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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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캐럴라인 냅의 마지막 책이다. 예전에 한 번 읽었는데, 몇 달 전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를 듣다가 정희진 선생님이 이 책을 언급하신 걸 듣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재구매했다. 그동안 거식증을 비롯한 식이장애에 대한 관심이 늘기도 했고, 소식좌 유행에 대한 이런저런 말을 듣기도 해서 그런지,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는 훨씬 책이 잘 읽히고 머리에 남는 내용이 많았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욕구들>이지만 원제는 <Appetites>이다. 이 책이 거식증을 비롯한 식이장애에 관한 내용임을 감안할 때 원제가 더 바람직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식욕이 곧 성욕, 애착, 인정욕, 명예욕, 만족감 등과 연결된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임을 감안하면 한국어판 제목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일단 캐럴라인 냅이 거식증 당사자다. 저자의 키가 162cm인데, 하도 안 먹어서 몸무게가 37kg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당연히 체력도 떨어지고 생리도 안 했다. 온종일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났다. 거식증을 고치려다 술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이 이야기는 저자의 다른 책 <드링킹>에 썼다). 저자는 2002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거식증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아니겠지만 간접적으로 저자의 건강과 수명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자신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유독 식이장애에 시달리는 이유를 문화, 사회, 역사적인 차원에서 고찰한다. 식이장애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남성 중심 사회가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다. 여성도 인간이므로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욕망을 가지는데, 사회는 오로지 남성만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고 여성은 욕망의 대상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거나(가꾸거나) 방기하는(망치는) 방식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다. 


식이장애가 여성이 통제욕을 자기 자신의 몸에 발산한 결과라는 사실은, 역으로 여성에게는 자기 자신의 몸밖에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허락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학력이 높거나 낮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여성이라면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혐오하며, 고치거나 바꾸거나 숨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며, 이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각종 문제를 겪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의 몸은 페미니즘이 가장 덜 건드린 미개척지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후의 미개척지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383쪽) 저자는 여성이 태어나고 자라는 가정과 여성이 사회화되는 학교에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방법을 배운다고 지적한다. 저자 자신이 여학교에 다닐 때는 자유롭게 먹고 편하게 움직였는데, 남녀 공학에 다니면서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고백이 의미심장하다. 


쌍둥이 언니의 출산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때 처음으로 여성의 몸이 남성을 먹이거나 남성에게 먹히는 대상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인류의 기원임을 실감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인류의 기원인 여성의 몸을 육성하고 지원하기는커녕 억압하고 통제하니, 출생률이 줄고 인구 절벽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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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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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년 넘게 아이돌 팬으로 살았고 주로 남자 아이돌을 덕질했지만 여자 아이돌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S.E.S의 모든 음반을 사모았고, 아직도 핑클의 성유리가 역대 여자아이돌 중에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며, 여자친구, 마마무의 노래는 지금도 즐겨듣고,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래서 조우리 작가의 소설 <라스트 러브>가 여자 아이돌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고 무조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성 작가가 쓴 여자 아이돌 이야기는 어떨까, 여성 작가가 쓴 남자 아이돌 이야기와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기도 했고. 


소설은 데뷔 5년차 여자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의 멤버 한 명 한 명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제로캐럿은 5년 전 5인조로 데뷔해 3년 차에 지유와 재키가 탈퇴하고 새 멤버 마린이 들어오는 혼란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안정적으로 활동해왔다. 마침내 데뷔 5년 만에 첫 콘서트를 하게 되어 멤버들 모두 기뻐하는데, 사실 이들에게 이 콘서트는 마지막 콘서트이기도 하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많은 나이, 그룹 활동에 대한 의지 저하 등을 이유로 회사가 두 멤버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꿈이기도 했고 청춘을 바친 일이기도 한 아이돌 활동의 끝을 기다리는 멤버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만 더 오래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멤버가 있는가 하면, 자기보다 훨씬 예쁘고 재능 있는 멤버들과의 경쟁에 지친 멤버도 있다. 한 시절을 함께 보낸 멤버들과 곧 헤어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아픈 멤버가 있는가 하면, 콘서트 직전까지 다른 멤버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멤버도 있다. 아마 실제 아이돌 멤버들 역시 이런 마음을 품고 활동을 하고 있거나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라스트 러브>에는 제로캐럿 멤버들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7의 인물이 있다. 바로 제로캐럿의 팬인 팬픽 작가 '파인캐럿'이다. 이 소설은 제로캐럿 멤버들의 이야기와 파인캐럿의 소설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의 스타인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보면서 팬이 꾸는 '꿈'과 그가 살아가는 '현실'을 환상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팬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만 그 안에 다양한 인물 유형이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팬 문화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조명하는 점도 이 소설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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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한 모든 것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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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소설 하면 '좋지만 어렵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어렵지만 좋다'로 바뀌었다. 특히 앞의 네 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좋았고, 뒤의 두 편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감상을 다듬어갈 생각이다. 


2022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중위 연령이 61세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근미래가 배경이다. CG 작업이 대세인 영화계에서 드물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일하는 특수분장사인 딸과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다. 막연히 상상한 장밋빛 미래와 달리 실제로 도래한 미래는 "재해와 기근과 신종 바이러스의 주기적 출몰이 고착화된 세계에서의 각자도생과, 인류가 더 이상 인류를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그 진행에 가속도가 붙은 초고령 사회"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미래 아니고 현재 같다. 


<노커>는 길에서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어깨빵을 당한 딸 다정이 언어 기능을 상실하자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 민주의 이야기를 그린다. 비슷한 일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자 정부는 가해자를 찾아서 처벌할 노력을 펼치기는커녕 피해자가 알아서 조심하고 당하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당연히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나 치고 도망가는 모방 범죄 사건이 늘고, 사람들은 평소에도 겁에 질려 생활하고 피해자가 발생하면 대비하지 못한 그 사람 잘못이라며 탓한다. 이 소설도 허구 아니고 사실 같다. 


표제작 <있을 법한 모든 것>은 플랫폼에 연재될 로맨스 소설을 창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소설가 C를 통해 호텔 키퍼, 매점 점원, 가사도우미 등 '섀도 워크(shadow work)'의 다양한 사례와 발생 가능한 문제 상황 등을 보여준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은 1980년대 '국민학교(초등학교 x)'를 배경으로 한국의 군사문화와 가부장제, 교육 등이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로 인해 어린 소녀들이 어떤 트러블 또는 트라우마를 겪었는지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가까운 일상에서 다채로운 상상을 펼쳐내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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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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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는 구병모의 장편소설 <파과>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파과>는 65세 여성 킬러가 주인공이라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인해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파쇄>는 주인공 '조각'의 젊은 시절 중에서도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삼기 직전 최종 훈련과 시험을 치르는 과정을 그린다. <파과>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저 없이 일을 치르던 조각에게도 생각에서 행동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야단맞는 햇병아리 시절이 있었다니. 몸도 마음도 완벽한 킬러인 조각을 만든 인물 '류'에 대해서도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어 좋았다. 


최근에 <사이렌 : 불의 섬>을 봐서 그런가. 조각이 훈련받는 과정을 보면서 <사이렌 : 불의 섬> 출연진 중에서도 군인 팀 생각이 많이 났다. 조각처럼 그분들도 엄청난 무게의 군장을 메고 산에 들어가 훈련을 받은 적이 있겠지.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서 찐 감자와 군용 저장식으로 끼니를 해결한 적이 있겠지. 힘으로 여자가 남자를 제압하는 것은 어려우니 속도를 높이거나 재빨리 주변에 활용 가능한 무기가 있는지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급소를 치라는 가르침을 받았겠지. (계속 생각나는 것 보니 <사이렌 : 불의 섬> 다시 보기 쿨타임이 찬 것 같다 ㅎㅎ) 


'작가의 말'에도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다. <파과>가 많은 분들의 성원과 지지를 받은 한편, '진정한' 여성 서사가 맞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1) 주인공이 손톱을 칠한다는 것, 2) 어린이를 구조하는 행위가 모성과 닮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 3) 이성을 향해 발생하는 마음 등이었다고. (94-5쪽) 주인공이 손톱을 칠하면 여성 서사가 아닌가. 어린이를 구하면 모성처럼 보여서 여성 서사가 아닌가. 이성을 좋아하면 여성 서사가 아닌가. 이래서 여성 서사가 아니고 저래서 여성 서사가 아니면 '진정한' 여성 서사는 무엇인가.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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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낙서 수집광
윤성근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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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헌책보다 새 책을 선호해 헌책방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찾는 책이 절판되어 불가피하게 중고책을 사야 하는 경우에는 가까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직접 보고 가장 새 책에 가까워 보이는 헌책만 구입한다. 이런 나와 달리, 세상에는 새 책보다 헌책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래될수록, 종이 색이 누렇게 바래 있을수록, 먼저 읽은 사람(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수록 '오히려 좋아'한다는 이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 <헌책 낙서 수집광>이다. 


이 책을 쓴 윤성근 작가는 2007년부터 서울 은평구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운영 중인 헌책방 주인이기도 하다. 헌책방 주인의 업무 중 하나는 헌책 매입이다. 매입을 위해 헌책을 살펴보다 보면 별의별 물건과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프랜차이즈 중고서점에서는 뭔가가 끼워져 있거나 흔적이 있는 책을 꺼리지만, 저자의 헌책방에서는 환영한다. 밑줄이 그어진 문장, 귀퉁이에 적힌 낙서, 속지에 끼적여진 일기 등을 보면 이 책을 읽은 사람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15년 넘게 헌책방 직원과 주인으로 일하며 수집한, 누군가의 손글씨가 남아있는 책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가 모은 손글씨 중에는 "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도대체 주문을 언제 했는데... 이제 오다니" 같은 일상적인 푸념에 가까운 낙서도 있고, "김 OO 부장 너는 내가 반드시 죽인다."처럼 무시무시한 저주도 있다. 80년대에 대학생들이 주고받은 러브레터, 엄마가 자녀에게 말로는 다 못해서 시의 힘을 빌려 적은 인생 이야기도 있다. 


"나는 책이 가장 책다워질 때가 언제냐고 하는 질문을 받으면 읽은 사람의 이야기가 책에 남는 그 순간부터라고 말한다. 헌책에서 찾은 흔적엔 비록 유명인은 아닐지라도 평범해서 더 값진 우리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10쪽) 


이 책을 읽은 후인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새 책을 선호하고, (평생 소장할 책이 아닌 이상)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새 책에는 없는 헌책만이 가진 매력을 알게 되었고, 새 책보다 헌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주 먼 미래에는 저자처럼 책에서 낙서나 손글씨를 발견했을 때 얼굴을 찌푸리기보다는 책에 얽힌 사연을 이리저리 유추해 보는 책탐정도 될 수 있을까. 그 삶도 꽤 재미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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