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 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웬즈데이 마틴 지음, 신선해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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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0.1 %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었다곧 태어날 아들에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로 이사를 결심한 저자. 그 곳에서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진다.

 

화려한 옷차림과 명품백이 준비물인 어퍼이스트사이드 아파트 구하기부터 시작해, 아이들이 졸리는 오후시간에 이루어지는 어린이집 입학 오디션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인맥을 총동원한 각고의 노력 끝에 아들을 제일 유명한 어린이집에 등록시킨 후, 저자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와서, 매일 운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커피 한 잔을 함께할, 이야기 나눌 단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로서, 객관적 관찰자로서 특이습성의 어퍼이스트사이드 문화를 연구하려 했던 저자는 방향을 선회한다. 그것은 사회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등 영장류의 하나인 그녀의 선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오늘날 인류학계는 동화를 불가피하고 유익한 현상으로 보고 있다. 연구대상과 관계를 맺고 그들 집단이 지지하는 신념의 일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내면화하는 동안 자연히 일어나는 역동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낯선 환경에서 현장연구가가 대개 처음 느끼는 감정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 같은 고립감과 압박감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조금씩 적응하다 보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본인을 사모아인으로여기기 시작한다. 혹은 아카족 Aka으로, 혹은 어퍼이스트사이드 주민으로. (121)

 


제일 큰 의문은 어린이집에서 만난 엄마들이 새로운 이주자에게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대하냐는 것이다.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의 놀이약속을 위한 전화, 문자, 이메일을 대놓고 무시해 버리는 집단적 행태는 설명이 필요하다. 이른 아침에도 런어웨이를 방불케 하는 완벽한 패션의 엄마들. 보톡스로 본래의 표정과 생기를 숨기고, 출산 후에는 피지크 57 - 전문 발레리나들이나 가능한 고난이도의 운동을 수행하고, 자신의 아이와 다른 아이들간의 놀이약속을 챙기며, 아이들의 생활과 학업에 올인하는 고학력 전업주부 최상류층 여성들. 완벽한 패션, 완벽한 미모, 완벽한 엄마들. 저자는 자녀에 대한 그녀들의 집착을 모성 집약적 육아때문이라고 보았다.

 


서구사회의 부유층 특유의 모성 집약적 육아intensive mothering’ 문화는 내가 연구한 엄마들에게 확실히 재앙이었다. 이 용어를 만든 사회학자 새런 헤이즈Sharon Hays는 모성 집약적 육아를 자녀 양육에 엄마가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하게 (의무화)하는 성편향적 육아방식이라 정의한다. 끊임없는 감정적 소모를 감당하고, 아이의 심리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꾸준히 활동을 제공하고, 아이의 지능발달촉진하는 것까지 전부 다 엄마의 역할로 간주되며, 그 모든 역할에 철저하지 못하면, 심지어 자유방임하기만 해도 엄마로서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라고 헤이즈는 전한다. (265)

 

극도의 생태적 해방과 극도로 경쟁적인 문화 안에서, ‘성공적인자녀는 엄마의 지위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아이의 성공을 이끌고 아이를 대신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엄마의 소명이다.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엄마란 위험부담이 크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하는 직업이다. 엄마로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인 동시에 그것이 아이의 성패와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 내 친구이자 작가인 에이미 퍼셀만 Amy Fusselman마치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 삶도 신분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낳은 것 같았다고 했다. (96-7)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여성들에게 (혹은 엄마들에게) 중요한 과제는 자신의 아이를 지속적인 성공과 행복의 경험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녀들의 지상 과제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이다. ‘품위 유지비라 불리는 그녀들의 지출사례를 대충 살펴보자.




 


그녀들이 뉴욕 최상류층 0.1%임을 감안한다해도, 외모에 대한 그녀들의 집착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 그녀들은 외연을 꾸미는 일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저자의 진단이다.

 


같은 종의 동성 간 경쟁을 말하는 성내 경쟁은 진화적 선택에 따라 보편화한 현상이다. … , 침팬지, 호모 사피엔스 등 포유류 암컷은 번식의 기회를 잡기 위해,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경쟁한다. … 영장류 암컷은 수컷이 새로운 상대에게 끌린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에 새로 들어온 암컷을 바짝 경계하고 적대한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 둘의 비율인 어퍼이스트사이드처럼 성비가 수컷에 유리하게 기울어 있는 환경에서는 기존 암컷의 텃세가 특히 심하기 마련이다. (210)

 


첫번째 이유는 불균형한 성비다. 남성 한 명에 가임기 여성이 둘인 상황에서, 선호하는 이성과 맺어지기 위해, 또는 내가 선택한 이성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암컷은 무리에 들어온 새로운 암컷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존재로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내 것이어야만 하는 수컷을 내 곁에 두기 위해, 가까이 잡아두기 위해.

 

두번째 이유는 여성 호모 사피엔스의 의존성 때문이다. 이 부분은문장과 문단을 읽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판단이고 자유지만, 이 문장들은,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자들이 참, 좋아할 만한 문장이 아닌가 싶다. 옮겨본다.

 


여성 호모 사피엔스는 비인간 영장류 세계에 유례가 없는 근본적인 곤란을 겪는다. 즉 호모 사피엔스 여성은 특이하게도 의존적이다. 우리는 음식과 자원을 집약적으로 공유하는 유일할 영장류로, 많은 사회의 여성이 주거와 생활을 남성에게 의존한다. 어미 새와 침팬지, 에페족 엄마 들은 새끼가 있다고 해서 먹이 구하러 다니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밥벌이를 하면 힘이 생긴다. 내키는 대로 동반자 관계를 벗어나고, 애인을 취하고, 자유롭게 드나들고,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칼라하리 사막과 동남아 우림지에서처럼,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도 자원이 관계의 핵심이다. 덩이뿌리와 샤 뿌리를 캐오지 않으면, 돈을 벌지 못하면, 결혼생활의 약자가 된다. 세상의 약자가 된다. 무조건. (239)

 

남편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괜찮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과 비인간 영장류에 관한 비교연구에 따르면, 그런 방식으로는 밥벌이하는 자의 권위를 살 수 없다. 이를 잘 알거나 어렴픗이 눈치채고 있기에,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 (243)

 


물론이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정확히 말하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노동은 임금으로 변환될 수 없기 때문에, ‘지급되지 않기 때문에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 한다. 또한 남편이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기 때문에 아내는 별 수 없이 어퍼이스트사이드의 마미노믹스Mommynomics(엄마경제)’에 항복하게 되는데, 아이들 학교의 기념식 준비, 소식지 편집, 도서관 운영, 수제 빵 판매 행사 개최등이 그녀들의 무료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학교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그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 남편의 고수입 덕분에 일할 필요가 없는, 일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은 여성의 경제활동을 가로막고, 고스펙 고학력의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아이들과 학교를 위한 활동에만 사용하게 되어, 여성은 경제적으로 더욱 남편에게 더욱 의존하게 된다.

 


먼저 시작한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서문에서부터 여성주의를 표방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에 푹푹 박힌다. 아프면서 시원하다. 반면 이 책은 좀 다른 느낌으로 시작한 책이다. 뉴욕 0.1% 최상류층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순수하게 궁금했고, 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행동을 비인간 영장류의 생태 및 행동과 비교하는 저자의 설명도 설득력이 있었다. 다만 이들의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무슨 이런 사람들이 다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겠다. 일례로, 어퍼이스트사이드 사회에 완벽히 동화된 저자는 버킨백을 구입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이야기가 한 챕터다. 그러니까 한 챕터가 온통 버킨백 이야기라는 뜻이다. 가방 하나에 왜 이렇게 목숨을 거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명품백에 대해 두근두근한 마음 잠시라도 가졌던 사람이라면, 나름 공감하며 읽을 수도 있겠다.

 

243쪽의 남편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 사이에 있는 심연 같은 차이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생각 있는 여자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수 있다에서 생각 있는 여자라는 표현을 원서에서 찾아봤더니, 대강 이렇다.  “… just sensing the disequilibrium, the abyss that separates your version of power from your man’s, could keep a thinking woman up at night.”

 

a thinking woman up at night.

 

나는 원체 잠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밤잠을 이루는 일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몇 일간 좀 심난하기는 했다. 나가서 무슨 열매라도 주워 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과 그러면 내가 열매 주으러 나간 사이 아이들은 무얼 할까, 하는 생각. 아직은 최소공배수 구하기를 가르쳐 줘야한다는 생각과 어차피 최소공배수 구하기가 끝나면 내가 아이들의 공부 봐주기는 어려워질거라는 생각. 지금은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때가 아니라, 내가 읽은 페미니즘이 가능해지도록 일을 해야할 때라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을 벌지 않고 딸기, 감자, 양파, 베이컨을 사느라 돈만 쓰고 돌아오는 길에,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a thinking woman up at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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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의서재 2017-03-09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출간한 책들 중 가장 흥미로운 부제를 단 책 같아요. 급 읽어보고 싶으나.. 반년 미루기로.. ^^ 대신 단발머리님 리뷰로 대신하고요

단발머리 2017-03-10 09:30   좋아요 0 | URL
네, 이 책 부제 잘 지었다는 이야기가 솔솔 들리더라구요. 책을 다 읽은 저도 같은 생각이구요^^

책 뒷부분에서, 작가가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 (유산의 경험)을 갖게 되는데요, 그렇게도 살벌하고 냉정했던 그녀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작가를 위로해 줬어요. 작가는 이렇게 썼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누군가는 내게 연락했다. 나를 점심모임에 데려가거나, 꽃을 보내주거나, 우리 가족을 자기네 여름 별장에 초대하거나, 이메일로 그저 안부를 묻기도 했다. (333쪽)

수이 2017-03-09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급호감_

단발머리 2017-03-10 09:32   좋아요 0 | URL
완전 급호감, 누구에 대해서일까요?
1) 작가
2) 책
3) 단발머리

정답은?!?!?

AgalmA 2017-03-1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존성에 대해서라면.... 가장의 역할을 서로 바꾸기만 해도 그게 시스템이 만든 성질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요ㅎ 남성들이 잘 못한다고 여성의 그 능력(주부 9단 같은)이 더 뛰어나다는 논리는 명백히 잘못된 것.
여성이 아버지, 남편, 아이에 의해 신분과 권력을 잡는다는 설정, 한국 막장 드라마 아니어도 여전히 전세계적 프로파간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삶엔 리셋 버튼이 없으니 참 힘든 나날입니다.

단발머리 2017-03-15 16:00   좋아요 1 | URL
이 책 속의 냉혹한 현실에서 동물의 세계를 방불케하는 행동을 보이는 여성들은 대부분 고학력의 부유층 전업주부들인데요. 그녀들도 경제력이 없기 때문에, 남편은 대단한 부자이지만 자신은 돈을 벌지 않기 때문에, 남편에 대한 의존도가 엄청나게 높아요. 그러니, 화려한 옷차림으로 아이가 다니는 학교 이름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해요.
완벽하게 예쁘고, 완벽하게 날씬한 여자들이요.
어찌 보면 돈만 많다 뿐이지, 부럽지가 않네요.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할까 싶기도 하구요.
 















 

어제 오후부터 오늘 아침까지 읽었던 책은 은유 산문집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이다. 나는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몇 편 읽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첫 두 쪽을 읽으면서 책을 두 번 덮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보다는 카를 마르크스를 공부했다’(5)나는 외동딸로 컸다’(4)는 내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엄마가 쌀 씻는 일 한번 시키지 않았다’(5)나 스스로를 남자와 동일시하거나 남자의 승인을 기다리는 명예 남성의 존재로 만들었다’(5), 그리고 내가 여성성을 맞닥뜨린 건 결혼 이후다’(5)는 내 이야기였다. 잠깐씩 숨을 고르고 이 책을 읽어나간다.

 

점심에는 친구가 보내준 명화를 감상했다. <노팅힐>.

 

남녀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하는 단계는 그야말로 제일 흥미진진한 때다. 다섯 번이던가 여섯 번,  ‘No’를 연발하는 줄리아 로버츠에게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질문하는, 말을 거는, 더듬거리면서 허둥대는 휴 그랜트가 너무 좋았다. 처음에 줄리아 로버츠가 나올 때 나오는 ‘She’라는 노래가 좋았고, 영화 말미에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휴 그랜트에게 자신을 거절한 게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며 웃는, 눈물을 글썽인 채 환하게 웃는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1999년 작품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올해의 영화로 꼽고 싶다.










 


오후에는 비평 이론의 모든 것을 읽었다. 951쪽 중에서 27쪽까지 읽었는데, 여기까지 중에서 의미 있는 문장이라면, “이론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새롭고 유익한 방법들에 따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26)” 이다. 대출 반납일까지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1차 목표는 <4장 여성주의 비평>까지 읽어내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서는 파크애비뉴의 영장류를 들었다. 잘 지었다고 소문난(?) 이 책의 부제는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이다. 저번 주에 촛불집회에 나갔을 때 교보문고에서 PRIMATES of PARK AVENUE 를 구입했다. 알라딘보다 2,500원이나 저렴하다는 건, <바로드림>을 한 후에 알았다. 표지색이 특이하고 예쁘다. 진도가 지지부진해서, 어제부터 이 책으로 갈아탔다.



이곳 아이들의 생활이 그저 특이한 정도라면, 엄마들 생활은 가히 괴이한 수준이다. 완벽한 특권층 여성을 지칭하는 이른바 금수저녀gets’ 생활상을 나는 체험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발견한 바로는, 그녀들의 정체성은 자치회 면접이나 자녀의 명문 학교 진학 같은 어퍼이스트사이드 특유의 잔인한 통과의례를 거치며 형성된다. 그녀들이 맨해튼 게이샤같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시간과 돈이 남아도는 고학력자 여성들이 피지크 57 Physique 57과 소울사이클SoulCycle을 광적으로 추종하며 직업 대신 완벽한 몸매 가꾸기로 과시욕을 채우는가 하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명품(그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후, 내 경우엔 버킨 백이었다)을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탐색적은 벌이기도 하고, 장애인 통행권을 가진 디즈니랜드 안내원을 암암리에 고용해 합법적인 새치기를 꾀하는 방법 같은 내부자 정보를 집요하게 찾아내기도 한다. (24)

 


어떤 책이었던가. 인류 진화에 있어 뒷담화의 역할에 대해 긍정하는 문장을 읽은 것 같은데... 그녀들의 삶이 부럽지는 않지만, 조금 궁금하기도 하고. 아무튼 그런 의미로, 내게는 너무 먼 그녀들의 삶을 엿보는 즐거움에 빠져보려 한다.

 

금요일 밤이고, 내일은 토요일. 토요일엔 광화문. 광화문. 광장 그리고 촛불.


싸울 때마다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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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7-03-0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팅힐의 줄리아 로버츠의 환한 웃음이 참 매력적이예요. 내용이 가물 가물거리는데, 다시 봐도 볼때마다 좋은 영화들이 있지요. 저는 워렌비티와 아넷 베닝의 러브 어페어가 그래요. 그 장면만보면 아직도 울컥거리고 둘다 아직도 결혼생활 유지하는것도 좋아요. ㅎㅎ

단발머리 2017-03-04 08:17   좋아요 0 | URL
저도 <노팅힐> 포스터 볼 때마다 좋은 기억에 환하게 웃기는 했는데 (물론 줄리아 로버츠의 환한 웃음은 아니겠지만요.^^), 어제 친구 덕분에 다시 영화를 보았는데, 넘 좋더라구요. 예전에는 주인공만 보였는데, 이제는 주인공 친구들도 막 보이구요 ㅎㅎㅎㅎㅎ

보슬비님께는 그런 영화가 <러브 어페어> 군요. ost가 아주 좋았던 그 영화요.^^

아무개 2017-03-04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유 산문집을 읽으면서
단발님 생각이 계속났어요.
단발님의 리뷰가 많이 기대되요.


단발머리 2017-03-15 16:01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을 해 주셨다는데 큰 기쁨과 감사를 드립니다. ㅎㅎㅎㅎㅎ
은유 산문집은 반 정도 읽었는데요, 잠깐 쉬고 있어요.
연거퍼 읽기 힘들더라구요. ㅠㅠ

수퍼남매맘 2017-03-04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유 작가의 산문집 단발님 리뷰가 궁금해요. ˝노팅힐 ˝ 볼때마다 좋아요. 또 보고 싶네용.

단발머리 2017-03-15 16:02   좋아요 0 | URL
제 리뷰가 궁금하시다는 분이 2분이나 계셔서 리뷰를 써야할텐데, 기대하시고 궁금해하시니 약간 걱정되려고 해요.
근사하게 써야할텐데.... ㅎㅎㅎㅎㅎㅎ
<노팅힐>은 넘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남주인지 여주인지 모를정도로요. 정말 좋네요.^^
 


 












제인 오스틴 시리즈레이디 수전 외에는 <레이디 수전>, <왓슨 가족>, <샌디턴> 이렇게 3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다. 악녀 주인공 레이디 수전의 이야기를 서간체로 풀어낸 <레이디 수전>,이모에게 맡겨졌다가 집으로 돌아온 에마와 이웃들의 이야기인 <왓슨 가족>, 그리고 건강이라는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있는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작품 <샌디턴>이 그것이다.


 

오만과 편견


 













내가 제인 오스틴을 읽을 때, 기대하는 장면은 이렇게 두 가지다. 하나는 볼품없고 가난한 집안의 처녀에게 청혼하면서, 자신의 청혼이 100% 받아들여질 것이라 예상했다가 그것이 좌절되자 엄청나게 화를 내는 어떤 남자의 모습.

 


다아시가 응접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어가며 소리쳤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를 어떤 사람으로 보시는지 이제 잘 알아들었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 말씀대로라면, 제가 엄청나게 잘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엘리자베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의 자존심을 긁어 놓지 않았다면, 이런 잘못 정도는 눈감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이런저런 망설임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는 제 솔직한 고백에 자존심이 상하셔서 깐깐하게 나오시는 게 아닙니까? … 당신 집안사람들이 신분이 낮은 것을 제가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저희 집안보다 한참 밑에 있는 집안과 맺어지는 것을 제가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61)

 


또 하나는 출생 때부터 약속된 결혼과 집안간의 금전적 거래를 이유로, 썸을 타고 있는 남자의 예상 청혼을 거절하라고 요구하는 귀족 부인과 이를 거절하는 어떤 여자의 모습.

 


더 이상은 못 참겠군. 베넷 양, 묻는 말에 바른 대로 말해. 내 조카가 자네한테 청혼했나?”

여사님께서 그런 일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내 조카가 정신 나간 게 아니라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내 조카가 자네에게 잠깐 홀려 있는 동안 자네가 술책을 부렸을 수도 있겠지. ... 내가 말할 때는 끼어들지 말고 그냥 들어. 내 딸하고 내 조카는 천생연분이야. 양쪽 어머니 가문은 같은 귀족 혈통이지. 양쪽 아버지 집안은 둘 다 덕망 있고 유서 깊고 지체 높은 그런 가문이야. 작위는 없지만 말이야. 양쪽 다 재산이 엄청나. 양쪽 집안 사람들이 입을 모아 두 사람을 짝지어 주기로 했는데, 그들을 갈라놓을 일이 뭐가 있나? 집안도 천하고, 친척들도 변변찮고, 재산 하나 없는 아가씨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 내가 그걸 두고 볼 것 같아? 천만에. 보고만 있을 수 없지. 보고만 있지 않지. (464)

 


나는 제인 오스틴을 읽을 때, 위의 모습을 그러니까, 사랑이 거절돼 거침없이 날뛰는 남자와 부당한 요구를 하는 여자, 그리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 속에서도 의연한 여주인공을 기대한다. 잠깐, 아주 잠깐은 우아한 척, 고상한 척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했을 때,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소리 지르고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무시하고 화를 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을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품성을, 인격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도전 받을 때, 거절 당할 때,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여기가, 내가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는 지점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에는 말 그대로 타고난 부자, 훤칠한 외모의 잘난 사람들과 볼품없는 가문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교양 있는 척, 우아한 척 서로의 본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폭발해버린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인간의 본모습, 인간 군상들의 민낯을 가감없이 확인할 수 있다.

 


<왓슨 가족>에서는 조금 다른 장면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차갑고 경솔하지만 멋진 외모, 좋은 집안의 오스본 경이 마음에 드는 왓슨 가의 에마의 환심을 사려고 풀어내는 이 이야기 말이다.

 


궃은 날씨엔 여성분들은 말을 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승마는 하십니까?”

아니요.”

여성분들이 왜 말을 타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말을 탄 여자들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데요.”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승마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말을 소유할 돈이 없을 수도 있어요.”

승마가 숙녀들에게 얼마나 어울리는지 안다면 누구나 하고 싶어 할 겁니다. 왓슨 양, 일단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돈은 곧 생겨요.”

경께서는 우리 여자들이 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바로 그 점이 오랫동안 남자와 여자 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지점이죠. 하지만 그건 차치하더라도, 여자들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있지 않겠어요. 오스본 경, 여성이 근검절약하면 꽤 많은 돈을 모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절약해도 적은 수입을 큰 수입으로 바꿀 수는 없어요.”(158

 


말을 탄 여자의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에 여자들은 궃은 날씨에 승마를 해야한다는 궤변에서 시작해 일단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돈은 곧 생긴다는 이 억지를 어찌해야 하나. 좋아하는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한 오스본 경의 스텝은 자꾸만 꼬이고, 스스로 만들어낸 궤변과 억지는 본인도 처리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다. 그렇게 오스본 경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에마에게 비호감으로 자리한다. 예상했던 장면, 기다렸던 장면은 아니지만, 특별히 관심이 가는 장면이다. 호감 가는 여자 앞에서 남자가 부리는 호기. 오버하는 남자, 담담한 여자. 꼬이는 스텝, 멀어져 가는 당신.

 

비평 이론을 배울 때, 비평 이론에 근거해 작품을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론 자체에 대해 배울 때, 난 그 일이 참 필요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당장 교재를 이해하는 건 고사하고, 선생님의 수업 내용도, 선배들의 질문도, 그에 대한 선생님의 답변도, 말 그대로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학점은 진작은 포기했고, 너무 힘든 수업이라 웬만하면 피해간다는 그 수업의 참여(?)에 의의를 뒀다. 작품은 읽고 느끼는게 중요하다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다. 특정한 이론을 배우는 일이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방해가 될 거라 생각했다.

 

모르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페미니즘 책을 몇 권 읽은 후에는, 책이 다르게 보이고, 다르게 읽힌다. 하나의 틀, 하나의 툴만 강요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안다. 물론이다. 세계를 남과 여로만 해석하는 사람과는 길게 이야기할 수 없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페미니즘은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100명의 여성이 있다면 100가지 페미니즘 이론이 있다고 말한 정희진님의 말은 옳다(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프롤로그, 9). 참으로 그렇다.

 

그래서 혹은 그렇기 때문에 제인 오스틴이 다르게 읽힌다.노생거 수도원의 맨스플레인도, 이 책 <왓슨 가족>의 오스본 경도 그렇다. 연애, 사랑, 결혼의 주제만을 다루었다고, 여자들만 읽는 이야기를 썼다고 평가 절하되었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에서, 나는 특유의 유머와 은근한 냉소로 잘난 척 하는 남자들과 이에 대항했던 여자들의 당당한 모습과 마주친다. 오늘의 현실로 옮겨와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녀의 날카로움에 다시 한 번 와우~~’를 외친다.

 

하여, 문학 비평 이론에 대한 책들을 찾아봤고, 로쟈님의 페이퍼를 살피고는 이렇게 세 권을 추렸다. 국내에서도 그렇고, 영어권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읽히는, 그러니 가장 성공적인 문학이론입문서’ (로쟈님 페이퍼, <문학이론이란 무엇인가, 2011-03-16>)문학이론입문(창비)과 비평이론 개설서에 목말라 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원서로 구해 읽는추천서로 이름을 알린 타이슨의 역작(로쟈님 페이퍼, <비평이론 공부의 로드맵, 2012-04-22)비평이론의 모든 것(앨피, 2012) . 마지막으로문학과 사회 116-2016. 겨울 (별책 <문학과 사회 하이픈: 페미니즘적-비평적> 포함)을 골라 두었다.



 













이렇게 세 권을 골랐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골라놓고, 목차를 본다.

 

비평이론의 모든 것(앨피, 2012)

 

1장    비평이론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한 것들

2장    정신분석 비평

3장    마르크스주의 비평

4장    여성주의 비평

5장    신비평

6장    독자반응 비평

7장    구조주의 비평

8장    해체 비평

9장    신역사주의와 문화비평

10장  레즈비언·게이·퀴어 비평

11장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학비평

12장  탈식민주의 비평.

 

아하이런 분위기구나. 예상을 뛰어넘어 이 분야가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예전에는 들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생각이 솔솔, 솔솔 피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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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2-27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멋지다 ♡
저도 제인 오스틴의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영화로 [레이디 수전] 너무 재미없었는데 책으로 읽으면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가 뭔가 더 알고 싶어하고 생각하고 그래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글을 보면 저는 너무 씐나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단발머리님이 이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 읽고 써주셔서 저는 진짜 행복합니다. 엉엉 ㅠㅠ

단발머리 2017-03-03 15:16   좋아요 0 | URL
제인 오스틴 북클럽이 이해가 되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너무 재밌고, 너무 잘 읽혀요. ㅎㅎ
멈추지 않고 읽고 쓸 때, 누구가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힘이 나요.
저에게 의미 있는 이 일을, 다락방님이 좋아해주고, 응원해줘서, 같이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좋네요.
우리 계속 생각하고 공부하고, 이야기해요~~~ 하트뿅뿅!!

지금행복하자 2017-02-27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최고의 책 영업은 정성어린 마음이 듬뿍담긴 리뷰에요~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편견밖에 못 읽었는데 급 호기심이 들게 해주세요~~ ㅎㅎ

단발머리 2017-03-03 15:17   좋아요 0 | URL
저의 책 영업을 출판사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저는 제인 오스틴 몇 권 읽었는데, <오만과 편견>이 제일 좋더라구요.

cyrus 2017-02-27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평 글을 읽고 이해하는 일은 어려워도, 비평하는 방식과 관점을 공부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남의 글을 비평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하니까요. ^^

단발머리 2017-03-03 15:18   좋아요 1 | URL
<비평 이론의 모든 것> 이제 막 빌려와서요, 읽기 시작하려는데... 오호... 950쪽이네요.
오호.....

moonnight 2017-02-27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의 글을 읽는데, 뭔가 저도 모르게 두근두근 침도 꼴깍 삼키게 됩니다^^; 제인 오스틴을 몇권 못 읽었지만 오만과 편견을 읽었을 때의 숨막힘^^;이 다시 떠오르네요. 보관함에 담으면서, 이렇게 예쁜 책들을 전집으로 갖고 싶은 욕망이. 큰 일ㅠㅠ;;

단발머리 2017-03-03 15:21   좋아요 0 | URL
아하~~ moonnight님을 두근두근하게 했다니, 저도 막 심쿵해지네요. ㅎㅎㅎㅎㅎㅎ
예쁜 전집에 대한 꿈은 언제나 계속되는데요, 저번에 제인오스틴 한정판으로 나왔을 때도 그랬지요.
저는 <오만과 편견>을 두 권을 가지고 있는데요.
앞으로도 <오만과 편견>이 다른 장정으로 나오면 또 구입할 듯 해요. ㅎㅎㅎ

순오기 2017-02-2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역시 단발머리님!♥

단발머리 2017-03-03 15:22   좋아요 0 | URL
오호~~ 순오기님~~ 안녕하세요^^
저도 하트발사할래요. 하트뿅뿅!!
 









 








저자 프랜시스 S. 콜린스는 인류 최초로 31억 개의 유전자 서열을 해독한 세계적인 유전학자이다. 생명의 암호가 작동하는 완벽하고 정교한 질서속에서 과학자 중의 과학자 콜린스는 신의 언어를 발견했다.


신앙은 설명할 수 없다. 믿음은 객관적일 수 없다. 만난 사람. 직접적이고 인격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지난 역사 속에서 종교의 폐해,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 그들에 의한 거짓 메시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나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이해와 설명이다.


신앙을 가진 과학자로서, 과학적 근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신앙인으로서, 저자는 그가 발견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험실 속에서, 유전자 지도를 해독하면서 만나게 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또한 같은 톤으로, 이미 축적된 과학적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앙인에게 무조건 과학을 적대시하는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냉정하게 지적한다.


우주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 중, 10초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다. 빅뱅 이전의 우주, 처음 10초 이전의 우주에 대해 과학자들은 알지 못 한다. 설명하지 못 한다. 이 우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과학자들도 대답할 수 없는 10초 이전의 일을 우리는 언제쯤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지구의 시작, 우주의 시작, 내가 아는 이 세계의 시작을.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무한에 가까운 고밀도에, 크기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로 시작했다는 데 동의한다. ‘특이점이라 부르는 이 상황에서는 물리학 법칙들이 무너진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과학자들도 대폭발이 일어나던 그 첫 순간, 즉 처음 10초 동안 일어난 일을 해석하지 못한다(10초는 1초의 100만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0만 분의 1 10분의 1초다.) 그 뒤부터 오늘날의 관찰 가능한 우주가 탄생하기까지 일어났을 일들은 추측이 가능하다. 물질과 반물질 소멸, 안정된 원자핵 형성, 전자와 최초의 수소, 중수소, 헬륨 형성 등이 그것이다. (71)



저번주에 읽었던김상욱의 과학공부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빅뱅이론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나오는 질문. 첫째,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조차도 없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의 물리학자들도 비슷할 거다. 둘째, 우주가 팽창한다면 어디로 팽창해가나요? 우주 바깥에 빈 공간이 있다는 말인가요? 이미 이야기했듯이 우주에는 바깥이 없다. 그냥 우주 전체가 팽창하는 거다. (35)



호킹 박사는 시간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주가 왜 꼭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어야 했는지, 우리 같은 인간을 탄생시키려는 신의 의도적인 행위로밖에는 달리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 (80쪽)



호킹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한다.


우주는 왜 재붕괴하는 모형과 영원히 팽창하는 모형을 가르는 팽창 임계점 근접한 곳에서 시작해 100억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임계점에서 팽창하고 있을까? 대폭발이 일어나고 1초 뒤의 팽창률이 1×10만 분의 1(10-)이라도 작았다면, 우주는 현재의 크기에 도달하기도 전에 다시 붕괴했을 것이다. (78)



저자가 자신이 얻게 된 과학적 지식과 개인적 경험을 통해 설득하려는 쪽은, 하나님 없는 우주를 전제로 설명할 수 없는 우주를 설명하려는 과학자들과 천지를 7일만에 창조한 신이 인간과 동물을 각각 개별적으로 창조했다고 믿는 신앙인들이다. 이번에는 그 신앙인 차례다.



우라늄, 칼륨, 스트론튬 세 가지 방사성원소는 천천히 붕괴해 납, 아르곤, 루비듐으로 변하는데, 이 세 쌍의 원소 중에 어느 한 쌍을 측정하면 어떤 암석이든 그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이 세 쌍으로 각각 지구의 나이를 측정해보면 놀랍게도 단지 1퍼센트의 오차로 45 5,000년이라는 일치된 결과가 나온다. (94)



다윈의 진화론은 임의로 일어나는 변종에 자연선택이 작용하고 우리는 그 자연선택 과정을 거쳐 동일한 조상에게서 진화해왔다는 이론이다. (130) 컴퓨터가 DNA 서열의 유사성만을 기초로 하여 그린 다양한 유기체의 생명계통도, 대단히 정확한 수준까지 밝혀진 인간과 생쥐의 게놈 비교, 공통된 조상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인 원시반복요소(ARE)로 알려진 유전자 요소 연구 등은 다윈의 진화론의 주장과 상당수 일치한다.



신은 무력해진 원시반복요소를 적절한 자리에 배치해 우리를 혼란케 하고 오도하려 했다고 결론내리지 않는 한, 인간과 생쥐는 조상이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140)







저자는 무신론, 불가지론, 창조론, 지적설계론을 모두 거부한다. 저자는 신앙을 가진 과학자로서 유신론적 진화를 받아들인다. 미국에서 다윈의 대표적 옹호자였던 아사 그레이와 20세기에 진화론적 사고를 확립한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유신론적 진화론자였다. 약간씩 변형된 형태도 많지만 전형적인 유신론적 진화는 다음과 같은 전제를 기초로 한다.


1.     우주는 약 140억 년 전에 무에서 창조되었다.

2.     확률적으로 대단히 희박해보이지만, 우주의 여러 특성은 생명이 존재하기에 정확하게 조율되어 있다.

3.     지구상에 처음 생명이 탄생하게 된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 수 없지만, 일단 생명이 탄생한 뒤로는 대단히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와 자연선택으로 생물학적 다양성과 복잡성이 생겨났다.

4.     일단 진화가 시작되고부터는 특별히 초자연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5.     인간도 이 과정의 일부이며, 유인원과 조상을 공유한다.

6.     그러나 진화론적 설명을 뛰어넘어 영적 본성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다. 도덕법(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이 존재하고 역사를 통틀어 모든 인간 사회에서 신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그 예가 된다. (202)



이런 유신론적 진화는 과학이 자연계에 관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모든 사실과 양립 가능하며, 세계의 주요 일신교들과도 양립 가능하다.(203) 물론 유신론적 진화라는 관점 역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 신앙이라는 도약, 믿음이라는 점프대를 통해서만이 인간은 신을 만날 수 있다.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에서 칼 세이건은 진화라는 개념이 없다면 동물이나 인간에 머무는 영혼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 역으로 진화를 믿으면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138)”고 말했다. 나 역시 영혼과 진화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믿어왔었다. 아니었다. 영혼도 진화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을 닮은 영혼이 깃드는 장소로서의 육체가 진화라는 오랜 과정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믿음과 동시에, 내 몸 속의 세포들 역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믿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또한 진화의 놀라운 과정이 대강이라도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그것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인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 진화는 우연에 지배되는 듯하지만, 신의 관점으로 보면 그 결과는 하나하나가 전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다. 이처럼 신은 각각의 종이 창조되는 순간에 일일이 완벽하게 개입할 수 있지만, 시간 개념이 일차원적 수준에 머무는 우리가 보기에는 이 과정이 방향성도 없는 무차별적 과정으로 보이기 쉽다. (206)



오 그렇습니다. 주께서 내 속과 겉을 빚으시고

모태에서 나를 지으셨습니다.

내 몸과 영혼을 경이롭게 지으신 높으신 하나님,

숨 막히도록 멋지신 주께 감사드립니다!

그 솜씨 너무 놀라워, 내가 주님을 마음 깊이 경배합니다!

주께서는 나를 속속들이 아시며

내 몸속의 뼈 마디마디까지 아십니다.

주께서는 정확히 아십니다.

내가 어떻게 지어졌는지,

아무것도 아니던 내가

어떻게 이처럼 근사한 형상으로 빚어졌는지를.

책을 펼쳐 보시듯, 주께서는 내가 잉태되고 태어나기까지

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내 생의 모든 시기가 주님 앞에 펼쳐졌습니다.

태어나 하루를 살기도 전에,

이미 내 삶의 모든 날들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시편 139 13-16) 



진화라는 지난한 과정 속, 신의 섭리와 간섭은 시편 기자의 노래 속에 아름답게 드러난다. 이 놀라운 진화의 결과가 바로 나이고, 나는 아직도 진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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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2-2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이지 편협한 독서를 하는데 단발머리님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다 읽으시는군요! 멋져요!! @.@
더 열심히 읽어야지, 불끈! 막 이런 마음이 됩니다. 후훗

단발머리 2017-02-23 12: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아이고 부끄럽군요. 저는 아직 <싸울 기회>도 , <맨박스>도,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도, <라이프오어데스>도 안 읽었는걸요. 다락방님의 독서 이력을 겁나게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다락방님이 멋지다~고 해주셔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에 아주 쉬운 과학책을 몇 권 읽으면서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겨서, 묻고 하는 도중에 어떤 사람이 그러더라구요. 개념이 막 생기려하면 그 분야 책을 연달아 읽는게 좋다고요.
그런데, 갑자기.... 그래... 페미니즘 책을 그렇게 읽어야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요즘에 페미니즘 책들이 많이 나와서 너무 좋기는 한데, 따라 읽기가 좀 버겁기는 해요.
또 우리 모두 알다시피.... 페미니즘 책들 읽다보면 화가 나고.. 그런 순간들이 많잖아요.
저는 원래 여러권을 동시에 읽기도 하고, 소설 읽고 나면 다른 분야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페미니즘에 대해서 조금 더 진지하게 읽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진짜 진지한 책 한 권 들면, 바로 좌절모드. 이 쪽이 아닌가봐~~~ 하게 돼요.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이 일들이 제일 먼저 제게 의미있는 일이지만,
제 글을 읽어주고 같이 생각하는 이웃님들, 그리고 격려해주시는 다락방님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도 불끈!해 지네요. 우리 모두 불끈 불끈, 화이팅입니다. ^^

AgalmA 2017-02-23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종교를 신화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세계와 나를 이해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으로.

단발머리 2017-02-24 15:38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같은 경우 신화와 종교는 전혀 다르지만요~~~ ㅎㅎ 금요일이네요. 금요일 밤에는 항상 스케쥴이 똑같지만 그래도 기다려지는 불금^^ 🔥금^^
 
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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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퇴장』을 다시 읽었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마흔 살 연하의 여자에게 굴복한 유명작가에게 매료된 게 사실이다.

 

산꼭대기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옆, 새나 들짐승이나 드나드는 곳. 뉴욕에서 128마일, 가장 가까운 이웃도 반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십일 년 동안 살았던 사람(45). 영화도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휴대전화, VCR이나 DVD 플레이어, 컴퓨터도 가지지 않는 사람. 하루 종일 글을 쓰고, 밤늦게까지 글을 쓰는 사람(13). 내가 반한 사람이 이 사람이다. 사회로부터의 존경과 자신의 것이 분명한 명예를 내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이기를 고집하는 남자. 내가 반한 사람이 바로 이 남자다.

 

그가 제이미에게 빠진다. 상류층 가문 출신의 텍사스 사람이 쓰는 억양에 자신이 아름다움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듯 신중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의 그녀에게 사로잡힌다.    

 

나는 계속 안절부절못했다. 평화로운 순간이라곤 없었다. 어쩌면 내 평생 처음으로 젊은 여성의 여성스러움을 응시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생애 마지막으로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나는 차마 그녀를 만져볼 생각도 못하고 떠났다. 그녀가 증언조서라도 받는 것 같다고 묘사한 그 대화 내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보다 훨씬 가까이 그녀가 앉아 있었는데도 차마 그녀의 얼굴을 만져볼 생각조차 못했다. ...  나는 실성하는 게 어떤 것인지 일흔한 살에 배우고 있었다. 아직도 자아 발견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164)  

 

젊음을 제외한 모든 걸 가진 남자. 명성과 지혜,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서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빼앗아버린 여자에게 사랑을 갈구한다.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여자에게 오히려 그녀를 숭배한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자신과 같은 감정을 일으킬 수 없기에 슬퍼한다. 완벽하게 절망한다. 그녀를 대하는 그의 방식. 그녀와 단둘이 방 안에 있고 싶다며 그녀를 찾아오고, 자넨 날 수집했네,라고 말하는... 그녀의 애인을 질투한다 말하고, 욕망에 이끌려 키스하지 않겠다 말하는. 질문하고 듣고 또 말하는

 

이번에 읽을 때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던 문단은 다르다

 

매니(로노프)는 호손과 그의 누이 엘리자베스와 관련된 교활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학계의 추측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신에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상징할 ― 당신 말처럼 그를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모하게 만든 그 놀랍고 낯선 감정들을 모두 면밀하게 검토해볼 ― 이야기를 찾던 중에 호손과 그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누나에 관한 그런 추측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거예요. ... 그에게 소설이란 무언가를 묘사하는 게 아니었어요. 이야기 형식 안에서 사색하는 것이었죠. 그는 생각한 거예요.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라고요.“ 이야기하는 동안 실은, 나 또한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현실을 내 것으로, 에이미의 것으로, 클러먼의 것으로, 다른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그리고 이후 한 시간 동안 나는 눈부신 수사를 동원해 내 주장의 타당성을 설파했고 결국 스스로도 그것을 믿기에 이르렀다. (264)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든다. 소설가가 만든 세계 속에서 소설가는 산다. 살고 생각하고 경험한다. 이야기 형식 안에서 사색한다. 소설의 현실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믿고 그 속에서 산다.

 

로노프는 호손과 그의 아름다운 누나에 대한 추측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에이미에게 말한다. 로노프의 연인 에이미는 그가 말한 현실, 누이와의 근친상간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로노프의 전기를 쓰려하는 클러먼은 그녀가 말한 현실, 근친상간의 현실을 사실로 해석한다. , 로노프의 추종자이며, 한때 그의 연인 에이미를 사모했던 나는, 그 현실이 로노프가 만든 것이라 주장한다. 로노프의 근친상간을 믿는 에이미의 현실, 로노프의 근친상간을 믿고 싶어하는 클러먼의 현실을 자신의 생각대로 재구성한다. 근친상간은 로노프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로노프가 만든 현실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말한다. 그렇게 주장하고, 자신도 그렇게 믿어버린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상상일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거짓일까.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서부터 추측일까.

 

분명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장갑을 식탁에서 발견하거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던 열쇠를 원래 놓았던 자리에서 찾는 일처럼, 분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없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오해고 착각이다. 이 소설, 필립 로스가 그려놓은 이 세계 속에서, 필립 로스는 말한다.

 

이걸 내 현실로 만들겠어.

 

맙소사, 그가 말한 대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만들었고, 그가 만든 현실은 그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 되었다. 이제 나는, 그가 만든 현실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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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쇠
    from 마지막 키스 2017-02-22 08:42 
    세상 일은 정말 알 수 없다. 아니 이런 말은 너무 거창한가... 기억이란 뜬금없고 연상이란 것도 역시 뜬금없는 것. 나는 위에 먼댓글로 연결한 단발머리님의 리뷰를 오늘 아침에 읽었다. '필립 로스'의 《유령 퇴장》에 관한 리뷰였고, 나 역시 그 책을 읽었으며 일전에 단발머리님의 글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부터 내가 생각한 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단발머리님의 리뷰 중에 잠깐 '열쇠'란 단어가 ...
 
 
다락방 2017-02-22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이 리뷰를 읽고 저는 엉뚱하게도 쉼보르스카의 시 한 편이 생각났어요. 리뷰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러나 ‘열쇠‘라는 단어 때문에요. 아아, 저를 용서하세요.


열쇠
-쉼보르스카


열쇠가 갑자기 없어졌다.
어떻게 집으로 들어갈까?
누군가 내 잃어버린 열쇠를 주워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리라 - 아무짝에도 소용없을 텐데.
걸어가다 그 쓸모없는 쇠붙이를
휙 던져버리는 게 고작이겠지.


너를 향한 내 애타는 감정에도
똑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이미 너와 나,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랑‘이 줄어드는 것이니.
누군가의 낯선 손에 들어 올려져서는
아무런 대문도 열지 못한 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열쇠‘의 형태를 지닌 유형물로 존재하게 될
내 잃어버린 열쇠처럼.
고철 덩어리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녹(綠)들은 불같이 화를 내리라.


카드나 별자리, 공작새의 깃털 따위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런 점괘는 종종 나온다.

단발머리 2017-02-22 08:33   좋아요 1 | URL
전혀, 전혀 엉뚱하지 않아요. ㅎㅎㅎ
쉼보르스카,.... 아, 예전에 제가 남자로 알았던 그 시인.
<충분하다>의 그 쉼보르스카의 시를 댓글로 달아주셔서
제 서재의 품격이한껏~ 올라갔네요.^^

잃어버렸다 혹은 잊어버렸다는 점에서 이 리뷰와 딱 맞아떨어지는 시예요.
<유령퇴장>에서는 주커먼이 에이미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에이미가 오지 않았잖아요.
전화번호를 메모해둔 종이를 찾지못해 그녀에게 연락도 못하고, 호텔에 돌아와 방안을 샅샅이 뒤진후에야,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지갑에서 발견했죠.

˝나는 피에를루이지에 그걸 가져가는 걸 잊은 게 아니라
가져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