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언어 - 민주주의로 가는 말과 글의 힘
양정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8년 1월
평점 :
품절




<세상을 바꾸는 언어>는 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말과 글로 보좌한 전 청와대 비서관 양정철이 쓴 책이다. 책보다도 저자에 관심이 있어 이 책을 읽었는데, 책이 좋으니 저자가 더 좋아 보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들이 쉽게 사용하고 무심코 내뱉는 말과 글 속에 남아 있는 권위주의와 차별 의식을 지적하고, 말과 글로써 '언어 민주주의'에 도달하는 길을 소개한다. 


이를테면 어려운 한자어가 난무하는 법조문을 법조인들이 애써 바꾸지 않는 것은 법조인 스스로가 법조인 아닌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특권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언론인들이 "~로 예상됩니다.", "~로 보여집니다." 같은 수동, 피동 표현을 남발하는 것은 스스로 보도의 주체가 되지 않고 중립을 가장해 책임을 미루는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아파트 이름이 죄다 대기업 이름과 캐슬이니 팰리스니 하는 외래어의 조합인 것은 돈과 자본, 외국의 것을 숭상하는 천박한 취향이다. 


언론에서 잘못 사용하는 표현에 대한 지적이 특히 흥미로웠다. 정치 보도에서 흔히 쓰이는 '대권'은 일본 구헌법에서 '천황이 행하는 통치권'을 일컫는 말을 그대로 가져와 쓰는 것이다. 이는 일본식 표현이라는 점에서 좋지 않고, 전제 왕조시대의 군주 권한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도 맞지 않다. 스포츠 보도에 자주 나오는 '현해탄'은 일본어 '겐카이나다'를 한자음 그대로 읽은 일본식 표현이다. '한일 두 나라 사이 바다'를 표현하고 싶을 때는 현해탄이 아닌 '대한 해협'을 쓰는 것이 적절하다. 


'빨갱이' 어원인 '빨치산' 뜻을 따져보면 재미있다. 빨치산 어원은 '파르티잔(partisan)'이다. 이는 정당(party) 당원들을 의미한다. (중략) 단순히 어원(파르티잔=정당 당원)으로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각 정당에 소속된 의원이나 당원 모두가 '빨치산'인 셈이다. (112-3쪽) 


각하는 폐하 아래, 전하보다도 아래다. 그냥 고위 관료를 이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정승 같은 고위 관료를 각하로 부르기도 했다. (중략) 따라서 대통령 뒤에 각하 호칭을 쓰는 것은 존칭이 아니라 심하게 격을 낮추는 꼴이다. 우리가 지금 쓰는 '대통령'이라는 호칭은 그 자체로 극존칭이다. (128쪽) 


일본 국가 <기미가요>의 작곡가가 일본인이 아닌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이고, 그의 묘지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기미가요> 작곡가의 묘지가 서울에 있다니 뭔가 찜찜하다). 중국 국가는 아니지만 중국인민해방군 대표 군가인 <팔로군 행진곡>은 전남 광주 출신의 정을성 선생이 작곡했다. 이런 미니 역사 지식도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 페미니즘 - 청소년인권×여성주의 청소년 벗
호야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성, 연장자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발언권이 약한 집단은 단연 어린 여성이다. 나 역시 한때는 '어린' 여성이었기에 그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그외 여러 공간에서 어떤 무지와 오해, 편견과 차별, 때로는 폭력을 맞닥뜨리는지 너무나 잘 알고 이해한다. 


그러나 <걸 페미니즘>의 저자인 청소년 페미니스트 27인은 이 책에 담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지금 이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가 아니라, 누군가의 과거로 취급'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을 가리켜 '어린애가 똑부러진다', '기특하다'고 바라보는 시선도 거절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연령이나 성별에 대한 편견 없이 온전히, 있는 그대로 읽어주길 당부한다.


이 책은 소녀다움, 생리, 외모주의, 가정 폭력, 어머니-자식 관계, 차별적 학교, 부실한 성교육, 임금 노동, 거리에서의 삶, 성폭력 경험, 낙태죄 문제, 동성애자, 트랜스젠더퀴어, 여성 아이돌 산업, 소녀/소년 만화, BL물, ‘촛불 소녀’ 등의 주제를 다룬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과거로 취급'되길 거부했으나, 실제로 내가 과거에 겪은 문제들은 나의 과거 이야기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소녀다움으로 시작되어 여성성, 모성으로 이어지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올가미, 아직도 폐지되지 않은 낙태죄와 언제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는 성폭력의 위험은 과거는 물론 현재도 진행 중인 문제다. 


4부 '당신들의 '소녀', 그 너머'가 특히 흥미로웠다. 여성이 여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문화, 여성이 여성향 만화를 기피하는 현상과 남성향 만화를 볼 때 느끼는 여성혐오, 소설에 나오는 동성애 묘사는 아무렇지 않은데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동성애 묘사는 거북하게 느껴졌던 경험 등 페미니즘 책은 물론 그 어떤 장르나 주제의 책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고백이 나온다. 나 역시 겪은 적이 있고 공감하는 문제라서 더 깊은 탐구와 분석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범죄 소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새롭게 배운 점도 많고 생각해볼 점도 많았습니다. 이런 연구, 이런 책, 격하게 환영합니다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범죄소설의 계보학 - 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남성인가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범죄 소설의 계보학>의 저자 계정민은 영미 문학 전공자로는 드물게 범죄 소설을 전공했다. 그중에서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범죄 소설 연구에 천착한 저자는 이 책에서 범죄 소설의 탄생과 변화, 기능과 폐해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 


나는 오랫동안 범죄 소설의 시작이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인 줄 알았는데, 이 책에 따르면 <셜록 홈스> 시리즈 이전에도 범죄 소설은 존재했다. 범죄 소설은 범죄자 전기물을 가리키는 뉴게이트 소설에서 출발해, 추리소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변형, 발전했다. 뉴게이트 소설은 범죄가 불공정한 사회체제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범죄자 개인에 대한 처벌보다 사회개혁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취했다(일본의 사회파 소설과 유사해 보인다). 


뉴게이트 소설이 인기를 끌자 반사회적 풍조를 우려한 정부는 추리소설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추리소설은 범죄자가 아니라 탐정의 시각으로 범죄를 바라보며, 범죄자를 체포하고 처벌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뒤이어 나타나는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은 범죄 자체를 근절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한다.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의 주인공은 선도 악도 부정하는 안티 히어로인 경우가 많다. 


범죄 소설에 나오는 형사나 탐정이 죄다 남성인 것은 실제로 형사나 탐정이 대부분 남성인 까닭도 있지만, 범죄 소설이 남성성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범죄 소설에서 남성은 주로 형사나 탐정으로 등장하고, 이성, 논리, 명석함, 냉철함 등을 상징한다. 반면 여성은 주로 범죄 피해자나 가해자, 형사나 탐정의 파트너 또는 뮤즈로 등장하고, 감정, 직관, 어리석음, 히스테리 등을 상징한다. 


예외도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를 비롯한 이른바 노처녀 탐정 추리소설이다. 결혼하지 않은 노처녀, 할머니, 추녀 등은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남성성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여겨졌고, 이로 인해 '가까스로' 이성이나 논리를 내세우는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범죄 소설은 오랫동안 백인, 귀족, 제국주의 등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확산하고 공고히 하는 기능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행 피하기 기술 - 영리하게 인생을 움직이는 52가지 비밀
롤프 도벨리 지음, 엘 보초 그림, 유영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의 유명 작사가이자 프로듀서인 아키모토 야스시는 자신의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라고 왜 실패를 안 했겠습니까. 다만 실패도 많이 하고 성공도 많이 하다보니 사람들이 성공한 것만 기억해주더군요." (오래 전에 들은 말이라서 정확하진 않다.) 롤프 도벨리의 신작 <불행 피하기 기술>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결국 불행을 '피하는' 기술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행운을 많이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상대적으로 불행이 더 작아 보이고 나중에는 불행을 '피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불행을 피하는(=행운을 발견하는) 기술을 52가지나 소개한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생에 있어서 설정(setting)보다 중요한 건 수정(correcting)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학교, 최고의 직장, 최고의 배우자를 원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선택이 최고가 아님이 드러났을 때(이 회사가 아니야! 이 사람이 아니야!) 일단 멈추고 과감히 경로를 바꿀 용기가 있는지 여부다. 


어떤 것에 빠지고 심취하는 것은 중독이 아니라 행운이며, 여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행운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는 선택이다. 빌 게이츠는 젊은 시절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졌고, 스티브 잡스는 캘리그라피와 디자인에 심취했다. 워런 버핏은 12세 때부터 주식투자에 중독이 되었다. 이런 건전한 '덕질'은 그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고 세계 최고 수준의 부와 명예를 가져다 주었다.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비롯된다는 파레토의 법칙을 뒤집은 스터전의 법칙, 즉 '모든 것의 90퍼센트는 쓰레기다'라는 말도 재미있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고민도 쓰레기, 내가 저지른 실패도 쓰레기, 내가 미워하는 사람도 쓰레기,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쓰레기. 모든 게 쓰레기라고 생각하면 불행도 실패도 원망도 좌절도 별 것 아닌 일처럼 느껴진다. 


결국 인생에서 내가 오롯이 가질 수 있는 것은 경험뿐이다. 그러므로 좋은 삶을 원한다면 경험에, 특히 행복한 경험에 더 많이 투자하라. (9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