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뭐 먹지? - 권여선 음식 산문집
권여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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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 작가의 첫 산문집인데 주제가 음식이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꼭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안녕 주정뱅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내기도 했다) 권여선 작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술인데, 그래서인지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책 제목이 원래는 <오늘 안주 뭐 먹지?>인데 '안주'가 생략된 거라며 어떤 음식이 나오든 곁들여 먹는 술을 떠올려 달라고 한다. (이 정도면 후속편으로 <오늘 뭐 마시지?>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ㅎㅎㅎ) 


이제는 술도 잘 마시고 술과 함께 먹는 음식 모두를 사랑하는 저자이지만, 어릴 때는 편식이 아주 심한 편이었다. 고기 특유의 냄새를 못 참아서 순대는 물론이고 만두나 고깃국물도 못 먹었다. 그랬던 저자가 대학에 입학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식성이 급격히 변했다. 고기는 물론이고 순대나 만두는 없어서 못 먹는다. 반대로 어릴 때 저자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부단히 애썼던 어머니는 종교적인 이유로 엄격한 채식을 하고 계시다니 모녀간의 역전이 놀랍다. 


저자는 음식을 잘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잘 해먹기도 한다. "오늘 뭐 먹지?"라는 즐거운 고민이 "오늘 뭐 해 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부담이 되지만, 잘 해먹는 사람 치고 잘 먹지 않는 사람도 없다. 저자는 주로 한식을 즐겨 해먹고, 젓갈도 직접 담가 먹는다. 봄에는 제철 바지락을 사서 조개젓을 만들고, 가을에는 천연 생굴을 사다가 어리굴젓을 만든다. 낙지젓, 오징어젓도 직접 만들고, 앞으로 명란젓, 멸치젓, 갈치속젓에도 도전할 거라고. 이름만 들어도 군침이 돈다. 


음식에 얽힌 추억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이 책에도 저자의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아버지 월급날이 되면 어머니가 식구 수에 맞춰서 사 왔던 고로케 맛도 궁금하고, 어디서도 맛보기 힘들다는 마른 오징어튀김 맛도 궁금하다. 단식의 경험도 나온다. 단식을 하고 나면 미음조차 꿀맛이고, 간장만 먹고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맛이 새로워진다니 이 또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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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국에서의 일 년
이창래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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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지금의 미국을 세우고 만들었으며, 지금도 많은 외국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며 미국으로 간다. 미국은 이주민들의 나라이기도 하다. 고향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업이나 취업, 결혼 등을 계기로 원래 살던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며 산다. 그만큼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높기 때문에 주변인들과 나를 구분하는 척도로서 인종, 국적, 종교, 성적 지향 등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재미작가 이창래의 신작 장편 소설 <타국에서의 일 년>의 주인공 틸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 너무나 평범하고 특별하지 않아서 스스로 비범하고 특별한 정체성을 만드는 인물이다. 틸러는 한국인의 피가 조금 섞였으나 겉보기에는 누가 봐도 백인인 20대 청년이다. 명문 대학교가 있는 던바라는 도시에서 자랐고, 대기업 관리직인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싱글 대디인 아버지와의 관계는 원만했다. 친구들은 부유하고 유쾌했다. 불만스러운 구석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틸러의 삶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으나 무엇 하나 틸러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의 사랑도 친구들과의 우정도 피상적이었다. 그러다 틸러는 지인의 대타로 캐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자수성가한 아시아계 사업가 퐁을 만난다. 틸러는 퐁의 불안정하지만 모험적이고 야망이 있는 면모에 끌리고, 퐁 역시 틸러를 좋게 보고 같이 외국에 가자고 한다. 그렇게 틸러는 일 년을 퐁과 함께 하와이, 마카오, 선전에서 보내고, 여행의 끝에서 밸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틸러는 한참 연상인 밸과 사귀게 되고, 밸의 집에서 밸의 아들인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살게 된다. 틸러에게 퐁과 지내는 날들이 모험과 광기의 시간이었다면, 밸과 지내는 날들은 은둔과 단련의 시간이다. 밸은 남편의 범죄를 연방 정부에 고발한 후 목격자 보호를 받고 있는 중이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빅터 주니어가 어린데도 요리 솜씨가 수준급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지역의 유명 인사가 되고, 밸의 집이 빅터 주니어의 음식을 맛보러 온 손님들로 붐빈다. 틸러는 이들 중에 위험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커진다. 


틸러는 밸의 젊은 연인일 뿐 그들 모자에 대한 아무런 의무나 책임이 없으므로 그들이 위험에 처하든 말든 무시하고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떠나지 않고 더욱 열렬히 밸과 빅터 주니어를 붙잡는다. 소설 초반의 무기력한 틸러에게선 상상하기 힘든 변화다. 익숙한 곳을 떠나서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봐야 그들과 내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있고 비로소 진정한 나를 알 수 있다는, 떠남과 만남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소설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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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 세계적 지성이 들려주는 모험과 발견의 철학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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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가을의 기본자세는 수직이라는 팟캐스트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의 두 작가님들(김하나, 황선우)의 말씀에 따라 주말마다 열심히 돌아다니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서울숲에 다녀왔는데, 서울 사람 다 여기 왔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그만큼 나무도 많고 새도 많고 호수에 물도 많고... 오랜만에 힐링하는 시간이었다.


집순이답지 않게 열심히 나돌아다니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책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이다. 이 책을 쓴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르도노상과 메디치상을 수상했고,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인정받는 공쿠르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인 프랑스 대표 석학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철학, 문학, 사회학적 지식과 통찰을 기반으로 우리가 왜 집에만 있지 말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실내에 머무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야외로 나가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철학계에서도 오랫동안 논쟁이 있어 왔다. 플라톤은 "가장 용감하고 대담한 자들만이 동굴의 환상에서 눈을 돌려 별이 빛나는 밤하늘, 태양, 천체들을 감히 쳐다본다."라고 말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동굴 밖 하늘이야말로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선과 아름다움의 세계라고 했다. 반면 이마누엘 칸트는 "집은 허무, 어둠, 모호한 근원의 공포를 막아주는 유일한 방벽이다."라고 했다. 


랑스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실내 생활을 찬양한 작품으로는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꼽을 수 있다. 드 메스트르는 42일간의 가택 연금형을 받고 자신의 집에만 머무르며 집 안의 가구, 책, 옷 등에 관한 책을 썼다. 그의 책은 영웅의 정복이나 순례 이야기가 대부분이던 당시 흐름과 정반대였으나 큰 성공을 거뒀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도 자기 방에서 영감을 받아 <사형수 최후의 날>을 썼다. 


사실 실내에 머무르든 야외로 나가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현대인들이 야외 활동보다 실내 활동을 선호하는 경향이 점점 더 커지고 있고, 팬데믹이 이를 강화했다는 것이다. 20세기가 성장과 확장을 숭배하고 과도한 경쟁이 팽배한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그에 대한 반동으로 정체와 축소를 추구하고 패배주의와 극단적 비관론이 넘쳐나는 시대다. 팬데믹은 역경에 맞서기를 꺼리고 모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핑계가 돼주었다. 


야외 활동에 따른 비용이 증가하면서 "진짜 활동다운 활동은 특권층의 호사가 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부자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은 집에서 OTT로 철 지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 먹방을 보면서 가공식품을 먹는다. 서핑이나 스키 같은 운동을 실제로 하면 많은 돈이 들지만 실내에서 온라인 게임으로 즐기면 돈도 절약되고 다칠 위험도 줄어든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현실에서의 사교 활동이 덜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현상도 언급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SNS에 자신의 실물보다 훨씬 잘 나온 사진을 올린다. 그런 사진에 익숙해질수록 실제 사람은 더욱 못생기고 불완전하고 흠 많은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구독하는 SNS, 내가 속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나를 닮은 타자들 밖에 없다. 그런 모임에 친숙해질수록 나와 다른 사상과 취향을 가진 사람을 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일부러라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이유는 도전과 모험이야말로 "삶이 제공하는 최선을 온전히 누리는" 행위이고 "우리의 두려움이 실상은 망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진짜로 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생장에도 바람이 필요하듯이 인간의 성장과 성숙에도 바람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메시지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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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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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은 얼마 전 고등학교 앞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일을 시작했다. 학원 강사로 일할 때보다 월급은 적지만 주인 부부가 친절하고 손님들도 다정해 일하는 마음이 훨씬 편하다. 지영은 엄마, 세상을 떠난 언니가 남긴 조카딸 송이와 함께 산다. 남들이 보기에는 가난하고 불완전해 보일지 몰라도 지영은 지금이 좋다. 좋아하는 작가의 낭독회에 가고, 휴일엔 조카와 서점에서 책을 사고, 이모가 만든 떡볶이가 제일 맛있다는 칭찬을 듣는 삶이 행복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이주란 작가의 소설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읽은 책이다. 일단 표제작 <한 사람을 위한 마음>부터가 내용이 잔잔하고 편안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지영의 상황은 그저 좋다고만 볼 수 없다. 언니가 조카를 남기고 죽었고, 애인과 헤어졌고, 직장을 그만뒀고, 세 식구의 생계 부양자는 오로지 자신이다. 그러나 지영은 상실에 아파하기보다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눌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고, 가난에 주눅 들기보다 적은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음에 행복해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인물이 은근히 드물고 귀하다. 


이 소설집은 전반부에 비교적 평이하게 읽히는 단편들이 실려 있고 후반부에 은근히 독하고 어떻게 보면 어두운 내용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넌 쉽게 말했지만>,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일상생활>은 일기처럼 읽힌다. 출근하기 싫다, 퇴사하고 싶다, 연애가 안 풀린다, 가족이 말썽이다 등 어떻게 보면 SNS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숱하게 보는 넋두리와도 비슷하다. 그 때마다 맛있는 것 먹으면 기분이 풀리고 한동안은 버틸 만해진다는 것도 많이 본 흐름이다 ㅎㅎ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에는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마찬가지로 자매 중 한쪽이 먼저 사망한 설정이 나온다. 남자친구를 따라 벌초를 하러 간 이야기를 그린 <준과 나의 여름>과 빵집이 배경인 <그냥, 수연>도 잔잔한 분위기인데, <나 어떡해>와 <H에게>는 내용이 무겁다. 앞의 단편들이 상실이나 충격 뒤에 오는 애도와 회복을 그렸다면, 뒤의 두 단편은 상실과 충격의 시기를 그려서 상대적으로 더 어둡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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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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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인 '나'는 어느 날 집에서 아버지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최초 발견자라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 금방 풀려났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상처와 고통으로부터는 어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풀려나지 못했다. 이후 소설가가 된 '나'는 오랜만에 고향 집을 찾는다. 법주사 근처라서 한때는 관광객이 많았던 동네인데 오랜만에 가보니 스산하기 그지 없다. 고향 집도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탓인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다. 처음엔 '왜' 써야 하는지 몰라서 못 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라서 못 쓴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그 아버지가 깊은 밤에 농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죽어가는 아버지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나라면, 내가 너무 일찍 발견해서 아버지의 고통을 연장한 것이 죄스럽다고 느낀다면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자신의 기억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한정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만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환갑을 맞은 어머니와 오키나와로 여행을 간 김에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하지만 묻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과의 대화는 변죽만 울리는 느낌이다. 결국 오로지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해 글을 써야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지 않다. 


소설 제목에 유서라는 단어가 있어서 유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유서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그날 마침 집으로 찾아온 친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는지, 가족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길이 없다. 아버지가 유서를 굳이 달력 뒤에 쓴 이유 또한 불명확하다. 이것은 누구라도 보기를 바란 걸까, 그러지 않기를 바란 걸까. 


소설 속 '나'의 이름이 민병훈이고 직업도 소설가라서 설마 진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가 했는데, 책소개를 보니 자전적인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소설이라는 것이 달력 뒤에 쓴 유서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을 쓰든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상처와 고통이 비쳐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달력은 인쇄된 날짜가 지나면 넘겨야 하는데 유서가 쓰인 달력은 함부로 넘길 수 없다는 점도 그 시절에 멈춰 있는 저자의 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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