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어디까지나 편집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면을 기억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면을 잊어버린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얼마나 많은 엄마들이 순수의 상징인 아이들의 정직한 이중성에 절망하는가. 자기한테 불리한 거는 쏙 빼놓고 이야기 하는 거 있죠? 아이에게까지 갈 필요도 없다. 바로 내가 그렇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의 갈등을 제3자에게 이야기할 때, 기억 속의 는 얼마나 침착한 사람인가. 얼마나 이성적이고, 얼마나 예의 바른 사람인가. 내가 말하는 기억 속의 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이다. 오로지 좋은 사람. 실제와는 다르게.


기억에 관한 책이라면 제일 먼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생각난다.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쌍욕과 저주를 애인과 친구에게 퍼부었던 과거의 나와 만난다면 어떨까. 책을 읽었던 사람 10명 중의 8명은 첫번째 페이지로 되돌아 갔다는 데 500원을 건다. 기억이라면 모디아노를 빼놓을 수 없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던 M도서관 어린이실의 뜨뜻한 방바닥을 확실히 기억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주인공에 대해서는 잊어버렸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기억과 싸우는 <살인자의 기억법>도 기억난다. 70대 노인이 화자로 등장하는 <에브리맨> <유령 퇴장>도 함께.

















캐나다는 물론 미국, 유럽까지 충격에 휩싸이게 했던 토머스 키니어 씨와 그의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 피살 사건의 주범 제임스 맥더모트는 교수형을 당했다. 공범으로 지목되었던 그레이스 마크스, 일명 메리 휘트니라고 불렸던 그녀는 혐의를 부인한다.


그레이스 마크스 그녀는 피고석에 서서,

모든 걸 부인했지.

저는 그녀가 목 졸리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쓰러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28)


질문은 하나다. 그레이스는 영악하고 잔인한 살인마일까? 아니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순결한 희생양일까? 당시에 만들어졌던 수많은 문서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이 책을 집필한 마거릿 애트우드는 <작가의 말>에서 확실하지 않으면 가장 확률이 높은 안을 선택하되 그럴듯한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으며, 기록상에서 단순한 암시에 그치고 누가 봐도 분명한 빈틈이 발견될 때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고 적었다.(677) 소설은 정신과 의사 사이먼 조던 박사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인생을 돌아보고, 비극이 벌어졌던 바로 그 날, 그 장소, 그 시간의 기억으로 점점 좁혀져 간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정확히 471쪽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술주정뱅이 무능한 아버지 밑에서 동생 다섯을 돌보며, 캐나다로 건너오는 배에서 엄마를 잃고 엄마를 바다에 장사 지내야 했던 그레이스가, 이집 저집 하녀로 떠돌며 자신의 일을 억척스럽게 그리고 성실하게 해내는 그레이스가 마냥 불쌍했다. 나는 언제고 그녀 편이었다. 그런데 471쪽을 읽고 나서는, 작은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미 월시의 증언에 따르면 8시쯤, 그러니까 당신이 쓰러진 직후에 마당으로 찾아 갔다고 합니다. 맥더모트는 그때까지 총을 들고 있었는데, 새를 쏘았다고 우겼다더군요.”

저도 알아요, 선생님.”

당신은 펌프 옆에 서 있었다고 했고요. 당신이 제이미에게 말하길 나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낸시는 라이츠 부인네 집에 놀러 갔다고 했답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어요. ” (472)


애트우드는 사건의 조각을 맞추기 위해 최선과 최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 한 채로 남겨졌다. 30년 동안 교도소와 정신 병원을 옮겨가며 지냈던 그레이스는 1872년에 사면되었다. “거처가 마련된뉴욕 주로 건너갔다고 하는데, 이후의 행적은 모호하다. 진실은 정말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683).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불린다고 하던데, 여자 이야기라고 무시하고 싶어서 붙이는 말이라면 동의하지 않지만, 남자가 모르는 세상을 조롱하기 위함이라면 받아줄 만하다.


그때쯤 우리 아버지는 지긋지긋해했어요. 뭐하러 자식새끼를 또 낳아 놓느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 그런데 멈출 줄 모르고 먹여 살려야 할 입을 또 하나 더하느냐,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말이에요. (162)


메리가 너는 이제 여자가 된 거라고 말했을 때 저는 다시 눈물이 났어요. 메리는 저를 감싸 안고 다독여 주었어요. 늘 바쁘거나 지치거나 아팠던 우리 어머니라도 그렇게 다독여 주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러더니 제 것을 살 때까지 쓰라고 빨간색 플란넬 페티코트를 빌려 주면서 어떤 식으로 옷을 접어서 핀을 꽂으면 되는지 가르쳐 주고, 어떤 사람들은 이걸 이브의 저주라고도 부르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이브에게 주어진 진짜 저주는 무슨 문제가 생기자마자 그녀 탓으로 돌렸던 바보 같은 아담을 참고 견뎌야 했던 거라고 말했어요. (245)


그는 길거리에 험악한 남자들이랑 떠돌이들이 많으니 보호 차원에서 자기도 같이 가겠다고 했어요. 내가 아는 중에서 유일하게 그런 남자가 지금 여기 이 부엌에 나와 앉아 있다는 말이 제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했죠. 하지만 맥더모트가 예의를 갖추려고 하고 있었으니 입술을 꾹 깨물고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했어요. (381)



퀼트 이불을 연상시키는 파란색 표지를 한 장 넘기고는 한 달음에 읽었다. 그레이스가, 예쁜 용모에 손이 야무진 하녀 그레이스가 자꾸만 생각난다. 그녀를 본다. 그녀를 다시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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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0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4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제 11월이 20분 정도 남았고
이 책은 470 페이지 정도 남았다.


바람 부는 겨울밤
나는 차분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책을 읽어 나간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모두 잠들어 고요한 밤에
나 혼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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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12-01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맨스플레인이 ‘내 앞에 꿇어‘ 심산이겠으나 요즘은 ‘나랑 싸우자!‘ 이꼴...뭐, 싸워도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겠지만 이런 정신 상태인 사람과 바람직한 대화가 이뤄지기 쉽지 않죠.

단발머리 2017-12-01 12:19   좋아요 1 | URL
으흠... 그러게요. 레베카의 실화가 증명하듯이 여자가 말해도 말이예요. 지금 맨스플레인할 타임이 아니예요~ 해도 그냥 직진이죠.
바람직한 대화 어려워요. 쉽지 않죠~~^^

다락방 2017-12-01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좋네요. 전 아직 사지도 않았는데 단발님은 또 벌써! 저보다 먼저! 읽으시네요. 아아. 왜이리 갈 길이 먼겁니까!

그나저나 남자들이 맨스플레인하는 걸 여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쵸?

단발머리 2017-12-01 12:25   좋아요 1 | URL
좋죠좋죠~~~162쪽, 235쪽 가히 압권입니다.
우리의 갈길은 멀지만 함께 가니까 좋아요.

저는 제인 오스틴이 작품에서 맨스플레인 은근하게 까는 거 보고서 깜놀했던 때가 아직도 생생해요. 여자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더라구요. ㅎㅎㅎㅎㅎㅎㅎ 웃어야지요 ㅎㅎㅎ

stella.K 2017-12-0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은 대체로 쌍방향소통이란 걸 잘 못하는 경우가 많죠.
맨스플래인이 곧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대화 좀 하려고 하면 싸우자고 덤비는 걸로 오해하는 경우도 많고.
그런데 여자들도 그것을 묵인 방조해왔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대화의 기술을 좀 배우면 좋을텐데.ㅠ

단발머리 2017-12-03 22:35   좋아요 0 | URL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자 중에도 쌍방향소통을 할 수 있는, 할 만한 남성도 있을 거라는 희망^^

진지한 대화를 시도할 때 많은 경우, 남자들은 화를 내더라구요.
여자들이 그걸 묵인방조했다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상황이 별로였다는 생각도 드네요.
 

 




나는 포도가 새겨진 거울을 청소할 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쳐다본다. 응접실의 오후 햇살에 비친 내 피부는 희미해져 가는 멍 자국처럼 옅은 자주색이고, 이는 푸르스름하다.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이고,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 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동물을 좋아하고, 안색이 밝은 미녀이고, 눈은 파란색인데 어디서 말하기로는 초록색이고, 머리는 적갈색인 동시에 갈색이고, 키는 크거나 작은 편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일에 관한 한 싹싹하며 영리하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38)


여기 38쪽까지 읽고 잠깐 멈췄다. 그리고는2의 성』을 펼쳤다. 밑줄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해둔 페이지들을 훑었다. 생각보다는 금방 찾았다.




신화를 설명하기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신화는 손쉽게 파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신화는 사람들의 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결코 고정된 대상으로서 의식의 정면에 놓이는 일이 없다. 너무나도 변덕스럽고 모순 투성이라 그 통일성을 파악할 수 없다. 데릴라(삼손을 유혹한 여자)와 유디트(적장을 죽인 열녀의 전형), 아스파지아(고대의 탕녀)와 루크레티아(정숙한 여자의 전형), 판도라(미녀의 상징)와 아테네(제우스의 딸, 지혜의 여신)처럼, 여자는 이브인 동시에 성모 마리아이다. 여자는 우상이고, 하녀이며, 생명의 원천이고, 암흑의 세력이다. 진리의 소박한 침묵인가 하면 기교이고, 수다이면서 거짓말이기도 하다. 여자는 의사이며 마술사이고, 남자의 먹이이며 파멸의 씨앗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없으나 남자가 갖고 싶어하는 전부이며, 남자의 부정이고 남자의 존재이유이다. (192)


우상이며 하녀, 생명의 원천이며 암흑의 세력. 침묵이며 수다이고 의사이며 마술사. 남자가 아닌 것 그리고 남자가 원하는 전부.

여성이 현실이 아닌 신화의 자리에 있을 때, 여성은 추앙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순결한 성녀가 아니면 몸을 막 굴리는 년이고,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천성이(라고 믿어지는) 분명한 모성을 거부한 매정한 어머니가 되어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시몬 드 보부와르의 글은 김이설에게까지 닿는다.




윤서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성적에 목숨 건 여자아이는 되바라진 여자애였고, 성적에 관심 없는 여자애들은 아이돌이나 따라다니면서 화장이나 하는 골빈 여자애였다. 윤서도 내 딸아이도 요즘 여자애들이라는 것을 잊은 사람 같았다. <「경년」, 김이설>

 





여자에게는 중간이 없다. 여자는 미녀이거나 추녀이며, 성녀이거나 마녀이다. 그 중간은 없다. 어떤 사람이 인간답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은 여자가 아니다. 여자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여자는 인간이 될 수 없기에, 인간 표준 중의 하나가 될 수 없다. 인간의 기준이 되는 남자 앞에서 여자는 항상 모자란 사람으로, 무언가 부족한 사람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여자가 아닌가.


38쪽까지 읽고 너무 길었다.

다시 그레이스에게로 간다. 그녀가 왜 괴물이 됐는지 아니, 그녀가 정말 괴물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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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1-29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여러분 빨리빨리~~ 페이퍼로 <현남오빠에게> ebook 특별이벤트 알려줘서 고마워요.
한참 후에나 찾아 읽었을텐데, 다락방님 덕분에 ‘손 안의 책‘이 됐어요. 땡큐요~~*^^*

다락방 2017-11-29 15:33   좋아요 1 | URL
우앙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잘되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짱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참 잘했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쓱으쓱)

단발머리 2017-11-29 15:46   좋아요 1 | URL
참 잘했어요~~~ 다락방님^^
언제나처럼, 어김없이, 여전히...
참 잘했어요~~~~ : )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평생을 달링턴 홀의 집사로 일했던 스티븐스는 새주인이 빌려준 포드를 타고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젊은 시절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길,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기억을 되살려 지난 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본다.

 

책뒷면의 줄거리 부분에서는 자신이 평생을 충직하게 모셔왔던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 앞에서 자신이 지켜왔던 명문과 신뢰가 허망하게 무너지고,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지나가 버린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깨닫게 된다,라고 적혀 있는데, 좀 허술한 서술이 아닌가 싶다. <인생의 황혼 녘에 비로소 깨달은 잃어버린 사랑, 그 허망함과 애잔함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라는 문구가 광고를 위해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스티븐스에게 켄턴 양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있었던가, 나는 아니라는 데 한 표를 건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영국의 진정한 집사, 위대한 집사의 대열에 설 만한 사람이라는데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평생 동안 자신의 일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인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가 위독한 상황에서도 업무에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이 진정한 신사를 모시고 있음에 대해 자신만만해 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지금은 뭐라고 말하는가.


 

그래, 노인장이 정말 그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 아니요. 나는 미국 신사이신 존 패러데이 어르신께 고용된 몸이오. 그분이 달링턴 가문으로부터 그 저택을 사셨거든요.” (153)

 

얘기해 봐요, 스티븐스. 그 달링턴 경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죠? 보아하니 그 사람 밑에서 일한 모양인데.”

아닙니다, 부인. 아니에요.”

, 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군요.” (157)

 

당신은 달링턴 경 밑에서 일했습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그의 대답은 이를 데 없이 단호하다. 물론, 나치의 지지자로서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던 옛 주인 달링턴을 옹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스티븐스는 주인이 하고 있는 일에 관여하는 것은 자신의 직무를 벗어난 일이라고 판단했다. 더 넓은 세상을 대면한,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한 주인의 의견이 무조건 옳은 것이라 한결같이 믿어왔다. 그러면서도 유대인 하녀들을 저택에서 내쫓으라는 잘못된 지시를 묵묵히 수행한다. 그는 옛 주인 달링턴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는 것만이 집사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확신했다. 달링턴 집사로서의 삶은 그의 전부다. 그런데 지금 그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자신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주인을 모른 척 하고 있다. 그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게 바쳤던 충성스러웠던 그의 인생 전부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호감 가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는 모양새다.

 


여행길에서 보여 준 스티븐스의 언행은 어처구니없는 정도를 넘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포드 자동차에 여느 신사와 다름없는 우아한 옷차림, 자연스럽게 몸에 밴 예법과 고급스러운 어투 때문에 시골 사람들은 그를 모두 진정한 신사로 생각한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한다. 물론 스티븐스가 유도한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느꼈다면 자신은 진정한 신사가 아니라, 신사를 모시던 진정한 집사였음을 밝혀야 할 텐데, 바로 이 부분에서는 이전의 단호함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실례합니다만 선생님, 혹시 처칠 씨도 만나 보셨나요?”

처칠 씨요? 그분도 저희 집에 여러 차례 오셨지요. 그러나 솔직히 말해, 테일러 부인, 제가 중대한 문제들에 한창 깊이 관여하던 시절의 처칠 씨는 그다지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조차 받지 못했답니다. … (232)

 


시골 사람들은 처칠 씨를 직접 보았다는 스티븐스의 말에 모두 존경과 감탄을 연발한다. 저명인사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은 모호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니라고 아니하셨으니,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주세요. 진짜 신사의 예리한 포착 때문에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을 때, 스티븐스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홀가분하다고 말한다. 정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그 홀가분한 일을 왜 그렇게 미뤄 두었을까.

 

마지막까지 좋아할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까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스티븐스씨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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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11-29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어째서..왜때문에... 단발님이 별 셋을 준 이 리뷰를 읽고 이 책이 읽고 싶어지는 겁니까? 망설이지 않아도 좋긴 해요. 책은 이미 집에 사두었으므로... 몇 년전에....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하하하하하.


단발머리 2017-11-29 13:19   좋아요 1 | URL
별점 조금 더 줘야겠어요. 3.5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니, 근데 다락방님은 이 책을 몇 년전에 사두었다는 말이예요?
역시, 다락방님의 안목~~ 가즈오를 미리 알아보셨군요.
저는 노벨문학상 때문에 이 작가를 알게 되었고, syo님이 가즈오 소설 주르르 읽는 거 보고 자극받아서 ㅋㅋㅋㅋㅋ
그래서 읽습니다. 한 권 더 읽으려고요. <나를 보내지 마>, 보내지 마아~~~^^
 
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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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증오와 멸시가 공고화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별 등에서 자신과다른 사람 불편해하며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증오와 혐오를 어떤 방식으로 강제하는지 살펴본다.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동질성 강요, 성별의 본원성 또는 본연성에 대한 주장, 순수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고찰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동영상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클라우스니츠 사건이 소개된다. 난민 여성들과 아이들을 태운 버스를 둘러싸고우리가 국민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 “꺼져! …… 꺼져! ……” 반복하는 사람들, 그들을 둘러싸고 멀지 않은 곳에서 이런 상황을 구경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태를 방관하는 경찰관들. 그들에게 난민은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 있어 마음대로 미워할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에 보편적인우리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난민 사람, 사람은 개인으로 인식되지 않고, 괴물처럼 위험한 존재로만 인식된다. 그들은 사람, 사람이 아니라 무리의그들로만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우리가 없는 사람들로서, 영원히그들이다. 



클라우스니츠에서 증오를 일으킨 이데올로기는 클라우스니츠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작센 안에서만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난민들을 원칙적으로 자신과 동등하며 고유한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없게 만드는 모든 인터넷 포럼과 토론 포럼, 출판물, 토크쇼, 노래 가사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76) 



하나의 사례는 에릭 가너다. 길에서 줄담배를 판매했다고 의심받아 경찰의 검문을 받게 에릭 가너는 다른 시민이 녹화한 동영상 속에서 작게 말한다. “이런 일은 오늘부로 끝나야 .” 에릭 가너는 경찰의 제지에 반항하지 않았고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명의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된 데는, 흑인을 멸시하고 경멸하고 학대해도 결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혐오의 유산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타네히시 코츠). 이미 불법이 초크chokehold(목을 졸라 질식시키거나 머리로 피가 공급되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격투기술) 사용해 에릭을 압박하고, 숨을 없다고 말하면서 정신을 잃은 에릭을 길에 방치한 경찰은 그의 죽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당시의 상황을 녹화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시민보다 백인 경찰관인 자신이 신뢰를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랍계 난민, 흑인, 혼혈인, 동성애자, 트래스인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계속해서 연구하고 탐구해볼 만한 과제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해 인간은 두려움과 함께 호기심도 느낀다. 어쩌면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존재의존재자체를 싫어한다는 것은 그러한 두려움이 자랄 있게 하는토양 존재 때문이라고 저자 카롤린 엠케는 지적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혐오와 증오는 개인적인 것도 우발적인 것도 아니다. 단순히 실수로 또는 궁지에 몰려서 자기도 모르게 분출하는 막연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다. 이것이 분출되려면 미리 정해진 양식이 필요하다. 모욕적인 언어표현, 사고와 분류에 사용되는 연상과 이미지들, 범주를 나누고 평가하는 인식틀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것을 자발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감정들이 계속 양성되는 일에 기여하는 셈이다. (22) 



동질한 것만이 정상이라는 믿음, 유기적 단일성에 대한 집착이 자신과 다른 존재를받아들이지못하게 한다. 자신과 다른 종교, 자신과 다른 문화, 자신과 다른 옷차림, 자신과 다른 식생활문화, 자신과 다른 생김새, 자신과 다른 성적취향을견디지 하게 한다. 



증오에 대한 대응이 눈길을 끈다. 



증오에 대처하려면 자신과 똑같아지라는 증오의 유혹을 뿌리치는 수밖에 없다. 증오로써 증오에 맞서는 사람은 이미 자기도 따라 변하도록 허용한 셈이며, 증오하는 자가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증오에는 증오하는 자에게 부족한 , 그러니까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과 자기회의로써 대응해야 한다. (25)  



증오하는 자에게는 이렇게 대응해야 한다.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구별, 그리고 자기회의. 그리고 마지막으로진실 말하기 Wahrsprechen’. 저자는 공공의 영역에서진실 말하기 더해 다양한 권력 구조에 저항하는 과제로서진실 말하기 제안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적 환경, 이를테면 가족과 친구, 종교공동체, 자신이 활동하는 정치적 맥락에 대해서도 반대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집단 내에서 자신도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배제하고 낙인찍는 독단론과 관행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하고 있지 않은지 주의하라는 당부다. (241) 



아랍계 난민으로 유대계 혼혈인이며 성소수자인 나를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랍계 난민으로 유대계 혼혈인이며 성소수자인 나를 상상하면서 책을 덮었다. 

아랍계 난민으로 유대계 혼혈인이며 성소수자가 되고 보니, 말을 없다는 사실이 제일 먼저 다가온다. 어렵게 도착했지만 이 곳의 말을 모른다. 들을 있으나 이해하지 한다. 

말을 잃었다. 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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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억 오늘 도서관에서 신간으로 꽂힌 걸 보고서 가져올까 말까 고민하다 놓고왔는데......

단발머리님의 글을 두 시간만 일찍 만났어도 업어왔겠어요.

단발머리 2017-11-23 16:20   좋아요 0 | URL
키햐~~~ 아쉽네요. syo님의 선택을 받았어야 하는데....
카롤린 의문의 1패입니다. ^^

cyrus 2017-11-23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진실 말하기’ 개념이 푸코의 ‘파레시아(진실을 말하는 용기)’과 유사한 느낌이 들었어요. 푸코의 파레시아를 이해하면서 페미니즘이 파레시아를 실천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아무개 2017-11-23 19:36   좋아요 0 | URL
진실... 진실을 말하는 용기라. . . 그거 하고 있습니다. 아시고 계시니까 하시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아무개 2017-11-23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혐오는 권력을 가진 쪽에서만 가능하죠. 여성이 장애인이 성소수자가 비성인인 청소년이나 유아가 그리고 전라도가 과연 어떤 혐오권력을 실재로 휘두룰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미러링 따위로 권력자들이 실제로 죽지는 않으니까요.
혐오는 대체적으로 권력문제라 생각해요.
조만간 뵈요^^

단발머리 2017-11-24 06:51   좋아요 0 | URL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와 <김대중 죽이기>가 자꾸 겹쳐지더라구요.
그 이야기도 페이퍼에 같이 써보려 했는데, 정교하게 써내려가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했어요.
아무개님 댓글이 제 글보다 낫네요~~~~~

맞습니다. 혐오는 권력을 가진 쪽에서만 가능한 일이죠.
특히 전라도 문제가 많이 생각났어요.
경상도도 지역투표고 전라도도 지역투표다. 둘 다 똑같다. ....
엄연히 혐오의 피해자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데 그것마저도 혐오로 해석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요^^

AgalmA 2017-12-01 08:19   좋아요 0 | URL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503 비롯 기타 등등의 정치인들을 혐오하는 게 우리가 권력이 있기 때문은 아니니까요. 제 견해로는 ‘권력을 가진‘도 해당되지만 ‘세력을 가지려는‘ 자들의 감정수단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동질성의 강요‘라고 기술하셨죠. 세력을 가진 측의 예로는 빨갱이니 종북이니 프레임을 덮어씌워 반대편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것이 있겠죠. 방송이니 언론플레이, 온갖 공작을 해서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휘두를 수 있는 힘은 2차적인 거죠. ‘세력을 가지려는 측‘의 부정정인 예는 각종 테러 집단을 예로 들 수 있을 겁니다. 긍정적인 예는 이 사회에 대한 혐오와 울분이 표출된 촛불운동이 해당된다고 생각되네요
약자라고 혐오가 없겠습니까. 사회를 움직이는 이런 정서들은 쉽게 재단해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명쾌하게 보자고 단순화시킬수록 놓치는 게 생기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즘도 하나의 세력 강요처럼 여겨지고 있죠.

깐도리 2017-12-3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희망 도서로 끼웠네요..궁금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