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일탈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여러 가정은 여성을 좋은 여자/나쁜 여자로 이름 붙이는 데 일조하면서 여성 섹슈얼리티를 두 범주로 나눈다. (237)


보다 자세히 검토해 보면, 여성들간의 구분이 그들의 성적 활동에 근거함을 알 수 있다. 집안의 여성들, 즉 한 남성의 보호 아래 그를 위해 성적 서비스를 하는 여성들은 여기서 베일이 씌워지는 존중받을 만한여성들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한 남자의 보호와 성적 통제 아래에 있지 않은 여성들은 공공의 여성들’(public women)로 지정되고 따라서 베일을 씌우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창조』, 241)



남성은, 여성을 결혼 제도 속에 보호해야 하는 좋은여자와 결혼 제도 밖의 부도덕한 나쁜여성으로 구분했다. 여성은 처녀와 창녀로 나뉘었다. 미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환경 속에서 모든 흑인여성은 나쁜여자로 범주화되었다.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색으로 그들의 습관, 성격, 성향이 유추되었고, 이는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 백인남성, 백인여성, 흑인남성 그리고 흑인여성에게 강력한 힘으로 작동했다.   


백인여성은 백인남성보다 자연에 더 가까운 존재로 여겨졌는데, 이제 그들보다 더 자연에 가까운 존재가 등장하게 되었다. 흑인은 백인보다 동물에 더 가까운 존재로 인식되었고 따라서 흑인여성은 동물과 가장 비슷한 존재로 여겨졌다. 아프리카 여성 사라 바트만이 유럽사회에 동물처럼 전시되는 과정을 통해, 흑인여성과 백인창녀의 이미지가 연결되었는데, 이는 생식기 질병으로 구체화되었다(255). 19세기 전반 미국 남부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흑인노예여성 성매매를 통해, 흑인여성은 백인여성의 대립적 존재가 되었다. 흑인 집단 전체가 창녀가 됨으로써 백인 여성 전체를 처녀로 만들어 준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남부의 오래된 노예제 사회에서 점차적으로 백인여성과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길러졌으며) 바로 이 때문에 애첩인 노예로 매우 중시되었던 아름다운 젊은 혼혈여성 (백인 신사의 손에서) 가학적으로 다루어졌다는 사실만 보아도 분명하다. (239)


첩과 번식용 여자라는 역할은 노예제의 마지막 10년 동안 노골적인 성매매 형태로 발전했다. 가장 예쁘고 백인에 가까운노예를 뉴올리언스 시장에서 대놓고 성적인 용도로 팔았다. 이때 쓰인 무신경한 용어가 팬시걸이었다. 포르노 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인-노예 관계의 도착 환상이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258)



이성은 인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감정이 옳고 그름을 훨씬 더 명확히 드러내준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이해는 사실과 판단에 근거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상상이 상황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여성은 침입자로 여겨지는 수정란을 10개월 동안 배에 품고 다닌다. 갖은 어려움과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면 타자였던 아이와 물리적으로 분리된다. 원치 않은 아이였을지라도, 죽도록 미워하는 이의 아이임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반경 2m너머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찰 때, 자신도 모르게 아이와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한다.


남성은, 백인 농장주는, 백인 농장주의 아들과 백인 관리자들은, 범죄(강간)의 결과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 한다. 알 필요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본다. 눈에 띄게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 , , 입의 이목구비가 자신을 똑 닮은 아이. 그 아이를 또 다시 잔혹한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아이를, 그 아이의 아이를, 이젠 거의 백인에 가까운 그 아이를 노예시장에 내다 판다. 팬시걸, 아름다운 젊은 혼혈여성.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추구해도 될 때, 그것이 범죄인가 아닌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다. 돈이 된다면, 그리고 그 순간 즐겁기만 한다면 일말의 가책은 한 잔 술로 털어버리고 말 일이다. 아니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가책을 느낄 수 없는 구조였고, 가책을 느낀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흑인노예여성 매매가 산업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 인간 남자에게 희망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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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생쥐가 한 번도 생각 못 한 것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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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생쥐, 바다사자는 마음씨가 따뜻한 나무꾼의 호의에 보답하고자 선녀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 나무꾼과 선녀는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그녀를 지상세계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큰언니의 노고와 그녀에 대한 징벌에 대해선 작가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함께 하는 삶에 대한 고민에는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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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7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친 아담 미친 아담 3부작 3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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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친 아담』의 가까운 과거는 현재의 미래다. 『미친 아담』의 먼 미래가 현재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근육단위의 단백질 조직 배양이 가능해졌다. 뇌 없이 닭다리만으로 이루어진 근육이 판매되고, 인간 장기를 위한 슈퍼 돼지도 사육된다. 홍채, 지문, 귀의 변형을 통한 신분 위조가 가능하고, 경제적 위계에 따라 사는 곳의 구별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크레이크는 크레이커를 창조한다. 크레이커를 창조하기 직전, 그는 인류 말살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새로운 세상에 크레이커들을 살게 한다. 크레이커는 태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자신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들을 만들어준 크레이크는 어디로 갔는지. 두려움이란 무엇인지, 희망이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인류와 꼭 닮은 크레이커는 인류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지 않기를, 순수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감수성 충만한 시기의 제일 황금같은 시절을 짝사랑으로 지샜기에,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더 감상적이게 된다. 내가 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기적 중의 기적. 기적 곱하기 기적이다. 그런 일이, 기적 곱하기 기적의 일이 토비에게 일어났다. 토비는 남몰래 젭을 짝사랑했다고 하는데(미친아담 3부작 지난이야기, 12), 그 사랑을 얼마나 꼭꼭 숨겨왔는지 나도 몰랐다.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져 기쁘다.




아니, 당신은 좀 그랬어. 내 생각으로는 신의 정원사들을 모두 통틀어서 당신이 미스 순결이었어. 아담1을 헌신적으로 돕는 소녀 복사였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담1이 혹시라도 당신과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어. 내가 얼마나 질투했는지 아마 당신은 모를 거야.” … “당신은 수녀원장 같았어. 당신이 날 혼쭐낼 거라고 생각했었지. 접근하기 어려운 흰눈썹뜸부기.” 젭은 토비가 예전에 사용하던 미친 아담 대화방의 암호명을 언급한다. “그게 당신이었어.” … 


그녀는 코를 훌쩍이며 울기 시작한다. 명상을 위한 물질이 그런 효과도 가져오는 것 같다. 그것이 요새의 벽들을 용해하는가 보다.

이봐. 왜 그래? 내가 좋지 못한 말을 한 거야?”

아니에요. 그저 감상적이 되어서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은 나의 생명선이었어요, 토비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하지는 못한다.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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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5-15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홍수를 읽고 나서 읽어야
하는 책인지 궁금하네요.

구판 홍수를 가지고 있거든요.

단발머리 2020-05-15 13:17   좋아요 0 | URL
오릭스와 크레이크-홍수의 해-미친 아담, 이 순서인데 전 순서대로 읽었구요.
과거 현재 미래 이리저리 오가면서 전개되는지라 순서대로 읽으시는걸 추천드립니다^^
 















타자로서 흑인여성 이미지를 지속시키는 것은 인종, 젠더, 계급 억압을 이데기올로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러 억압의 형식을 가로질러 존재하는 특정한 기본적인 관념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관념들 중 하나는 사람, 사물, 관념을 두 사이의 차이에 기반하여 범주화하는 이항적 사유이다. (131)

 


이항적 사유방식에서 차이는 대립으로 정의되는데, 오로지 서로 반대항으로 정의됨으로써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항적 사유에서 한 요소는 타자로 대상화되어 조작되고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는데, 백인에겐 흑인이, 남성에겐 여성이, 이성에겐 감정이, 문화에겐 자연이, 정신에겐 신체가 대상화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차이에 의해 자신과 타자의 다름을 인식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나, 이러한 이분법이 대칭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남성 중심적, 서구 중심적, 미국 중심적, 서울 중심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논리는, 말하는 주체(the definer, subject)와 그에 의해 규정된 대상(the defined, object)의 존재를 전제한다. 주체(one)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the others)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이다. 즉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29)









『오리엔탈리즘』에서 에드워드 사이드도 이 지점을 지적한다. 민족적으로 다소의 차이는 있더라도 대부분의 동양인은 유아상태’(75)에 처해있다고 믿었기에, 다수의 유럽 지식인들에게 동양은 서양의 가르침또는 지도가 필요한 존재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유럽에서 동양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때, 유럽은 언제나 강자의 위치를 차지했다(80). 오리엔탈리스트에게 동양이란 있는 그대로의 동양이 아니라 동양화된 동양이다(192). 서양이 바라보는 동양, 서양이 해석하는 동양, 서양이 이해하는 동양만이 동양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인간이 자기를 생각할 때 반드시 타자를 생각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이원성의 표시 아래서 세계를 파악한다. 이원성은 처음에는 성적 특성을 띠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자기를 동일자로 생각하는 남자와는 자연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타자의 범주에 분류된다. ‘타자는 여자를 포함한다. 처음에 여자는 타자를 홀로 대표할 만큼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타자 속에서 또 세분이 이루어진다. (『2의 성』, 98)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원형(『양성평등에 반대한다』, 30)이다. 그리고 이는 대칭적이지 않다. 남과 여의 구별이, 대칭적이지 않다는 걸 깨닫는 건 매우 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남자, 여자, 우리 모두 이렇게 사이좋게, 평화롭게 (모두 알다시피 사이좋게평화롭게는 강자의 언어다) 같이 살면 좋을텐데, 페미니스트라는 여자들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여자만의 권리를 주장해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대립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결과라는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강남역 사건과 같은 여성혐오 범죄에 대해서도 남성혐오를 부추긴다고 목놓아 울부짖고, 인증 절차를 여러 번 거쳐야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n번방 출입이 뭐가 그렇게 나쁜 일이냐 되묻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연의 주인으로서의 인간 남자와 타자로서의 인간 여자가 출생에서부터 사망시까지 여아살해, 여성할례, 불평등한 교육 및 취업기회, 남녀 급여 격차, 승진 제한, 결혼지참금 폭력,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임신, 출산으로 인해 고통받고 차별받는 이유가 여자이기 때문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 쉬운 말로, 진짜 더 쉬운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려온다.





알려진 모든 인간사회에서 최고로 중요한 위계질서가 하나 존재한다. 바로 성별이다.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적어도 농업혁명 이후로는 그랬다. (212)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농업혁명 이후로는 쭈욱.

인류 역사 내내.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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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5-15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농업혁명 이후로는 쭈욱.
인류 역사 내내. 남자가 더 좋은 몫을 차지했다.

...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유발 하라리가 명쾌하게 짚어주니 좋구나.. 싶었던 기억 소환.

단발머리 2020-05-15 20:26   좋아요 0 | URL
인류 역사 기술할 때 여자는 왕비, 여왕, 공주 몇 명 이름 넣어주고 마는데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핵심을 한 번 짚어주더라구요.
그점에 대해선 박수를 좀 쳐주고 싶습니다^^

수이 2020-05-1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여기 자주 놀러오면 안되겠소. 오면 읽고싶고 사고싶고 그런 책들이 너무 많아서리......

단발머리 2020-05-15 20:2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오세요~~~ 자주자주 오시어요. 놀러 구경하러 오시어요~~~~~
 


터키, 중앙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 평원에는 지하도시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데린쿠유이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 히타이트인들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로마와 비잔틴 시대를 거쳐 더 확장되었으리라 추정된다. 깊이 85m, 지하 20층의 규모이고, 작은 방들과 주방, 창고, 교실, 환기구 등이 보인다(<저스트 고 터키> 380).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위한 다양한 종류의 방어문을 가지고 있다. 벽에는 길을 알려주는 암호가 있는데, 외부인이 침입했더라도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한다. 가이드는 몇 해 전에 안내를 무시하고 혼자 이동했던 일본인 관광객이 실종됐다는 말도 더했다.

 










신앙인으로서 감상을 예상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념을 지키기 위해 동굴로까지 피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했다. 순교자일 뿐 아니라 순종의 삶을 살기 위해 동굴에까지 자신의 몸을 숨겨야만 했던 사람들의 간절함을 생각했다. 그들의 믿음, 그들의 신념, 그들의 확신. 그런 것들이 내게 전해질거라고 예상했다. 내가 기대했던 감상은 그런 것들이었다. 세속주의에 물든 나의 나약한 믿음은 깊은 동굴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또 그들을 부러워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들의 믿음을, 그 신앙의 절개를.

 

몇 번째 방이었을까. 관광객들을 위해 현재는 내부가 훤히 보이는 모습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활할 때는 천을 문처럼 덧대 자신들만의 공간을 만들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옆의, 그 옆의, 그 옆옆의, 그리고 아래와 그 아래아래의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지냈다는, 지내야만 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했다. 평생을 같은 사람들과 지내야만 한다는 것. 싫어하는 사람을 피해 도망갈 수 없다는 것. 보고 싶지 않은데 계속 봐야 하는 사람을 피해 도망갈 수 없다는 것.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 싫어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는 괴로움과 좋아하는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는 절망. 그런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동굴에서 얼른 나오고 싶었다.

 


터키는 광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나라이다. 열기구를 타고 내려다보는 괴레메 계곡의 나라이고, 파묵칼레의 나라이다. 셀주크의 나라이고, 제국의 강인함을 간직한 나라이다. 아야 소피아의 나라이고, 블루 모스크의 나라이다. 이 모든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이 기억에 남아있지만, 터키에서 내게 특별한 딱 한 장소만을 고르라면 난 데린쿠유를 고를 것 같다. 데린쿠유는 관광 스팟이 아니라 감정을 전해준 장소이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데린쿠유가 생각난건, 이 문단 때문이다.

 


그만 좀 해라, 토비. 그녀는 자신을 타이른다. 고립무원 상태거나 조난을 당했거나 포위 상태에 있는 닫힌 공동체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문제가 시작된다. 질투, 불화는 집단 사고의 담벼락에 생긴 구멍이다. 사소한 증오심을 키우고 하찮은 분노를 마구잡이로 방출하며 서로를 향해 고함을 질러 대고 그릇들을 내던지는 등 어두운 자아로 인해 우리의 주의가 산만해지고, 그 결과 우리가 깜빡 잊고 잠그지 않은 문을 통해 우리의 적, 살인자, 그림자가 슬며시 들어오게 된다. (182)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의 결과로 인류는 멸망하고, 순진무구한 신인류 크레이크와 소수의 인간만이 살아남았다. 폐쇄적이고 제한적인 공동체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리고 질투. 보기 싫은 어떤 사람과 보고 싶은 어떤 사람. 그들을 피해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을 때, 바로 그 때 토비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반응하는가. 스스로에게 무어라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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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5-1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터키에 갔을 때 카파도키아가 가장 인상깊었더랬습니다.
이건 뭘까. 신앙은 뭘까. 여기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시 가고 싶네요, 그곳.

단발머리 2020-05-13 10:02   좋아요 0 | URL
전 뭐랄까요. 예상치 못한 생각에 움찔해서 그 곳을 방문했을 때는 그렇게는 좋지 않았는데 자꾸 그 곳에서의 감정이 생각나요.
오래오래 기억날 장소 같고요. 끝없이 펼쳐지는 황량한 평원과 나무숲 사이에서 우리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강인한지... 그런 생각도 했더랬죠.
저도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