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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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뒤늦게 영화 <영웅>을 보고 안중근의 생애가 궁금해졌다. 그 전까지 나는 안중근을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독립 운동가로만 알았는데, <영웅>에서 보니 그는 독립 운동가인 동시에 독실한 천주교인이었고 한 집안의 맏아들이었다. 특히 천주교인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살해하고 십계명(살인하지 말라)을 어긴다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거사 직전까지 상당했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안중근에 대한 책을 읽고 싶어져서 찾다가 이 책이 떠올라서 읽어보았다. 


<영웅>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안중근이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 사이에서 갈등한 것으로 그린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영웅>의 안중근은 독립운동가로서 이토를 살해할지 아니면 기독교인으로서 십계명을 지킬지를 두고 내적인 갈등을 하는 반면, <하얼빈>의 안중근은 독립운동가로서 일본 정부+조선 왕실과 대립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천주교 사제들과 갈등하는 식으로 외적인 갈등을 치른다. 


즉, 이 소설에서 안중근은 일본 정부와 대립하는 동시에 1) 일본 정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조선 왕실과 대립하고 2)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고 하지만 사실상 일본 정부와 결탁한 천주교 사제들과 대립한다. 일본 정부는 그렇다 쳐도 조선 왕실과 천주교 사제들은 그들의 백성이자 신도인 안중근을 마땅히 보호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을 버린다(갈등하다 버리는 것도 아니고 안중근의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로 버린다). 


<영웅>을 봤을 때는 안중근의 내적인 갈등에 흥미를 느꼈는데, <하얼빈>을 읽으니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당시 조선 왕실과 천주교 사제들(을 포함한 다른 종교인들)이 어떠한 태도를 보였는지 궁금하다. 친일파 하면 보통 이완용을 비롯한, 한일강제병합 전후에 매국 행위를 하고 이를 통해 엄청난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본 사람들을 떠올리는데, 이 소설을 읽으니 그들 외에도 다양한 부류의 친일파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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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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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가의 왕복서간을 책으로 엮은 '총총문고' 시리즈를 좋아한다. 처음엔 편지글이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이 시리즈를 꾸준히 따라 읽다 보니 편지 쓰는 사람들의 관계나 각자의 캐릭터에 따라서 글의 느낌이 아주 달랐다(대표적인 예가 이슬아x남궁인 편). 그래서 작년에 황선우x김혼비 편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엔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글 잘 쓰는 건 당연하고, 두 분 모두 단어나 문장을 맛깔나고 재치 있게 쓰는 분들이라서 (읽으면서) 엄청 웃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랬다. 


특히 김혼비 작가님은 시트콤 급의 일상을 사는 분 같았다. 현금 없이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사 먹은 이야기도 그랬고,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기 싫은데 양보하고 싶을 때(무슨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책을 읽어 보면 안다) 쓰는 테크닉에 관한 이야기도 그랬고, 친구와 경칩맞이 개구리 뛰기 한 이야기도 그랬다. 황선우 작가님 에피소드도 재미있는 게 많았는데 여둘톡 애청자라서 아주 새로운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전국노래자랑이나 망탁클(망원 탁구 클럽), 논어 이야기처럼 방송에서 언급했지만 차마 다 풀지 못한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 편지 교환을 시작할 때 작가님들은 서로를 웃게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셨고, 실제로 웃기는 이야기가 많지만, 반대로 울리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김혼비 작가님이 쓰신 당근마켓 거래 이야기의 결말을 읽고 한동안 얼떨떨했다. 작가님처럼 나도 당연히 사기 사건인 줄 알고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이야기를 읽었기에 충격이 컸다. 이야기의 전개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과 비슷한데, <별 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은 허구이지만 책의 이야기는 실제라는 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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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산
미즈무라 미나에 지음, 송태욱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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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유산>은 김영하 북클럽 7월 선정 도서라서 읽게 된 책이다. 김영하 북클럽을 통해 만난 책들이 대체로 좋았는데 이 책도 그랬다. 일본 소설(특히 여성 작가 소설)을 나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미즈무라 미나에의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한국에도 뛰어난 여성 작가들이 많지만 중년 또는 노년에 이른 여성의 삶의 문제(노화와 죽음, 투병과 간병, 이혼과 사별 등)에 있어서는 일본 여성 작가의 글에서 참고할 점이 많다고 느꼈다. 


미쓰키는 프랑스 유학 시절 만난 남편과 삼십 년 가까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오십 대 여성이다. 유학으로 갈고 닦은 외국어 실력을 살려 대학 강의와 번역 일을 하고 있고, 슬하에 자녀는 없다. 연말의 어느 날, 미쓰키는 실버타운에 모신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는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쓰키는 남편이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자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쓰키에게 어머니는 경애의 대상이 결코 아닌데, 그도 그럴 것이 미쓰키가 어릴 때 어머니는 언니인 나쓰키와 여동생인 미쓰키를 차별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간병을 미쓰키에게 맡긴 것으로 모자라 외도까지 했다. 


이후 미쓰키는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한편으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열심히 돌아본다. 미쓰키는 전쟁 직후 일본 전역이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에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남편의 외도를 알기 전까지는) 남편과의 관계도 원만했고, 대학 강사와 번역가로 일하는 삶에도 만족했다. 하지만 삶의 끝을 향해 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 진정으로 만족하는지 되묻는다. 나는 정말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게 맞나?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 유학을 그만둔 것에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게 맞나? 


이 소설은 '신문소설(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신문에 연재하기 위하여 쓰인 장편소설 형식)'이기도 하다. 다양한 독자층을 겨냥한 작품인 만큼 문장이 쉽고 내용이 현실적이며 전개가 속도감 있다. 한국에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잘 알려진 일본의 신파 소설 <금색야차>를 비롯해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일본의 문학 작품과 <이방인>, <마담 보바리> 등 서양의 문학 작품이 여러 번 언급되는 점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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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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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에 출간된 박솔뫼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이 소설집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각 단편(?)의 등장 인물과 내용이 겹쳐서 연작 소설인가 했다가 나중에야 장편 소설인 걸 알았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는데, 처음에는 연결점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조금씩 겹치는 방식으로 소설이 전개되어 그랬던 것 같다. 


부산의 구도심에 관심이 많은 '나(수미)'는 아파트 매물을 찾는 척하며 남포동 일대의 오래되고 특이한 건물들을 구경하다가 충동적으로 월세 계약을 한다. 그 후로 '나'는 평소에는 서울에서 일하며 지내다가 며칠 정도 휴가를 내거나 연휴를 보낼 수 있게 되면 부산 집으로 쉬러 가는 식으로 생활한다. 처음에는 주로 혼자 놀다가 나중에는 집주인, 예전 지인, 동네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 등등과 어울린다. 이런 이야기가 소설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나'의 과거, 부산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수미는 어릴 때 교도소에서 출소한 '윤미 언니'와 한동안 같이 살았다. 매일같이 집에서 잠만 자던 언니가 어느 날 친구를 만나러 광주로 가야 한다고 했고, 수미가 윤미 언니를 따라 가게 되었다. 당시 수미는 너무나 어려서 언니가 왜 전남도청을 아련한 눈길로 바라보는지, 언니와 함께 광주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되는지 몰랐다. 나중에 수미는 언니를 따라서 부산에서 광주로 다녀왔던 일이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19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을 연결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만 보면 무거운 내용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주된 내용은 '나'의 산책이고, 산책을 하다가 혼자서 뭘 먹었다거나 누구를 만나서 뭘 먹었다거나 먹을거리를 사서 집에 가서 먹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밥보다는 면이나 빵, 떡 같은 탄수화물 함량이 높은 음식이 자주 나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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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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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에 출간된 문지혁 작가의 장편 소설 <중급 한국어>의 전편이다. 나는 이 책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중급 한국어>가 나왔을 때 <초급 한국어>도 있다는 걸 알고 뒤늦게 사서 읽었다. 작가 스스로 자전적 소설이라고 밝힌 데다가 주인공 이름부터 문지혁인데, 그렇다고 해서 에세이 느낌은 전혀 아니고 제대로 소설이다. 

주인공 문지혁은 외고-명문대 영문과 졸업 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고 뉴욕의 한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지혁은 소설가가 자신의 본업이고 한국어 강사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한국어 강사 일을 해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구개음화 같은 한국어 발음 규칙부터 '한 시 일 분'은 왜 '한(우리말) 시 일(한자) 분'인지, '삼촌이 좋아'와 '삼촌은 좋아'가 왜 다른지 등 한국인도 설명하기 힘든 한국어의 기초를 외국인이 알기 쉽게, 심지어 외국어로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혁은 열심히 수업에 매진하는 한편, 이방인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하고 위태로운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의식한다. 심지어 지혁은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진 직후이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의 간병을 여동생에게 맡긴 상태다. 기왕 외국에 왔으니 뭐라도 되어서 귀국하고 싶은 욕망과 무엇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 사이에서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무엇 하나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인데도 몰입이 잘 되었고, 얼른 <중급 한국어>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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