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 을 읽었을 때는 책의 내용이 페미니즘과 닿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다만 이제는 직장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아이 키우는 일을 전담하기로 한, 전업주부가 되기로 결정했던 내게 찾아왔던 이유 모를 무력감과 암울함이 내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3 9월의 일이다.

 


다음날 아침이 지나면 집은 다시 거짓말처럼 어질러져 있다. 벽에 기대 앉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다. 어디부터 또 손을 댈까. 아기는 자기만 보아달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옆에서 머리를 바닥에 박아댄다. 집이 나에게도 쉬는 곳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나는 집을 나가서 쉬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 30)  

 





<빨래하는 페미니즘>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구체적으로 눈뜨게 해주었던 책이다. ‘여성으로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살아왔던 저자가 결혼과 육아를 통해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이런 갈등과 의문을 페미니즘 고전 읽기를 통해 분석해 가는 책이다.




나는 결혼을 하고 어머니가 된 후에야 비로소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이 적어진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슴 터질 듯한 사랑도 느꼈지만 미칠 듯한 좌절감도 맛보았다. 그전까지는 생각해 보지도 못한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새로운 감정이었다. 백만 가지 방식으로 아이와 연결된 어머니가 되고 나서야 페미니즘의 이상향을 현실에 접목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아이를 욕조 속에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빨래하는 페미니즘>, 20)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페미니즘이라는 울화통 터지는 주제에 대한 유쾌한 접근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맨스플레인은 2010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단어일 수 있겠으나, 이러한 행태는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다. 오히려 놀라웠던 것은 미국 가정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 속 달달한 사랑 고백만을 듣고 보았기에, 미국 기혼 여성 부상 원인 1위가 교통사고가 아니라 가정 폭력 때문이라는 통계는 책을 읽던 그 때도 지금에도 충격적인 사실이다.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 번째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49)>

 








읽어야하고 읽으려 했지만 아직 읽어내지 못한 책은 <2의 성>이고, 책이 절판되어 오늘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려는 책이 <여성의 신비>

 













가까운 이들에게 페미니즘 입문서를 추천하게 된다면, 아주 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와 자랑스러운 그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그리고 페미니즘 말싸움 실전편, 부제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에 빛나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를 권하고 싶다.











 




그 때 남성은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동시에 가장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아래라 생겨나는 불평등이라는 주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채로는 영영 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이 직접 느낄 수 없으니,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은 한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볼 수 밖에 없는 문제는 자신은 볼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밝혔음에도, 공신력을 얻는 쪽은 상대입니다. 내 경험의 정당성마저 남성이 결정하는 겁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27)

 


이런 책이 나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내가 이 책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행복한 페미니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으로 새 제목, 새 표지로 다시 나왔다. 반가운 일이다. 만화로 페미니즘을 만나고 싶다면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악어 프로젝트>마스다 미리 여자 만화 시리즈중 하나인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도 좋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이 부제인 <여자다운 게 어딨어>는 사회 구조 속에서 여성이 차별 받을 때, 그것이 선택의 문제라는 주장에 이렇게 답한다.



만약 당신이 행위주체가 우선이라고 열렬히 주장한다면, 즉 개인이 그가 하는 행동을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소들을 간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또한 당신이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문제를 그들 탓으로 돌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행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보수적·자본주의적 세계관은 개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이처럼 행위주체에 무게를 싣는 경향이 있다. ...

반대로 구조가 우선이라고 열렬히 주장한다면, 개인의 행동이 언제나 사회적 상황의 결과라고 믿는다면 개인의 성취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할 수 있다. 진보적·사회주의적 세계관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구조를 우선시한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 73)



 


<혁명하는 여자들>에는 여성 작가 15명의 페미니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늑대여자>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아름다우며 가슴 한 켠을 서늘하게 하는 작품이다.



 

어떻게 날 떠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내가 그간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상황은 계속 변해왔어.” 넌 그에게 말했다. 목이 따가웠다. “그 변화가 문제야. 조너선……”

네가 날 이렇게 상처 주려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난 믿기지가 않……” (<혁명하는 여자들>, 62)

 






여성 집약적, 모성 집약적 육아에 대한 언급은 의외의 책에서 발견했는데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가 바로 그 책이다.


 


서구사회의 부유층 특유의 모성 집약적 육아intensive mothering’ 문화는 내가 연구한 엄마들에게 확실히 재앙이었다. 이 용어를 만든 사회학자 새런 헤이즈Sharon Hays는 모성 집약적 육아를 자녀 양육에 엄마가 어마어마한 양의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하게 (의무화)하는 성편향적 육아방식이라 정의한다. 끊임없는 감정적 소모를 감당하고, 아이의 심리상태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꾸준히 활동을 제공하고, 아이의 지능발달촉진하는 것까지 전부 다 엄마의 역할로 간주되며, 그 모든 역할에 철저하지 못하면, 심지어 자유방임하기만 해도 엄마로서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기 십상이라고 헤이즈는 전한다. (265)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책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에 대해 말해보자면, 이 책의 부제는 소녀들을 위한 페미니즘 입문서이고, 12명의 여성학자, 여성주의 연구 활동가, 칼럼니스트, 기자등의 글을 실었다. 공동체 생활, 모성, 외모 지상주의, 대중문화, 온라인과 여성혐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성 정체성, 몸과 성, 노동, 과학, 환경에 대한 글이 실려있다.

 

가슴에 울렸던 글은 모성에 대한 글이었다. 모성은 신화도 아니지만, 아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아이와 일, 개인으로서의 와 어머니로서의 가 갈등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그녀의 주장은 큰 위로가 되었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직업적 성취 사이에서 자아가 찢기면서 날마다 울었습니다.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내가 내 경력을 만신창이로 만들면서 고통받을 때, 남편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니까요. 같은 학교에서 같은 공부를 하고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데, 저는 만신창이가 되고, 남편은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은 채 어엿한 4인 가구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제 모성애로부터 막대한 수혜를 입었습니다. 남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토록 강력한 권력이라는 것을 저는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모성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서 아이를 24시간 어린이집에 맡겨도 괜찮으면 좋으련만,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엄마가 경력 단절 여성이 되는 이유이고, 절차입니다.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59)

 

그녀는 엄마가 되기 위해 혹은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글을 읽어달라고 했다. 모성의 신화에 속아 모성 없는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부탁했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끈끈한 모성애 역시 부인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녀의 해결책은 선택을 거부하는 것이다. 남성도 아빠로서 엄마와 동등한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지도록 사회, 문화가 강제하고(60), 남녀가 함께 가정과 직장을 모두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모성과 부성이 부모애라는 이름으로 동등해지도록 하자는 그녀의 주장. 팍팍한 현실을 볼 때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제 메타젠더로 본 세상’ <낯선 시선>의 첫 장을 펼친다. 좋아하는 ㅎ님이 보내주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라, 야금야금 한 줄 한 줄 아껴가며 읽을 건인지, 보내주신 간식 먹어치우듯 단숨에 몰아쳐 읽을 것인지 아직 결정하지 못 했다.





 






월요일이다. 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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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4-03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간식도 어마어마하네요. 저보다 먼저 이 책 시작하시겠어요. 얼른 읽고 후기 남겨주세요! >.<

단발머리 2017-04-03 12:25   좋아요 1 | URL
네 명이 나눠먹고 남을만큼 어마어마했어요 ㅎㅎㅎㅎ 그날 밤이 생각나네요.
아.... 과자로 인심 쓰며 난 얼마나 행복했던가... 얼른 읽을까봐요~~
아끼지 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공개 2017-04-0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저도 페미니즘을 공부해 봐야겠어요. 이 어마어마한 책들을 읽을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
소개 감사합니다.

단발머리 2017-04-04 12:56   좋아요 0 | URL
몇년 전이던가요. 알라딘 서재에 페미니즘 공부줄이 유행해서요. ㅎㅎㅎㅎ
저도 얼떨결에 줄 서기는 했는데, 공부하는 정도는 아니구요.
요즘에 워낙 페미니즘 신간들이 다양하게 많이 나오고 있어서 다 따라 읽기도 버겁기는 한데,
한 권 한 권 읽다보니 정말 재미있네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구요.
함정이라면 알게 될수록 더 아리송하다는 건데요. ㅎㅎㅎㅎㅎㅎㅎ
jsshin님도 같이 해요~~ 페미니즘 알아가기^^

해피북 2017-04-0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정말 어마어마한 책을 소개해주셔서 저도 기회가 될때 야금야금 읽어가야겠어요 ㅎ 그런데 제가 이제까지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 페미니즘하면 워킹맘을 위주로 했던 책들이라서 그런지 아쉬운 마음이 컸거든요. 모든 여성을 근간으로 아우를수 있는 책이 읽고 싶었는데 단발머리님이 소개해주신 책들이 참 좋을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요일의 페미니즘이란 제목도 참 멋졌고요. 그리고 단발머리림의 고민이 아직 아이는 없는 저지만 깊은 공감이 되었어요^^

단발머리 2017-04-10 16:15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읽고 있는 <여성의 신비>는 전업주부들의 무력감과 소외를 중심으로 페미니즘을 연구한 책이예요.
지금 재미있게 신나게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위의 책들은 제가 읽은 책들이구요. 사실 요즘 페미니즘 책들이 아주 많이 나오고 있는데, 다 읽지는 못하고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일단 제목이 흥미로운 책들부터 읽어가고 있어요.

해피북님도 같이 읽고 같이 이야기 나누면 참 좋을 것 같아요. ^^
 


 















인간이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인간과 그 밖의 생명체를 구분 짓는 중요한 차이점이다.(19) 공포는 죽음의 숨결이 가까울 때 느끼는 당연하고도 대체로 순응적인 반응(21)으로, 인간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문화적 세계관이다. , 인생이 아주 특별하고 중요하며 영원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세계관에 의해 정부, 교육, 종교 기관, 의례 등이 인간 사회에서 중요성을 획득한다. 다른 하나는, 자존감이다. 자기 자신이 의미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감정은 심리적 수준 뿐만 아니라 생리적 수준에서도 공포를 완화하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자존감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는 다음을 추천한다.


 

우선, 개인이 다양한 자기 개념을 갖도록 장려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한 사람이 미국인이면서 기독교인, 변호사, 공화당 지지자, 아버지, 골퍼, 인디애나 주민 후원자, 자원 봉사 소방대원이기도 한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은 다양한 사회적 역할과 부합하며, 각각의 정체성에는 나름의 고유 기준이 존재한다. … 우리 중 누군가는 같은 직급의 다른 직원에 비해 영업실적은 낮고 골프 실력도 형편 없지만 누구보다 훌륭한 아버지이자 신실한 교회 신자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면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 (101)  


 

문화적 세계관의 토대인 의례, 예술, 신화, 종교는 대략 순차적으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133언어의 진화를 통해 자의식을 지닌 존재로 거듭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한다. 또한, 뜻있는 집단에 속하고자 애쓰고 창조적인 예술작품 혹은 과학적 업적, 자기 이름을 딴 건물이나 사람,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과 유전자, 혹은 타인의 기억을 통해 세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데(24), 이는 모두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문화적 관습의 영향이다.

 


이처럼 죽음을 초월하는 문화적 관습 덕분에 우리는 자기가 이 세계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런 문화적 관습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는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따라오는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 실제 불멸성 literal immortality 과 상징적 불멸성 symbolic immortality 을 믿는다. (24)


 





실제 불멸성이란 사람이 결코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거나 자아의 어떤 핵심적인 부분은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다고 믿는 것이며(139), 상징적 불멸성은 자신이 숨을 거둔 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어떤 영원한 존재의 일부로 남을 것이며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적 자취 혹은 유물을 영구히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140) , 사후세계에 대한 논의, 연금술, 냉동 보존을 통해 인간은 죽지 않는 나의 영속을 추구하고, 아이를 낳고 명성을 쌓으며 부의 축적을 통해 내 이름과 명성이 영원히전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특히, 영혼은 실제 불멸성을 거론할 때, 공통으로 등장하는 개념인데, 영혼의 개념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단순히 육체적 존재 이상으로 인식하고, 죽음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145)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실제적으로 죽음을 피해 불멸을 모색하는 방법도 있는데, 알코어 생명연장 재단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가 그 중 하나의 예다. 높이 275센티미터 용기 여러 개가 롤러 위에 마치 스테인리스 스틸 보초병처럼 늘어서 있는데, 내용물을 섭씨 영하 196도로 유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액체 질소를 붓는다고 한다. 죽음 직후, 시체를 얼음물에 넣고 심폐소생기를 부착하며 혈압을 유지하고 뇌를 보호하기 위해 정맥 주사를 놓는다. 시체를 냉각하고, 시체를 머리가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용기에 넣고 수십년 혹은 수백 년 동안 냉각 상태를 유지한다. 분자 나노기술로 시체 소생이 가능해질때까지. 비용은? 한 사람 당 20만 달러이다. (157) 다른 방법도 있다. 백업으로 자아 의식을 포함해 인간 뇌에서 생성되는 모든 정보를 컴퓨터로 옮겨놓는 비침습성 고정 업로딩방법이 있고, 혹은 인간의 모든 정보를 내구성이 훨씬 더 뛰어난 로봇에게 옮기는 방식도 있다.


 





상징적 불멸성의 하나의 예는 세대를 통해 전해지는 예술작품이다. 이미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죽음에 사로잡혀 있던 키츠가 지은 잠과 시 Sleep and Poetry’라는 시의 일부다.

 


내가 정말로 쓰러진다면, 적어도 나는 누우리

백양나무 그늘의 침묵 아래

그리고 내 위로 난 품을 말끔히 깎으리

그리고 그곳에 상냥한 비문을 새기리 (165)

 


그는 죽었지만, 그의 시는 살아남았다. 사후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의 시는 살아서 전해지고, 독자들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다. 그렇다면 세월을 뛰어넘는 상징적 불멸성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은 좀 더 단순하고 미묘하고 심지어 위장된 방식을 이용하는데, 저자들은 가족제도를 통한 후손 남기기, 명성 쌓기, 돈과 물질의 추구, 영웅 민족주의와 카리스마 지도자에 대한 추종 등을 그 예로 제시한다.

 

<11단원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에서, 저자들은 죽음을 대면한 우리 인간들에게 죽음그 자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은 상태로서 우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므로, 무감각한 상태와 똑같은 죽음의 상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마사 누스바움, 타일러 볼크, 스티븐 케이브는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루크레티우스는 미래 세대가 성장하도록 우리는 죽어야만 하며’, 미래 세대 역시 주어진 삶을 살고 나면 당신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 생자필멸의 현실을 더 잘 알고 수용해야 하며, 죽음을 초월한다는 감각을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강화하라는 것이다. (336)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과 타협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불안의 학교에 등록하는 것을 추천했는데, 억제되지 않은 죽음의 공포가 개인 정체성과 모든 신념이 일시적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지점까지 도달하게 한 후, ‘신앙의 도약을 경험할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최후에 대한 마지막 생각’은 '타협하라'. 죽음과 타협하라, 이다.


 

죽음과 타협하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무섭기는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용기, 연민, 그리고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불어넣음으로써 삶을 숭고하게 만든다. 의미와 가치, 사회적 관계, 영성, 개인적 성취, 자연과 동일시, 순간적인 초월 경험을 자기 나름대로 잘 조합함으로써 영원히 지속될 의미를 찾으라. 이런 방도를 제공하는 문화적 세계관을 장려하고 불확실성 및 자기와 다른 신념을 품은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라. (345)


 

인간은 별의 먼지, 인간은 별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난 좋아한다. 아주 먼 옛날, 끝없이 펼쳐진 우주에 별이 탄생했을 때, 그 때 내 존재의 일부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좋고, 저 멀리 예쁘게 반짝이는 별의 일부가 내 안에 있다는 이야기로 들려서 좋다.

 

죽음과 타협하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라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주장을 인식하는 '내'가 실제적, 개인적 죽음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지는 존재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 없는 우주에서 영원히 지속될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의 추구가 무슨 의의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진 신념, 이를테면 죽음 후의 심판, 영원히 계속될 사후세계, 영혼 불멸 등의 주장보다 인간과 우주의 무목적성이 내게는 더욱 허무맹랑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의 본질은, 죽음 이후에 확인될 수 있단 말인가






 


죽음 그 자체보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인식이 인간 존재 핵심에 존재하는 고뇌이다. 

그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고 불멸 추구의 길로 이끈다. 


조르주 드 라 투르, <회개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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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9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7-04-03 12:20   좋아요 2 | URL
네.... 맞아요. 저도 죽음 없이 영원히 산다는 걸 상상하는 게 힘들어요.
문제는 너무 자주 죽음을 예상하지 않고 산다는 거겠죠. 영원을 살것처럼요.
우리는 영원을 살지 못하는데,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럴 때가 많아요.
잘 읽으셨다니, 감사합니다. ^^

AgalmA 2017-04-03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의 화자 목소리가 왜 죽음의 사자 같이 들리죠^^; 죽음 소재가 나오면 가볍긴 어렵지만... 평소 단발머리님 글의 목소리와 달라서 색다르네요

단발머리 2017-04-03 12:26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ㅎㅎㅎ
책에는 실험이 많이 나오는데요. 죽음에 대한 언급을 듣고 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국의 이익이나 자신의 민족성을 의식한 결정을 한다거나... 그런 실험이요.
제가 더 궁금한건... 죽음 앞에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인데, 그건 서술할 수가 없으니까요.
서술할 사람이.... ㅠㅠ
 




 











다이어트, 여드름 치료, 영어 학습법의 공통점은, 이것만은 확실하다는 성공 비법이 모든 사람에게 두루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 다이어트법이 어떤 사람에게는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체질, 다른 생활습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무용지물일 수 있다. 특정한 여드름 치료법이 어떤 사람에게는 효과를 발휘해 도자기 피부, 아기 피부의 기쁨을 선사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엄청난 비용을 치루게 하는 밑 빠진 독이 될 수도 있다. 성공하는 사람은 있지만 특별한 성공 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영어회화, 영어문법, 영어작문, 비즈니스 영어, 유학 영어, 취업 영어등 각 분야 영어책의 범람 속에서 영어학습법 또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공한 사람이 들려주는 성공 비법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 부족한 것은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마음과 자세이건만, 일단 책을 집었으니 끝까지 간다. 최근 가장 핫하다는 영어학습법 책을 읽었다.

 

모든 책이 그렇겠지만, 영어학습법 책도 제목이 중요하다. 제목이 책내용의 반 이상을 이야기한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저자가 주장하는 영어공부의 비법은 외우기이고, 얼마만큼이요?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책 한 권을 외우라고 주문한다. 외우는 책의 수준은 중요하지 않다.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웠다는 게 중요하다.  

 

지은이 김민식은 한양대 자원공학과를 나와 한국 3M에 영업직으로 입사했다가 한국외대 통역대학원을 거쳐, MBC 공채로 들어가 예능과 드라마 연출을 하고 있다. 시트콤 <뉴논스톱> <내조의 여왕>등이 대표작이다. 영어학습 책을 쓰기에 아주 좋은 이력이다.

 

대부분의 영어학습 책이 그러하듯, 1장에서는 영어공부의 필요성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2장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외워라’, ‘하루 10문장만 외워보자’, ‘회화 암송은 드라마 연기하듯이등의 저자 팁이 쏟아진다. ‘어떤 책을 외우면 좋을까에서는 문성현의 영어회화 100일의 기적을 추천한다. 3장은 짬짬이 시간을 활용하는 법, 4장은 책 한 권을 외운 후, 미국 드라마, 어린이 영어책, 영어원서, <TED> 강의 등을 통해 놀면서 영어를 공부하는 방법을 소개한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문제는 방법이 아니라, 태도다.









 





영어공부를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는 저자의 말에 동감한다. 영어를 공부해야만, 영어를 잘해야만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저자로서는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가 지독한 영어 공부였다는 말이다. 이 세상 무슨 일이든, 일정 정도 이상의 수준에 오르는 일은 어렵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영어가 또 하나의 국어 대접을 받는 나라에서, 공대 출신의 순수 국내파가 영어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았다면, 스스로 자부심과 자신감을 얻게 되는 건 당연하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문단을 옮겨본다.

 

책을 읽고도 암송법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너무 자책하진 마세요. 대부분이 그래요. 기껏 돈을 주고 책을 샀는데, 막상 책 한 권을 못 외워서 아쉬울 분들께도 뭔가 위안을 드리고 싶네요. 괜찮아요, 영어공부를 하지 않아도.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영어책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영어 공부를 안 하더라도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달성하셨다면 큰 선물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 ‘아이의 영어 교육을 위해 굳이 비싼 조기 유학을 시킬 필요는 없겠네하고 느끼셨다면 이 책의 선물 중 가장 큰 걸 받으신 셈입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가장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그것이거든요. 아이에게 억지로 영어를 가르치지 마세요.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자유로이 놀도록 해주세요. …

, ‘언젠가 이민이든 이직이든 영어가 꼭 필요한 시기가 오면, 그때 이 책에서 일러준 대로 하면 되겠네하고 미루셔도 됩니다. …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세요. 영어는 미뤄도 됩니다.

, ‘,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가끔 재미있었어하고 느끼셨다면 저도 기쁩니다. … 영어 공부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잠깐이라도 즐거우셨다면,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281)

 

그러니까, 이 책은 291쪽 전체를 통해 영어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는 방식으로 영어공부법을 설파하고 있지만,  281쪽에서 283쪽을 통해 현재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위해 영어를 미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 자체는 확실한 작은 결심의 의미로, ‘한 권을 통째로 외워주마!’하며 1년 전 구입했던 책을 이 페이퍼에 걸어놓고 나는 유유히 사라진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중요한 일에 집중하기 위해. 그렇게 스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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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3-24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조기 유학이 필요없다 말하고 영어공부를 미뤄도 된다고 말하는 영어학습법 책이라니. 참신하네요! 그리고 뭔가 위로가 됩니다. 저 역시 한 권 외우는 게 답이다 싶어서 그러려고 책을 샀는데(노팅힐 대본이요!) 역시나 펼쳐보지도 않고 있네요. 저에게 중요한 일은 다른 일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술을 마신다든지, 술을 마신다든가, 술을 마신다든지.....( ˝)

단발머리 2017-03-24 14:06   좋아요 0 | URL
위로는 281쪽에 나와서요. 280쪽을 쭈욱~~ 읽어야 합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 전에는 영어공부를 했을 때의 좋은 점, 영어를 잘하면 인생이 어떻게 피나, 영어가 얼마나 중요한가, 영어 공부하는데 요즘에는 얼마나 좋은 교재와 컨텐츠가 있는가가 나열됩니다.

<노팅힐> 대본으로 하는 영어공부는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요, 좋아하는 드라마로 하는 영어공부는 진짜 좋죠. 저는 예전에 산드라 블록 주연의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그런 방식으로 공부했었더랬죠.
200번 듣기까지는 도달했는데, 역시나 외우기에서 실패....

이 책에도 나오는데, 나에게 중요한 일이라는 건 각자 본인이 찾는 거니까요.
흠.... 다락방님은 중요한 일을 일단 하나 찾으셨고... ^^ 다른 중요한 일들도 많이 하고 계시니까요~~~
책을 읽지 않아도 중요한 교훈을 이미 얻으셨네요^^

cyrus 2017-03-24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생 때 영어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한 적 있어요. 빨간 기본영어, 맨투맨 영어책 둘 중 한 권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못 보면, 수능 영어를 공부하는 데 엄청 고생한다고 했어요. 그땐 그게 사실인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 본다고 영어 실력이 늘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단발머리 2017-04-03 12:27   좋아요 0 | URL
저는 성문영어를 보았던, 아니... 솔직히 열심히 필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건 완전 어렵죠. ㅠㅠ
그게 다는 아니지만, 일단 책 한권을 끝낸다는게 의미는 있는것 같아요. 에구...

해피북 2017-04-04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왠지 저를 위한 말씀 같았어요~~ 저 역시도 ‘저‘를 위한 책 읽기가 먼저라서 영어는 잠시 뒤로... 그리고는 영영 찾을 수 없는 곳으로 ... ㅋㅋ

역시 아직까지는 저녁시간이 서늘한거 같아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저녁 시간 보내세요^^

단발머리 2017-04-10 16:12   좋아요 0 | URL
에궁.... 답글이 늦었어요. ^^
저도 그 친구 말이예요. 좋아하지만 친해지지 못하고 있는 그 친구 계속 찾고 있어요.
친구야~~ 어디니? ㅎㅎㅎㅎㅎ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을 때, 그러니까 주문이 낭독되어 혼자서 한참 소리를 지르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씁쓸했다. 

내 손으로 꾸욱 눌러 대통령이 된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우리의 대통령이었고, 그리고 탄핵 되고 나서도 '박 전 대통령'이라고 불릴 '전 대통령'을 갖는다는 사실이 아쉽고도 안타까웠다. 박근혜가 탄핵되면 봄이 올 것 같았는데, 사저로 들어설 때, 얼굴 가득히 피어난 환한 미소를 보고는 집 안이었는데도 옷깃을 여몄다. 아직도 겨울인가.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봄이.... 오늘 내게 왔다. 

봄은 꽃의 모습을 하고 내게 왔는데, 하이드님의 미니부케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분홍을 입었다. 

정확히 어떤 분홍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세상 제일 예쁜 분홍이다. 

아무에게도 닿지 않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너무나도 예쁜 분홍. 


봄이 왔다. 

봄은 꽃의 모습을 하고 내게 왔는데, 

사랑하는 님의 마음과 같이 왔다. 


나는 이제서야 

명랑하게 그리고 기쁘게 

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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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2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교차가 크고, 미세먼지 때문에 며칠 동안 코감기에 시달렸습니다. 날씨가 따뜻하다고 생각해서 조끼만 입고 다닌 적이 있어요. 아마도 그때부터 감기에 걸린 것 같습니다. 감시 조심하세요. ^^

단발머리 2017-03-24 13:03   좋아요 0 | URL
네, 일교차가 크긴 하죠.
cyrus님 감기걸리셨다니, 얼른 나으시기 바랍니다.

2017-03-23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24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고의 과학소설에 수여되는 모든 상을 석권한 엄청난 소설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작가 테드 창은 미국 브라운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과학도이다. 동시대 과학소설 작가들의 인정과 동시대 과학소설 독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는데, 만약 책과 영화 중에 무엇이 더 좋냐고 묻는다면 책과 영화가 각각 다른 재미와 의미가 있다,는 판에 박힌 말을 한 번 한 후에, 그래도 머리 속이 아니라 눈앞에 그려진 외계인의 모습을, 진짜 외계인을 보고 싶다면, 영화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


 





다윈으로부터 시작해 인간이 하나의 계통으로부터 진화해 현인류에까지 이르렀다는 진화론이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부터 현재까지 오랫동안 거부되고 부정된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를 특별한존재라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타의 다른 동물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여러 동물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간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지구의 유일한 지배자인 인간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외계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은하 속의 태양계, 태양계 속의 지구, 지구에 존재하는 우리 인간들은 우리만큼 혹은 우리보다 지적으로 과학적으로 도덕적으로 진화한 지적 생물체를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의 특별함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외계인의 외양을 이렇게 묘사한다. 외계인들에게 피랍되었다가 탈출하거나 일정한 실험 후에 돌려보내진 지구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과대망상이라는 진단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단 그들의 증언은 이렇다.


 

피랍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피랍과 관계된 외계인은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한정됩니다. 첫 번째는 인섹토이드insectoid, 곤충 특히 사마귀의 모습에 가까우며, 둘째는 큰 그레이로, 키가 150-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키에 회색빛 혹은 연두색 피부를 가졌다고 합니다. 눈은 검고 큰 아몬드형이고, 궁둥이는 독립적으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 , 귀는 퇴화되어 흔적만 있고 머리가 몸체에 비해 월등히 발달되어 몸이 전체적으로 가분수형입니다. 셋째는 작은 그레이로, 키만 90-120센티미터 정도로 조금 작을 뿐, 모양새는 큰 그레이와 거의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인간형인데, 이 외계인은 인간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외계 지성체의  방문과 인류종말의 문제에 관하여), 174)

 




이 책에서는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외계인은 일곱 개의 가지가 맞닿은 지점에 올려놓은 통처럼 보였다. 방사상으로 대칭이었고, 가지는 모두 팔이나 다리로 기능할 수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그것은 네 다리를 써서 걷고 있었고, 나머지 세 개의 가지는 팔처럼 측면에 말려올라간 상태였다. 게리는 이들은 헵타포드’ (heptapod, 그리스어에서 7을 뜻하는 hepta와 발을 뜻하는 pod를 합친 조어)라고 불렀다. (160)

 

머리 속으로 외계인을 상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에는 틀림없지만, 영화에서 화면을 보면 딱 한 마디가 나온다. 나 역시 그랬다. 외계인과의 첫 만남을 앞둔 여주인공과 함께 긴장과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스크린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옆에 앉은 딸롱이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뭐야, 문어잖아?!”  (가운데 큰 원은 헵타포드의 문자다. 헵타포드는 그 옆의 음영으로만 보인다.) 또 다른 설명이다. 



 



나는 체경으로 바싹 다가가 헵타포드의 여러 신체 부위, 이를테면 칠지라든지 손가락, 눈 따위를 가리키고 그에 해당하는 단어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동체 아래쪽에 연접한 골질의 주름 사이에 구멍이 하나 나 있음이 밝혀졌다. 아마 이것은 음식 섭취를 위한 것이고, 동체 꼭대기에 있는 구멍은 호흡과 발화를 위한 것인 듯했다. 그 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구멍은 없었다. 아마 입이 항문의 역할까지 맡고 있는 듯했는데 이런 종류의 의문을 해결하는 것은 일단 미루어두는 수밖에 없다. (170)

 

외계인의 외모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일까. 화면 속 외계인 헵타포드는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 혹은 받아들일 수 있는 외모를 가지고 있다. 물론이다. 이 외계인은 테드 창이 상상해 낸 외계인이다. 그렇다면 진짜 외계인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 너머에 있는 외계인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사고방식도 달라진다라는 사피어 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은 영화 속에서 중요한 장치 중의 하나인데,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워가면서 주인공은 점점 더 헵타포드처럼 사고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작용이나 적분에 의해 정의되는 다른 것들처럼 헵타포드들이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207)

 

인간은 선후를 따라 사고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이용해 현재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미래를 알 수 없다. 미래를 알 수 없을 때 인간은 자유의지를 사용해 자신의 현재를 선택한다.

 

하지만 헵타포드는 다르게 사고한다. 각 명제들 사이의 관계에 고유한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고, 특정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사고의 맥락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에 관여된 모든 요소의 힘이 동등하고, 모두가 동일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204) 목적론적 사건 해석은 최소화 혹은 최대화라는 목적에 달성하기 위해 이루어지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 상태를 알아야 한다. 헵타포드는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대한 지식을 소유한다. (207) 마치 헵타포드의 문자에서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197)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는 모습이 소설 속에서도 효과적으로 그려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상황을 그리기에는 영화가 좀 더 적합한 매체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영화의 방식이 조금 더 정교했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을 나서며 내가 사건의 순서를 거꾸로, 그러니까 과거와 미래를 역으로 이해했음을 딸롱이에게 확인받고 나서 더욱 확신하게 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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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7-03-2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아직 못 봤구요~--;
테드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제가 완전 애정하는 책이지요~^^

단발머리 2017-03-24 13:11   좋아요 0 | URL
아.... 테드창이 알아야할텐데요.
양철나무꾼님의 애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요^^
저는, 책소개에서 너무 거창하게 칭찬한거 아니야? 하고 좀 삐뚤어지게 보았는데, 책 읽어보니 참 좋네요.
영화를 아직 안 보셨다니, 영화도 권해드립니다. 다른 느낌을 선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ㅎㅎㅎ

보슬비 2017-03-2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아직 책은 읽지 않았는데, 정말 가끔 영화가 책으로 상상하지 못한것을 표현해줄때는 더 좋을때가 있는것 같아요. 결과를 알지만 똑같은 선택을 한다는것은 상실감보다 행복감이 더 컸다는 뜻이기에 더 감동적이었던것 같아요. 저는 아직 결과를 모르지만 지금까지로는 계속 같은 선택을 할것 같아요. ㅎㅎ

단발머리 2017-04-03 12:29   좋아요 0 | URL
결과를 알고도 한 선택이라는 점에서... 저는 여주인공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아이와의 매 순간을 더 기쁘게 소중하게 느끼지 않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저도... 보슬비님과 같아요.
지금까지로는 계속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아요. 우리 행복한가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