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그리고 엄마』에 대한 내용이 많을 것 같아 이런 순서로 배치했지만, 제일 먼저 출간된 책은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1969)이고,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2010년에,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마야 안젤루가 발표한 일곱번째 에세이이자 고인이 되기 전 발표한 마지막 책으로 2013년에 출간되었다. 순위에 집착하는 사람이라서 (왜 그럴까, 진짜), 세 권 중에 제일 좋았던 책 한 권을 고르라 하면새장에 갇힌 새가… 』를 꼽고 싶다.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보니 내용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다른 책의 사건이 더 자세히 서술되기도 하는데, 마야 안젤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읽어봄 직하다.

 

나는 엄마니까 아무래도 엄마의 입장에서 읽게 된다. 부모가 자녀의 삶에 좋은 모범이 되면 참 좋겠지만 그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이 지내다 보면 장점보다는 약점이나 단점이 더 잘 보이기도 하고, 모든 잔소리 ‘~ 해라‘~ 하지 마라를 종합할 때 부모는 자녀에게 억압이다. 부모도 완전한 인간은 아니기에 자신의 주장과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 나는 그렇다. 마야 안젤루 어머니의 특별한 점은 여기에 있다. 솔직함. 자신의 실수 혹은 선택에 대해서 자녀에게 솔직하게 말한다는 점.

 

 

너희가 보고 싶었지만, 그곳이 너희에게 가장 알맞은 환경이라는 걸 알았어. 난 끔찍한 엄마가 됐을 거야. 참을성이 없었거든. 마야, 네가 두 살쯤이었을 때 나더러 뭘 달라고 한 적이 있었어. 내가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어서 네가 내 손을 찰싹 쳤는데, 내가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너를 현관 밖으로 날아갈 만큼 세게 때렸지 뭐니. 널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야.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돼 있었던 거지. 난 지금 사과하는 게 아니라 설명하는 거란다. 내가 너희를 키웠더라면 우린 셋 다 비참했을 거야.“(41)

 


전 세계 공통의, 특별히 흑인 여성에게 더 많이 강요되는 모성애에 대해 그녀처럼 솔직하게 반응하기는 쉽지 않다. 엄마도 인간으로, 여자도 사람으로 인식되는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어쩌면 그것도 여자들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 여자는, 엄마는, 아직 사람이 아닐 수도…) 엄마는 인간이 아니라 초인으로 살기를 강요당한다. 그럴 수 없는데 그래야 한다고 요구 받는다. 마야의 어머니는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자신을 어린 자식들에게 고백한다. 난 준비가 안 된 엄마였어. 그 때 우리가 같이 살았더라면 우린 불행했을거야. 난 이 지점이 훌륭하다고 본다. 마야 안젤루의 어머니가 모성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 아니라, 정확한 상황 판단으로 자신으로서는 최선의 선택,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다는 점.

 

 


아쉬운 점을 쓸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쓴다. 옮긴이의 말이 좀 불편하다. 마야의 어머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마야 역시 특별한 사람이다. 강하고 지혜로우며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넘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마야도 그의 어머니도 그런 류의 사람들이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더라도 성공했을 사람이다. 마야 안젤루는 자신의 어머니 덕분에 오늘의 자신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런 찬사를 들을 만하다.

 

하지만 마야 안젤루의 어머니가 어떠해서 마야 안젤루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될 수 있었다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은 후, 더 정확히는 이 책을 번역한 후, ‘자신의 아이를 끝까지 응원하는 엄마가 되겠다'는 옮긴이의 결심이 나는 좀 부담스럽다. 모성이 부족한 사람으로서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다는 말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냥 내가 삐뚤어진 엄마여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난 그런 결심을 할 수 없기 때문이고, 모든 엄마가 그런 결심을 해야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마야 안젤루의 책을 마친 후 읽게 된 옮긴이의 말은 마야 안젤루의 원래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 나 그리고 엄마』는 전체적으로는 어머니 비비언 백스터에 대한 이야기인데,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이 지금 이런 여자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랑하는 할머니와 흠모하게 된 어머니 덕분이라고 말한다.(10)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다리가 불편한 아들과 부모가 키울 수 없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손자, 손녀를 키우고 있는 흑인 할머니가 자신의 손녀를 사랑하는 법을 묘사한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일부러 그 문단을 옮겨 적지 않았다. 감동을 반감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시간이 넉넉치 않아 이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면 프롤로그 두세쪽이라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 사랑은 꼭 엄마가 아니어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할머니여도 되고, 외할머니여도 된다. 외삼촌 혹은 이모, 고모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한 명, 적어도 이 드넓은 우주에서 한 명은, 아이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느낀다. 너는 똑똑한 아이야. 너는 특별한 아이란다. 네가 그런 아이라는 걸 난 알아. 난 그런 네가 자랑스럽구나.

 

엄마라면 좋겠지만 항상 엄마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랑 사이가 안 좋은 사춘기 때는 이모가, 외할머니가, 교회 삼촌이,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여도 좋지만, 엄마 아닌 사람도 사랑을, 충분한 사랑을 전해줄 수 있다.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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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5 1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7-15 11:58   좋아요 0 | URL
후회 없는 선택일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다락방 2020-07-15 1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항상 저희 엄마를 볼 때마다 생각하거든요. 물론 살면서 엄마를 원망한 적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엄마가 된다면 우리 엄마의 절반도 못할거다‘란 생각을요. 저희 엄마는 제가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최상의 엄마라는 생각을 해요. 엄마는 저에게 너무 좋은 엄마에요. (아 근데 이 말 쓰는데 왜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죠?)

그리고 여동생이 조카와 있는 모습을 보면 또 좋은 엄마 같아요. 실제 여동생의 자식들이 제엄마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적인 엄마인 거에요. 그래서 동생을 볼 때마다 ‘나에게 애가 없는건 저런 엄마가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 합리화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 저는 제가 이모인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저한테 가장 잘 맞는 역할이 이모가 아닌가 싶어요. 때로는 엄마인 적 없고 엄마일 수 없다는 게 삶에서 무언가 놓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하지만, 그러나 제가 제일 잘 할수 있는건 이모인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 그거 너무 좋잖아요. 한 생명이 태어나고 그 생명이 아기에서 어린이로 청소년으로 그리고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옆에서 함께 겪는다는거요. 저는 그것이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너무나 커다란 축복이 아닌가해요. 그래서 아이의 성장과 더불어 양육자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일테고요. 저는 비록 이모이지만, 그래도 조카가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직 마야 안젤루 한 권도 안읽었는데, [엄마, 나 그리고 엄마]도 살래요. 읽어보기도 전부터 어쩐지 울것같지만 말예요.

잠자냥 2020-07-15 13:24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은 웬만한 포스팅보다 좋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0-07-15 19:08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 댓글 읽다가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다락방님 어머님도 생각나고, 다락방님 동생분도 생각나고, 물론 저희 엄마도 생각나고요.

좋은 엄마를 만나고, 그 엄마와 친밀한 관계를 오래오래 맺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인것 같아요. 저는 다 그런 줄 알았어요. 대학에 가서야 저의 엄마가 오히려 특별한 경우라는 걸 알았어요. 한편으로는 한국의 진정한 어머니 상과 같은 엄마에게 많이 미안하고요. 엄마의 희생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편하게 산다 생각할 때가 많아요. 사실이 그렇기도 하구요.

저는 제가 엄마니까.... (사실 아직도 어색해요. 제가 엄마라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좋은 엄마가 되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어렴픗 알것 같아요. 사랑에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고요. 하지만 이제는 큰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야 엄마를 행복하게 해드릴까 그런 생각도 하게 되요. 그래서. 저는 엄마한테 자주 가요. (응?!?)

모든 이모가 좋은 이모는 아니거든요. 근데 다락방님은 좋은 이모에요. 앞으로도 타미는 다락방님을 통해서 다른 세상, 다른 세계에 대해 배우게 될 거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게 될 것 같아요. 좋은 이모, 좋은 고모, 좋은 외할머니, 좋은 할머니, 삼촌, 할아버지가 아이에게는 필요한 것 같아요. 한 인간이 인간으로 자라게 하는데요.

제 친구는 전업주부인데 같은 동네 사는 고등학교 친구의 아이를 오후 시간에 돌봐줘요. 특별히 뭐를 해 준다기 보다 안전하게 지켜주는 거죠. 같이 있어주고요. 만날 때마다 제가 훌륭하다고 칭찬을 해요. 그 친구는 혈연적으로 연결된 것도 아닌데 그 아이의 이모가 되기로 한 거니까요. 우리 사는 세상이 이렇게 확장되는구나 감동이 되요.

이 책은 너무 좋은 책이라 뭉클한 구석이 많으니 특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단발머리 2020-07-15 19:07   좋아요 0 | URL
그래서, 다락방님 댓글은 따로 페이퍼로 나와야한다고 전 생각합니다^^
 
뉴턴의 아틀리에 - 과학과 예술, 두 시선의 다양한 관계 맺기
김상욱.유지원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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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술작품에서 과학을 보는 물리학자 김상욱과 과학에서 예술을 읽는 타이포그래퍼 유지원의 협업으로 만들어어졌다. 내용과 형식의 기묘한 조합은 글자모양 폰트로 구체화되었다. 본명조 레귤러의 김상욱과 아리따부리 미디엄의 유지원은 다른 이야기를 다른 글씨로 말한다. (이 글은 알라딘 돋음체로 쓰여졌다) 신선하고 도전적인 시도이어서 책 읽는 시간 내내 호기심이 일었지만, 특히 작가 유지원의 매력이 대단했다. 읽고 있는 글을 쓴 사람이 유지원이 아니라 김상욱이 아닌가 싶어 앞으로 돌아가 글쓴이를 확인하고는 했다.

 

양자역학 전문가인 김상욱의 글 중에는 <친애하는 마그리트 작가님께>가 기억에 남는다.

 





양자역학에 중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상태가 공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파리에 있으면서 동시에 브뤼셀에 있는 것이지요. 당신의 작품 <표절>을 보면 실내에 꽃병이 하나 있는데, 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건물 밖의 나무가 존재합니다. <빛의 제국>에서는 하나의 장면 속에 낮과 밤이 공존하고 있죠. 저는 이런 그림이 양자 중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당신이 저의 이런 해석을 달가워하지는 않을 겁니다. (83)

 



저자는 초현실주의 작가 마그리트의 작품이 양자역학의 중요한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에 일천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과 함께 양자역학의 중첩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면, 무엇인가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듯 착각에 빠진다. 1920년대 유럽이라는 시공간에서 양자역학과 초현실주의의 동시 탄생에 대한 저자의 학문적 의심에 자기도 모르게 동의하게 된다.


 

<벌거벗은 이름>에서 벌거벗는다는 것은 이름만 남고 그 대상이 남겨진 상태를 말하는데, 생물학에서는 대상의 묘사가 규정에 따라 적절하게 채워지지 않았을 때를 가리킨다(240). 반면 수학에서는 대상이 벗겨진 개념들에도 이름이 붙기도 하고, 물리학 역시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는 관념 자체가 환상이기에(239), 이름이란 결국 사람들 간의 소통과 합의가 분명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에 느닷없이 외국어 공부의 효용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대상에 이름이 한 번 밀착되면, 거기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멈추게 되기 쉽다. 대상에 들어붙은 이름을 벗겨 보는 데에는, 모국어나 익숙한 영어 아닌 다른 외국어가 도움이 된다. 거리를 벌려 놓으면 대상과 이름 사이에 넓어진 틈새에서, 감각을 확장한 관찰과 대안적인 사유가 활기차게 운신을 재개할 수 있다. 이렇게 느슨해진 공백은 사고가 완고해지는 일을 막아 준다. 다양한 언어를 경험한 정신의 과학적 효용과 묘미도 여기에 있다. (242)

 


국어, 그리고 잘하지는 못해도 익숙한 언어인 영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 완벽하게 낯설고 여타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은 외국어를 통해서, 외국어 공부를 통해서 사고가 완고해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외국어 공부가 치매 예방에 좋다는 흔한 이야기의 과학 버전.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책을 언제 만나는가에 대한 생각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이전에는 게을렀던 나 자신과 흘러간 시간에 대한 후회가 많았다면, 변명일지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만날 책을 만날 때에 만나게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코로나19로 인해 도서관 휴관이 너무 길어질 것을 예상해 사두었던 책인데, 모두 다 그렇듯이 구입한 후에는 바로 읽지 않고 책상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요 며칠 심난한 시간들이 이어져 어떤 책도 읽고 싶지 않았는데 내용을 예상할 수 없는 이 책을 손에 든 순간, 잠시라도 고민과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내가 만난 문단은 이 문단이었다. 나는 이 문단이 내게 찾아왔다고 느꼈다. 내가 이 책을, 지금 만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별에서 온 원자들이 우리 몸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는 과학의 진실을 안다. 인간은 필멸이라도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는 불멸임을 안다. 이 사실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필멸의 생명이란, 원자들을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조립한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 아님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 속 유구한 생명의 흐름은 지속될 것을 알고도 개체의 소멸을 애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 명의 인간 개체는 생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경험과 지식과 기억의 온전한 집적체일진대, 그것이 죽음으로 스러지는 엄청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견디어야 할까? 살아간다는 기쁨, 육체 감각의 강렬함, 억제하기 어려운 열망, 넘쳐흐르는 감정들은 어디로 가는가? (134)

 



전시장에는 오래된 책의 한 면이 펼쳐져 있었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 라파엘 로자노헤머의 ‘결정의 숲(Decision Forest)’ 전시였다. 펼쳐진 책에는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가 1837년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거주하는 지구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남기는 영구적인 각인> 중 한 대목이 담겼다. 그 부분을 읽어 보니 우리말 관용구 하나가 떠올랐다. "말이 씨가 된다." - P43

인간의 말소리는 공기를 진동시킨다. 이렇게 발생된 공기의 파동은 전 지구의 육지와 바다를 돌아다닌다. 인간의 말소리가 바꾸는 공기의 움직임을 지구상 대기의 모든 원자가 받아들이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스무 시간이 채 안 되다는 내용을 담은 논문이었다. 지구 위에서 생존해 온 인류의 모든 개체들이 남긴 소리와 숨결은 그렇게 공기 입자의 움직임 속에 영원히 기록된다는 것이다. 찰스 배비지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구의 공기 자체가 전 인류의 태곳적 행적부터 기록된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은 지구의 공기에 진동의 씨를 남기는 셈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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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단지 숨을 쉬고 심장의 고동을 울리는 것만으로도 다른 누군가에게, 그리고 지구 전체의 대기와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44)

 

 

어제 기사를 읽다가 일반인 인터뷰를 보았다. “공적인 장에서 애도를 하는 글을 올리고 고인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반복해 적는 것은 피해자를 향한 폭력이라는 글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모르는 일이다. 처벌받지 않았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무책임했다는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묻고 싶다. 내 슬픔이 피해자를 향한 폭력인가. 알라딘은, 알라딘 서재는, 이 공간은 공적인 공간인가. 아니면 나 혼자 일기 같은 걸 끄적이는 나만의 공간, 사적인 공간인가. 나는 여기에, 슬프다는 말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인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고인을 물어뜯기 전 숨고르기를 하는 언론의 작태를 바라보면서, 그의 공적과 희생과 평생을 부인하기 위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는 언론의 야만적 얼굴 바로 앞에서, 나는 슬퍼할 수도 없단 말인가.

 


고마웠던 사람의 죽음을, 의지했던 사람의 죽음을, 그의 심장 고동이 멈추고, 우리의 세계와 우주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음을, 슬퍼할 수도 없단 말인가. 슬퍼해서도 안 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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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7-11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것마저 비난하는 것은 정의라는 이름이 폭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이 존중되어야 하는 만큼, 각자의 감정 역시 같은 이유로 존중받아야 할 것입니다...

단발머리 2020-07-12 16:43   좋아요 1 | URL
조용한 하루, 딱 하루가 이렇게 어려운건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불어닥칠 일들이 걱정스럽기도 하구요.
 




 













『레베카』를 읽었다. 레베카는 실제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작품 전체를 주도하는 인물이다. 아름답고 똑똑하며 자신만만한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

 


『나의 사촌 레이첼』을 3월에 읽었다. 도서관책으로 읽었는데, 단숨에 다 읽고 바로 책을 구입했다.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한 문장, 한 문장씩 아끼면서 천천히 읽는다. 『레베카』를 시작하면서도 최고의 자리는 『나의 사촌 레이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렇게 차분히 소설을 따라 읽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것. 레이첼과는 또 다른 매력의 레베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최고의 작품을 꼭 하나만 골라야 하나.

 


















나는 그런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친구의 소개로 『제인 에어』를 알게 된 그 날부터 내게 최고는 제인 에어였고, 제인 에어였으며, 영원히 제인 에어여야 했다. 샬롯 브론테의 『빌레뜨』를 읽으면서 제인 에어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샬롯 브론테가 샬롯 브론테와 싸우고 있었다. 끝내 승부는 나지 않았다. 『빌레뜨』는 『제인 에어』만큼 좋았고, 『레베카』는 『나의 사촌 레이첼』에 못지 않았다.  

 


강력한 아우라를 풍기는 레베카를 아직 만나기 전, 작품이 끝날 때까지 이름조차 밝혀지지 않는 주인공 가 등장한다. 이 세상 어디 하나 기댈 곳 없이 가난하고 파랗게 젊은 여성. 하녀는 아니지만 하녀의 일을 해야 하는 여성. 고단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에게 왕자님이 나타난다. 재투성이 그녀와 드라이브를 즐기고 함께 식사를 한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그래서 더욱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을 목전에 두고 그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녀는 가난으로부터, 떠돌이 생활로부터, 가족 하나 없는 불쌍한 처지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맥심과 결혼한다.

 

그와 함께 돌아간 맨덜리에는 저택의 안주인이었던 레베카, 드윈터 부인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새색시 는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에 더욱 더 위축된다. ‘와 맥심의 결혼 축하 파티를 준비하는 장면에서 이런 면이 특히 도드라진다. 근처의 마을 사람들 대부분을 초대하는 성대한 파티를 준비하면서 맨덜리 저택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로 모두 바쁘게 움직인다. 가구를 재배치하고, 홀을 들꽃으로 장식하고, 음식을 장만하고 악단을 접대한다. 드윈터 부인, 마님인 는 무슨 일을 해야할까.

 


는 할 일이 없다. 댄버스 부인이 예전 파티의 세세한 것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어 파티 준비를 총괄하고, 하인들은 각각 자기의 일을 하고 있는데, ‘는 할 일이 없다. 그저 예쁘게 꾸미고 앉아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것이 에게 주어진 일이다. 고된 육체 노동의 무게를 무시하려는 뜻은 전혀 없지만, 할 일이 없는 의 처지 역시 서글퍼 보인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하인들의 마님, 저쪽으로 조금만 비켜주세요를 들으며 미안해요를 연발하는 힘없는 마님.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해야만 하는 파티에서 무슨 옷을 입을까, 무슨 가발을 쓸까, 어떤 화장을 할까,에만 신경 쓰는 삶이다 보니 그녀는 더욱 맥심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어느 현자가 말했던가. 우리 인생에서 연애는 5프로 정도라고. 5프로에 목매는 가 안타깝고, 맥심의 기분을 살피는 가 안쓰럽다. 흥미롭고 인상 깊은 장면들은 아직 레베카를 읽지 않은 '부러운' 사람들을 위해 남겨 둔다. 읽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라.

 


부푼 기대를 안고 시작했던 『레베카』를 한 번 더 읽고 싶다. 『나의 사촌 레이첼』처럼 『레베카』도, 영원한 나의 읽고 싶어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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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07-08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의 사촌 레이첼보다 레베카가 훨씬 좋아요.

단발머리 2020-07-08 19:22   좋아요 1 | URL
비밀입니다만...... 저는 5.5 : 4.5의 비율로 나의 사촌 레이첼이 더 좋아요.

비연 2020-07-08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사촌 레이첼도... 보관함에 푱... 정말 이러시깁니까..ㅜㅜㅜㅜ

단발머리 2020-07-08 20:11   좋아요 0 | URL
저도 아까 <팬더믹패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더하기 <사라진 후작>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0-07-08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 저는 올해 대프니 듀 모리에를 안 게 참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메이카 여인숙>은 또 어떨까 기대중이랍니다. 자서전도 남겼다는데 그것도 읽고 싶어요. 그냥 이 사람은 소설을 만드는 게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이 사람한테 떨어진 느낌이에요. 등장인물들이 다 살아 있어요.

아, 나 <빌레뜨> 읽어야 하는 걸까요? 이 와중에 침이..죄송해요. 저거 빙수인가요? 저 간헐적 단식중이란 말이에요. ㅋㅋ

단발머리 2020-07-08 22:15   좋아요 1 | URL
저도 대프니 듀 모리에가 올해의 발견이에요. <자메이카 여인숙>도 읽고 싶은데 좀 기다렸다가 블랑카님 읽으신 후에 부러움을 받으면서 읽고 싶습니다. 블랑카님 읽으신 현대문학 단편집도 남아있구요.

아... <빌레뜨>는 전 아주 좋았어요. 샬롯 브론테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구요. 샬롯 브론테의 작품이 얼마 안 되기도 하지만, 아무튼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저거는... 과일빙수입니다. 전 팥빙수 더 좋아하는데 일행이 꼭 과일빙수여야 한대서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07-08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레베카> 쪽이 훨씬 좋았습니다! ㅎㅎ 아마 단발머리 님은 로맨스가 있는 쪽을 조금 더 좋아하시나봐요. ㅎㅎ

단발머리 2020-07-08 22:1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 <인형> 페이퍼 읽고 나서 저도 그 책 샀거든요. 아직 다 읽지는 못했는데, 장편을 좋아해서 <나의 사촌 레이첼>을 읽게 되고, <레베카>를 이어 읽게 되었네요. 잠자냥님의 의견은 옳습니다. 저는 로맨스가 있는 쪽을 더 좋아해요.
하나만 고르라면......아, 하나만 고르라면,의 이 압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나의 사촌 레이첼>입니다. 아이 러브 레이첼, 아이 러브 필립!!!

Breeze 2020-07-09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베카>나 <나의 사촌 레이첼>이나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은 정말 재미있죠.
그 뒤로도 몇 권을 더 읽었는데,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샬럿 브론테의 <빌레뜨> 읽고 싶더라고요. ^^

단발머리 2020-07-09 17:32   좋아요 1 | URL
사실 <레베카>의 작가가 누군지도 몰랐거든요. 대프니 듀 모리에를 알게 되어 너무 행복합니다.
전 <빌레뜨>가 아주 좋았거든요.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유부만두 2020-07-10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좋아요, 전 제인 에어가 최고인데요.... 레베카....

단발머리 2020-07-12 16:43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인 에어가 최고에요. 레베카도 좋지만요.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 입구의 철문 앞에 섰지만 굳게 닫힌 탓에 들어갈 수 없었다. 철문에는 쇠사슬이 가로걸리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5)

 



대중의 인기로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안티팬이 그렇게나 많았는데도 성공했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세 가지 요인이 있을 텐데, 첫째는 실력이고, 둘째는 실력. 세번째는 실력? 뮤지컬을 즐겨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매 한 번 해보면 알게 되는 거지만, 뮤지컬은 무슨 공연(극제목)을 보는가 보다는 누구(주연배우)의 공연을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페이가 어떤 식으로 지급되는지는 모르지만(잘하는 사람 많이 주겠지요), 공연 좌석이 매진되지 않고 많이 남는 경우 다음 시즌에서 주인공이 사라지기도 한다. 더블 캐스팅된 배우가 공연 시간을 늘리기도 하고, 새로운 얼굴이 등판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보다 배우에 대한 선호가 더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뮤지컬 배우도, 성악 전공자도 아닌 걸그룹 출신의 아이돌이 성공하기란 보통의 노력으로 될 일이 아니다. 옥주현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테고, 싫으면 싫은 이유가 100가지나 되겠지만, 나 같으면 한결같이 옥주현 팬이다. 노래를 잘 하고, 노래할 때 표정도 자연스럽고, 입 모양도 예쁘다. 발음이 정확하고, 호흡도 좋고, 성량은 뭐 말할 것도 없다. 팔도 길고 키도 크고 힘도 세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뭐, 1등이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독하다는 말을 들으며 결국 그 자리에까지 갔다. 실력으로만 승부해서. 

 






옥주현의 레베카는 여러 버전이 있는데, 나는 이 버전을 좋아한다. 다른 영상들에 비해 나름 순한댄버스 부인 버전이다. 옥주현의 레베카를 두어 번 듣고 시작한다. 어제 블랑카님 서재에 댓글을 남겼는데, 블랑카님이 내가레베카』를 아직 읽지 않은 걸 아시고는 내가 부럽다고 하셨다. 호호호. 내가 그런 사람이다. 『레베카』 아직 안 읽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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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0-07-0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부러워요. 흠뻑 빠지실 겁니다. 장담합니다. ^^

단발머리 2020-07-04 21:34   좋아요 0 | URL
움하하하하하하하! 오늘밤이죠. 전 아무도 안 부럽습니다.
저 지금 블랑카님 방에서 <감염도시> 리뷰 읽고 있었거든요. 레베카 만나고 나면 <감염도시>로 갑니다.
제가 요즘 바빠요!!!

유부만두 2020-07-0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다음주에 만날겁니다. 안 읽고 이렇게 자랑할 수 있어서 좋네요. ㅎㅎ

단발머리 2020-07-04 21:49   좋아요 1 | URL
그러면 오늘은 유부만두님이 저 부러워하시고요 ㅋㅋㅋㅋㅋㅋㅋ 담주에 제가 유부만두님 많이 부러워하겠습니다!

페넬로페 2020-07-0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댄버스부인은 단연 옥주현이죠!
레베카를 아직 읽지 않았으면 왜 부러울까요?
알지 못하는 이유로 책도 읽어보고 싶어요^^

단발머리 2020-07-06 10:09   좋아요 1 | URL
저도 언젠가 한 번쯤 옥주현의 레베카를 라이브로 들을날이 있었으면 하네요. 블랑카님 말씀은 레베카를 읽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는 의미인거 같아요. 이미 읽어버린 사람에게는 지난 과거의 일이죠. 전 아직 반이 남았는데... 아이구... 아까워요, 가는 페이지들이요ㅠㅠ

비연 2020-07-05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곧 만나야겠네요, 레베카 ~
저도 아직 레베카 안 읽은 사람 ^^;;

단발머리 2020-07-06 10:10   좋아요 0 | URL
레베카~~~ 할 때 고음이 그냥 쫘악!
일단 축하를 드립니다. 저는 이미 반을 읽은 사람으로서ㅠㅠ 비연님 부럽습니다.

psyche 2020-07-05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고백하는 타임인가요? 저도 레베카 안 읽은 사람입니다 ㅎㅎ

단발머리 2020-07-06 10:12   좋아요 0 | URL
지금의 이 고백은 사랑고백처럼 마냥 행복한 고백입니다.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요. 선물 같은 책이라... 저도 블랑카님 그 말을.. 프시케님, 부럽습니다^^

수이 2020-07-0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고백 타임이라면 역시 저 또한 레베카 안 읽은 사람 손 번쩍!

단발머리 2020-07-06 14:06   좋아요 0 | URL
아주 축하드리구요. 언제든 레베카를 시작하자마자 저의 부러움을 이만~~~~~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