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들 -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오찬호 지음 / 북트리거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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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잘 보이지 않는 일들. 자세히 보고, 자신의 관점만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일들. 제 생각과 분명히 다르지만, 왜 다른지 고민해 봐야 하는 일들.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그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 자신의 관점만을 고수한다. 확증편향이라는 말이 잘 적용되는 일들이 많다. 자기에게 유리한 면들만 보고, 그것들로 자신의 관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모두 잘못된 주장이고, 고려할 가치가 없는 편협한 주장일 뿐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관점을 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는 관점이나, 이것도 그르고, 저것도 그르다는 양비론적 관점을 택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들에는 분명 옳고 그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일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힘들다면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살피고, 원인을 파악하여 원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는, 저자의 관점을 빌리자면 잘못된 주장을 하는 집단들이 존재하는 일들 열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다.


성소수자, 악성 댓글, 폭력(운동선수), 비정규직(노동자 사고), 빈곤(복지), 기업의 비윤리성(가습기 살균제), 코로나19(재난), 성착취, 낙태죄, 세월호, 대통령 탄핵, 입시 문제(공정)


다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다. 사실 성소수자가 논란이 될 이유는 없다. 성적 취향이 어찌 논란이 된단 말인가? 그럼에도 아직도 성소수자는 차별을 받고 있다.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밝히기도 어렵다.


소수의 성소수자들이 방송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많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극소수에 해당할 뿐이다. 고 변희수 하사는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을 당해야 했다. 아직도 퀴어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단지 반대가 아니라 혐오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여기에 안심 화장실 문제... 모든 성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자신들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악성 댓글이 단지 댓글 창만 없앤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사회가 바뀌어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운동선수들의 폭력 문제나, 입시의 공정성, 비정규직 노동 환경(단지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함을, 노동자들의 사고는 바로 이런 노동환경의 개선이 있어야 함을, 사회가 국가가 적극적으로 노동환경의 개선에 개입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의 개선,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데 선별 복지냐 보편 복지냐에 대한 접근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까지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의 사안은 그 사안으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회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만 해도 그렇다. 피해자는 있는데, 그 피해를 온전히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 몇 년 전 일을...  최근에 국가에서 가습기 피해를 인정했다고 하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던가. 또한 아직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피해를 보상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기업이 이윤을 추구할 자유를 무한히 허용했다가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세월호 역시 가습기 살균제와 마찬가지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온갖 개조를 하고, 규제를 무마하기 위해 벌인 로비, 이런 것들로 인해 벌어진 사고... 국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인정하기 걸린 오랜 시간처럼 세월호 역시 국가가 책임지고 진실을 규명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런 일들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는데, 이는 한 개인을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즉, 대통령이 지닌 책무가 무엇인지, 대통령은 한없는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헌법에 부여된 국민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자리임을, 그런 일을 하지 못하는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격이 없음을 잘 보여준 일이라고 한다.


여기에 낙태나 성착취는 여성을 어떻게 보는가? 성착취야 착취라는 말에서 이미 잘못임을, 범법 행위임을 알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던 사례들이 있었음을, 그것은 바로 성착취에 대한 과거의 인식에 머물러 있었음을 이야기하면서, 낙태에 관한 관점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낙태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고 성문란 또는 방종으로 연결시키는 관점들이 있음을... 낙태죄가 법적으로 이미 폐지가 되었음에도 이런 관점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이처럼 이 책은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면서, 저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사안들에 대해서 이런 관점과 저런 관점이 있고, 또한 배경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단지 하나의 관점에 갇히지 말고,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한 주장이 득세를 하는 세상인데, 그 강한 주장이 적절한 근거를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근거를 들어 그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다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어려운 길일지라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 기억해야 한다. 유효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다.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이 사회는 사람이 만든 거고 그걸 바꾸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주하기 싫어도 마주해야 변화가 가능하다.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 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 (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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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악한 말들이 나돌아 다니는 이 시대. 겉으로 드러난 말들이 이리도 험악한데,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최근에 '사형'이란 말을 많이도 들었다.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 사형에 처해도 마땅한 존재. 과연 사형에 처해도 마땅한 존재가 있을까?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 한때 판사였다는 사람이 사형 운운하는 장면을 보는 일은 참 불편하다.


  특히 사법살인이라고, 나중에 무죄가 된 판결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 이 나라에서, 자신이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같은 판사 출신이라면 그러한 판결에 대해서

끄러워하고, 또 '사형제'에 대해서는 많은 성찰을 했어야 하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역사책도 좋지만 김원일이 쓴 소설 [푸른 혼]을 읽으면 더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아니 '사형'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정인 시집을 읽다가 말이 아닌 침묵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또는 말과 말 사이에 얼마나 깊은 심연이 있는지, 그래서 말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함의를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생각하게 됐다.


많은 시들이 있는데, 두 시를 연결지어, 지금 시국을 씁쓸하게 여기에 되었는데...


그 두 시는 '문신'이라는 시와 '말들의 크레바스'라는 시다.


              문신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정인, 장미의 내용, 창비. 2011년 초판 2쇄. 24-25쪽.


함께 함... 여기에는 살벌한 말은 없다. 살벌하게 느껴질, 식탁 다리의 자국들,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말들이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이라고 했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는 것이다. 고양이가 남긴 자국, 그것은 홀로 된 할머니로 하여금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통한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될 때는 바로 고독할 때다. 사람이 철저하게 혼자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느님을 의식하게 된다. 할머니가 고양이가 떠난 뒤 고양이가 남긴 흔적과 함께 살게 되듯이. 그러므로 식탁은 할머니의 고독한 식사, 요즘 말로 '혼밥'이 아닌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존재가 된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식탁은 함께 한다. 자극적인 말을 할 필요가 없다.섣부른 위안의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렇게 자신의 존재로 함께 할 뿐이다. 그러니 고독과 하느님과 침묵은 모두 홀로 됨으로써 비로소 함께 함을 깨닫게 될 때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이 아닌 말들을 통해 함께 함을 깨닫는다면, 말을 통해서는 어떨까? 표면에 드러난 말만이 아니라 감추어진, 말해지지 않은 말들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도 험악한 말들을 '크레바스'에 떨어뜨려버려야 하지 않을까. 두 시가 통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말'을 통해서 어떤 말들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말들의 크레바스


말의 수면 아래에는 극지와 극지를 잇는 레일이 있다


말과 말이 어긋나 레일이 끊긴 날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쓸쓸하니? 우심실이 물어왔다 괜찮아, 먹먹한 좌심실이 대답했다

혀끝으로 싸락눈이 몰려 왔다 말과 말 사이 헛발 디딘 날


바람이 낸 길, 크레바스 깊은 골은 만년설의 마음이며 봉인된 입

마음이 밀리고 밀린 단애 밑으로 사랑해, 짧은 말마디가 뛰어내리면 뒤이어

쩌렁쩌렁 설산이 무너진다 누구에겐들 극지를 뒤흔드는

설원의 고함소리를 듣는 밤이 없었겠니?


해일을 일으키며 시작된 안개 무리가 해협을 건너고 초원을 건너

당신께 이르기까지 말은 자주 지워져 띄엄띄엄 새소리에 묻어 흩어지다가

길에 떨어진 단추나 깨진 접시, 돌멩이 따위에 가만히 엎드리기도 하는데


멀고 쓸쓸한 극지에서 태어난, 그보다 훨씬 먼 행성에서 날아온 씨앗에서 움튼

사랑해,라는 말에는 얼마나 자주 마음이 다녀가는지


당신과 내가 투숙하는 이쪽과 저쪽, 극지와 극지 사이 아득하게 레일이 놓였고

하루치 쓸쓸한 바람을 적재한 그날의 화물열차가 협곡을 지나간다


조정인, 장미의 내용, 창비. 2011년 초판 2쇄. 114-115쪽


'당신께 이르기까지 말은 자주 지워져 띄엄띄엄 새소리에 묻어 흩어지다가 / 길에 떨어진 단추나 깨진 접시, 돌멩이 따위에 가만히 엎드리기도 하는데'라는 구절에서 아, 앞에 나온 '문신'이라는 시에 나온 고양이 자국들을 이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즉 말이 엎드려 있는 그런 상태. 그러니 결국 식탁 다리에 있는 자국은 '사랑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고, 이 '사랑해'라는 말이 고독한 상태에서 침묵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크레바스에 빠진 말이 아니라,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깃들여 우리에게 날아온 '사랑해'라는 말이라는 것. 그런데, 이런 말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크레바스에 빠진 말들, 아니 우리를 크레바스에 빠뜨리는 말들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해질 뿐.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한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말의 중요성이 나온다. 말이 얼마나 우리 마음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반대로 말이 우리 마음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 그러니 말을 통해서 우리를 크레바스에 빠뜨릴 수도 있고, 하느님과 만나게 할 수도 있다.


자, 당신은 어떤 말을 쓰겠는가? 어떤 말들을 상대에게 보내겠는가? 이 두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자. 이 질문을 최근에 자주 언론에 나오는 분에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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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이다. 이제 더위가 누그러들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기승이다.


  세상에, 이렇게 더워가지고 어디 사람이 견디겠나. 여기에 모기 주둥이가 비뚤어진다는 처서가 지났음에도 모기들도 극성이다.


  제 때를 맞추지 못하고 있는지, 철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시원한 것을 만나고 싶었는데, 빅이슈를 읽으며 조금이나마 무더위와 짜증을 잊을 수 있었다.


  다양한 내용이 실려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든 이번 호다.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지만 내게는 생소한 그룹도 소개되었고, 배우들도 마찬가지고, 여기에 꾸준히 실리고 있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의 인터뷰도 읽을 만했다.


빅판의 인터뷰에서 빅판이 인터뷰에 임한 이유가 자신이 게을러서, 또는 그냥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파서, 판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인터뷰했다는 기사를 읽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음도 생각하고.


이젠 청량해져야 한다.


날씨만이 아니라 사회도. 그렇게 청량함을 선사해주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 빅이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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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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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서로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별 상관이 없다. 한편 한편이 완성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제목이 된 소설은 경쾌하다.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아니다. 이미 공산주의는 이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적은 무엇일까? 소설은 그런 자본주의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을 자신들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삶을 '자폐'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자폐 가족'이 바로 자본주의의 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한다. 관계맺기를 어려워하니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가 없다. 현대 문명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이 그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들이 된다. 그러니 그냥 자신들의 힘으로 살려고 한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니라 수요를 창출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서 상품을 생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 자폐 가족에게는 새로운 물품이 별로 필요없다. 그냥 그들이 자급할 수 있으면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적이 될 수밖에.


이런 과정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어쩌면 궁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발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고 있으니, 그렇다. 우리가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환경 문제를 걱정하지만, 지금처럼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자본주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기후 재앙이나, 환경은 나아질 수가 없다.


결국 자본주의는 우리의 생활을 먹고 사는 불가사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본주의를 이겨낼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참조할 만하다. '자폐 가족'이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이를 생태학자들의 용어로 바꾸면 '자급자족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먹을거리는 자신이 생산하고, 가능하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내는 물품을 쓰면서 사는 삶. 자급자족의 삶. 


그런 삶으로 생활이 바뀌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온갖 병폐들을 없앨 수가 있다. 이 소설 '자본주의의 적'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과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 나오는 시골 사람들의 모습이 딱 그렇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의 적'에 나오는 '자폐 가족'과 비슷하다. 크게 욕심 내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


그런 삶이 경쾌하게 그려지고 있어서 읽으면서 웃음을 머금게 된다. 가볍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는 않게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냥 재미가 아니라 울림이 있는 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읽은 뒤 이 소설집을 읽으니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검은 방'이라는 소설은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였다면, 이 소설은 어머니를 중심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회상을 통해서 전에 읽었던 소설을 떠올릴 수가 있게 된다. 여기에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과도 연결이 되고.


한 시대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가? 과연 그런 사회는 도래했는가?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보다는 바로 우리 삶, 스스로를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대체로 이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이 경쾌하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무겁지 않게 표현하고 있지만, '계급의 완성'이라는 작품은 결코 가볍지 않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자신들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사람들, 평생을 힘겹게 일하지만 얻는 것이라고는 상한 몸밖에 없는 사람들.


우연히 발바닥, 그것도 보드랍고 '연분홍 빛 발바닥'이라고 소설에서 표현한 태어날 때는 누구나 갖고 있는 그 발바닥을 땅 한 번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관리라는 명목으로 - 사실 그들은 관리하지 않아도 어릴 적 갖고 태어난 발바닥을 그리 험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만, 관리하면서 더욱 더 보드랍게 관리를 할 뿐이다. 땅에 발디디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 그런 발바닥을 유지하고 있는데,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은 너무도 거칠고 갈라진 발바닥을 지닐 수밖에 없는 현실.


그렇다. 어떤 이는 계급을 '냄새'로 구분했지만, 정지아는 이 소설에서 '발바닥'으로 구분했다. 땅을 딛고, 우리를 나아가게 하는 존재인 발바닥. - 물론 손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아내의 손을 이렇게 표현했다 -. 아들의 발바닥을 보는 순간 그는 '아들의 발만큼은 태어났을 적 그대로, 보들보들, 야들야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복숭아꽃 빛깔로 되돌려주고 싶었다'(211쪽)고 생각했다.


아들의 발바닥을 정리해주지만, 그것이 그때뿐이리라.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바로 계급은 이렇게 해서 완성이 된다. 소설 제목이 '계급의 완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슬프고도 무거운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는 가볍게 표현하고 있다. '해학적 표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우울에 찌들지 않게 그림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음을, 그런 희망을 우리가 지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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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사도들 - 최재천이 만난 다윈주의자들 드디어 다윈 6
최재천 지음,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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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도'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도란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제일 먼저 나와 있지만, 대부분은 예수의 제자들을 의미할 때 쓴다. 또한 그런 의미를 확장하여 스승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컫기도 하고.


그렇다면 사도들은 스승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다. 또한 스승을 뛰어넘지 않는다.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그를 남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사도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한계에 갇힌 존재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윈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킨 12사람을 인터뷰한 결과를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도들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들이 다윈의 학설을 지지하고, 다윈의 학설을 우리들에게 널리 알린 공로를 들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 참 좋은 말이긴 한데...


대담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다윈의 위대함이다. 그의 위대함이 지금 그들을 낳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다윈의 위대함과 더불어 다윈의 잘못도 다루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다윈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화론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다윈이었다. 다윈은 진화론의 창시자로서 역할을 했을 뿐, 지금 과학계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생각이 사라진다.


다윈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학설은 계속 진화한다. 그렇다면 그의 학설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발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윈은 이런 학설에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대담집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다윈의 학설은 단순하다는 점에 있음을 알았다. 그들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다윈의 주장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 단순함이 생물들의 진화를 설명하는데 유용하다는 것.


그렇다. 이론이 단순할수록 이해하기 쉽다. 또한 그 단순함으로 인해서 다양한 분야로 벋어나갈 수 있다.  


다들 다윈의 이론은 아래에서 위로, 단순함으로 생물학을 설명하고 있다고 하던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코페르니쿠스가 생각났다.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 오죽하면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도 했겠는가. 기존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역할. 


천문학이, 과학이 더 발전했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듯이, 다윈의 업적도 사라지지 않는데,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 이론으로는 천체의 운행을 단순하고 깔끔하게 설명하기 힘들다는 데서 천동설의 문제점을 느꼈다고 하는데...


그래서 지동설로 바꾸었더니 천체의 운행이 단순하고 명료하게 설명이 되더라는, 그런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다윈의 이론도 마찬가지다. 단순 명료.


여기서 출발하면 된다. 또한 과학자로서 다윈은 증거를 확보하기까지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 사회의 분위기가 엄중해서 안전을 고려해서 발표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하기 위한 시간을 가진 것이 진화론을 발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


이런 태도가 바로 과학자가 지녀야 할 자세 아니던가. 그렇게 이 책을 통해서 다윈의 진화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과학자의 태도에 대해서, 왜 사람들이 다윈, 다윈 하는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속칭 다윈의 사도라고 칭하는 사람들 역시 다윈의 절대성 속에 무조건 자신들을 밀어넣지 않고 있음을... 다윈의 사도들은 다윈의 이론에서 출발해 더 진전된 과학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사도란 말에 대해서 지금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이 책에 나온 사도들처럼 무조건적이지는 않음을... 이것이 바로 과학이고 과학자들의 태도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널리 이름을 날린 최재천이라는 학자가 다윈의 사도들이라고 만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이름만 여기에 적는다.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우리나라에 이 사람들 책이 많이 번역되어 있다고 하니, 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 아니면 다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책 뒤에 실린 부록을 참고하면 좋겠다.


자 , 열두 사도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단순히 다윈 추종자라고 해서는 안 되고, 다윈의 학설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 사람들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피터와 로즈메리 그랜트(부부. 일심동체라고 한 사람으로 여기서 다룬다), 헬레나 크로닌, 스티븐 핑커,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피터 크레인, 마쓰자와 데쓰로, 스티브 존스, 매트 리들리와 마이클 셔머, 제임스 왓슨, 재닛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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