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에 수놓은 이야기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구병모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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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서 한 남자가 추락하고 그 집이 불타는 사고가 일어난다. 공교롭게도 국가 대항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라 주민들은 사고 직전에 들린 여성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무시했다. 추락한 남자는 바로 사망했고, 화재가 일어난 집은 말 그대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런데 이 집에 있던 여자는 가벼운 화상조차 입지 않았다. 마치 여자만 피해서 불이 번진 것처럼 여자는 멀쩡하고 집은 깡그리 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한편 중년 여성 시미는 회사 후배인 화인의 목덜미에서 작은 문신을 발견한다. 남자 상사는 젊은 여자가 문신을 하면 안 좋게 보인다고 비아냥거렸지만, 시미는 화인의 문신이 내심 마음에 든다. 화인의 소개로 '문신술사'를 찾아간 시미는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세련된 인테리어와는 거리가 먼 일반 가정집 분위기와 한약방 같은 냄새, 사장의 시대착오적인 의상에 기겁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문신을 하면 좋을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구병모 작가가 2020년에 발표한 소설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는 작가의 데뷔작 <위저드 베이커리>와 대표작 <파과>가 동시에 연상되는 작품이다. <위저드 베이커리>의 배경이 평범한 빵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마법사의 베이커리였던 것처럼, <심장에 수놓은 이야기>의 문신 업장도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이지만 특별한 힘이 감돈다. 약자, 소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갑질을 하는 사람을 응징하는 내용인 점은 <파과>와 비슷하다. 


모성에 대한 언급이 많은 점은 가족 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그린 작가의 또 다른 대표작 <네 이웃의 식탁>을 연상케 한다. 시미는 오래 전 남편의 학대와 폭력에 시달리다 집을 나왔는데, 이때 남편 집에 두고 온 아들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뒤늦게 많은 노력을 하지만 쉽지 않다. 아들 입장에선 어머니가 어린 자신을 가정폭력 가해자인 아버지에게 남기고 혼자서 집을 떠났기 때문에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어머니는 과연 피해자일까 가해자일까.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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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마음 델핀 드 비강의 마음시리즈 2
델핀 드 비강 지음, 윤석헌 옮김 / 레모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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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쉬카 할머니는 실어증에 걸려 요양병원에 입원한다. 젊은 시절 신문사에서 교정교열 업무를 담당했을 정도로 단어와 문법 지식이 상당했던 미쉬카 할머니가 실어증에 걸리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족이 없는 미쉬카 할머니를 만나러 오는 사람은 이웃에 살면서 친할머니와 친손녀처럼 지냈던 마리와 언어치료사 제롬뿐이다. 마리와 제롬은 서로 다른 날짜와 시각에 미쉬카 할머니를 방문하며 미쉬카 할머니의 말년을 지켜본다. 


미쉬카 할머니는 실어증 때문에 간단한 단어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떤 말을 계속 하려고 하는데, 그 말의 내용은 니콜과 앙리라는 사람들을 찾아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와 제롬은 니콜과 앙리가 누구이며 미쉬카 할머니가 왜 고마워 하는지 정확히 모른 채 이들을 찾는 일을 거든다. 그러다 결국 이들의 사연이 밝혀지는데, 그 사연은 미쉬카 할머니의 어린 시절과 20세기 프랑스 및 유럽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고마운 마음>은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의 '인간관계에 대한 짧은 소설' 시리즈 2편에 해당한다(1편은 <충실한 마음>이고 3편은 미출간).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고마운 마음'은,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타인에게 빚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빚을 소중한 관계의 형태로 여기는 것"이다. 인간 관계의 대부분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형태의 빚을 지기 마련인데, 빚을 인정하지 않거나 감사를 표하지 않을 때 수많은 심리적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가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심하다고 분석한다. 많은 사람들이 업무상 만나는 사람이나 아예 낯선 타인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쉽게 하는 반면, 가족이나 친구, 연인 등 가까운 사람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잘 하지 못한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이니까 이 정도 친절을 베푸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때도 있고, 일부러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어련히 알 거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미쉬카 할머니의 생각은 다르다. 오랜 세월 누군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고 그 마음을 빚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미쉬카 할머니는, 고마운 사람이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것이 좋다고 마리와 제롬에게 가르친다. 상대가 나에게 무심한 연인, 나를 미워하는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내가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표현했던가? 충분하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던가?"라고 끊임없이 생각했던 미쉬카 할머니의 삶의 태도를 본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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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4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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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이자 음식 평론가인 몰리 레인의 장례식에 두 명의 남자가 온다. 유명 작곡가 클라이브 린리와 중앙 일간지의 편집국장인 버넌 핼리데이다. 각자 다른 시기에 몰리의 연인이었던 클라이브와 버넌은 몰리가 부유한 출판업자 조지 레인과 결혼한 후에도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장례식에는 클라이브와 버넌 외에 몰리가 사귄 또 다른 남자가 와 있었다. 그는 바로 줄리언 가머니. 보수당 출신 외무장관이자 차기 총리로 예상되는 유명 인사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오만불손한 데다가 정치 성향도 안 맞고 자신들보다 훨씬 유명한 가머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버넌의 신문사 사주인 조지가 버넌에게 비밀스러운 자료를 건넨다. 생전에 몰리가 찍은 가머니의 사진인데, 사진 속 가머니는 여장을 하고 있다. 사진이 공개되면 가머니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 나고 신문은 날개 돋은 듯 팔려나갈 거라고 직감한 버넌은 신문사 내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특종 보도를 준비한다.


한편 클라이브는 밀레니엄을 기념하기 위한 교향곡을 의뢰받아 작업 중인데 좀처럼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골치가 아프다. 머리를 식힐 겸 호수 지대로 여행을 떠난 클라이브는 그곳에서 한 여자가 남자에게 위협을 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 순간 그토록 떠오르지 않았던 악상이 떠오르고, 여자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어렵게 떠올린 악상이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앞선 클라이브는 현장을 뒤로 하고 작업실로 돌아간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암스테르담>은 사회적 지위도 높고 경제적 안정도 이룬 엘리트 계급의 두 남자가 내면에 어떤 모순과 허위를 감추고 있고 그로 인해 어떻게 파멸을 맞는지를 보여준다. 클라이브와 버넌은 직업적 성공을 위해 도덕적 의무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린다. 클라이브는 여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버넌은 성소수자를 공격하는데, 이는 클라이브와 버넌으로 대변되는 이성애자 남성 집단이 여성과 동성애자 집단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희생해 왔음을 암시한다. 


소설의 제목이 <암스테르담>인 것은 소설 초반 몰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클라이브와 버넌이 한쪽이 사리분별이 안 되는 상황이 되면 다른 한쪽이 암스테르담으로 데려가 안락사를 시켜주자고 약속한 것과 관련이 있다. (소설에 총이 등장하면 적어도 한 번은 총성이 울려야 하듯이) 결국 이들은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데, 절친했던 두 친구가 서로의 가장 큰 적이자 원수가 되는 과정이 우스우면서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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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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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민에게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취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매물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임대인의 디지털 도어 비밀번호를 알거나 열쇠를 복사해 임대인이 없을 때 그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장소 중 하나가 수호를 만난 가구점이다. 오래된 쇼핑센터에 있는 폐업한 가구점에 종종 들러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곤 했던 민은, 그곳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게 바로 수호다. 


수호는 가구점 주인의 아들이다. 가구점이 망하고 빚더미에 앉은 아버지가 집에만 있게 된 이후로 수호네 가족은 전부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라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던 중, 수호는 우연히 습득한 신분증을 이용해 쇼핑센터 옥상에서 운영하는 놀이동산의 피에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다 혼자서 놀이동산을 운영하고 있다시피 한 실장 연주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위조한 신분과 가난한 처지 때문에 좀처럼 다가가지 못한다. 


조해진 작가의 <여름이 지나가다>의 초판은 2015년에 나왔고, 내가 읽은 버전은 2022년에 나온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리뉴얼 판이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에는 인물들이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에 점유하는 설정이 자주 나온다. <단순한 진심>에선 나나가 서영의 방을 빌려서 살고, <완벽한 생애>에선 시징이 윤주의 방을 빌려서 산다. <여름이 지나가다>에선 민이 수호의 방, 은 아니지만 가족과 관련이 있는 공간에 몰래 머문다. 


이에 대해 조해진 작가는 "도시에 살면서 느꼈던 거주지의 불안함"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쭉 따라 읽어온 내가 보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설 속 인물이 내 방보다 남의 방을 더 편하게 느끼는 마음은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고, 남의 방에 살면서 방의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 보고 확인하는 과정은 타인이 입장이 되어 봐야 비로소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실제로 소설에서 민은 폐업한 가구점에서 지내며 자신의 과거를 천천히 돌아본다. 파혼 후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수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마음을 멈추고 자신의 현재를 살핀다. 가난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미래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추한다. 결국 각자의 잘못이 드러나고 또 다시 모든 걸 잃을 위기에 놓였을 때, 이들은 두려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속 시원해 한다. 마침내 한 시절이 끝났다는 듯이. 


민과 수호에게 폐업한 가구점에서 보낸 그 시절은 누구에게 쉽게 말할 수도 없고 공감을 얻을 수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각자의 삶에서 가장 고독하고 비루했던 시절에 모든 걸 내려놓고 자기 자신마저 잊은 채 온전히 쉴 수 있었던 시간과 공간은 더없이 소중하고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런 시간이 나에게는 언제였는지, 그런 공간이 나에게는 어디였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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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 파티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왕수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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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 작가인 올리버 부인(아리아드네 올리버)는 그리스 여행에서 만난 친구 주디스 버틀러의 집에 머무는 중이다. 마침 핼러윈 때라서 마을 아이들을 위한 핼러윈 파티가 열리고, 올리버 부인은 주디스와 함께 파티 준비를 거들게 된다. 올리버 부인이 유명한 추리 소설 작가라는 걸 안 사람들이 올리버 부인에게 말을 거는데, 그 중 한 명인 조이스라는 소녀가 신경 쓰이는 말을 한다. 몇 년 전에 자신이 살인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조이스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허풍 떨지 말라며 조이스를 혼낸다. 그도 그럴 게 조이스는 전부터 거짓말쟁이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올리버 부인도 마을 사람들을 따라 조이스의 말을 흘려 듣는다. 그러나 그 날 밤 핼러윈 파티 도중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올리버 부인은 조이스를 무시한 것을 후회한다. 올리버 부인은 곧바로 오랜 친구인 푸아로를 부르고, 푸아로는 올리버 부인의 부탁에 따라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핼러윈 파티>는 올해 9월 공개된 영화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의 원작이라고 해서 읽어 보았다. <핼러윈 파티>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 <오리엔트 특급 열차>,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에 비해 덜 알려진 작품인데,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재미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최근에 일어난 한 건의 살인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던 여러 건의 살인 사건과 연결되는 방식이 복잡하면서도 세련되어 그 자체로 흥미롭다. 


푸아로는 조사를 통해 이 마을에 수상한 죽음이 여러 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단한 부자였던 루엘린 스마이스 부인이 갑자기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외국인 오페어가 도망 간 사건, 16세 점원 샬럿 벤필드가 남자 둘에게 살해당한 사건, 여교사 재닛 화이트가 목졸려 죽은 사건, 법률 사무소 서기였던 레슬리 페리어가 불륜을 저지르고 살해당한 사건 등이다. 살인 사건 한 건을 조사하러 온 푸아로는 졸지에 네 건을 더 조사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마을 사람들은 조이스의 말은 전부 거짓이라고, 그 애의 말만 믿고 옛날 일을 들추는 건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 하지만 푸아로는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의문점을 차례로 해소하고 결국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 푸아로의 추리 과정 자체도 재미있지만,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의 사연도 소설 여러 편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흥미롭다. 1969년작인데 어른들이 '요즘 애들 문제야'라며 혀를 끌끌 차는 모습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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