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새크리파이스
곤도 후미에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서울 신촌에 미스터리 전문 서점 '미스터리 유니온'이 있다. 이곳의 주인 유수영 씨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 곤도 후미에의 <새크리파이스>이다. 저자 이름도, 책 제목도 낯설어 책 소개 글을 찾아보니 저자는 1993년에 데뷔해 가부키 시리즈, 사루와카초 사건 수첩 시리즈, 음식 시리즈 등을 썼고, <새크리파이스>는 2007년 서점 대상 2위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런 작가, 이런 작품을 몰랐다니. 어디 가서 일본 소설 '쫌' 읽는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이야기는 한 사람이 도로 위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가르쳐줘. 어디서부터 다시 하면 이런 결과를 피할 수 있는지.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지." 장면은 바뀌어 한 청년이 신나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모습이 나온다. 청년의 이름은 시라이시 지카우. 고교 시절까지 장래가 촉망되는 육상 선수로 활약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육상을 그만두고 로드 레이스 선수로 전향했다.
선수 개개인이 각자의 기량을 겨루는 육상과 달리, 로드 레이스는 팀원 간의 협력과 조화가 중시되는 종목이다. 에이스의 우승을 위해서라면 동료 선수들이 자신의 성적을 포기하고 서포트를 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개인 간의 경쟁에 질려있던 시라이시는 로드 레이스의 이런 문화가 싫지 않다. 에이스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성적을 포기하고 몸까지 바쳐가며 서포트하라는 팀의 요구도 기꺼이 받아들인다.
물론 모든 선수가 시라이시처럼 에이스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문화를 납득하는 건 아니다. 시라이시가 속한 팀 오지의 차세대 에이스 이바는 자신의 승리를 위해 달리는 선수이고, 이 때문에 팀 내에서 공공연한 질타를 받는다. 현재 팀 오지의 에이스인 이시오 선배와 차세대 에이스인 이바의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일본에서 열린 큰 로드 레이스 대회에서 뜻밖에 시라이시가 주목을 받게 되고 팀 내 분위기는 점점 더 어수선해진다.
겉보기엔 로드 레이스 선수들의 경쟁과 대결을 그린 소설이지만 본질은 영락없는 추리소설이다. 도입부에 (살인) 사건이 등장하고, 곧바로 탐정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나오고, 몇 명의 용의자를 제시한 다음, 추리에 추리를 거듭한 끝에 진짜 범인을 잡아내는 구성을 취한다.
종래의 추리소설과 달리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아닌 개인과 단체, 천재성과 근성, 조화와 희생이라는 가치에 주목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살인 사건의 동기는 머니 아니면 섹스라고 하는데 희생(을 비롯한 열등감, 자괴감, 모욕감 등)도 여기에 들어갈 만하지 않을까('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라는 명령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아마 한국인이라면 다 들어봤을 듯), 거기에 굴복해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