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 삶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많은 것을 잃고, 잊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만 지니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꿈을 잃는 과정, 이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이런 어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의식적으로 우리는 이런 어른이 되지 않으려 한다. 꿈을 잃고 싶지는 않고, 순수함을 잃고 싶지도 않다. 또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있다. 이미 과거를 지나 버린 어른.


  박은정 시집을 읽는데 '소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소녀들이 명랑한 소녀들이 아니다. 무언가 어둡다. 꿈과 희망보다는 절망 쪽에 더 가까운 소녀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녀들에게서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왜 그럴까? 어쩌면 이 각박한 세상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을 시인은 표현하고 있는지도.


많은 시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무언가 시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칙칙하고, 어두웠는데... 다음 시... '녹물의 편애' 


'녹물'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주고 있는데, 여기에 편애라니... 난청을 가진 아이로 시작하는데, 난청이란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는, 그렇다면 이 세상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는 말. 


슬픔이 쉽게 편애된다는 말... 그렇게 소리가 음악이 되어야 하는데, 음악이 되지 못한 소리들,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들이 아닌가.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랑을 해야 한다. 시인은 '무서워서 사랑을 한다'고 한다. 벼랑 끝에서도 사랑은 피어난다. 아니, 피어나야 한다. 


여전히 모르겠다. 이 시가 지닌 의미를... 그럼에도 무언가 마음을 울리고 있으니, 이렇게 쓰고 계속 볼 수밖에.


     녹물의 편애

                                           

난청을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자

울 때마다 녹물을 흘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나는 불협의 감정을 사랑하고

나는 병력의 감정을 사랑합니다


정성을 들여 돌아갈 곳 없어

짐승처럼 제 팔을 물어뜯을 때에도

슬픔은 쉽게 편애됩니다


소리의 어디까지 들어가야 음악이 될까요


조금씩 밤을 넘어온 탄식으로

목단꽃 이불이 젖고 있습니다


공명되던 음들이

초록으로 물들 때까지 움츠리는

소리 속의 큰 소리들


나는 무서워서 자꾸 사랑을 합니다


여자가 귀를 두드리면

허공의 낮과 밤이 흩어집니다


검붉은 말들이 울음 없이

벼랑을 내달립니다


박은정,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문학동네. 2018년 1판 4쇄.100-1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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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꿀벌의 예언 1~2 세트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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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넘나드는 소설이다. 환경과 역사가 교차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과학과 환상이 어우러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베르베르의 소설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한 상상력을 통해서 인류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작은 곤충, 꿀벌에서 시작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각국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이 빠른 시기에 끝나지 않으면 인류는 멸망하고 만다.


그렇다. 퇴행 최면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전생에 접속한다는 것은 환상에 속한다. 전생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소설은 이런 환상을 과학과 연결짓는다. 바로 시공간의 중첩. 그리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예로 들어서 말한다.


우리가 말을 한 이후에는 결과는 말을 하기 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언을 알고 있다면, 그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하려고 한다. 즉, 예언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행위로 인하여 예언은 실현되든 실현되지 않든 한다.


먼 미래에 제3차 시계대전이 일어나고 인류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을 안 주인공. 그리고 그 일이 바로 자신이 실행한 최면때문에 벌어진 일임을 알게 되고,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 전생으로 간다.


예언서를 작성한 인물이 바로 현재를 살고 있는 주인공의 전생이다. 그것도 현재의 인물이 전생의 인물에게 역사를 알려줘서 기록된 예언. 그런데 이 예언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먼 미래의 일이 쓰였다. 이게 무슨 일?


소설은 여기에서 새로운 흥미를 유발한다. 그냥 전생으로 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줬다에서 끝나면 사건은 과거형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건이 변할 수는 없다. 과거를 바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 베르베르 소설의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현재를 넘어선 자신도 모르는 미래가 예언서에 적혀 있다. 그래서 그 예언서를 읽어야만 미래를 바꿀 수가 있다.


예언서의 이름은 '꿀벌의 예언'이다. 예언서를 쓰기 위해서 베르베르는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성스러움을 인정하던 시대.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던 시대. 그래서 수호천사로 중세로 간 현생의 인물이 전생의 인물에게 사건을 불러주게 된다. 이것이 예언서가 된다.


이때 네 사람이 얽히고 설키게 된다.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는 베스파, 주인공인 르네, 그리고 르네의 스승이자 전생에서부터 함께 하는 알렉상드르와 그의 딸 멜리사.


르네와 알렉상드르, 멜리사가 역사학자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들은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과거를 추적할 수가 있다. 이런 역사학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에서는 역사적 사실도 기록되고 있다. 또한 베르베르는 자신의 어학지식을 소설에서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베스파는 등검은 말벌을 의미하고, 멜리사는 꿀벌과 관련이 있다는 것.


검은등말벌이 꿀벌을 멸종시켜, 인류를 위험에 빠뜨리는데, 그를 구원하는 것은 과거에서 온 여왕 꿀벌. 그리고 멜리사로 추정되는 인물인 드보라를 통해서 미래의 도시가 나오게 되는데...


허구적인 소설을 통해서는 이렇게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겪는 일들로 서술이 되고, 종교의 역사는 소설에 '므네모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게 된다. 이 역사적 사실은 주인공들이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서술한다. 사실을 알려준다. 종교의 역사를 알 수 있게 된다.


다음에 전생 여행을 통해서 다시 역사를 만나게 된다. 역사에 기술된 과거가 아니라 과거 인물이 겪는 일을 통해 만나는 역사. 그리고 예언서를 찾는 과정에서 추리가 곁들여진다.


결말 부분에 나타나는 반전까지. 소설은 끝까지 호기심을 잃지 않게 전개된다. 여기에 꿀벌이 우리 인간의 삶에 지닌 의미까지.


아주 희망적으로 소설이 끝났으면 하지만, 베르베르는 현실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도 있지만, 지금 이대로 살아가는 우리들 생활에서는 지구 온난화를 피할 수 없음을 그는 소설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꿀벌에게서 생존 방식을 배우고 꿀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음을... 그런 미래를 소설의 끝부분에서 보여주고 있다.


다만, 지금처럼 살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 있다. 인류는 3보 전진하고 2보 후퇴하면서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것. 또 이런 역사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만들어간다는 것.


그렇다. 예정설이 아니다. 전생이 있다고 해서 후생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현재를 통해 바꿀 수가 있다. 즉 예정설 자체가 결정론이 아닌 것이다.


예정은 말 그대로 예정이다. 얼마든지 수정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3보 전진 2보 후퇴에 담겨 있는 의미다.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언제든지 전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2보 후퇴의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2보 후퇴의 기간을 줄이는 일 또한 우리들의 행위에 달려 있다. 베르베르는 바로 '꿀벌의 예언'이라는 이 소설을 통해서, 아니 소설 속 예언서의 존재를 통해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방대한 소설이지만 읽기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빨리 끝을 향해 가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소설 속 주인공이 빨리 예언서를 찾으려 하는 마음과도 같이. 하지만 예언서를 찾기 위해서 그들이 시간 순서를 밟아가야 하듯, 이 소설 역시 순서대로 읽어가야 한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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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리커버 에디션)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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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 참 좋은 말이다. 누구에게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공정한 사람이라는 말은 칭찬이다. 우리는 공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공정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공정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공정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그 공정을 실현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무엇이 공정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된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기회의 공정이다. 누구에게도 기회를 박탈하지 않고 동등하게 주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공정하다고 한다. 기회의 공정을 넘어서, 결과의 공정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의 공정은 너무도 다양한 해석을 나을 수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단지 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결과물의 평등도 추구해야 한다고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자. 결과물을 평등하게 공유한다? 이것이 공정인가?


아니면 기회를 공정하게 주었기 때문에 결과물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논쟁이 시작된다.


기회의 공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시대는 신분에 따라, 인종에 따라, 또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기회가 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과는? 기회가 공정하다면 결과는 불공정해도 좋다. 아니 이것은 불공정이 아니라 자신이 한 행위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니 여기에 기계적인 평등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은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회가 공정하니, 결과가 다르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말은 자명하게 들린다.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샌델은 질문을 한다. 우리가 말하는 공정은 능력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능력주의를 합리화하고 있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결코 기회의 공정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기회조차도 공정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는데, 능력주의가 이를 가리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명문대 입학률이다. 대부분 부유층이거나 기득권층의 자녀들이 입학을 많이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미국의 입학시험인 SAT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아주 공정하게 동일한 시험을 봐서, 자신이 얻은 결과로 대학에 진학하게 하는 일. 얼마나 공정한가?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졌다.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다.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회를 공정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는가? 학생들의 처지에 따라서 시험을 보기 전에 주어진 기회가 같을까?


다르다. 다르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누군가는 고액 과외나 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오로지 학교 수업으로만 시험을 보아야 한다. 이런 모습이 과연 기회의 공정인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같은 기회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이미 출발선에 서기 전에 다른 경험을 했다. 다른 능력치를 부여받았다. 출발선이 같다면 결코 결과가 같아질 수 없다. 그럼에도 공정하다고, 다른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승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패자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즉, 능력주의가 만연하면 사회는 공동체를 이루기가 힘들다. 누군가에는 깊은 패배감을 심어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샌델이 주장하는 능력주의의 폐해다. 경제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결과물도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패배감만 심어줄 뿐이다.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자신은 실패자일 뿐이라는 생각. 이것이 능력주의가 보여주는 문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정을 능력주의와 연결짓는다.


능력에도 우연이 많이 작동함을, 따라서 자신의 결과물을 나눌 수도 있어야 함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능력주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능력주의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처음부터 분석은 명쾌하다. 왜 능력주의가 문제가 되는지, 미국이라는 나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해결책은 별로 없다. 샌델 역시 일반적인 이야기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쉬운 답은 없기에... 거꾸로 말하면 답은 너무도 쉬운데, 우리가 실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샌델의 주장은 이렇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353쪽)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삶의 결과물은 어쩌면 운칠기삼(運七技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상들이 자주 말하던 '운칠기삼' 이 말을 명심한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과물에서 다른 사람들을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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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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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불펜의 시간'이라니. 불펜은 마운드가 아닌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곳 아닌가. 어떤 선수는 불펜 투수라는 이름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도 하는데...


불펜은 그래서 밝음과 어둠으로 굳이 나눈다면, 어둠 쪽에 가깝다. 물론 프로야구에서 불펜 투수를 한다는 사실은 프로가 되지 못한 다른 선수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남에게 주목받지 않는 삶. 그런 삶을 불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면, 불펜을 마운드에 오르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를 불펜이라고 한다면, 불펜의 시간은 노력과 기대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설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화려한 마운드의 삶을 보여주지 않고, 불펜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마운드에 서려고 하지만 설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마운드에 선 사람들도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다.


자신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경기를 책임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불펜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불펜의 도움으로 자신들이 더 빛날 수 있다.


하지만 마운드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이 불펜의 고충을 알까? 불펜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까? 어쩌면 불펜은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설 수밖에 없는 자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소설에서 말하는 불펜의 시간은 그래서 마운드에 서기 위해 준비하는 미래의 영광을 대비하는 노력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맞이하는 시간이라고 해야 한다.


본래는 밀려난 삶을 불펜의 삶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혁오를 통해서 불펜의 삶이 타의에 의해서 밀려난 삶, 능력이 부족해서 밀려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까지 최고의 투수였던 혁오는 진호의 죽음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러다 그는 깨닫는다. 


'왜 소수의 선수만 프로가 되는 거야? 왜 1군과 2군을 나누는 거야? 왜 굳이 연장 게임을 해서까지 승패를 가리려는 거야? 연봉과 성적은 왜 다 공개하는 거야? 왜 모두 승자가 될 수 없는 거야?' (157쪽)


'그래서 혁오는 결단했다. 남들과 다른 방식의 야구를 하기로. 이기는 것을 욕망하지 않는 스포츠를 하기로. 어제까지의 세계, 프로야구 역사와의 대결을 포기하고 가장 꿈꾸었던 기록과의 대결과 포기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기만의 리그를 개설하기로.' (158쪽)


프로라는 세계는 경쟁의 세계, 야구가 기록과의 싸움도 되지만, 다른 선수와의 경쟁도 치열하다는 사실. 그런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야구계에서 은퇴해야 한다는 사실. 소수만이 프로가 되는 비정한 현실을 깨달은 혁오는, 자신만의 경기를 하기로 한다.


승부와 관계가 없는,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하는 야구. 그는 중간 계투로 프로선수로서의 생명을 이어간다. 불펜 투수인 것. 불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데, 이를 자신의 의지로 해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비난해도 그는 밀려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세계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독립리그에서 프로선수가 되기를 꿈꾸지 않고 야구를 하는 혁오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런 혁오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 경쟁, 남보다 앞서 가겠다고 아등바등 특종에 혈안이 되어 있던 기현이라는 기자. 그 역시 신문사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그렇다. 꼭 남에게 잘 보이면서, 굽신거리면서 사회 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기현도 신문사에서는 '불펜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편집장과의 갈등으로, 그런 기현을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으로부터, 기현은 불펜이 아니라 퇴출이 될 위기에 처한다. 물론 퇴출이 아니라 퇴사다. 스스로 나온다.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남 눈치를 보면서 기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현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지내는 새롬이 한 말, '작아도 단단한 것, 어쩌면 작아서 단단한 것.' (238쪽)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다른 주인공 준삼에게도 '불펜의 시간'이 다가온다. 혁오는 야구장에서, 기현은 신문사에서, 준삼은 대기업에서 '불펜'으로 내쳐진다.


견뎌내지 못한 준삼에게 혁오가 포기하지 않고 공을 던지는 모습은 그에게 다시 시작할 힘을 준다. 


'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 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확신이 준삼의 마음에 찾아왔다.' (  251쪽)


이렇게 소설은 불펜의 시간을 보내던 세 사람이 모두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낸다는 희망으로 끝난다. 희망이다. 절망에 겨워 '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만 내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치는 삶을 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사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그것을 펼쳐보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그렇게 되기 위해 '불펜의 시간'을 거쳤을 그들을 소설은 보여준다. 서로 다른 인생을 사는 세 사람이 야구라는 공통 분모를 통해 각자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모습을... 아니 혁오를 통해 준삼과 기현이 마운드의 삶이 아니라 불펜의 삶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세 사람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은 어느 새 끝나 있다. 그리고 '불펜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내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모처럼 마음이 청량해지는 소설을 읽었다는 느낌... '연꽃'이 떠올랐다고 해야 할까? 무더위에 그다지 깨끗한 물이라고 할 수 없는 연못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을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혁오의 삶이 바로 연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엉킨 마음이 풀리는 그런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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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 시집을 읽다가 '치매'란 말이 생각났을까? 치매, 기억을 잃는 질병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것을 넘어,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치매란 누구에게도 좋은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왜 시집을 읽으면서 치매? 시와 치매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텐데...


  이 시집에 어두운, 어려운 생활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그런가 하다가, 시집에서 시인이 이런 내용을 다룬 것은 '지금-여기'의 우리가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여기',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한국. 선진국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을 거쳐 왔을까? 그런 어려움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또한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소외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의 가족들, 아니 기택의 가족들보다도 더 아래에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우리는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우리 눈에 보이는 순간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그들에게는 일상이 '별일'인데, 그들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보이는 것이 '별일'이다. 즉, 그들이 '별일 없다'고 했을 때,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는 많은 죽음들을 다뤘다. 죽음은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지만, 죽음을 인식해야만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 죽음까지 가기 위해서 우리는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니 자신의 삶이 '지금-여기'까지 오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있었음을, 또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여기'의 삶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데... 최근 교사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이게 바로 '사회적 치매'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나올 때마다, 그들을 잊고 살았던 우리 자신이 바로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교육을 통해서 이만큼 왔는데, 최소한 자기 자식들을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잊어서는 안 되는데, 교사들을 마치 자신들의 종처럼( 당연히 누구에게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자신들이 누군가의 노동으로, 그것이 감정이든 육체든, 편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데, 그것을 잊고 있으니 이를 사회적 치매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고 있으니...


어려운 시절에도 교사들을 대우했던 과거를 까맣게 잊고, 버리고 지내는 지금이 과연 치매가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자신들이 무시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식들이 무언가를 배울 수가 있나? 배움이 없는 학교가 되어 버리게 만든 사람들...


학교만 그런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간신히 이룬 형식적 민주주의마저도 껍데기만 남기고 다 잃고 있는 지금 아닌가? 과거를 지우듯이, 그냥 과거만 잊는 것이 아니라, 더욱 광포한 행위들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으니, '사회적 치매'라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는 '별일 없는' 상태이겠으나, 많은 사람들에게는 '별일인' 상태가 바로 지금 아닌가 하는 생각.


이렇게 과거를 잊으면서 어떻게 '별일 없이' 살 수 있겠는지... '별일 없이' 살기 위해... 시집을 읽는다.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내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점자 숲 오목눈이 교실3


 아함경 읽는다 가시 손으로

 모래사막 낙타가시풀의 고독을 읽는다

 하루가 무섭다 어두워지는 눈이 무섭다

 의사의 만류에도 삶의 낙이 이것뿐이라고

 어머니 철필로 점자 불경 닥종이에 옮겨 새기신다

 해진 열 손톱 끝에 봉선화 꽃물 번져 간다

 시치미 떼고, 연옥을 찾아가는 단테같이

 주문을 하얀 닥종이에 새긴다

 어디선가 찌르르 스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

 잘 알아보면, 점자별과 통신을 하는 소리...

 제 심장에다 나이테를 나무들이 새기듯이

 더듬더듬 감은 눈으로 무얼 쓰고 싶은 것인가

 오늘 만나도 내일은 알 수 없는 내 마음이

 답답한 마스크 끼고 앉아서 철필로 만다라 새긴다

 결국 시작과 끝이 만나서 바람에 털리고야 말

 모래 만다라처럼, 빈손은 백지로 돌아온다

 그래도 자꾸 점자별이 되고 싶어

 만다라 속을 수놓는

 오롯한 점자의 시간

 

송유미, 점자 편지. 실천문학사. 2023년.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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