽을 때는 정독을 해야 합니다. 즉 독서의 사회적 책임을 생각할 때 정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쓴 사람의 피땀 어린 공력, 만든 사람의 수고로움, 그걸 읽고 살아갈 내 삶의 소중함 그리고 내가 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세상을 생각하면 정성껏 정밀히 읽는 게 당연하지요. (55쪽)

 

책은 내가 아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내가 당연시하는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내가 누리는 안락에 감사하고 내가 겪는 아픔을 고집하지 않게 하며,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 원망 없이 받아들이게 하지요. (11쪽)

 

 

변함없이 나는 즐거움을 위해 읽는다. 그리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도 읽는다. 내가 당연시하는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 읽고, 내가 누리는 안락에 감사하고, 내가 겪는 아픔을 고집하지 않기 위해 읽는다. 

시립 도서관에서 20년 넘게 강사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제안한 <아이와 함께 책 읽는 법>에 많이 공감하게 된다. 평소 내 지론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그런 것 같다.

아이들에게 독서를 권하고 싶다면 독서 교육을 시키는 대신 직접 책을 읽으십시오(126쪽), 아이들이 독서에 재미를 느끼려면 무엇보다 좋아하는 책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읽도록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128쪽), 수십권씩 되는 전집으로 책장을 빽빽이 채우는 일은 부디 참아주세요, 중구난방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독후감 쓰라고 하지 마세요,가 그 세부적인 방침이다. 모두 다 맞는 말씀, 혼자서 고개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읽는 법> 꼭지에서도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났다.

책을 읽다가 졸릴 때 낭독을 하면 좋습니다. 독서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똑같은 문장에서 맴도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졸려서 그럴 수도 있고 딴생각을 하느라 그럴 수도 있는데, 아무튼 이럴 때는 책을 덮고 자거나 딴 생각에 몰입하는 게 제일이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다면 소리를 내어 읽으세요. 나갔던 정신을 불러오는 데는 책 읽는 내 목소리만 한 게 없습니다. (121쪽)

 

나갔던 정신을 불러오는 데는 책 읽는 내 목소리만 한 게 없습니다,가 그것인데, 아, 어찌 알았나. 이 방법은 내가 원서를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려 할 때마다 나간 정신을 불러오기 위해 써먹는 방법이다.

책 읽는 내 목소리는 나를 깨운다. 깨우고야 만다. 기어이. 꼭.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여도 좋았겠지만, 애정하는 아무개님으로부터 제공 받아 리뷰를 쓰는 것도 좋다.

아무개님, 땡큐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5-11-1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진짜 미인이시네요....라는 댓글을 쓰려는데,
아래 스타뉴스가 있어 다른 분 사진이라는 걸 알았어요;;;

비오는 주말이에요,
단발머리님,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시간 되세요^^

단발머리 2015-11-24 18:5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가 이렇게 예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꿈에서라도~~~~~~~

서니데이님, 바람도 많이 불고 하던데, 건강 조심하세요.
저는 저번주에 약 없이 감기를 이겨내서 스스로 장하다, 하고 있었는데,
오늘 컨디션이 별로예요.
화이팅해요, 우리......
 
타임 푸어 - 항상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을 위한 일 가사 휴식 균형 잡기
브리짓 슐트 지음, 안진이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는, 여가 없이 정신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다. 현대사회는 왜 바쁜 삶을 높이 평가하는가. 우리는 왜 바쁘게 살아가는가. 바쁘지 않을 때 왜 죄책감을 느끼는가. 여가란 곧 게으름을 의미하는가. 게으름은 잘못된 것인가. 한정된 시간,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란 무엇인가.

두 번째로는 워킹맘,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해 하루가 35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워킹맘들의 행복찾기에 대한 안내이다. 육아와 일을 한 사람, 하나의 육체 안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이뤄갈 것인가. ‘이상적인 노동자’이면서 ‘좋은 엄마’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꿈의 나라, 워킹맘들의 천국 덴마크에서는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 많다. 첫째는 공감 때문이요, 둘째는 부러움, 셋째는 당위요, 넷째는 절망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희망 때문에. 공감과 부러움, 당위와 절망 그리고 희망 때문에 줄을 긋고, 옮겨 적는다.

 

1. 여가 없는 삶

“육체노동이든 공장노동이든 간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일해야 하는 일들은 모두 하층계급의 몫이다. 하층계급에는 노예들, 생계를 남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그리고 여자 대부분이 포함된다.(64쪽)

고대부터 힘든 노동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의미의 여가를 보냈던 사람들은 물론 엘리트 남성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교육을 받지 못한 빈곤층과 노동계급도 어느 정도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83쪽) 지금은 어떤가. 우리 모두 바쁘게 살아간다. 하루라도, 1시간이라도, 1분이라도, 1초라도 허투루 보내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우리의 시간표는 활동과 약속으로 가득차있다. 쉬고 있다고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고 자리에 앉아 손에 핸드폰을 잡는 순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나’는 도파민의 엄정한 지휘 아래 원치 않는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알림이 울리기를 ‘기대하는’ 동안 우리의 뇌에서는 달콤한 마약 같은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것은 다른 종류의 강력한 중독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가 짧거나, 생각이 완결되지 않았거나, 메시지가 도중에 끊겼을 경우에 우리는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때 급격히 증가하는 도파민은 우리 몸속을 돌아다니며 더, 더, 더 많은 정보에 대한 욕구에 불을 붙인다. (101쪽)

그렇다면 나는 왜 바쁠까, 나는 왜 바쁘게 살고 있을까.

일과 쫓기는 삶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비인간적인 장시간 노동,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 세계화, 인구비율의 변화, 성역할의 변화, 바쁨을 높이 평가하는 문화, 경제적 불안, 남은 직원들이 더 많은 일을 감당하게 만드는 정리해고, 늘어나는 생활비와 가계부채, 정체된 임금, 자녀 양육에 드는 높은 비용.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대학 등록금(대학등록금 1980년부터 현재까지 893퍼센트나 상승했다). 이런 것들이 일과 소비의 악순환을 고착시킨다. (119쪽)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 쉴새 없이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이 좋다, 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일해야 쉴 수 있다.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 일은 기본이다.

하지만, 일하는 건 좋은 것이지만, 일하는 중간 휴식하는 것도 좋은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는 건 좋은 것이지만, 50분 공부하고 나서 10분 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쉼 없는 연습, 쉼 없는 공부, 쉼 없는 노동은 우리 뇌의 리듬과 자연스러운 재편성 주기를 엉망으로 만드는데(426쪽) 반해, 긍정적인 마음과 휴식시간은 창의적인 통찰을 얻을 확률을 높여준다.(427쪽) 우리가 생활의 속도를 늦추고 잠시 시간을 내서 지금 있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낄 줄 알게 되면 우리의 복잡한 뇌는 문자 그대로 커진다. 그리고 뇌의 공포 중추는 작아진다.(438쪽)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열심히 일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스스로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열심히 일한다. 대한민국 취업자 1인당 연간 평균노동시간은 2124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2위이다. OECD 회원국 평균 1770시간보다 354시간 길다. 노동시간이 제일 짧은 독일 노동자들에 비해 753시간, 즉 하루 8시간 근로를 기준으로 할 때 94일을 더 일하고 있는 셈이다.

[출처] 독일보다 연간 94일 더 일하는 한국인, OECD 회원국 장시간 노동 2위/작성자 윈플러스경영개발원

즉, 일하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일했음에도,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비정규직 400만 시대‘가 이것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지표다. 더해서 문화의 ‘향유자’로서가 아니라 상품의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 강요하는 현대 자본주의하에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스스로의 삶을 조정하고 누리며 가꾸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옆집, 윗집, 아랫집을 맹목적으로 따라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계속 부러워하며 또 다른 소유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누리려는 자세, 현재의 시간을 행복하게 채우려는 노력 말이다.

 

2. 아이를 낳았어요

프랑스의 경우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사들은 소르본 대학 교수들과 똑같은 공무원 신분이다. 반면 미국 보육교사들의 평균 임금은 주차관리원이나 호텔 웨이터와 비슷한 수준이다. (162쪽)

둘째는 초등학교병설유치원에 다녔는데, 그 곳의 선생님들도 공무원 신분이다. 엄마들 말로는 “네~ 네~ 어머님~”의 사립유치원 선생님들과 다르다고, 스스로에 대한 프라이드 때문에 좀 꼿꼿하다던데, 실제로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 즐거운 유치원 생활을 보냈다. 방학때는 종일반 아이들만 돌봐준다고 하던데, 문제는 학기 중 하원시간이 5시여서 직장에 다니는 엄마, 아빠가 그 시간까지 아이들을 데리러 올 수 있을지 많이 궁금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24분까지 일합니다. 여기에 5를 곱하면 정확히 37시간이 나와요.” (346쪽)

꿈의 직장 정도가 아니라, 꿈의 나라 덴마크 이야기이다. 덴마크에서는 9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 24분에 퇴근한단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저녁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고, 엄마들은 직장에서 실력있는 ‘동료’로 일할 수 있으며, 아빠들은 빛의 속도로 자라나는 자녀들의 성장 과정을 엄마처럼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직장 퇴근 시간 엄수, 어린이집 이용 시간 확대.

 

3. 결단이 필요한 순간

그 때 나는 육아휴직이나 단축근무를 얻어내기 위해 싸우는, 또는 주양육자 역할을 하면서 집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아빠들과 인터뷰를 하느라 휴대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대화를 옆에서 듣더니 15살 조카 와이어트가 말했다. “멋있네요.” 그러자 남편 톰이 곧바로 대꾸했다. “나라면 그냥 일을 하겠어.” 우리 아버지는 남자가 아이를 돌본다는 발상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버지는 당황한 기색으로 나에게 충고했다. “브리짓, 네가 이해를 잘 못 하는 것 같구나. 남자들의 인생에는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있단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의사가 될까? 변호사가 될까?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같은 것들을 결정해야 해.” 나는 조용히 반문했다. “그러면 아빠, 여자들에게는 그런 순간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184쪽)

남편이 한 달 동안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됐을 때는 또 어땠나? 남편은 칸다하르 외곽의 람로드라는 군사기지에서 찍은 자기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그는 ‘숙소’, 즉 거대한 금속제 상자 앞에 지저분한 옷차림으로 서 있었다. 손에는 물만 많은 인스턴트커피 한 잔과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던 건 그 사진을 처음 봤을 때 나의 반응이었다. 나는 남편이 부러웠다! (244쪽)

대개 쫓기는 삶의 시작은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나는 시점이다. 내가 찾아본 전 세계의 다양한 시간활용 연구들에 따르면, 첫 아이의 탄생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여자의 생활은 근본부터 변화한다. 하지만 남자의 생활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251쪽)

“당신이 그렇게 차분할 수 있는 건 남들보다 ‘이상적인 엄마’에 가깝다는 자신감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러자 그래프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같은 일하는 엄마들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나는 괜찮은 엄마인가? 아이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라는 걱정을 하죠. 나 같은 전업주부 엄마들은 날마다 이런 질문을 던져요. ‘이 정도로 충분한가? 내 선택이 과연 옳은 걸까? 나도 일을 할 걸 그랬나? 내가 받은 교육은 다 무슨 소용이람?’ 양쪽 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거죠.“ 그렇다. 엄마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이 포기한 ‘저편의 삶’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281쪽)

모성에 대한 강요는 아이를 낳은 후에 ‘저절로’ 모성이 생기지 않는 스스로를 발견한 모든 어머니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고, 일하는 여성이 ‘방치되고 있는’ 자신의 자녀에게 갖는 죄책감을 가중시킨다. 전업주부라면 나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끝도 없는 집안 가꾸기와 살림살이, 더욱이 요즘에는 아이를 잘 교육하는 게 제일 중요하게 여겨져 아이를 중심으로 생활하다 보면, 스스로의 삶에 대해 많은 회의를 갖게 된다. “내가 받은 교육이 다 무슨 소용이람?”이 이에 대한 물음이자 답이다. 워킹맘도, 전업주부도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 한다. 이 쪽도, 저 쪽도 행복하지 못 하다.

아이들을 ‘근성 있고’ 행복하게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터는 부모들에게 자기를 희생하는 일부터 그만두라고 가르친다. 부모가 우울하면 아이들도 문제행동을 나타내기가 쉽고, 부모의 긍정적인 감정은 아이들에게도 전염된다. 가장 중요한 교육은 ‘감사’의 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받는 혜택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334쪽)

‘감사의 마음을 가르치는 일’이라면 내 특기 아닌 특기며 전공 아닌 전공인데, 이것이 아이들을 ‘근성 있고’ 행복하게 키우는 방법이라니 정말 눈이 번쩍 뜨인다. 전공 심화 과정 착수.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읽고 싶은 책’에 추가한다. 

 

4. 야무진 부록

이 책의 부록은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운 삶을 위한 작가의 제안이다. 나는 아래 문장들에 솔깃했다.

주저 없이 ‘페미니스트feminist'라는 단어를 입 밖에 내자. 그리고 역사 속에서 ’페미니스트‘의 진정한 의미는 여자들이 개성을 찾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449쪽)

행복이 우선이다. 행복은 성공과 성취로 이어진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지는 않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행복한 이유를 나열해보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쳐라.

아이들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시간과 공간을 줘라. (452쪽)

집안의 먼지가 다 없어지고 냉장고자 꽉 찰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그냥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자. 케첩으로 만든 스파게티와 좋은 사람들만 있으면 충분하다. (454쪽)

저녁 식사 시간에 마음에 드는 구절, 바로 위의 454쪽을 소리내 읽어 주었더니, 남편이 고개를 들고 말한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유리한) 책을 읽고 있네.”

맞다. 이 책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나는 전업주부인데 아이들을 워킹맘처럼 먹인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한의 자유시간을 준다.(그래야 그 시간에 나도 놀 수 있다.) 나는 툭하면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초딩인 이 시간을 즐겁게 누리고 있다. 

 

5. 오늘의 다짐

나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걸 잊지 말자.(443쪽)

인생은 짧다는 것,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는 것, 남은 시간에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바 2015-11-1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은 인간이야, 쥐야 전후로 저에게 언제나 좋은 엄마, 친구같은 엄마로 기억되고 있어요. 문학을 자연스레 논하는 자녀분들과 함께요.

단발머리 2015-11-12 15:09   좋아요 1 | URL
허걱, 이런 극찬을... @@
저에게 인간이야, 쥐야? 같은 주옥같은 문장을 선사해 주신 필립 로스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면서...

저는 좋은 엄마, 친구같은 엄마는 아니예요.
막 애들을 방치하고, 싸우고, 놀고 그렇습니다.
웃긴 엄마가 제 지향점이예요.
다정하면서 웃긴 엄마. 아..... 어렵......

책읽는나무 2015-11-12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툭하면 웃음을 터트린다는 대목에서 내공이 느껴집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아이들 앞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횟수가 줄어요ㅜ
전업주부지만 워킹맘처럼 먹이기!!
이건 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어요^^

전업주부여도,워킹맘이어도 후회되고 죄책감이 드는 부분들이 똑같다는 부분에 깊이 공감합니다
여튼 아이들 이쁘게 키우시는 알라딘엄마들을 보면서 많이 배워요^^

단발머리 2015-11-12 18:44   좋아요 0 | URL
저는 항상 아이들 먹이는 게 어려워요.
가까운데 사시는 엄마가 맛있는 거 자주 해주시니 실력이 안 늘기도 하구요(변명),
정말 근근히 먹고 삽니다. T.T

예전에는 위의 문장처럼 질문을 많이 했죠.
“내가 받은 교육이 다 무슨 소용이람?”
요즘엔 그런 생각이 덜하기는 하지만,
딸애가 혹 저를 `롤모델`로 삼으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전 지금 행복하고, 집에 있는 엄마가 행복해 보이는 건 좋지만, 그래서 나도 집에.... 라고 말한다면,
전 이렇게 말할 것 같거든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살림을 한다고 해?
저, 이중적인가요? ㅎㅎㅎ
 

설거지 하다가 얘들 챙겨주고 와서 헹구려고 하니 둘이 이러고 있다. 두 개 다 좋아하는 컵인데...어쩌나...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appletreeje 2015-11-09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컵이 꽉 껴서 안 빠지는 거지요? ㅜ-ㅜ
정말 어쩌지요? 다른 분들 중, 이럴때 컵 빼는 방법 아시는 분 있지 않으실까
살짝 기대를^^
참, 세제 풀은 뜨거운 물을 부어 놓으면 혹 미끄러워서? ㅎㅎ

단발머리 2015-11-09 13:38   좋아요 0 | URL
제일 처음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
잘 안 되고 있어요. 엉엉...

다락방 2015-11-09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아 어쩔 ㅋㅋㅋㅋㅋㅋㅋ 잡아 뽀으면 망가질 것 같고. 애플님 말씀대로 해보심이??

단발머리 2015-11-09 13:39   좋아요 0 | URL
작은 펭귄 컵을 잡아 당길때마다 ˝뽀도독˝ 이런 소리가 나요.
이러다 펭귄 컵 팔 빠질것 같아요. T.T

해피북 2015-11-0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공 속상하시겠어요 단발머리님 ㅎ 제가 하도 털털해서 접시나 사기 그릇은 다 이가 빠진 상태인데 ㅠㅠ 저도 이 페이퍼에 달리는 댓글 유심히 읽으며 배워야겠어요 ㅎ 힘내시라는 의미에서 꾹 누르고 갑니다 ^~^

단발머리 2015-11-09 13:40   좋아요 0 | URL
일단 조금 기다려보세요.
가능한 모든 적법한 조치들을 다 취하고 있습니다.
엉엉.................

아무개 2015-11-09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야. 어찌돼었나요???

단발머리 2015-11-09 13:41   좋아요 0 | URL
아직도 쟤네들이 저러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요.
그러니까, 왜 아롱이는 아침부터 펭귄 컵에 보리차를 따라 먹고 그랬나요!!!!
원래 펭귄 컵은 제가 엄청 아끼는거라 가끔 꺼내서 조심조심 먹고, 설거지도 따로 하고 그랬는데...
어쩌다 저기에 빠졌................으...........................

아무개 2015-11-09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챔기름이나 식용유 같은거
바르면?????????

단발머리 2015-11-09 13:48   좋아요 0 | URL
일단 네이버양에게 물어보았더니, 몇 가지 가르쳐 주네요.
해보고 돌아올께요.

근데, 참기름은 없었어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금행복하자 2015-11-09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워라~ ㅠㅠ
꼭 회생시키기를 빕니다~

단발머리 2015-11-10 14:53   좋아요 0 | URL
현재 상황 아직 그대로입니다. 슬픕니다, 진짜.

서니데이 2015-11-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보고 엄마한테 여쭤보았는데요. 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냄비에 먼저 겹쳐진 컵을 넣고,
파란컵이 잠기지 않을 정도로 냄비에 물을 담고 중탕합니다.
어느정도 물이 뜨거워지면, 파란컵 안쪽으로 차가운 물을 부어보세요.

잘 됐으면 좋겠네요.




단발머리 2015-11-10 14:54   좋아요 1 | URL
네, 말씀하신 대로 해 보았는데, 아직 안 되고 있어요.
오늘은 에라, 모르겠다 외출했다가 지금 막 들어왔어요.

그냥 낀게 아니라, 약간 옆으로 비스듬히 자리를 잡아 둘 중에 하나가 깨져야 나오려나...
참, 슬픕니다.

많은 관심 감사드려요. 엉엉...

2015-11-09 14: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0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0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0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5-11-10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에선 성공한 방법인데, 잘 안되셔서 어쩌나요,
단발머리님, 더 좋은 방법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단발머리 2015-11-12 10:55   좋아요 1 | URL
컵이 그냥 겹친게 아니라서 그런지 좀처럼 빠지지가 않네요.
잡아당길 때 끼긱 소리도 나구요.
여러 방법으로 도전해보고 있어요. 엉엉~~~~

icaru 2015-11-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으윽,,, 아직도예요?? ㅠ

단발머리 2015-11-12 10:59   좋아요 1 | URL
아... 제가 게을러서 일단 아직도 저러고 있다는 슬픈 소식입니다.
오늘 저녁에 남편이 시간 나면 해결해준다고 했습니다.
해결이 되야지 사진도 올리고 할텐데... 쩝.
 

 

1. 『사랑은 사치일까?』

 

 

 

 

 

진짜 이 책을 읽을 것일가, 말 것인가는 도서반납일이 3일 남았을 때 결정된다.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면 2주간 ‘절대소유권’을 획득하게 된다. 뒤에 예약한 사람이 없다면 일주일을 더 볼 수 있는데, 사실 그 때까지 대출해 온 책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면 그 책은 읽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과 도서관 직원분들, 그리고 책을 집까지 운반한 내 팔에 대한 예의상, 반납일이 3일 정도 남았을 때, 그러니까 마지막 반납기일 2-3일 전에는 책무더기 속 책들을 차례로 훑어본다. 제목만 보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읽지도 않을거면서 무거운 이 책을 왜 빌렸을까, 『여성의 남성성』, 『여자들의 사상』), 자리에 앉아 목차를 살펴보는 경우가 있고(『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겨우 29페이지 읽은거야?의 (『신곡: 지옥편』) 경우도 있다.    

나는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과 『올 어바웃 러브』를 읽었기에 이 책은 그냥 간단히 지나가려, 아니, 목차만 대충 살펴보려 책을 들고 잠깐 앉았는데, 역시나, 그녀의 책은 패쓰가 안 되는 책이다.

그러나 소득이 높은 여성들만이 실질적으로 일을 통해 자율성을 획득한다. 요리와 가사, 육아 등을 도와줄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그들은 가정으로 돌아와 ‘2교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저소득 여성은 자신들의 변화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이 상대 배우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경제적 부담과 책임감을 덜 수 있다. 종종 밖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완벽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더욱 무리해서 일했다. .... 일터에서 여성을 위해 늘어난 여러 가지 기회의 수혜자는 많은 경우 독신의 여성 노동자였다. 남편이나 가족이 있는 여성들은 일을 시작한 후 삶이 더 어렵고 힘들어졌다. 따라서 일터가 자유를 향한 길인 것처럼 주장했던 페미니즘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의 비판은 타당했다. (81쪽)

 

더 자유로운 삶, 구속이 없는 삶을 위해 밖으로! 밖으로!를 외쳤던 여성들은 변한 건, 시대를 앞선 그녀들의 의식일 뿐, 세상은, 남편은, 가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노력이 인정되지 않고,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가정의 모든 잡다한 일을 떠맡아야 할 뿐만 아니라, 육아와 가사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남성들과 똑같은 강도, 똑같은 분량, 똑같은 시간동안 일할 것을 강요받는다. 가정에서 남성들이 육아와 가사의 ‘도우미’가 아니라, ‘당사자’로서 일하지 않는 한, 여성의 이러한 ‘2교대’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은 내게 반복해서 경고했다. 내 남자 파트너는 내가 자신의 섹시하고 반항적인 후배인 한, 그리고 자기가 우월한 멘토가 될 수 있는 한 내 지성에 신경 쓰지 않지만, 내가 그를 능가하고 추월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정말로 지지를 거둬들였고, 나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느끼는 등 비이성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187쪽)

 

임옥희는 말한다. “여성은 힘이 없었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었던 것이 아니라 여성이 갖고 있었던 힘 때문에 혐오와 매혹의 대상이었다.”(『여성혐오가 어쨌다고?』, 88쪽) 즉, 여성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인지하고 못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불신하고 있을 때,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그녀를 사랑하고 인정해준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보호를 벗어나려 할 때, 자신보다 더 나은 직장을 얻었을 때, 자신보다 연봉이 높아졌을 때, 자신보다 더 좋은 대학에 임용되었을 때, 바로 그 때, 남자는 자신의 지지를 철회한다. 그녀의 성공을 축하하지 않는다. 그녀와 결별한다.

어허, 흥분하지 마시라. 나는 모든 남자가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벨 훅스의 남자 말이다. 벨 훅스가 기나긴 박사과정을 밟는 내내 학문적 동료였으며, 그녀의 성공을 응원했고, 경제적으로도 그녀를 돕기 위해 노력했던 그 남자, 그녀와 사실혼 관계에 있었던 동거남, 그 남자가 그랬다는 거다. 당연하게도, 그 남자만 그러는 건 아니다.

 

2. 『성서와 만나다』

 

 

 

 

 

과학자인 저에게 좀 더 자연스러운 유비를 들자면 성서는 모든 커다란 질문에 정해진 답을 마련해놓은 궁극의 교과서가 아니라, 실험실의 노트와 같습니다. 곧 성서는 중대한 역사적 경험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느님의 뜻과 본성은 성서를 통해 가장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무오하며 질문조차 허용하시지 않는 기이한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시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분은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사건에 관한 기록을 통해 당신의 뜻과 본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셨습니다.(16쪽)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놀랍고 신비로우며 흥미진진한 확신 위에 놓여 있으며, 저는 이 확신이 진리임을 믿습니다. 이 확신이란 무한하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가장 분명하며 가장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곧 말씀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라는 육신을 취함으로써 당신의 본성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181쪽)

 

성서가 실험실의 노트와 같다는 저자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요즘엔 성경을 너무 안 읽어서 정말 심하다,는 생각에 성경계의 아이돌 『메시지 시가서』를 구입했는데, 이것도 책탑 속에서 정말 잘 지내고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 물리학 교수를 지낸 존 폴킹혼이 저자인데, 과학자의 신앙 고백,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흥미로우며 쉽게 잘 읽힌다.

 

3.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5분 사이에 한 명의 사람을 열 명의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사람, 어떤 일이든지 몇 초만 지나면 잊어버리는 사람, 거짓 혹은 가짜 이야기를 능숙하게 지어내면서 그 심연에 다리를 놓아 건너가려는 사람. 코르사코프 증후군 환자인 톰슨씨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톰슨씨는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지껄이며 몽상을 말한다. 자기의 내적 세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를 쉬지 않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의 경우 가장 큰 ‘실존적인’ 비극은 기억에 있지 않았다. 그의 기억이 완전히 황폐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기억에만 있지 않았다. 그에게는 느낀다는 기본적인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이란 이것을 말한다. (220쪽)

 

그가 유일하게 평정을 되찾는 장소는 사회적인 요구나 인간적인 요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 병원에 딸린 정원이다(223쪽). 사람이 없는 적막한 곳에서 그는 비로소 평온함과 충족감을 맛볼 수 있다.

뇌의 아주 작은 부분이 손상되어도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정상’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정상을 벗어난 사람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들. 소설처럼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이 관찰자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가감없이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풀어가다 보면, 마지막 문제에 부딪힌다. 섬과 같은 존재인 인간, 기존 문화에 동화될 수 없는 인간, 본토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발 붙일 곳이 있을까? 과연 ‘본토’가 그들을 특수한 존재로 받아들여줄까?

 

결국엔 그렇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모두 다 말짱한 정신일 수 없을 테고, 그 때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곁에 있어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혼자가 될 것이다.

그 때에도 내 손을 잡아준다고 약속하신 그 어떤 분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나와 함께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결국엔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의 섬처럼, 떠돌고 또 그렇게 떠돌아 다닐 것이다. 하나의 섬, 또 다른 하나의 섬처럼 말이다.

 

뜨거운 8월의 여름, 이 책을 읽었을때만 해도 작가 올래드 색스가 암으로 투병중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고기사를 보게 되었다. 또 하나의 섬이 되어 이 아름다운 세계를 떠났으되,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떠났으니 올리버 색스, 덜 외롭기를.

 

4. 『희지의 세계』

 

 

 

 

 

 

희지의 세계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초원의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18-19쪽)

나는 언제나 시읽기가 어려워 시집은 사놓고도 못 읽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집은 사실 외모에 먼저 반했다. 1988년생의 작가, 민트색의 표지 때문에 산뜻한 느낌으로 읽기 시작한다. 시를 더 많이 읽어야겠다, 시집을 더 많이 사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 보면서...

오늘은 민트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읽는나무 2015-11-08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도 깔맞춤이 가능하군요?
이뻐요^^
민트는 하얀색이랑 분명 차이가 나는데도 저는 항상 민트색을 보면 목구멍이 시원해지는 박하사탕맛이 생각나네요
민트는 박하사탕맛!!^^

몇 권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콕 찍어놓았습니다
남은 주말도 사랑받고,사랑 많이 하는 하루 되시길♡

단발머리 2015-11-09 13:47   좋아요 0 | URL
저도 민트가 너무 좋아요.
민트티, 민트레깅스, 민트가방의 딸애한테는 못 미치지만요.

저는 님 덕분에 많이 사랑받고 즐거운 주말되었어요.
책 읽는 나무님도 즐거운 주말되셨나요?

icaru 2015-11-11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정가제 시행전에 올리버 색스의 책을 재정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그러니까 다섯권은 넘지 않는다는 요지이죠 ㅋ)에서 갈퀴로 긁었어요. 그중에 아내를 모자로~ 도 있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단발머리 님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오프 지인들이 몇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좀 전무한 편인데,,, 없는 와중에도 한분 발견했잖아요. 둘째친구엄마가 모자를 아내로, 저 책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
꼼꼼하게 읽고 싶은 페이퍼인데, 제게 허락된 시간이 2분이라,, 대략 발자취라도 남기려고 발악하는 저의 꼴 좀 봐요 ㅠㅠ))

단발머리 2015-11-12 10:59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저도 언니가 있긴한데, 요즘엔 아이들 스케쥴이 바뀌어 자주 못 만나고 있어요.
요즘에 언니는 현대문학 단편선을 읽고 계시더만요. 오헨리, 기드 모파상 이런 분들을 만나신다는.
책 이야기 나눌 때 너무 좋지요. 잘난 척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책 이야기로...
그래서 알라딘이 좋아요. 잘난 척은 무슨. 간신히 따라갑니다.

icaru님 많이 바쁘시군요. 그 와중에 댓글 무한감사드려요.

from 사랑과 댓글을 먹고 사는 단발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