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넥서스

이제 우리는 유기체가 아닌 이질적인 종류의 지능을 불러냈고, 이 지능은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나 우리 종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생명체들까지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이 낯선 지능을 소환한 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될지, 아니면 생명 진화의 희망찬 새 장을 여는 시작이 될지 판가름 날 것이다. (561쪽)

오랜 시간을 들여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를 읽었다. 재미로 하자면, 『사피엔스』가 최고이고, 충격적인 걸로 하자면 『호모 데우스』가 최고일 테지만, 이 책은 앞으로의 전망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놓칠 수 없는' 책이기는 했다.

나의, 인공지능에 대한 사유와 인류의 미래 전망에 관심을 갖는 친구는 인공지능이 왜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없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사고 실험은 흥미롭고 섹시하고 도파민 터지지만(저속노화 주창하시다가 고속노화로 선회하신 분이 생각나는군), 사실 나는 그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그의 주장, 'AI는 판단의 주체가 될 수 없고, AI가 그럴 것이라는 주장은 식민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서백남들의 픽션'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내 안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고. 그런 채로, 그러니깐 의문과 질문을 껴안은 채로 계속해서 읽을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재미있게 쓴다는 점에서는 유발 하라리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촘촘한 논증 역시 물론 수준급이다. 그래서, 전 세계 초베스트셀러를 연이어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실어줄지는 다른 책들을 읽어가면서 확인해 봐야겠다.











2.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

나는 언니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상처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면서 내가 더 상처받았다. 사람을 가려서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지 않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져 몹시 괴로웠다. 지금도 그렇다. 엄마도 아버지도 심지어 박겨울도 모든 게 언니의 잘못이라고 하는데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혹시 언니보다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인 걸까……………. 나는 어떻게든 언니의 손을 놓지 않으려는 내가 언니보다 더 부도덕한 인간은 아닌지 깊게 고민했다. (43쪽)

2025년의 발견이라 하고 싶은 이서수의 소설이다. 너무 예쁜 소설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응?) 소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 말하지만, 사랑에 '너무'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하는 우리네 각박한 세상에서. 나부터 그런 삶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다. 적당히 사랑하는 사람만 생존이 가능한 세상. 내 모든 걸 다 주고, 내 모든 걸 다 걸고 하는 사랑의 위험을 감수할 수 없는 세상. 그런 세상에 묵묵히 적응해버린 나. 그런 내가 바로 이 소설의 '나'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 소설 속의 이 '언니'다.

위픽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국에서 멀리 사시는 분이 각별한 안목으로 선택해 주신 책이어서, 한글로 쓰인 책이어서 더 반갑고 더 좋았다.













3. 너의 유토피아

2.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인간이 나에게 팔을 휘두르며 신호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점점 더 격렬해지고 점점 더 불규칙해졌다.

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 경련했다. 주차 시설의 옥상에서 팔을 휘두르며 몸을 뒤트는 인간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Kad. Kad. Kad. Kad. Kad.

314의 음성신호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푸른 불빛은 점점 강해졌다.

3.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62쪽)

읽지 않았어도 기억나는 로봇 공학의 3원칙.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이 소설의 특별한 점은 자동차 형태로 만들어진 이 작품의 주인공이 인간과 비슷하게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설정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극찬하면서 많이 회자되었던 것이 작중의 인물뿐 아니라 개에게도 작가의 감정이 이입되었다는 주장인데, 이 소설이 딱 그렇다. 자동차 형태의 로봇이, 인간이 버리고 떠나버린 지구에서 자신에게 입력된 로봇 공학 원칙에 따라 인간을 구하려 애쓰고, 또한 자신에게 입력된 원칙을 벗어나 다른 로봇을 구하려 한다. 이 단편의 이름은 <너의 유토피아>이다.

소설과 소설가가 딱 붙어 있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정보라 작가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작가의 말이 초판과 신판으로 두 개가 실려 있는데, 구구절절 가슴이 아리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 이렇게나 예민한 사람이어서, 독립된 공간에서 집필해야 할 두 손으로 오체 투지했던 이야기 읽을 때, 마음 한 쪽이 닳는 것 같다.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사람들. 마음으로부터 오는 깊은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다.









Stolen Focus / The Intruder / Reading Women 빨래하는 페미니즘

이런 책들을 읽고 있다. 『Stolen Focus』는 많이 어렵지는 않은데 영어라서 그런지 읽는 속도가 느리다. 이러다가 영영 밀리는 거 아닌가 싶다. 『The Intruder 』는 가정 폭력 피해자 어린아이가 나와서 계속 읽어야 할지 고민 중이다. 맥파든 소설 중에 어린이가 등장인물인 경우는 여럿이었는데, 계속 읽어야 할지 고민되는 건 이 책이 처음이다. 『Reading Women』은 한글책으로는 『빨래하는 페미니즘』이고,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 다시 읽고 싶어 시작했는데(30쪽), 이 책 역시 진도가 지지부진하다.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 의미들 / Crying in H mart

우치다 책은 3분의 1 읽었는데, 도서관에서 반납하라고 해서 일단 오늘, 내일 읽어야 한다. 『의미들』은 할 이야기가 많은 책이기도 하고, 내용 자체가 무거워서 읽다가 자꾸 책을 덮게 된다. 쭉쭉 넘길 수 없는 그런 사정이 있다. 『Crying in H Mart』는 짱구는 다 먹었는데, 이제 겨우 4쪽 읽었다.











『Master Slave Husband Wife』는 신문기사로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출간 소식을 접하고 알게 되었다. 목숨을 건 흑인의 탈출 이야기로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제일 널리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이 소설이 특별한 점은 두 사람이 비밀 통로나 스스로를 감추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차와 증기선, 최고급 역마차를 갈아타면서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아슬아슬한 젠더 수행과 인종에 대한 오해 덕분이었다. 여성이 혼자 여행했더라면, 백인 여성과 흑인 노예가 함께했더라면 불가능했었던 일이, 유약한 백인 청년과 건장한 흑인 노예의 결합이어서 가능했다.



겨울이라 정말 낮이 짧은가.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벌써 4시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단다. 길고 긴 겨울밤에 밀린 책들 다 읽어야 하는데. 마음은 급하고, 눈은 자꾸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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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01-07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작가 저도 좋아해서, 제가 읽은 세권의 소설 모두 별 다섯개를 주었어요. 올려주신 책은 저도 안읽은 책이네요. 지금 읽는 책 읽고 다음 책으로 메모해놓았어요.

단발머리 2026-01-08 09:11   좋아요 0 | URL
역시나 역시! hnine님은 벌써 이서수 작가님을 알고 계셨군요. 세 권 모두 별 다섯이라 하시니 저도 마저 읽어봐야겠어요.
이서수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하하하!!

난티나무 2026-01-08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몸과 여자들> 좋아요. 추천합니다. 연작으로 그 후에 나온 <몸과 고백들>은 안 봤지만 그리고 몸과 여자들,이 실려 있다고 해서 안 샀지만 (음 샀던가? ㅋㅋ) 아마 좋지 않을까 싶고요. 전작 읽기 하고 싶은 작가예요.

단발머리 2026-01-09 17:51   좋아요 0 | URL
위의 댓글에 hnine님이 소설 세 권 모두 별 다섯개라 하셔서 제가 기대가 많다고 합니다. 저도 전작읽기하고 싶은 작가예요.
물론 그 앞에 전작읽기 다짐한 소설가들이 많이 계시긴 합니다만.... 이서수 작가님 젊어서 아직 그렇게 작품이 많지는 않을거라는 생각도 조금 있고요. (찡긋)

다락방 2026-01-09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짱구 다시 사시면 된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고요,

제가 이 페이퍼를 읽으면서 잠깐 눈물이 핑- 돌아서, 그러니까 너의 유토피아 부분에서요, 그래서 아, 단발머리 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조은가! 했어요. 사람이 글을 읽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랑 다른 관심사를 가진 사람의 생각을 듣는 일도 즐겁고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어느 지점에서는 교집합으로 만난다는 것도 너무 즐겁기 때문에, 읽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서수 작가는.. 저 뭐 읽었나요? 하여간 저 책, 언니가 나오는 저 책을, 저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읽고싶은 책은 많고 읽어야할 책도 많고 그런데 저는 게으르고.. 참.. 머릿속에 할 일이 수십가지인데, 프렌치 토스트 해 먹고 있습니다. 껄껄.

저는 음 언제나 그렇듯이 생각이 많은데요, 요즘은 관계라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좋은 사이인가,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마음에 품고 사는 관계는 어떤 사이인가, 뭐 그런 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언제가 말하게 될 날이 오겠지요.

이 페이퍼 제목의 ‘겨울밤‘이 제게 참 낯설게 여겨집니다. 겨울밤이라뇨, 겨울밤이라뇨. 하핫. 저는 여름낮, 여름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단발머리 2026-01-09 17:59   좋아요 0 | URL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데도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있어서, 그런 사람들이 함께할 때 그 세계가 더 넓어질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른 지점이 있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공통되는 지점이 더 많을 수도 있고요.

저는, 돈이 최고라는 이 세대, 돈이면 다 된다는 이 세상에서, 돈 주는 사람 없이 글 쓰는 이 커뮤니티가, 알라딘 서재가 그래서 더 소중하다고,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에 대해 말하고, 자신에 대해 말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이런 공간이요. 물론 우리는 영어 이야기도 나누고, 짱구 이야기도 나누지만요. 프렌치 토스트도 역시나 그렇구요.

제가 싱가폴 갔을때였죠. 맨날 여름이니깐요. (전 1월에 갔더랬죠) 여긴 이래? 항상 그니깐 늦게까지 놀고 사람들이 집에 안 들어가고, 엉? 이랬더니 동생이 그러더라구요. 한국의 여름, 한국의 휴가철 같은 분위기라고요.
여름을 좋아하는 다락방님에게는 아주 딱입니다요!!

독서괭 2026-01-14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작가 책 궁금해지네요. ‘사랑에 너무 빠지면 안 된다’는 내용 보니, H마트에서울다 생각이 나는데, 작가의 어머니가 평소 어느 때는, 누구에게서든 자기 자신의 10%는 스스로를 위해 남겨둬야 한다(정확한 워딩 아님)는 말을 하거든요. 작가는 나중에서야 엄마가 딸에게서도 10%를 남겨두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AI 이런 거에 느린 편인데, 하도 요즘은 안 쓸 수 없게 되나 보니 저도 슬슬 쓰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서 저는 전혀 모르겠고, 단발님이 전해주시는 이야기로 파악해봐야겠어요 ㅎㅎ

단발머리 2026-01-15 13:06   좋아요 1 | URL
저는 30퍼센트 이상 남겨두는 사람으로서(자식에게도요) 작가 엄마의 이야기가 참 옳다고 생각합니다. 독서괭님의 이야기는 H Mart 읽어가시면서 찬찬히 들어볼게요^^

AI 영상 몇 개 이어봤더니 저의 알고리즘 어쩔, 다 AI만 나오네요. 저는 문송인데.... 어떻게 저의 이야기로 파악하시려는지 ㅋㅋㅋㅋㅋㅋ 걱정이 산더미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그래, 나는 문과야. 잘 몰라. 모른다는 거를 알고는 있으니깐, 완전 모르는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공지능이랑 휴먼노이드에 진심인 건... 나잖아.

뇌와 의식, 불멸과 영혼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나잖아.

AI 관련 글 쓰는 사람, 나잖아.

AI 시대의 기본소득이랑 살인교사범 AI에 대해 글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 나잖아.

근데, 왜.


내가 아니라 네가 2026 CES에 가는 거야?

왜 내가 아니라.... 왜...



라고 아무리 물어도 '대답없는 너'는 대답하지 않았고.

라스베가스행 비행기는 얌전히 떴고, 그렇게 나는 덩그라니 남겨졌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까. 들을 수 없다면, 그 답은 내가 찾아가겠어.

결심의 밤. 혹은 결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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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7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7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수하 2026-01-07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MSHW 재밌어요? 재밌을 것 같은데....

단발머리 2026-01-07 09:56   좋아요 1 | URL
소재 자체가 특별하고 역사적인 부분도 얽혀 있어서 겁나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한글책 사야하나 고민 중이예요. 15쪽 읽었는데, 알쏭달쏭 무지개라서요. 더 정확하게 읽고 싶어요^^

독서괭 2026-01-07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과생은 웁니다 ㅠㅠ
우리 단발님을 ces에 보내달라!!
근데 ces가 뭔가요? (찾아보고 옴)
와.. 엄청난 기술 전시회군요.

단발머리 2026-01-07 10:51   좋아요 1 | URL
저도 가고 싶다고요!!!
이 사람들아, 제발 독서괭님 말 좀 들어라!!!!!!!!!!!!!
이번에 CES에서 현대차가 선보인 아틀라스 보셨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관절이 360도 회전 ㅋㅋㅋㅋㅋ
그런거 필요없는데 말이지요. 저 세탁기 안의 빨래 좀 건조기에다 넣어주고, 그리고 좀 개켜주고 ㅋㅋㅋㅋㅋㅋㅋ

앗!! LG에서 나온 클로이드는 빨래 갠대요. 와우!

망고 2026-01-07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CES가 열리고 있는 그곳에 가고 싶네요ㅋㅋㅋㅋㅋ로보트는 뉴스로 본 걸로 되었고 관광가고 싶어요 역시 문과ㅋㅋㅋㅋㅋㅌㅋ

단발머리 2026-01-07 12: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맞네요. 로보트 구경은 티비로 해야죠. 어차피 상용화되려면 시간 걸릴텐데요. 그럼 망고님이랑 저랑은 1층에서 만나요! 카지노 입구에서요 ㅋㅋㅋㅋㅋㅋ
 



인공지능과 휴먼노이드의 결합이 신인류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테고.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을 테다. 나는 관심이 많은 쪽이다.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에서 언급되었듯이, 인공 팔, 인공 다리, 인공심장의 교체로 인해 인간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에서 사이보그에 가까워질 때, '어디까지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혹은 '어디에서부터 인간이 아닌가'에 대한 논의 역시 정답 없이 무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신체 구성물의 51% 이상이 원래 인간의 신체였을 때, 그를 인간이라 규정한다면, 구성물의 51% 이상이 실리콘, 스테인리스 스틸, 고강도 폴리머, 티타늄일 때, 그는 사이보그가 되는 것인가.

다운로드된 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뇌가 다운로드되어 사이보그 스페이스를 떠도는 것이 인간 진화의 끝판왕이라 믿는 사람들은 다운로드된 뇌의 복사로 인한 '나'의 '반복'을 환영할 것이다. 환영할 만한 일인가. 적어도 그 일에 대해 회의적이지는 않다.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다만, 나는 묻고 있을 뿐이다.











사이보그는 인간/기계, 자연/기술, 남성/여성, 신체/정신 등의 이분법적 사고를 무너뜨리며, 기술적 변형을 통해 성별, 신체, 인간의 개념을 재구성할 수 있다고 해러웨이는 전망했다(『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정체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재구성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기억이 나인가.

내 뇌가 나인가.

몸 없는 나,를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몸 없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기억이 혹은 기억의 총합이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몸 없는 나에 대해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내가 믿고 있는 기독교에서는 몸 없는 개별적 존재, 즉 영혼에 대해 긍정한다.

이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써야겠다.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나는 부분까지 써보려고 한다. 쓰면서 내가 모르는 부분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서구의 기본 사상은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중세는 신본주의 사회였지만, 신을 믿고 경배하는 한, 인간은 지구의 대표자로, 지구의 지배자로 살 수 있었다. 다윈을 시작으로 진화론이 정교화되었고, 여러 층위의 생물학적 발견의 결과로 인간이 독자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지난한 진화의 과정 속에서 '가장 운 좋은' 개체였다는 사실이 현재 과학계에서는 통용되고 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유발 하라리에게 도착한다. 내가 써둔 문장을 그대로 가져온다.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일 뿐이며, 이 세상에는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지능과 의식 또한 그러하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 (『호모 데우스』) 근대 과학 발전 가운데 이루어진 해부학적 지식의 축적 결과, 내부 장기의 어디에서도 인간은 '마음'을 그리고 '영혼'을 찾아내지 못했다. 여기서 얻은 결론은 '마음이란 뇌 속의 신경 세포 다발의 특정한 전기 신호'라는 것이다. 유물론, 만물의 근원은 물질이고 모든 정신 현상도 물질의 작용 혹은 그 산물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나는 누구인가'와 '나는 무엇인가'의 사이에서, 단발머리)

인간 역시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유기체의 일종이며, 1.3~1.4 킬로그램의 단백질 덩어리 위의 전기 자극이 인간 사고와 의식의 실체일 뿐이라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털을 입고 있다는 것과 옷을 입고 있다는 것뿐이라면.

실리콘 위의 의식을 소유한 혹은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인공지능, 스테인리스 스틸을 입은 인공지능이 또 다른 인류라고 말할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정체성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 믿기 힘들 정도로 확률이 낮은 사건들이 놀랍도록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실로 경이롭기 짝이 없다. 나를 만들려면 우선 부모가 만나 아기를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특정 정자가 특정 난자와 만나야 한다. 우선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 아기를 갖기로 결정할 확률도 추정하기가 어렵지만, 나를 만들기 위해 특정 정자와 난자가 만날 확률만 하더라도 200경 분의 1에 불과하다. 대략적인 추정에 따르면, 평균적인 남자는 평생 동안 정자를 약 2조개 만들고, 평균적인 여자는 약 100만 개의 난자를 갖고 태어난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 나를 만든 특정 정자와 난자의 만남에 달려 있다면, 그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200경 분의 1이다. (『마침내 특이점이 시작된다』, 141쪽)


믿기 어려울 정도의 우연, 200경 분의 1의 우연을 믿는 과학자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 나는 그보다는 그 진화의 변화와 만남에 의미와 의도, 그리고 방향이 있다고 믿는 쪽이다.












AI 탐구는 미래 소설 읽기로 이어지고 있다. 벅찬 기대주 주민선 작가의 소설을 읽었고, 아무튼 정보라의 정보라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진'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읽을 차례다. 장강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짱구도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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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1-05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짱구 사셨군요?ㅋㅋㅋ
인공지능과 휴먼노이드..특이점이 시작된다에 꽂혀 심각하게 읽어내려가다 결론은 짱구?!
이건 H마트 읽어 본 사람들은 빵 터지는 사진인 거죠?ㅋㅋㅋ
새해 복 많이 받으실 겁니다. 허허허.

단발머리 2026-01-07 18:40   좋아요 1 | URL
결론은 항상 짱구입니다! 빨간색 오리지널과 주황색 누룽지맛(신상) 중에 심사숙고하다가 결국 신상을 선택했습니다.
H마트에는 한국 과자가 많이 나와요. 죠리퐁 속에 들어 있는 스푼 접는 법을 엄마가 가르쳐주셨다, 그런 대목도 있고요.

잠시라도 기쁨 드렸다니 매우 기쁩니다!
책나무님, 새해 복 많이 많이 받으시고,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락방 2026-01-09 13:11   좋아요 1 | URL
ㅋㅋ 맞습니다. 죠리퐁도 먹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짱구가 진리입니다!! ㅎㅎㅎㅎㅎ

그런데 단발머리 님은, 정말 사진 찍는 감각이 있으신 분이시네요. 짱구가 등장하는데, 신짱이 등장하는데 사진이 참 예술적입니다. 음.. 아니, 신짱때문에 예술이 된걸까요? 책과 간식이 있는 사진에서는 압도적 챔피언 이십니다!!

책읽는나무 2026-01-09 13: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H마트에서 울다> 올해 첫 책으로 읽고 있거든요. 이제 몇 장 안 남았어요.^^
앞부분 읽으면서 짱구 과자 나왔을 때 음. 울엄마도 짱구 좋아했었는데…그러면서 읽어나갔는데 다락방 님의 짱구 과자 사진을 보고 응? 독후활동이란 게 바로 이런 거로구나!(읽으면서 연상되는 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진리?!)깨닫고 저도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짱구 과자 사 와서 사진을 찍어뒀거든요. 저는 짱구가 두 가지 버전이 있는 건 첨 알았어요.
(아 그러고보니 짱구가 아니고 신짱이란 이름이었다는 건 오늘 알았어요.)그래서 지금두 개 다 사와서 지금은 다 먹고 없는데 사진은 남아 있습니다.ㅋㅋㅋ
근데 단발 님 이날 사진을 보고 나의 짱구 사진이 좀 퀄리티가 떨어짐을 느꼈어요.ㅋㅋㅋ
램프를 곁에 둔 저 블라인드 앞 나무 탁자 저 자리가 책과 간식의 포토존인가 봅니다.
저도 예술적 책과 간식 사진의 아우라 그걸 느꼈는데 다락방 님도 느끼셨군요.ㅋㅋㅋ

다락방 2026-01-09 13:52   좋아요 1 | URL
책나무 님, 짱구 사진 올려주세요!! >.<

책읽는나무 2026-01-09 13:57   좋아요 0 | URL
네. 조만간 짱구 사진 올려볼게요. 해가 바뀌고 나서 갑자기 왜 이렇게 바빠졌는지.ㅜ.ㅜ
그나저나 이 책 넘 좋네요.
며칠동안 정말 푹 빠져 읽었어요.
아. 원서가 아니고 번역서로 말이죠.ㅋㅋㅋ

단발머리 2026-01-09 18:04   좋아요 0 | URL
H마트의 독후 활동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것 같아요. 짱구도 짱구지만 한국의 여러 음식들... 갈비가 생각나는군요(군침).

저희집은 대대적인 청소와 정리가 필요한데요. 바로 저 지점만... 사진 촬영 때만 깨끗하답니다. 사진 스팟 ㅋㅋㅋㅋㅋ뒤로 더 물러날 수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답니다. 주위에 또 새로운 책들이 쌓여있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책+간식 사진은 책나무님께서 영원한 랭킹 1위이신데, 제가 짱구 덕분에 치고 올라갔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책나무님 완독 축하드리고, 다락방님과 저도 열독하겠습니다. 감상+짱구 사진 역시 기다릴게요~~
 













인생을 사는데 제일 어려운 문제 중 하나로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말하는데, 나는 조직 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워낙 인간관계의 풀이 좁아서 그런지, 인간관계로 인한 어려움이 그렇게 컸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아 잘 실망하지 않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일 수 있겠다.

지난주부터 시작해 어제까지 일신상에 각종 문제가 벌어졌는데, 그 중심에는 역시나 '인간'. 한 해가 다 지나가고 바람은 차가운데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꿀꿀해지려는 찰나. 책 읽는 것도 재미없고(대략 책읽기는 재미있어하는 편)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언제 신청해두었는지 모르겠지만 도서관에서 책 찾아가라 해서 머리는 복잡한데 다리가 움직여서 도서관에 갔다.

신년맞이 특별새벽기도회가 있어 교회 다녀와서 잠깐 짬에 식탁 앞에 앉아 두어 장 읽는데 나도 모르게 터져버리는 웃음ㅋㅋㅋㅋㅋ




아, 맞다. 내가 우치다 읽으려고 그랬지. 까먹었네. 내년에 우치다 많이 읽어야겠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4권을 읽었고.





























일단 먼저 골라놓은 책은 이렇다. 내년에는 책 많이 읽을 결심. 느닷없이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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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5-12-30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옳은 말만 하고 싶은 사람은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아 정말 그렇겠네요..??

단발머리 2025-12-30 14:25   좋아요 1 | URL
크흐 ㅋㅋㅋㅋ 바로 중요 문장 찾아주시는 센스! 😉

다락방 2025-12-30 15: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내년에는 책 많이 읽을 결심..... 흠흠.

음,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단발머리 님이 인간관계에 딱히 어려움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사실 단발머리 님 자신의 영향이라고 보여집니다. 제가 그동안 보아온 단발머리 님은 상대의 다름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고 본인의 말이 옳다고 무조건 우기는 그런 분도 아니셨거든요. 또 기분에 따라 상대에 대한 행동이 달라지는 분도 아니셨고요, 쉽게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고 다니는 분도 아니시고요. 부정적인 말을 먼저 하는 분도 아니시고요. 어떤 말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생각을 하는 분이시고요. 신뢰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어떻게 모질게 돌아설 수 있겠어요? 계속 옆에 있고 싶을 것이고, 그리고 계속 옆에 있고 싶다면, 상대도 단발머리 님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여야겠지요. 결론은, 단발머리 님의 인간관계가 많이 어렵지 않은 이유는, 단발머리 님은 유독 스스로를 더 잘 다스리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좋은 책읽기 시간 보내시고요, 올해 마무리도 잘 하시길 바랍니다. 꿀꿀한 마음은 금세 사라지기를요.
내년에도 후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단발머리 2025-12-30 20:37   좋아요 0 | URL
아~~~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란 말입니까!!!

다락방님의 이 댓글 출력해서 냉장고에 붙여두고 싶어요. 다락방님이야말로 댓글 속의 그런 분이셔서 저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신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아직 저의 진면목(?)을 알라딘 세상에서는 많이 자제하고 있을 수도 있구요. 저는 인간 관계에서만 그런 건 아니지만 갈등 회피형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구요.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 다음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다락방님!
같이 읽고 서로의 글에 기대어 새롭게 써나가는 즐거운 시간들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구요.
꿀꿀한 마음은 일단 죠리퐁을 먹으면서 달래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5-12-30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하기 힘든것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1인입니다. 우치다의 글이면 제가 생각하는 결과는 다를 듯요.^^
그런데 이 책 제가 읽은듯도 한 이 느낌적 느낌은 뭘까요.
ㅋㅋ

단발머리 2025-12-30 20:39   좋아요 1 | URL
제가 우치다를 많이 읽지 못했지만, 멀리 돌아가지 않고 정면승부하는 면이 좋아요^^
그레이스님의 느낌적 느낌이라면 어쩌면 이 책을 이미 읽으셨을수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5-12-31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2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곡 2026-01-02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요!!!

단발머리 2026-01-02 13:54   좋아요 0 | URL
네네~~ 서곡님도 새해에 복 많이 많이 받으세요!!! 올해도 자주 뵈어요^^

2026-01-02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2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미래에게 창비청소년문학 142
주민선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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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의 시작을 나는 이병한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이 기술발전, 인공지능, 영생불사, 인류의 현재와 미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이 시리즈의 시작점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시작은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이 두 편의 영화였다. 갖은 고생과 고초 끝에 취업에 성공한 이병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공장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전에 해오던 일을 계속하는 장면. 기계화와 자동화 물결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켰는지를 그려냈던 박찬욱의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만들어가고자 했던 꿈들이 현실과 부조화를 이룰 때의 난감함이 블랙 유머로 표현되었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질문은 계속된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이길 바라는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어떠해야 하나.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그에 대한 답은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고, 그 인식은 이야기 속에서 가장 적확하고 명확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떠한가에 대한 진단은 이야기 속에서 가장 생생하다. 우리 앞에 도달하지 않은 미래가 과거와 현재의 조합으로 만들어지고, 우리 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을 만들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세상은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처럼 존재한다.

내 시리즈는 이제 미래 ‘읽기'로 간다. 첫 번째 소설은 주민선 작가의 『나의 미래에게』이다. '피터팬 바이러스'라 불리던 전염병의 창궐로 어른들이 모두 죽고 아이들만 남게 된 세계. 열병을 앓으며 죽을 뻔했던 미아를 구한 건 언니 미래였다. 엄마, 아빠를 비롯한 모든 어른들이 죽게 된 상황, 적대적인 환경의 도시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게 된 미아와 미래는 전염병 이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댁을 생각해 낸다. 아궁이와 우물, 밭 등 옛날식 삶의 방식이 가능한 남쪽의 할머니 댁으로 가기 위해 자매는 집을 나선다.

낯선 사람이 죽기 전에 남긴 물품을 통해 생존을 이어갈 수 있었던 미아는 그의 편지에 적힌 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에 대해 마음에 새긴다. 작은 다툼으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고, 아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회 속에 일원으로 편입된 미아는 그곳에서 언니의 그늘 없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성장해나간다. 언니와 재회하는 기쁨도 잠시, 자매는 집단 환각에 빠진 듯한 종교 집단을 마주하고, 의지를 제어하는 힘에 맞서며 그곳을 탈출하려다 귀중한 무언가를 그곳에 남겨 둔 채 탈출에 성공한다. 할머니 집에 거의 도달했을 즈음, 미아 앞에는 새로운 시련이 나타나고, 이제 미아는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른들의 퇴장으로 모든 것이 0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남겨진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생존 법칙을 정하고, 그 규칙에 맞춰 생활하게 된다. 생존만이 중요한 세상에서 남을 향한 배려나 친절은 오히려 사치에 가깝게 느껴진다. 심각한 병에 걸렸거나 공동체 유지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유기되고 방기된다. 1인분의 몫을 해내지 못한 사람에게는 양식도, 보호도, 돌봄도 없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미아는 낯선 이웃의 편지를 기억한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채 베풀어진 친절, 누군가를 돕기 위해 먼저 내민 손.

미아와 미래의 관계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동경과 질투의 마음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다툼과 싸움 속에서도 끝내 내칠 수 없는 자매간의 그 무엇에 대해서는 나는 여전히 모르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 같다. 싸우고, 화해하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고, 다시 만나는 그 어떤 마음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여기다.

"지금도 후회하지 않아? 식물이 뒤덮은 도시에서 내가 유도했던 대로 셋이 평화롭게 끝내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하지 않아? ... "

"언젠가는 분명 오늘을 후회하겠지. 그때 끝냈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날이 올 거야. 하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날도 있을 거야. 살아서 다행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 날도 반드시 있을 거야."

영조와 시선을 맞춘 채 나는 내뱉었어.

"그러니까 후회하더라도 나는 계속 살아 볼 거야." (377쪽)

삶은 끈질기고, 매몰차다. 모멸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삶이고, 끝내 모른척하기 어려운 것이 삶이다. 살아 있다는 것이 주는 기쁨은 어쩌면 삶이 다해 가는 순간에 더 확실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마음.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은 소중하다.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지고 또다시 이어지는 반복되는 삶, 지겹고 가끔은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여전히 이어지는 삶. 오늘이 그런 삶이고, 내일이 또 그런 삶의 한 조각이다.

주민선 작가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표지에서부터 흥미로웠는데, 제목에 '미래'가 있어 나의 '미래' 시리즈에 적합할 것 같았다. 명료한 문장과 매력적인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오히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친절한 편지의 주인공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됐다. 그 친절한 사람,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그 친절한 사람이 작가님을 많이 닮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부쩍 책을 안 읽는 우리집의 성인 & 아가들에게도, 책읽기를 좋아해서 '어떤 책이 재미있어?'라고 묻는 친구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만하다.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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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5-12-2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정값이 달라서 그런 듯해요, 자매. 이 사람과는 도의적으로라도 영원히 헤어질 수는 없는 관계라는 암묵적 동의에 함몰…ㅋㅋㅋ 약간의 동지 의식도 있죠.
그걸 벗어나는 사람은 가족에서 떨어져나갈 수 있지만 그건 정말 완전 완벽한 떨어짐이어야 가능하다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 자매는 나에게 너무 잘 하거든요. 저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잘 한다’는 말의 의미를 진중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나무쟁반 한 모서리가 유난히 어여쁩니다.

단발머리 2025-12-26 17:57   좋아요 1 | URL
제 친구는 언니가 여럿인데, 그 언니들이 다 엄마에요 ㅋㅋㅋㅋㅋㅋ 그니깐 엄마가 넷인 것이며ㅋㅋㅋㅋ힘든 시간도 많겠죠. 형제는 모르겠지만 자매는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저는 보거든요. 그 무거움과 편안함을, 이 작가는 아주 잘 보여줍니다.

방학하고 첫 외출이었는데, 비가 왔어요. 제일 가까운 커피숍에 들어갔는데, 리저브여서 ㅋㅋㅋㅋㅋㅋㅋ그래서 접시가 예쁘네요^^

다락방 2025-12-29 0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을 보니 [파리대왕] 이 생간나는데요, 파리대왕은 어두운 버전이었다면, 이 책은 좀 따뜻한 버전이 될 것 같아요. 저는 단발머리 님과 관심사가 다르지만, 그러나 다른 관심사를 가진 단발머리 님에게는 관심이 많으므로, 단발머리 님의 글읽기가 참 좋습니다.

단발머리 2025-12-29 21:39   좋아요 0 | URL
저는 [파리대왕]을 읽지는 않았어요. 아직~ 이라고 하고 싶네요 ㅎㅎ
저와 관심사가 다르지만 저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는 다락방님의 배려와 애정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옵니다~~

독서괭 2025-12-29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자신있게 추천하시는 책이라니! 재밌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주는 이 페이퍼 너무 좋네요 🥰 후회하더라도 계속 살아보는 용기를 가지면 좋겠어요. 특히 아이들이…
단발님은 사진도 참 잘 찍으시는군요. 저 오늘 두부과자 만들었는데 사진 찍으니 무슨 고기전 같아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5-12-29 21:42   좋아요 1 | URL
어른들이 모두 죽게 되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청소년이거든요. 아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지만, 사실은 더 원초적인 세계를 상상한 모습일 수도 있구요. 저는 좋게, 아주 잘 읽었습니다^^
14-5장 찍어서 한 장 남았습니다. 독서괭님표 두부과자 보고 싶은데~~ 고기전이라도 환영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