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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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하다'와 '알아보다'라는 두 동사는 하천의 비슷한 유황(流況)을 규정하고 있지 않다. '발견하다'와 '알아보다'는 '태어나다'와 '늙다'의 차이와 마찬가지다. 내가 강물의 범람이라고 말한 (河床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 극대의 순간부터, 바야흐로 엄습해오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알아보다'라는 동사는 낙뢰의 섬광만큼 충격적이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매혹된, 그보다 훨씬 더 횡포한 물의 움직임이다.
열정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운 신명(神明) 재판*이다.
넘어가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은 행운이 따르든 치명적이든 간에 극단적이기 때문에, 이 넘어가기는 위험 천만이다.
* 물, 불 따위의 시련으로 판결을 내린 중세 시대의 재판.
-14쪽

간통이 가장 강렬한 관계라고 그녀는 생각했던 것일까? 완벽한 비밀이 거짓말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고 더 밀도 높은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부부간의 부정(不貞)이 인간의 언어에 뚫릴 수 있는 어떤 틈새, 나날의 인간 관계와 교류 그리고 주어진 약속의 완전한 노예로 만드는 거역할 수 없는 인접성에 뚫일 수 있는 틈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것을 벽에 뚫린 틈새, 엄밀히 말해서 지속되는 모든 것, 즉 식사 · 밤 · 업무 · 질병 · 낮이라는 매일매일 이루어가는 일상사인 이 산에 뚫린 틈새라고 생각했을까?
-19쪽

사랑의 발생은 어떤 목소리에 대한 복종일 수 있다. 어떤 목소리의 억양에 대한 복종.-25쪽

환영의 습격을 받는 것, 여행을 하는 것만이 예술의 본질은 아니다. 되돌아와서 악보를 기록하는 작은 용기가 추가로 필요하다.
열려 있고 벌려진 채 있는 내면의 색청(色聽)*으로부터 악보를 적어내는 일은 작은 용기, 뒤로 한 발 물러서기, 가늘게 눈을 뜨고 보아야 하는 용기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절머리나는 일이다.
모차르트가 로홀리츠에게 했던 매우 단순한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전체를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파노라마를 구성하는 것이 문제다. 양팔로, 단 한번에 전체를 통째로 끌어안아야 한다.
'전체를 한꺼번에' 단번에 기록해야 한다.
전체를 앞지르는 것은 동일한 시간 내에서 그것을 애도함이다.
그것을 영원한 결별 안에서 붙잡아야만 한다.-28쪽

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문학이다. 아름다운 악보는 연주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미리 준비된 서양 음악의 찬란함이다. 음악의 원천은 소리의 생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듣기라는 절대 행위 안에 있다. 창조 행위에서 이 절대 행위는 소리의 생산에 선챙한다. 작곡이라는 행위가 이미 그것을 듣고, 그것으로 작곡을 한다. 연주가 이미 들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듣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은 의미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내기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듣기이다.-60쪽

사랑에 빠진 사람들, 연인들, 부부들이란 동일한 인간을 지칭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욕과도 결혼과도 대립된다. 사랑은 도둑질에 속하지 사회적 교환에 속하지 않는다.
태고의 어둠 이래로 사랑에 빠진 자는 오래 전부터 그의 가족, 친척들, 그리고 집단이 그에게 마련해준 교환에서 빠져나온 여자 혹은 남자를 가리킨다.
동화들은 도주를 결합에 대립시키는 것과 상당이 유사한 방식으로 사랑과 결혼을 대립시킨다.
옛날이야기에서 사랑은 언제나 세 가지 특성으로부터 정의된다. 즉 이해하기 어려운 쌍둥이와 같은 사랑(낯선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거의 근친상간적인 화합을 발견한다), 한눈에 반하기(갑작스럽고, 예비되지 않았으며, 말없는, 매개되지 않은 홀림), 끝으로 자살이나 살인 혹은 그를 죽게 하거나 그들을 저주받게 만드는 치정 살인이 그것이다. -65쪽

누가,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쓸데없는 말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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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구판절판


조제는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간을 잘 맞춘 음식을 츠네오에게 먹이고, 천천히 세탁을 해서 츠네오에게 늘 깨끗한 옷을 입힌다. 아껴 모은 돈으로 일년에 한 번 여행도 떠난다.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죽은 존재란, 사체다.
물고기 같은 츠네오와 조제의 모습에, 조제는 깊은 만족감을 느낀다. 츠네오가 언제 조제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곁에 있는 한 행복하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할 때, 그것을 늘 죽음과 같은 말로 여긴다.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다.
'우리는 물고기야. 죽어버린 거야.'-66쪽

오바와의 관게를(이와코는 섹스라고 부르기 싫었다. 그게 뭔데, 하는 기분이다. 오히려 정분을 쌓는다는 말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생각할 때마다 이와코는 슬픈 쾌락의 파도에 온몸이 흠뻑 젖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럴 때면 '자궁의 위치를 안다......'는 느낌이 든다. 위장이 진짜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만큼 맛있는 물이라는 말이 있다. 차가운 물이 몸속으로 들어가 위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뚜렷이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자궁의 위치를 느끼는 것이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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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르발 남작의 성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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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하다는 건 인정하겠다. 다만 좀 지나치다는 느낌. 기술적 측면에만 의존한다는 느낌은, 나만 가진 걸까.  

모두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제목들만 봐도 분위기가 짐작이 간다. 이 중에서 '마녀의 스테레오타입', '괴물을 위한 변명', '쉿 당신이'는 내키지 않아서 읽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나머지 단편 중에서 '그녀의 매듭',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는 일반적인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읽기 편했고, '퀴르발 남작의 성'은 특이한 형식과 흥미로운 소재에 끌려 재미있게 읽었다.  '셜록 홈즈'는 나름 추리소설 팬으로서 사건이나 해결의 기발함이 별로 엿보이지 않았고, '그림자 박제'는 소재는 파격적인데 내용은 진부했다. 

퀴르발 남작의 성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그녀의 매듭
그림자 박제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휘뚜루마뚜루 세계사 1
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괴물을 위한 변명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

'그녀의 매듭'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재치있게 던지는 작품이다. 온라인상의 정보 조작(가상)이 실제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설정도 흥미로웠다. '퀴르발 남작의 성'은 어떤 드라큘라 이야기가 시공간을 초월해 어떻게 다뤄지는가, 조작되고 전이되는가 하는 이야기로, 재기가 돋보였다.   

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 단편집에 실린 주인공들이 모두 나와 소란을 피운다는 마지막 작품 '쉿! 당산이 책장을 덮은 후' 같은 이야기 말이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을 뿐. 결론적으로 최제훈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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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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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시작은 본드걸의 모험을 끝낸 미미양이 007과 함께 휴가를 즐기는 모습. 그저 평범한 한국 아가씨인 미미와 집에서 티비 보며 뒹굴기 좋아하는 평범한 007이 참 신선했다. 그리고 미미의 눈으로 본 007의 비루함은 웃기기 그지없었다. 

미미양은 달콤한 휴가가 끝난 후 바로 007에게 차이고, 본격적인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스파이 훈련을 받고 스파이가 되어 007과 첩보작전을 수행하는 중후반부는 전반부에 비해 재미가 좀 덜했다.   

전체적으로 풍자적인 소설이지만 대중적인 요소도 충분히 갖추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오현종 작가의 책 중에서는 동화와 풍자를 결합한 <사과의 맛>과 함께 묶을 수 있을 것 같다. 좀더 사실적인 소재를 차분하게 다룬 <거룩한 속물들>,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과 대비된다.  

   
 

그는 내게 무슨 까닭으로 스파이가 되려 하냐고 물었습니다. 여자들은 모험을 싫어하지 않느냐고도 했지요. 나는 그의 말에 여자가 모험을 싫어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남자의 영혼만이 세상을 자유롭게 헤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라고 반박해주었어요.
"누나는 무섭지 않아요?"
"난 권태호운 일상을 견디는 게 더 끔찍해."
어렸을 적 읽은 이야기 중에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건 달걀귀신이 나오는 전래동화도 아니고, 아기 잡아먹는 호랑이 얘기도 아니었답니다. 그것은 결혼 첫날밤 집을 나가버린 신랑을 늙도록 그 방에서 기다렸다는 색시 이야기였답니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꼼짝 않고 한 사람을 기다리며 보낸단 말인가요. 시간의 무게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것도 없습니다. 나는 침묵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느니 차라리 사자의 입 속에 머리를 집어넣어 내 운을 시험하고 싶어요.
–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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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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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무슨 까닭으로 스파이가 되려 하냐고 물었습니다. 여자들은 모험을 싫어하지 않느냐고도 했지요. 나는 그의 말에 여자가 모험을 싫어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남자의 영혼만이 세상을 자유롭게 헤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라고 반박해주었어요.
"누나는 무섭지 않아요?"
"난 권태호운 일상을 견디는 게 더 끔찍해."
어렸을 적 읽은 이야기 중에 내가 가장 무서워했던 건 달걀귀신이 나오는 전래동화도 아니고, 아기 잡아먹는 호랑이 얘기도 아니었답니다. 그것은 결혼 첫날밤 집을 나가버린 신랑을 늙도록 그 방에서 기다렸다는 색시 이야기였답니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꼼짝 않고 한 사람을 기다리며 보낸단 말인가요. 시간의 무게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것도 없습니다. 나는 침묵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느니 차라리 사자의 입 속에 머리를 집어넣어 내 운을 시험하고 싶어요.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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