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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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을 열심히 추억하며 사는 사람은 아닌데, 이따금 어린 시절의 어떤 장면들이 문득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중에는 동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아름다운 추억도 있고, 밤중에 자다가 이불킥 할 만한 흑역사도 있고, 현재의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사건들도 있다.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 소설 <눈부신 안부>는 어른인 해미가 어린 시절의 일들을 떠올리면서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라면 알 수 있는 것들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퇴사 후 할 일이 없던 해미는 사진 전시회에서 우연히 대학 동창 우재를 만난다. 서로의 안부를 나누다가 대학 시절 해미가 이모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걸 기억해 낸 우재 덕분에 해미는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일들을 떠올린다. 


언니가 사고로 죽었을 때 초등학생이었던 해미는 아빠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엄마를 따라서 독일로 갔다. 독일에는 오래 전 파독 간호사로서 독일에 갔고 현재는 의사로 일하며 성공적으로 독일에 자리를 잡은 엄마의 언니, 즉 이모가 살고 있었다. 해미는 낯선 독일어를 배우고 독일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와중에도 틈틈이 언니 생각을 하며 언니를 그리워했다. 그런 해미를 애틋하게 여긴 이모와 이모 친구들, 이모 친구들의 자식들이 해미를 가족 이상으로 아껴줬다. 


해미는 특히 마리아 이모의 딸 '레나'와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와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자 이모에게 병이 찾아온다. 엄마를 끔찍이 여기는 한수가 해미와 레나에게 어떤 부탁을 해오는데, 그 부탁이란 게 엄마가 그동안 써온 일기를 몰래 읽고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달라는 것이다. 해미는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만, 친구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열심히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다. 


그로부터 20년 후. 현재의 해미는 그 시절의 일을 흑역사로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해미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지 못했고, 찾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으며, 그 시절 영원한 우정을 약속했던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겼다(해미 쪽에서 연락을 끊었다). 그 시절 해미와 해미의 엄마, 동생을 살뜰히 보살펴줬던 이모와 소원해지고, 대학 시절 썸을 탔던 우재와 잘 안 되고 재회한 후에도 미적거리는 것은 그 시절 이후에 생긴 자기 혐오 때문인지 모른다. 


그랬던 해미에게 기적처럼 우재가 나타났고, 해미는 다시 한 번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에 도전한다. 이 과정에서 해미는 과거에 자신이 첫사랑 찾기에 실패했던 건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해서였다는 걸 깨닫고(너무 어리고 너무 몰랐다), 그런데도 뭐라도 한 것이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눈부신 안부'를 전하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족하고 서툴러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할지라도 뭐라도 해보기. 실행력, 적극성이 부족한 나에게 참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다. 오늘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더운데 잘 지내느냐고 문자라도 보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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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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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상 작가의 소설이 기발하고 참신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작가의 첫 소설집 <이중 작가 초롱>을 읽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 불합리한 관행이나 세태를 적극적으로 조롱한다는 점, 서사의 방식이 관습적이지 않다는 점, 비일상적인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시녀 이야기>를 쓴 캐나다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연상되기도 했다. 


첫 번째 단편 <하긴>은 운동권 출신의 엘리트인 아버지가 고등학생인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그는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딸 보미나래를 미국에 있는 에코 공동체로 보낸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 수상 실적으로 대학에 가겠다는 계획이다. 자칭 '진보'라는 사람이 대학 입시라는 성과에 연연하고 기득권에 편입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풍자함과 동시에, 정치적 입장과 약자, 소수자에 대한 혐오 여부는 무관할 수 있음을 탁월한 솜씨로 보여준다. 


제14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도 좋았다. 집안에서 '모래'로 불릴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한 고모와 두 여자 조카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이야기는 더 어린 조카인 무경의 시선으로 진행되는데, 고모와 언니 사이의 유대감, 연대감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화자가 나이가 들면서 차츰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어떤 소외는 성장으로 연결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리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는 작품은 <티나지 않는 밤>이다. 치과에서 데스크 직원으로 일하는 수진의 취미는 밤마다 원룸 베란다에서 소설을 쓰는 것인데, 수진의 노동과 수입을 필요로 하는 남자들이 그의 유일한 취미를 비웃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표제작 <이중 작가 초롱>도 글 쓰는 여자가 주인공인데, 말할 자유가 없는 여성에게서 글 쓸 자유조차 빼앗는 세상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연결되는 작품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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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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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 리스트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초기 걸작들을 모은 소설집이다. <저주토끼>와 마찬가지로 국적이 불분명한, 소설이라기보다는 민담이나 전설처럼 읽히는 기묘하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첫 번째 단편 <나무>는 두 소년과 한 남자의 기구한 인연을 그린다. 나무 타기를 하면서 놀기를 좋아하는 두 소년이 어느 날 마을을 지나가던 이방인에게 장난을 친다. 화가 난 이방인이 한 소년을 땅에 묻고, 얼마 후 이 소년은 나무가 된다. 남은 소년은 나무가 되어버린 친구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을 떠난다. 그러다 한 식당 겸 여관에서 식객으로 지내다 여관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과거의 잘못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런 식으로 악연이 증폭되는 이야기들이 있는가 하면, (정보라 작가의 또 다른 특기인) 인간의 신체를 활용한 이야기들도 있다. 두 번째 단편 <머리카락>은 인간의 머리카락이 온 세상을 뒤덮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일종의 디스토피아 재난물이다. 여성의 신체 일부가 재생되면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저주토끼>에 실린 단편 <머리>의 원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좋았던 단편은 마지막에 실린 <Nessun Sapra>이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대표곡 <Nessun Dorma>를 모티프로 한다. 독소전쟁(대조국전쟁)에서 살아남은 간호사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불가해함까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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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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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글은 솔직하다. 외동딸인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부와 사회적 지위는 주지 못했던 부모에 대한 애증, 부르주아 계급을 경멸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과거에 대한 환멸,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를 사랑할수록 낮아지는 자존감과 높아지는 불안감, 우울감 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을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2016년에 발표한 <여자아이 기억>도 그렇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첫 성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1958년. 열여덟 살이었던 저자는 방학을 맞아 여름방학 캠프에서 지도강사로 일하게 된다. 그 전까지 부모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가톨릭계 여학교에 다녔던 저자로서는 몸도 마음도 해방되는 최초의 기회였다. 그동안 소설이나 잡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저자에게 거짓말처럼 이상형의 남자가 다가왔고,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캠프에서의 지위도 높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그와 밤을 보내게 된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간 저자는 남자가 전날 밤 자신과 잤다는 사실을 동료 강사들에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 깜짝할 새에 소문이 퍼졌고, 그 때부터 남자 강사들은 저자를 '창녀', '걸레'라고 부르고, 여자 강사들도 저자를 따돌리고 무시했다. 저자와 밤을 보낸 남자도 저자를 피했다. 그 때부터 저자에게 여름방학 캠프는 지옥이 되었다. 저자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명예 회복에 대한 미련이었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남자와 딱 하룻밤 잤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같이 잔 남자는 아무 문제 없이 생활하는데 자신만 처벌을 받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남자를 사랑한 여자가 감내해야 할 대가라면 또 다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개학 후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보면서 '나는 너희들과 달리 성경험이 있다'고 뿌듯해 하고, 자신을 버린 그 남자의 약혼녀처럼 금발로 염색하고 초등 교사가 되려고 했다니. 내가 다 부끄럽다. 


사실 난 저자가 자신의 첫 성경험을 고백한 것보다 영국에서 오페어로 일할 때 친구와 벌인 절도 사건을 밝힌 것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첫 성경험은 저자가 피해자였지만, 절도는 저자가 가해자이고 엄연한 범죄인데 이걸 고백하다니. 심지어 저자 자신이 식료품점 딸인데 식료품점을 비롯한 여러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영화 <벌새>에도 떡집 딸인 주인공이 친구와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 있었다. 의외로 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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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연작소설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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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 작가 하면 남성 성소수자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쓴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믿음에 대하여>를 읽고 실은 사랑보다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써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사랑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도 남성 성소수자인 이십 대 청년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비중 있게 그려졌고, 두 번째 작품인 <1차원이 되고 싶어>에서는 첫사랑으로 가슴 앓이 하는 와중에도 좋은 대학은 가고 싶고, 친구와의 우정도 지키고 싶고, 부모에게 인정받는 자식이고 싶은 마음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믿음에 대하여>에서는 그 욕망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요즘 애들>의 남준은 인턴으로 일하는 잡지사에서 정직원으로 전환되기를 기대하지만 수습 기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애가 탄다. <보름 이후의 사랑>의 찬호는 방송국 메인 앵커인 남자친구와 아파트를 장만해 한 집에 살게 된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되는 순간>의 한영은 대기업 마케팅 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사내 정치에 휘말려 입장이 난처해진다. <믿음에 대하여>의 철우는 사진작가 일을 그만두고 이자카야를 개업하지만 팬데믹으로 폐업 위기에 처한다. 


이들의 욕망을 보면서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이 떠올랐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를 먼저 채우려 하고, 그 다음에 안전 욕구, 사랑과 소속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를 만족하려고 한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모두 남성 성소수자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생계를 해결해야 하고, 기왕이면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어서 이직을 거듭한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간 후 연애를 시작하지만, 직장에서 성과를 쌓고 연봉이 올라가고 여윳돈이 생기면서 쇼핑에 탐닉하고 주식, 부동산에 눈 돌리다 애인과 마찰을 빚는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던 이들은 상사와의 갈등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 예상치 못한 팬데믹의 발생 등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자신의 현재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재미있었던 점은, 어떤 인물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울과 허무를 느끼는 반면, 어떤 인물은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인간은 언젠가 죽으니까) 지금을 즐기자(하고 싶은 걸 하자)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욕망도 무상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무상하므로 구애받지 않으려 하고 누구는 무상하므로 더욱 갈구하는 것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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