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법한 모든 것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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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소설 하면 '좋지만 어렵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어렵지만 좋다'로 바뀌었다. 특히 앞의 네 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좋았고, 뒤의 두 편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감상을 다듬어갈 생각이다. 


2022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중위 연령이 61세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근미래가 배경이다. CG 작업이 대세인 영화계에서 드물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일하는 특수분장사인 딸과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다. 막연히 상상한 장밋빛 미래와 달리 실제로 도래한 미래는 "재해와 기근과 신종 바이러스의 주기적 출몰이 고착화된 세계에서의 각자도생과, 인류가 더 이상 인류를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그 진행에 가속도가 붙은 초고령 사회"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미래 아니고 현재 같다. 


<노커>는 길에서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어깨빵을 당한 딸 다정이 언어 기능을 상실하자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 민주의 이야기를 그린다. 비슷한 일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자 정부는 가해자를 찾아서 처벌할 노력을 펼치기는커녕 피해자가 알아서 조심하고 당하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당연히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나 치고 도망가는 모방 범죄 사건이 늘고, 사람들은 평소에도 겁에 질려 생활하고 피해자가 발생하면 대비하지 못한 그 사람 잘못이라며 탓한다. 이 소설도 허구 아니고 사실 같다. 


표제작 <있을 법한 모든 것>은 플랫폼에 연재될 로맨스 소설을 창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소설가 C를 통해 호텔 키퍼, 매점 점원, 가사도우미 등 '섀도 워크(shadow work)'의 다양한 사례와 발생 가능한 문제 상황 등을 보여준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은 1980년대 '국민학교(초등학교 x)'를 배경으로 한국의 군사문화와 가부장제, 교육 등이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로 인해 어린 소녀들이 어떤 트러블 또는 트라우마를 겪었는지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가까운 일상에서 다채로운 상상을 펼쳐내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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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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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는 구병모의 장편소설 <파과>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파과>는 65세 여성 킬러가 주인공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인해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파쇄>는 주인공 '조각'의 젊은 시절 중에서도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기 직전 최종 훈련과 시험을 치르는 과정을 그린다. <파과>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저 없이 일을 치르던 조각에게도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야단맞는 햇병아리 시절이 있었다니. 몸도 마음도 완벽한 킬러인 조각을 만든 인물 '류'에 대해서도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최근에 <사이렌 : 불의 섬>을 봐서 그런가. 조각이 훈련받는 과정을 보면서 <사이렌 : 불의 섬> 출연진 중에서도 군인 팀 생각이 많이 났다. 조각처럼 그분들도 엄청난 무게의 군장을 메고 산에 들어가 훈련을 받은 적이 있겠지.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찐 감자와 군용 저장식으로 끼니를 해결한 적이 있겠지. 힘으로 여자가 남자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우니 속도를 높이거나 재빨리 주변에 활용 가능한 무기가 있는지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급소를 치라는 가르침을 받았겠지. (계속 생각나는 것 보니 <사이렌 : 불의 섬> 다시 보기 쿨타임이 찬 것 같다 ㅎㅎ) 


'작가의 말'에도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파과>가 많은 분들의 성원과 지지를 받은 한편, '진정한' 여성 서사가 맞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1) 주인공이 손톱을 칠한다는 것, 2) 어린이를 구조하는 행위가 모성과 닮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 3) 이성을 향해 발생하는 마음 등이었다고. (94-5쪽) 주인공이 손톱을 칠하면 여성 서사가 아닌가. 어린이를 구하면 모성처럼 보여서 여성 서사가 아닌가. 이성을 좋아하면 여성 서사가 아닌가. 이래서 여성 서사가 아니고 저래서 여성 서사가 아니면 '진정한' 여성 서사는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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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낙서 수집광
윤성근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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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책보다 새 책을 선호해 헌책방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찾는 책이 절판되어 불가피하게 중고책을 사야 하는 경우에는 가까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직접 보고 가장 새 책에 가까워 보이는 헌책만 구입한다. 이런 나와 달리, 세상에는 새 책보다 헌책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래될수록, 종이 색이 누렇게 바래 있을수록, 먼저 읽은 사람(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수록 '오히려 좋아'한다는 이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 <헌책 낙서 수집광>이다. 


이 책을 쓴 윤성근 작가는 2007년부터 서울 은평구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 중인 헌책방 주인이기도 하다. 헌책방 주인의 업무 중 하나는 헌책 매입이다. 매입을 위해 헌책을 살펴보다 보면 별의별 물건과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프랜차이즈 중고서점에서는 뭔가가 끼워져 있거나 흔적이 있는 책을 꺼리지만, 저자의 헌책방에서는 환영한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 귀퉁이에 적힌 낙서, 속지에 끼적여진 일기 등을 보면 이 책을 읽은 사람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15년 넘게 헌책방 직원과 주인으로 일하며 수집한, 누군가의 손글씨가 남아있는 책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가 모은 손글씨 중에는 "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도대체 주문을 언제 했는데... 이제 오다니" 같은 일상적인 푸념에 가까운 낙서도 있고, "김 OO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처럼 무시무시한 저주도 있다. 80년대에 대학생들이 주고받은 러브레터, 엄마가 자녀에게 말로는 다 못해서 시의 힘을 빌려 적은 인생 이야기도 있다. 


"나는 책이 가장 책다워질 때가 언제냐고 하는 질문을 받으면 읽은 사람의 이야기가 책에 남는 그 순간부터라고 말한다. 헌책에서 찾은 흔적엔 비록 유명인은 아닐지라도 평범해서 더 값진 우리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10쪽) 


이 책을 읽은 후인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새 책을 선호하고, (평생 소장할 책이 아닌 이상)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새 책에는 없는 헌책만이 가진 매력을 알게 되었고, 새 책보다 헌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먼 미래에는 저자처럼 책에서 낙서나 손글씨를 발견했을 때 얼굴을 찌푸리기보다는 책에 얽힌 사연을 이리저리 유추해 보는 책탐정도 될 수 있을까. 그 삶도 꽤 재미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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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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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을 보고 미국 현대사에 관심이 생겼다. 뒤이어 로런 그로프의 소설 <아르카디아>를 읽고 구체적으로 미국의 1970년대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알게 된 이 책의 배경이 1970년대라고 해서 바로 구입했다. 책이 도착하고 나서야 이 책이 무려 872쪽에 달하고 조너슨 프랜즌이 원래 벽돌책으로 유명한 작가라는 걸 알았는데, 하루에 100쪽씩, 총 9일 동안 읽기로 결심했으나 이틀 줄여서 일주일 만에 읽은 건 내용이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어떻게 보면 막장 가족 드라마에 가깝다. 1971년 성탄절을 앞둔 미국 중서부 시카고 교외의 한 마을. 교회의 부목사로 재직 중인 러스와 그의 아내 매리언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다. 독실하고 화목한 중산층 가족으로 보이지만, 이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문제가 있다. 


러스는 최근 남편을 잃고 교회에 새로 가입한 프랜시스라는 젊은 여자 신도 프랜시스에게 홀딱 반한 상태다.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챈 매리언은 정신 상담을 받으러 다니다가 결혼 전 사귀었던 유부남과의 재회를 상상한다. 장남 클렘은 대학에서 만난 여자 친구의 영향으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심한다. 장녀 베키는 이모에게 상속 받은 거액의 유산으로 대학 진학 전 남자친구와 유럽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운다. 차남 페리는 아버지가 재직 중인 교회의 청소년부인 '크로스로드' 활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위험한 일탈을 꿈꾼다. 


이 소설은 붕괴 직전의 가정을 묘사하는 동시에 미국 문화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종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러스는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메노파 신자였는데, 메노파란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의 일파로, 퀘이커 교도만큼이나 엄격하고 배타적인 생활을 한다고 한다. 매리언은 가톨릭 신자였는데, 남편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자가 된 후에도 천국을 믿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는 등 자기 본위의 신앙 생활을 한다. 클렘은 무신론자에 가깝고, 베키는 사귀는 남자에 따라 교회에 다니거나 말거나 한다. 


그런 이들이 종국에는 (클렘 빼고) 독실한 신자로 복귀하는데, 표면적으로는 페리의 사고가 있지만 그 이면에는 각자가 경험한 일탈과 실패가 있고, 더 자세히는 실패로 말미암아 깨달은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눈 앞의 상황을 운명이라고 믿고 신에게 의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 초반에 러스가 "가난할 때는 이런저런 일이 그냥 일어납니다.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죠. 완전히 주님의 자비에 몸을 내맡기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이 축복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주님과 가까워지니까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시 보니 소설의 결말을 예고한 듯하다.) 


이 소설에는 미국 가정의 붕괴와 신앙 공동체의 파멸 외에도 킹 목사 사망과 닉슨 정권의 등장, 히피 문화의 유행, 반전 시위, 페미니즘 물결 등 1970년대 초반을 수놓은 미국의 사회 문제들이 직간접적으로 언급되거나 묘사된다. 남자한테 상처를 받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식으로 반응하고 폭식으로 해소(처벌?)하는 매리언, "스무 살 때 베티 프리단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읽었다면 내 인생 전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죠."라고 말한 프랜시스, 다양한 가치관을 보여주는 베키, 로라, 섀런 등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도 여럿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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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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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타계한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트레버가 말년에 발표한 단편 열 편을 묶어서 펴낸 소설집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로는 소설집 <밀회>와 장편 소설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었는데, 단편이 장편보다 훨씬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윌레엄 트레버는 단편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열 편 중에 열 편 모두 좋을 수가.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직전에 읽은 단편보다 더 좋을 리가 없다고 일부러 흥분을 절제하면서 읽었는데도 매번 감동했다. 


윌리엄 트레버의 이름으로 출간된 마지막 책이라서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윌리엄 트레버의 작가 소개와 연혁에 유독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윌리엄 트레버는 1928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학교를 열세 군데나 옮겨 다녔고,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졸업 후 영국으로 이주해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두 번째 소설 <동창생들>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고, 영국 남서부 데번으로 이주해 평생 그곳에 살았다. 


가톨릭 국가의 개신교도, 다수의 전학 경험, 영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이라는 '아웃사이더'적인 정체성 때문일까. 그의 소설에는 가족, 직장, 이웃 등의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공동체로부터 소외, 배척당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책에도 장애인, 고아, 집시, 과부, 노숙인, 가사도우미 등의 '외부인'이 나온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주류가 아니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선 어느 영화 못지 않은 드라마틱한 상황 속 주인공이다. 


예를 들어 맨 처음에 실린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의 주인공 미스 나이팅게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같이 사는 사람도 없고, 피아노를 배우러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들 외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는 비혼 여성이다. 남들은 그가 단조롭고 외로운 일상을 보내리라고 짐작하지만, 사실 그는 천재가 아닐까 싶은 한 제자 때문에 흥분되고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남들이 알아차리기 힘들고 본인도 인식하기 어려운 섬세하고도 복잡한 감정의 결을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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