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뒤에 쓴 유서 오늘의 젊은 작가 41
민병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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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인 '나'는 어느 날 집에서 아버지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최초 발견자라는 이유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고 금방 풀려났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상처와 고통으로부터는 어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풀려나지 못했다. 이후 소설가가 된 '나'는 오랜만에 고향 집을 찾는다. 법주사 근처라서 한때는 관광객이 많았던 동네인데 오랜만에 가보니 스산하기 그지 없다. 고향 집도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탓인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하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글이 써지지 않는다. 처음엔 '왜' 써야 하는지 몰라서 못 쓴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라서 못 쓴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심지어 그 아버지가 깊은 밤에 농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죽어가는 아버지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나라면, 내가 너무 일찍 발견해서 아버지의 고통을 연장한 것이 죄스럽다고 느낀다면 말이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쓰기에는 자신의 기억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한정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만 말을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환갑을 맞은 어머니와 오키나와로 여행을 간 김에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하지만 묻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과의 대화는 변죽만 울리는 느낌이다. 결국 오로지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해 글을 써야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지 않다. 


소설 제목에 유서라는 단어가 있어서 유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유서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그날 마침 집으로 찾아온 친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는지, 가족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길이 없다. 아버지가 유서를 굳이 달력 뒤에 쓴 이유 또한 불명확하다. 이것은 누구라도 보기를 바란 걸까, 그러지 않기를 바란 걸까. 


소설 속 '나'의 이름이 민병훈이고 직업도 소설가라서 설마 진짜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가 했는데, 책소개를 보니 자전적인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서 소설이라는 것이 달력 뒤에 쓴 유서 같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을 쓰든 아버지의 죽음이 남긴 상처와 고통이 비쳐 보인다는 점에서 말이다. 달력은 인쇄된 날짜가 지나면 넘겨야 하는데 유서가 쓰인 달력은 함부로 넘길 수 없다는 점도 그 시절에 멈춰 있는 저자의 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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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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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일하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삼십 대 청년 인수는 어느 날 우연히 자해공갈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가출 청소년 이호를 보고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한다. 눈빛이 거칠고 태도가 불손한 이호를 보면서 인수는 12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은 직업도 있고 집도 있는 그가 한때는 이호처럼 거리를 떠돌며 생활하는 가출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12년 전의 어느 날. 인수는 엄마와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거리로 나온다. 인수는 PC방을 전전하고 무료 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자신처럼 집이 없는 또래 청소년인 성연과 경우를 만난다. 성연과 경우는 여러모로 정반대다. 성연은 겉모습부터 불량하고 태도도 위압적인 반면, 경우는 가출 청소년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외모가 단정하고 태도도 예의 바르다. 


인수는 성연처럼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친 말투와 강압적인 태도에는 거리감을 느낀다. 경우처럼 남에게 피해를 안 주고 배려하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무법천지나 다름 없는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에서 경우 같은 모범생으로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체념한다. 


같은 가출 청소년이라도 성향은 정반대인 성연, 경우와 어울리던 인수는 가출한 아이들의 공동체인 이른바 '가출팸'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화장실이나 공사 중인 건물이 아닌 반지하 빌라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좋았는데, 식구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해졌고 이로 인해 점점 더 불법적이고 위험한 일에 관여하게 된다. 


백온유 작가는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인수와 성연, 경우처럼 청소년기에 가출한 경험이 있거나 소년원에 가본 경험이 있는 인터뷰이들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에 묘사된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가 무척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런 아이들이 지금도 거리에 있을 것 같고, 그동안 나는 이런 아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봤던가 돌아보게 한다.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를 그린 소설이지만, 누구나 할 법한 보편적인 삶의 고민을 다룬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연이 악을 행한다면 경우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인수는 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악을 행하는 성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꼿꼿하게 선을 행하는 경우의 방식도 동경한다. 완벽한 악도 완벽한 선도 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우물쭈물하는 인수의 모습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인수는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주고 싶었던 사랑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 이호를 만났고, 이호에게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과 주고 싶었던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인수가 경우에게 배운 사랑이고 삶의 자세다. 인수처럼 경우를 기억하고 경우의 삶을 따르는 사람이 있는 한, 경우는 계속 이 세계에 '있는' 게 아닐까. 경우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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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지 마라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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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작가의 <눈감지 마라>는 총 49편의 짧은 소설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집이다. 주인공인 박정용과 전진만은 지방대 졸업 후 취업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사회로 나오기 전에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부터 떠안은 이들은 월세 30만 원짜리 방에 둘이 살면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들은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편의점은 기본이고 음식점, 출장 뷔페, 택배 상하차, 고속도로 휴게소 등 장소와 날짜를 안 가리고 돈 주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 


이렇게 보면 노동과 생계 걱정으로 얼룩진 어두운 이야기일 것 같지만, 의외로 코믹하고 유머가 많다. 일단 정용과 진만의 캐릭터가 재미있다. 정용은 성실하고 정의감이 높은 만큼 분노도 많은 반면, 진만은 정용에 비해 헐랭하지만 그만큼 정도 많고 실수도 많다. 그런 두 사람이 집에서 일터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며 생활하는 모습이 유쾌하고 푸근하다. 내복보다 싸고 따뜻하다며 성인 남자 둘이 집에서 팬티 스타킹을 입고 생활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ㅋㅋㅋ 


정용과 진만이 일상에서 또는 일터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들도 하나 같이 개성 있고 재미있다. 특히 나는 이들의 옆방에 사는 아저씨가 웃겼다. 어떤 사정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혼자서 사는 이 아저씨는 딸과 통화를 할 때마다 어떻게든 딸을 웃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통화 끝에 항상 회심의 유머를 날린다. 정용과 진만은 처음엔 아재 개그라며 무시하다 점점 어이가 없어서 웃고 나중에는 진심으로 웃겨서 웃는다 ㅋㅋㅋ 


가난하고 힘들어도 열심히 사는 정용과 진만이 결말에선 형편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닌 점도 인상적이었다. 해피엔딩은 할리우드 영화에나 있는 것이고 현실에는 없다는 비관 또는 체념일까. 실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자신의 젊음을 희생하고 있고 심하게는 신체와 목숨을 잃고 있다. 이런 현실을 그저 소설의 글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적극적으로 언급하는 소설이라서 더욱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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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곳에서
박선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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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을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누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나'는 누나에게 곧 손님이 온다는 말을 듣는다. 손님은 누나가 전부터 알고 지낸 오픈리 게이로, 애인과 헤어진 후 생업을 접고 외국을 여행하다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누나는 손님에게 잘해주라고 신신당부하지만 '나'는 왠지 그 남자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첫 만남부터 어색한 건 물론이고, 친동생인 자신보다 누나한테 더 싹싹하게 구는 그의 태도가 점점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다 둘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해주던 누나가 일 때문에 집을 떠나게 되고, '나'는 그 남자와 단둘이 집에 남아 긴 밤을 보내게 된다. 어색함을 달래려고 열심히 들이부은 술기운 탓이었을까. 시종일관 싹싹하고 자못 명랑해 보이기까지 했던 남자가 '나'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울고 싶지만 울지 않고 잠든 '나'는 이튿날 남자가 떠난 걸 알게 된다. 울고 싶을 때 우는 남자와 울지 않는 남자의 차이는 뭘까. 울지 않는 쪽이 사실은 더 울고 싶은 건 아닐까. 


박선우의 소설집 <우리는 같은 곳에서>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 첫 번째로 실린 <밤의 물고기들>이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누나의 손님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사건이랄 게 없는 소설이다. 그런데도 인상적이었던 건 화자인 '나'가 드러낸 감정보다 드러내지 않은 감정이 더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내심 꺼렸던 그 남자를 직접 만난 후 그 남자가 예상보다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뿐이다. 


이어지는 단편 <우리는 같은 곳에서>도 어떻게 보면 인물들의 관계가 비슷하다. '나'의 아내는 대학교 때 잠깐 사귀었고 지금도 계절마다 한 번은 만나는 '나'와 영지의 사이를 의심한다. 그러다 우연히 영지를 만나 영지와 '나'가 자신이 의심하는 사이가 아니란 걸 알게 되지만 그뿐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좋은 사이가 되는 건 별개라는 걸 우리는 언제부터 알게 되는 걸까. 그런 한계는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소설집을 읽는 내내 공감이 되면서도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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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만세 매일과 영원 6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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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날 때부터 이야기꾼인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글을 쓰면 소설이 되고 명작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십 년 이상 한국 문학, 외국 문학 가리지 않고 수많은 소설을 꾸준히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타고난 이야기꾼도 분명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 어쩌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서 -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정용준 작가님은 후자에 속하지 않나 싶다. 


2022년 민음사 '매일과 영원' 시리즈로 출간된 <소설 만세>는 2009년 작품 활동을 시작해 <프롬 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선릉 산책> 등 다수의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 정용준의 첫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해온 노력과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 중견 소설가로서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소설에 대한 애정과 각오, 의지 등이 담겨 있다. 


저자는 어릴 때 말더듬증이 있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주인공 소년처럼 말더듬증 때문에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꺼렸고, 자연히 남이 말하는 걸 보거나 자기처럼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러다 소설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소설을 만나 더 나은 입술을 얻었다." 20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오직 소설을 쓰기 위해 2년 동안 인터넷이 되지 않는 방에 칩거할 정도로 지독하게 썼다. 


저자에게 소설은 "단 한 사람의 편에 서서 그를 설명하고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이지만, 허구인 그 이야기도 누군가에게는 과거와 미래의 어떤 날 어떤 순간의 현실이고 실제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 놓여 있어도 계속 살아갈 여지를 남긴다. 소설은 끝나도 인물에게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작한 허구의 이야기 속 인물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는 마음은, 저자가 그동안 읽은 소설과 저자를 가르친 스승들에게서 배웠다. 글은 작가가 쓰는 것인 동시에 독자가 읽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소설가로서 충분히 숙련된 지금도 꾸준히 다른 책을 읽고 공부한다. 배우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한승원, 나희덕, 이장욱, 이승우 등 좋은 스승, 선배를 모범으로 삼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어떤 소설가들은 자신을 '소설가 000'라고 소개하는 대신 '소설 쓰는 000'이라고 소개한다. 이는 겸양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한때 소설을 썼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소설을 쓰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수식이기도 하다. 저자 또한 자신을 '소설 쓰는 정용준'으로 소개하고, 이 소개 문구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이런 마음, 이런 태도로 살아왔고 써와서 그의 소설이 그토록 좋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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