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전에 시내에 나갔다가 The Second Sex을 샀다. <바로드림>으로 구입하면 알라딘보다 5,000원이 저렴해 충동적으로 그만…. 충동구매는 후회를 부른다. 거의 대부분.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이라서 대출 건수를 늘려주는 특별 관리가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아무개님이 이 책에 별 3개를 주면서(*^^*), 7새로운 사회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전망에 대하여만 읽어도 되겠다 하셔서 그렇게 해볼까 생각 중이다.


『젠더와 민족』은 정희진님의 토요일 칼럼에 소개된 책이다. 상호대차로 빌린 책이라 가능하면 꼭 읽어보려 했는데, 전혀 가능하지가 않았다. 생각보다 어려워 이번에 돌아가면 이 책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잘 가. 아쉽지만 빠이 빠이~~



책 세 권을 미뤄두고, 오늘 읽은 책은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 아직 3분의 1 밖에 읽지 않아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하고. 지금까지 읽었던 부분 중에서는 이 부분이 인상깊었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욕망이 꽂히는 지점이 저마다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우리의 욕망이 다른 동물들의 번식 본능과 유사한 것인 양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묘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또는 그녀가 번식적 이점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기꺼이 동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있는 상대가 유전적 로또일 때도, 그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별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않을 경우 억지로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덜 까다로운 사람들도 있지만, 인간의 욕망이 보여주는 진정으로 놀라운 점은 그것이 매우 차별적이라는 것이다. …. 요컨대 우리는 특정한 사람, 특정한 배우자를 진화심리학이 설명할 수 없는 전혀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경험한다. (127)




특정한 사람에게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내 앞의 그 사람이 전혀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느껴지는 그런 순간. 그런 순간을 설명할 때, 보통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우리가 특정한 사람, 특정한 존재에게 한없이 끌리는 순간, 그의 인력에 거부할 수 없는 순간, 내 눈동자와 손과 발, 몸 속 세포 하나 하나가 오직 그 사람에만 향하는 그 순간을 우리는 설명할 수 없다. 증명할 수 없고, 밝혀낼 수 없다.




『욕망의 진화』의 저자 데이비드 버스는 배우자 자질에 대한 선호도에 나타나는 차이에서 성차이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주 작았음을 시인하면서도(99), 여성들은 무엇보다 돈 (그리고 지위)를 원하는 반면 남성들은 무엇보다 젊음(그리고 아름다움)을 원한다는 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101)  버스의 주장에 반박하는 이 책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는 진화심리학이라는 분야가 남녀에 대한 문화적 가정들을 토대로 가설을 세우고 이러한 가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데 망설임이 없는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105) 그런 과정이 과학적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조금 더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진화심리학은 인간,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무시하는 듯하다. 인간은 영장류의 한 종류인 동물일 뿐이고, 또한 한낱 동물에 불과하지만, 본능에 따르지 않는, 본능을 넘어서는 영역에 대한 설명에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사랑. 나에게 유익하지도 않고, 나를 이롭게 하지도 않는, 오히려 나를 절망과 한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그 어떤 대체 불가능한 존재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과 느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없이 이타적으로 변해버리는, 희생을 희생이라 여기지 않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양보해버리는 혹은 양보하고 싶은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설명이 불가능한 그 모든 행복하고 즐거운, 절망과 후회의 순간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타인의 특징은 아주 사소한 것일 때가 많다. 우리는 그 사람의 목소리 톤, 눈빛, , , 눈썹, 손톱 모양, 또는 커피 잔을 집는 방식에 매료되기도 한다. 한 사람이 말하거나 움직이는 방식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 남성이 과거의 상처로 방황하는 모습이 어떤 여성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한 남성의 무엇이 자신을 매료시키는지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그 남성의 독특한 분위기를 말하며 그 수수께끼 같은 자질을 묘사하는 여성들도 있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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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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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아내들이 대개 여자였다. (31)

 


아내 가뭄이라는 제목을 문장으로 바꾸면 우리는 모두 아내가 필요하다혹은 여성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쯤 되겠다. 전통적으로 아내란 집 안 여기저기 쌓여가는 무급 노동을 더 많이 하려고 유급 노동을 그만둔 사람이다.(30) 아내가 집 안의 자질구레한 일을 맡아주기에 결혼한 남자는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가정을 이루고 아이가 있는 남자는 직장에서 미혼의 남자보다 더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아내의 도움으로 남자는 더욱 안정적으로 자신의 일에, 자신의 인생에 집중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첫 아이의 출생과 함께 신체 리듬은 육아, 정확히는 수유 간격에 따라 맞추어지고, 아이와 관련된 모든 일에 자동적으로 ‘1순위가 될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는 일에 소홀한 무책임한 사람으로,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소홀한 무심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20년 동안 여성 대졸자 수는 남성 대졸자 수를 크게 앞질렀다. 1985년에 앞지르기 시작하여 지금은 전체 대졸자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 또한 직장에서 어느 정도 끈질기게 버텨 경력 사다리를 반 정도 오른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중간 관리자의 45퍼센트를 차지한다. 하지만 회사 중역에 이르면 여성의 비율은 고작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오스트레일리아 증권 거래소 200대 기업의 CEO 중 여성의 비율은 게일 켈리(오스트레일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웨스트팩은행의 CEO)가 휴가 중인지 아닌지 여부에 따라 2~3퍼센트를 왔다 갔다 한다. (68)

 

 


전체 대졸자의 60퍼센트가 여성이고, 또 많은 수의 여성들이 직장에서 일하지만, CEO를 비롯한 최고위 자리에까지 올라서는 여성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이 남성보다 일을 못하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야망이 적기 때문에? 여성이 남성보다 불성실하기 때문에? 아니다. 남성이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회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여성도, 그 일과 관련해 노력과 실력을 갖춘 여성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결혼하고, 똑같이 취업해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여성 CEO의 비율이 2~3퍼센트라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여성에게는 아내가 없다라는 것?


 







일하는 여성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더 많은 여성이 사회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로 더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가정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을 가정에만 묶어두려는 여성의 신비가 약화된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여성이 직장에서 일하는 만큼또는 여성이 직장일 때문에 가정의 일을 돌보지 못하는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남성들이 채워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여성을 직장으로가 서서히 자리잡아가는 반면, ‘남성을 가정으로는 여전히 먼 일처럼 보인다. 결국, 일하는 여성은 이중 노동에 시달린다. 직장에서 일하고, 가정에서 일한다. 생계부양자로서 일하고, 아내로서 일한다.


 





많은 여성들, 특히 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업무 경쟁이 치열하고 스트레스가 많은데, 집에 오면 집안일도 내 차지고…… 남편 짜증과 비위 맞추기에 지쳤다.”며, “나도 마누라가 필요하다.”고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페미니즘의 도전>, 103)

 

 


그 다음은 악순환이다. 미뤄둘 수 없고, 기다려 줄 수 없는 육아의 특수성 때문에, 여성들은 좀 더 책임 있는 전임제 일자리보다 탄력적 근무가 가능한 임시직, 시간제 일자리에서 일하기로  스스로’, ‘결정한다. 그래야만 가정일과 직장일을 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여성은 남성의 재산이었다. 여성들은 아버지-남편-아들 (혹은 오빠나 남동생)의 법적인 지배 아래 있었다. 1893년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고, 미국에서는 1920,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가장 최근에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나라는 2015년 여성의 선거 참여를 허용한 사우디아라비아다. 이게 끝은 아니다. 여자는 취업할 수 있었지만, 결혼과 동시에 퇴직해야만 했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44년간이나 유지되던 기혼자 퇴직법’, 여성에게만 적용되었기에 정확히는 유부녀 퇴직법은 미국, 캐나다, 영국에서 1946년에야 폐지되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많은 불평등들이 하나씩 바뀌어 가고 있다. 앞으로도 갈 길은 무척이나 멀어 보이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여성들과 남성들이 반세기 전에 그랬듯이 함께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새로운 전국적 운동에 나서는 모습을 보고 싶다. 40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은 이제 30시간이 돼야 할 테고, 합쳐서 주 80시간을 노동하면 안 되는, 아이를 키우는 남성과 여성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노동하는 부모들에게는 하루 6시간 노동이 알맞고, 젊은 남성과 여성은 교육과 심화 훈련의 기회를 노동과 결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60세가 넘는 사람들은 집안일만 돌보기보다는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계속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좀더 많은 일자리가, 그리고 여성과 남성에게 새로운 성공의 기준이 주어져야 한다. (<여성의 신비> , 16)

 

 

남성과 여성, 아이와 노인이 함께 행복한 사회에 살기 원한다는 데에 모든 사람들이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거라 생각한다. 권위적이고 자신의 주장만 말하는 아빠와는 누구도 저녁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피곤에 절어 무력감에 빠져있는 엄마와는 대화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항상 그립지만, 어린이집 차에서 내렸을 때 두 팔로 맞아주는 아빠가 서있다면 아이는 활짝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같이 키우며,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하는, 다시 또 살아가고 사랑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모두 행복한 이 시간 속에서, 혼자만 울고 있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이리저리 1 3, 혼자만 뛰어다니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혼자 속앓이 하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 내가 행복해야 식구들 모두 웃을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해야 그게 진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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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7-05-3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_ 좋음. 오늘 글 짱 좋음.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단발머리 2017-05-30 17:22   좋아요 0 | URL
우리 모두 아내가 필요하지요~~
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야나님이 좋다고 하니 나도 좋네요. 헤헤
 
루슬란과 류드밀라 비룡소 클래식 7
푸슈킨 지음, 카랄리코프 그림, 조주관 옮김 / 비룡소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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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20세기』 에서 제일 먼저 소개된 작가가 푸시킨이고, 책 제목을 비룡소 클래식에서 본 것 같아 찾아보니, 이 책이다. 다짜고짜 첫날밤.

 

 

여러분! 속삭이는 사랑의 소리가 들리는가?

달콤한 키스 소리가 들리는가?

마지막으로 신부의

더듬거리는 수줍은 말소리가 들리는가?

신랑은 이미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안으려고 가까이 다가섰다.

이때 갑자기 … (19)

 


 






신부 류드밀라는 밤안개보다 더 검은 그림자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딸을 잃은 대왕은 류드밀라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그녀를 아내로 주겠다고 선언한다. 이미 그녀는 루슬란의 아내인데.... 그녀를 짝사랑하던 기사 3명과 그녀의 남편까지, 한꺼번에 네 사람이 길을 떠난다.









질투의 화신들인 기사들과 결투하고, 머리통과 대결하고, 핀란드 노인의 도움을 받아 난쟁이 마법사 체르노모르에게서 아내를 구출하는 데 성공한 루슬란. 한 번의 위기를 더 겪은 후에 잠자는 류드밀라를 마법에서 해제시키고 그녀를 구한다. 그리고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오래오래 행복하게.  

 


루슬란과 류드밀라의 사랑과 모험이야기보다 더 관심이 가는 건, 작가의 이야기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말 그대로 동화 같은 이야기. 사랑과 질투, 명예 회복을 위한 결투 신청 그리고 죽음. 푸시킨은 정말 아내를 그렇게 사랑했을까. 사랑. 사랑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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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5-29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시킨이 자존심이 센 성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랑과 명예, 두 마리 토끼를 되찾고 싶어서 결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


단발머리 2017-05-30 14:31   좋아요 0 | URL
나탈리아가 니콜라이 1세와도 썸싱이 있고 해서, 사실 푸시킨이 많이 예민했던 건, 맞는 것 같아요.
사랑과 명예 중에,
사랑과 진지한 대화, 일테면.... 너는 날 사랑하지 않냐... 를 먼저 나눴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입니다. ㅠㅠ
 















로쟈 이현우님의 20세기 러시아 문학 강의. 고리키에서 나보코프까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학이 어떤 자리에 있었나를 러시아 역사와 함께 짚어본다.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관심 가는 작가는 예브게니 자먀틴이다. 혁명에 열광한 친볼셰비키였지만 혁명 이후에는 오히려 볼셰비키로부터 반동 작가로 찍혀 1920년대 말 이후 작가 활동을 전면 금지 당한 불운의 작가. (61)















자먀틴의 『우리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3대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꼽힌다고 한다. (71) 『우리들』의 배경은 29세기 미래 사회이다. 조선 담당 기사이자 수학자인 D-503은 번호로만 존재하는데, 반란 세력의 일원인 여성 I-330과 만나 에로스적인 경험을 하게 되면서 자기 속의 진짜 나가 깨어난다.



자기 안에 있는 어떤 동물, 여기서는 어떤 짐승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바로 영혼이에요. 여기서 영혼은 뭔가 고상하고 순결하고 순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지워져 버린 동물성입니다. 우리가 이성적 존재로서만 인간을 규정할 때, 이성의 승리를 외칠 때 떼버린 것, 곧 본능, 감정, 욕망 이런 것들이 귀환합니다. (81)



이제 눈 떠 버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D-503I-330과 함께 반란에 참여하지만, 결국에 실패로 돌아가고, 목숨을 보전 받는 대신 수술을 통해 백치 상태가 된다. (83) 소설의 마지막은 그런 상태를 그리는 것으로 끝난다. “… 나는 우리가 승리하길 희망한다. 아니, 그보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이성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



영혼이란 순수하고 고결한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지워져 버린 동물성을 뜻한다는 설명이 무척 신선하다.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감정의 변화에 솔직한 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이성의 승리를 확신하는 백치 상태의 D-503과 현실의 503은 서로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판단하는 는 무엇의 지배를 받는 누구?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가 공산주의입니다. … 한편 사회주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입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는 것은 당연하죠. 능력 이상으로 일할 수는 없으니까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가는 것이 사회주의입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고 하는 공산주의와는 그 점에서 구별되죠. 반면 자본주의는 어떤가요? 능력에 따라, 혹은 능력 이상으로 일하지만 일한 만큼 가져가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자본가가 노동을 착취하기에 노동자는 언제나 잉여노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53쪽)

나에게 소설이란 심미적 희열을, 다시 말해서 예술을 기준으로 삼는 특별한 심리상태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에만 존재 의미가 있다. (나보코프,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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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 발문의 처음 두 문장이다.


아날렉타analecta, 이것은 먹다 남은 음식, 즉 남은 것, 나아가서는 빠진 것을 보충하고, 가외로 얻은 종류를 가리키는 라틴어다. 이 전체 제목 아래 지금까지 의뢰할 적마다 써왔던 수필, 서평, 대담, 토론, 인터뷰 등을 선별해서 모아 발간하게 되었다. (289)



이 책 맨 앞에는 <한국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글이 있는데, 그 글에서 사사키 아타루는 지난 가을부터 한국 광장에서 보인 촛불 시민의 불굴의 의지와 긍지에 대해 칭찬한다. 곤란을 극복하는 능력, 용기가 부족하지 않았던 한국 국민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넘친다. 느껴진다. 허락된다면 친애하는 마음을 담아서, 2017 3 10일 한밤중에, 보내어진 편지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글이 인상 깊었다.


이야기는 현대 최초로 대도시에서 대규모 화학병기 테러로 기록된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의 주동 단체인 옴진리교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내부자료를 통해 옴진리교 신자들은 자살하려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죽는 순간과 이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을 일치시키려 했다. , 자신과 세계의 멸망이 일치하는 그 한 점을 절대적인 향락’, ‘죽음의 향락’, ‘멸망의 향락으로서 욕망했다는 것이다. (81) 이것은 뿌리 깊은 인간의 욕망, 즉 내가 죽으니, 따라서 모두 죽어라. 깡그리 죽어라. 다른 사람들도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의 저급한 발현을 뜻한다. 저자는 모두 죽는다에서 모두 죽어라로 비약하는 파멸에 이르는 이 욕동 Trieb, 즉 충동을 인간은 불교 특히 원시불교와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방법으로 수렴해왔다고 정리한다.


저자는 부처의 회답을 윤회전생으로 본다. 즉 전생에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현세에 이런 저런 고민을 갖게 되었고, 내세가 있으니 현재의 삶 역시 자포자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죽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바꾸는 것. 개개인의 죽음을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으로 바꾸는 것. 개개인의 죽음을 절대적으로 상대화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개개인의 죽음을 초월한 절대적인 죽음을 마련해둡니다. 바로 참된 죽음입니다. 이 개개인의 죽음 그 자체인 연속되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완전히 탈출하고 벗어나는 것이 참된 죽음입니다. 그러면 더는 공포도 고통도 아니지요. 두 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이것을 해탈이나 열반,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93)



일신교 쪽은 오히려 더 간단하다. 죽음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정한 죽음을 저편에 둔다. 죽음의 고통을 경멸한다. 최후의 심판이 실로 진정한 죽음이며 그것에 비하면 우리 개개인의 죽음은 하찮다고 말한다. 기독교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구원이 없는 것인데, 최후의 심판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이 그것이다. (95)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인용해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고, 모든 사람이 나누는 절대적 경험, 죽음. 다른 모든 가능성을 무로 만들어버리는 가능성. 모든 불가능성의 가능성, 죽음. 하지만, 내가 죽었을 때, 내가 죽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것은 육신이 없는 이승의 타인들이다. 나는 죽어갈 뿐, 나는 내가 죽은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인 비은폐성 Unverborgenheit=aletheia’ (숨어 있지 않은, 드러난, 들춰진, 나타난 혹은 밝혀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저승은 없습니다. 이승 또한 없습니다. 죽음에는 피안도 차안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갑니다.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무한한, 끝없는 여정입니다. 어차피 죽는다거나 어차피 죽으니까 같은 부질없는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러므로? 그런 말은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죽어갑니다. 무한히 이어진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갑니다. 죽음이 없는 양 그 길을 가는 중입니다. 자포자기의 심경으로서가 아니라 웃으면서 죽음을 대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117)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돈이나 미모, 명예 혹은 인기에 대한 집착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존립 그 자체, 생명에 대한 집착은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된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 숨을 다해 나 죽기 싫어,를 외치는 (혹은 속으로 되뇌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가야할 때를 알고 스스로 곡기를 끊을 정도로 단련된 분들, 자연의 섭리를 자신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는 분들은 정말 극소수다.


우리 중 누구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지만, 이제 곧,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죽음은 삶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의문이다.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이다. 저승도 없고, 이승도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 참된 죽음에 이르기 위해 해탈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 눈을 감으면 아버지 집에 영원히 살리라,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누구의 답이 맞는지는 눈을 감아봐야 알 것이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기에, 우리 모두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믿음과 신념에 따라 살 뿐이다. 죽은 후에야, 내가 죽은 후에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은 역시나 저자가 추천하는 책들로 마무리되는데, ‘나의 소설관을 바꾼 책 세 권이라는 제목이 시선을 끈다.


사무엘 베케트 : 『말론, 죽다』

제임스 조이스 : 『율리시즈』

헨리 밀러 : 『남회귀선』

















제목은 3권이라는 데, 베케트는 3부작의 다른 2『몰로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나 단편집 중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소설과 텍스트들』과 바꿀 수 있고, 조이스는 『피네건의 경야』와 밀러는 『마루시의 거상』과 바꿀 수 있다고 하니, 8권이 되는 셈이다. 몇 권은 검색이 되지 않는데, 번역된 제목이 다른 듯하기도 하고 내가 못 찾는 이유도 있다. 제목들이 한결같이 무겁고 장엄해서 좀 부담스럽기는 한데, 일단 책 제목과 표지는 한 번씩 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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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 밀러가....남회귀선도 썼네요? 북회귀선만 알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2017-05-24 14: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오늘 알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네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