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채집가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5
로이스 로리 지음, 김옥수 옮김 / 비룡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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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으로 태어난다.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주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있다.


장애인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죽게 내버려야 한다. 그것으로 끝이다. 사회에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그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소설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것이 지워진 시대. 권력자들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는 사회. 키라는 엄마를 잃는다. 엄마가 죽은 뒤, 키라의 집은 불태워졌으며, 키라는 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런데 위원회에서 키라를 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불러들인다. 키라의 재주가 수놓고 염색하는 재주가 그들의 통치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해에 한 번 노래를 통해서 그들의 과거를 들려주는 행사를 하는데,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지팡이와 옷을 입고 노래를 부른다.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서, 파멸과 재건에 대해서.


그런 의식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가 셋이 있다. 지팡이를 만드는 사람, 옷을 수선하는 사람,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


이들은 어릴 적에 가족을 잃고 불려와 살게 된다. 집에서 쫓겨나 죽음에 이르게 된 지경에 처한 키라는 위원회를 자신의 은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지내면서 무언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노래를 부르는 조는 자기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 오직 그들이 필요로 하는 노래만 연습하게 된다. 


목수 재질을 지닌 토마는 자기가 만들고 싶은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원회가 시키는 대로 지팡이 수리를 하게 된다. 어릴 적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영감이 떠나가는 것을 느끼는 토마.


키라 역시 마찬가지다. 수를 자신이 놓고 싶은, 손이 가는 대로 하지 못하고, 가수의 의상을 수선하는 일에 온 시간을 보내게 된다.


먹고 자고 지내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이들은 시키는 일을 하는 존재로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과 반대로 어린 아이인 맷은 자유롭게 생활한다. 얼핏 부랑아로 느껴질 정도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맷은 키라를 위해 파랑을 채집하기 위해 떠난다.


누구도 가지 말라고 했던 마을의 경계 너머로. 그 너머에서 맷은 키라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아버지와 함께 파랑을 가지고 온다. 키라가 살던 마을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파랑을.


그리고 키라는 어느 정도 진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을 깨달은 키라가 선택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묘미다.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아 진실을 알리고, 미래를 만들어가려고 하는 키라. 그렇다. 회피하지 않는다. 비록 절름발이로 태어났지만 키라는 누구보다도 세상을 똑바로 걸어가려고 한다.


파랑 채집가라는 소설은 획일화된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면서 주어진 대로만 하라고 하면 암울하다. 


적어도 노래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 키라와 토마는 이를 예술가라고 지칭했는데, 이런 예술가들에게 자유는 절대적이다.


자유를 빼앗긴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할 수 없다. 이는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키라가 목격한 가수의 쇠사슬은 자유를 잃은,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밖에 할 수 없는 예술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키라는 이를 거부한다.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 세상이 온전해 보이지만 겉으로 장애가 있는 자신보다도 더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옷을 통해서 미래를 바꿔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또 다른 존재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있다. 존재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기준에 닿지 못하면 없애야 한다고 하는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 잘 돌아가는 유토피아 같지만, 실상은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다.


권력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사회. 그런 사회는 자신들의 치부를 꽁꽁 감추어둔다. 겉으로는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사회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하지만 그렇다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 무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 부족함을 때우기 위해 아직 어린 아이들을 자신들의 수하로 거둬 이용하려 하지만,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들은 아직 왜곡된 시선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키라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부족함이 도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함으로 인해서 다른 면에서는 넘쳐남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어린 키라를 통해서 어떤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 또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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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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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그래, 이거였어.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친환경이라는 말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반환경적인 일들이 있는데, 디지털이 바로 그렇지 않나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직접 내뿜지도 않는다. 이산화탄소뿐만 아니라 디지털을 눈 앞에 두고서는 어떤 오염 물질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오염 물질이 나오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가? 우선 간단하게 살펴보자. 다른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디지털 기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만 보자.


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물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가? 옛날 구식 전화기보다, 또 벽돌폰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큰 핸드폰보다, 아주 작은 정말 스마트한 스마트폰이 다른 무엇보다 많은 원재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구식 전화기는 10가지 원재로면 된단다. 소위 벽돌폰은 29가지 원재료가, 스마트폰은 54가지의 원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307쪽. 부록2)


54가지의 원재료는 땅 속에 있는데, 이들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스마트하게 쓰는 스마트폰은 이미 그 자체로 환경에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에 빨리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케이블을 깔아야 한다. 인공위성을 통해서 통신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지금 세계는 바닷속에 광케이블을 깔아놓고 있다고 한다.


한두 나라가 아니고, 한두 곳이 아니고 대양 이곳저곳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다고 한다. 광케이블을 만드는 재료로 인한 환경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바닷속에 있는 광케이블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된다.


또한 스마트폰이나 다른 디지털 기기들을 사용한다면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데이터 창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부지만이 아니라 적절한 온도도 필요하다. 즉 뜨거움을 냉각시킬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 사용량이 어마어마하다. 세상에 우리가 쉽게 계산할 수 있는 1기가바이트를 예로 들자. 1기가 바이트면 영화 2시간짜리(아주 높은 고해상도의 영화는 2-3기가바이트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정도의 영화해상도라면 1기가바이트면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충분히 들어간다) 양이라고 하는데, 이에 필요한 물의 양이 10만 리터란다. 10만 리터? 감이 잘 안 온다.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대형 빗물 저장 탱크 1개에 맞먹는 양이란다.(310쪽. 부록5)


인터넷을 통해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대형 빗물 저장 탱크 1개에 채워진 물을 쓰는 것인데, 이보다 용량이 큰 행위들을 한다면? 데이터 센터에 필요한 물의 양은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이 점들만 생각해도 디지털은 자체로 환경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대로 디지털 문명을 계속 추구해야 할까? 한다... 해저에 광케이블을 설치하는 이유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막대한 투자비용이 들지만, 투자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을 이익을 남길 수 있다. 게다가 소비자들의 심리가 조금이라도 느린 인터넷은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5G로 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을 주로 어떻게 사용하는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고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파괴되는 환경재해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저자는 이렇게 디지털의 보이지 않는 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마트함 속에 감춰진 문제들을 들춰내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지금은 산업혁명 초기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할 수가 없다. 러다이트 운동도 실패하지 않았는가.


저자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디지털을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온 메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세속적임을, 디지털이 실제로는 우리를 본떠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합의에 의해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우리가 하는 만큼만 친환경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식량 자원과 에너지 자원을 낭비하기 좋아한다면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이러한 경향을 한층 심화시킬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한계를 넘어 지속 가능한 지구를 생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원자 군단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도구는 우리의 일상적 솔선수범(그것이 고귀한 것이든 명예옵지 못한 것이든)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그것은 우리가 미래 세대에 물려줄 유산을 증대시킬 것이다." (301쪽)


이 말은 결국 디지털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의 모습을 찾고, 그것을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과 공생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 과연 디지털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할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그것도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윤의 수단으로 디지털을 이용하고, 결국은 디지털로 인해서 우리들 삶이 종속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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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 큐큐클래식 7
버지니아 울프.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박하연 옮김 / 큐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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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는 사적이면서 공적이다. 일기와 달리 자신만이 보지 않고 상대방이 보게 쓴 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담고 있지만, 그 내면이 상대에게 전달이 되어야 한다. 나와 남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편지가 한다.


나와 상대. 단 둘만이 간직하고 있으면 사적인 글로 그쳤을 텐데, 편지는 둘 다 폐기하지 않는 한 어느 한쪽이 쓴 글이라도 살아남는다. 그래서 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히게 된다. 이때 편지는 공적인 존재가 된다.


편지가 문학이 될 수도 있음을 유명한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발간된 편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중에 카프카의 편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카프카의 편지에서 그 유명한 구절 '책은 도끼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지는 못했다. 읽어야지 하면서도 선뜻 손에 잡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반면 울프의 다른 글들 [자기만의 방]과 같은 글은 어쩌다 읽게 되었는데... 계속 버지니아 울프는 언젠가 읽어야 할 작가로 내게 남아 있다.


이번에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는 비타 색빌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가 주고 받은 편지를 모아 놓았다. 1923년부터 1941년 버지니아 울프가 죽기까지 주고 받은 편지들. 무려 18년이다. 방대한 양이 남아 있을테니, 책으로 편찬할 때는 그 중에서 선별을 했을 테다. 선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600쪽이 넘는다. 


만남-사랑-우정이라는 제목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살필 수 있게 한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이 둘 사이에는 굳은 신뢰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 경탄하면서 서로를 북돋워주기도 하고,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편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울프의 소설 [올랜도]가 비타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비타 색빌웨스트가 내가 몰라서 그렇지 꽤 많은 작품을 썼으며, 잘 알려진 작가였다는 점에서 울프 주변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남성 중심으로 편협하게 알고 있지 않았나 반성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 울프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는, 특히 비타가 극찬하고 있는 [등대로]라든지, [올랜도]는 시간 내서 꼭 읽어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됐는데...


당시 영국은 동성애에 엄격한 나라였다. 일례로 오스카 와일드도 동성애로 감옥 생활을 했으며,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앨런 튜링도 동성애로 탄압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 버지니아와 비타가 어느 정도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이들이 동성애로 처벌을 받지 않은 이유는 둘 다 결혼을 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한다. 


겉으로는 이들은 이성애자로 보였을 테고, 버지니아와 비타의 관계는 동료 작가 또는 문학을 하는 선후배 정도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겠다.


동성애든 이성애든 이 둘의 관계에서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둘의 만남이 서로의 문학활동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고, 지지를 받고, 다른 사람들의 비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문학을 추구해갈 수 있는 힘을 서로에게 얻었다는 점. 


그런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문학을 감상할 기회를 주었다는 점. 그런 점들을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사랑, 서로에 대한 우정으로 1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한 버지니아와 비타. 그런데 이렇게 서로를 위하던 사람이었는데, 비타는 버지니아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했을까? 


이 책을 보면 버지니아가 비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1941년 3월 22일이다. 그리고 버지니아는 3월 28일에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겨우 6일 차이...마지막 편지에 '우리가 언제 가게 될까?'(633쪽)라고 하며 비타와의 만남을 기대했던 버지니아인데.


예민한 버지니아에게 전쟁 상황, 주변에 떨어지는 폭탄들, 견디기 힘든 경제 상황 등이 더욱 견디지 못하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비타가 그렇게 많은 도움을 주려고 했음에도...


버지니아와 비타가 주고받은 편지. 이 편지들을 통해서 개인 버지니아 울프에게 좀더 다가갈 수 있어서 좋았고,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작가에 대해서 알게 되어서도 좋았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면서 북돋워주는, 문학 활동을 하는데 서로 도움을 주는 그런 모습. 그런 모습이 오롯히 드러나고 있는 편지 모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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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과 나의 사막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3
천선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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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이다. 그렇게 분류한다. 하지만 그런 분류가 무색하게, 이 소설은 정서를 다루고 있다. 그것도 로봇을 주인공으로 해서.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을까? 로봇은 입력된 값만을 출력한다고 하지만, 아니다. 로봇들도 입력된 값을 넘어서 출력을 할 때도 있지 않은가. 즉, 입력한 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구를 파괴해, 거의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죽고 사막만 남은 상태. 함께 지내던 인간 랑이 죽자, 로봇 고고는 길을 떠난다.


과거로 가는 땅을 찾아 간다. 랑과 함게 지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이미 자신과 함께 하던 존재가 죽었는데도, 자꾸만 고장난 영상처럼 함께 지냈던 때가 떠오른다고 로봇 고고는 말한다.


어떤 일일 있을 때마다 떠올리는 랑과의 일들. 그것은 바로 랑의 부재를 충만으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랑은 곁에 없지만 영상을 통해서 고고와 함께 한다. 그리고 고고를 삭막한 사막을 넘어 과거로 가는 땅으로 향하게 한다.


랑의 죽음으로 랑과 알고 지내던 지카는 바다로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고고는 거부한다. 고고는 랑과 함께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인간 버진을 만나 고쳐준다. 인간들에 의해서 예언자로 대우받던 버진. 그러나 그런 종교인에게도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없다. 그 역시 고고와 함께 할 수 없다. 고고는 계속 길을 떠난다. 이미 떠난 랑과 함께 하기 위해.


사막을 여행하는 고고는 다른 로봇을 만난다. 알아이아이라고 하는 로봇, 트랙터로 사막에 길을 내는 로봇이다. 자신의 주인이 맡인 일을 하기 위해 망가지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는 로봇. 그러나 사막에 길을 내기는 힘들다. 힘들지만 알아이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일을 할 뿐이다. 자신의 주인이 올 때까지.


알아이아이가 일을 하는 방식은 곧 주인과 함께 하는 방식이다. 고고에게 영상으로 랑이 계속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알아이아이에게 고고는 자신의 팔을 하나 떼어준다. 길을 제대로 내게 하기 위해서. 알아이아이와 헤어진 고고는 다시 길을 떠나다 사막의 폭풍에 휩쓸린다. 그러다 외계 생명체인 살리를 만난다.


살리가 자신을 고칠 수 있다는 점을 알지만 고고는 살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고쳐짐이 목적이 아니라 랑과 함께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고고는 기억의 땅으로 간다. 그 곳에서 랑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믿으며... 결국 고고가 하는 여정에서 깨닫는 것은 자신에게도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것. 그것을 인간의 관점에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준다면 그것이 바로 감정이고 정서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고고가 만나는 네 인물, 지카-버진-알아이아이-살리.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고고는 함께 했던 랑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예전의 고고가 아니라 감정이 있는 로봇 고고로.


네 인물을 도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카는 새로운 문명을 찾아 떠나는 인류가 될 테고, 버진은 길 잃은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을 상징하고, 알아이아이는 과학기술의 힘으로 고난을 극복하려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지구는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는데ㅡ 이때 외계가 등장한다.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답은 그곳에 있지 않다. 바로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고고는 사막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사막에 있는 과거로 가는 땅으로 간다. 과거로 가는 땅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잇는 땅이고, 그것은 부재를 충만으로 채우는 장소가 된다.


사막을 통과해가면서 다른 존재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고고는 성장해 간다. 그 성장이 인간이 통상 말하는 성장과 같지는 않지만,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이니 이는 분명한 성장이다. 


무척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고고가 로봇이 아니라 바로 성장하고자 하는 우리들이라고 여기니 더더욱 재미있는 그런 소설. 부재, 비어 있음이 채움, 충만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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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있다. 그동안 쌓였던 폐단들을 없애는 일. 하지만 적폐청산이 쉽지는 않다. 한방에 해결할 수는 없다. 현대에는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처럼 물줄기를 바꿔 오물덩어리를 한번에 쓸어버리면 좋겠지만, 적폐들을 누군가의 어퍼컷 몸짓처럼 한 방에 날려버리면 좋겠지만, 세상 적폐들은 어퍼컷 한 방으로 나가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크게 휘두른 어퍼컷은 빗나갈 확률이 높다. 어퍼컷 한 방보다는 꾸준히 날리는 잽이 더 유효하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잽을 맞다보면 충격이 누적되어 결국 나중에는 쓰러지고 만다.


적폐 역시 마찬가지다. 꾸준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치우려고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큰 거 한방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한다.


우리나라 경제가 어렵다. 물가는 계속 올라가고, 월급은 제 자리이다 보니, 실질소득은 감소한 상태다. 여기에 금리는 올라 빚을 얻은 사람들은 이자에 허덕이게 된다.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재해로 죽어가는데도 그들이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제도도 별로 없다. 파업권이 보장되어 있다고? 아니다. 파업을 하는 순간 노동자들은 사용자들이 제기한 온갖 손해보상 소송을 감당해야 한다.


학생들이 입시 부담으로 죽어나가도, 교사들이 각종 스트레스로 죽어나가도 교육현장은 바뀌지 않는다. 한방에 바꾸려고 하기 때문에 아예 바뀌기 않는다. 헛손질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놈의 어퍼컷. 어째서 이렇게 큰 것 한방만을 노리는지.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은 어떠해야 할까? 역시 큰 것 한방을 노리고 있는 것 아닌가? 상태의 어퍼컷을 어퍼컷으로 응수하려고 하고 있지 않나 반성해 보아야 한다.


서로가 큰 것만을 노릴 때 정작 바뀌어야 할 것들은 바뀌지 않는다. 큰 몸짓들만 보일 뿐. 그 몸짓들에 가려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지속된다. 지금 상태가 그렇다. 


어떻게 해야 어퍼컷에서 벗어날까? 이번 [빅이슈] 310호를 읽다가 배우 장서희의 인터뷰에 나온 말이 이번 호 다른 사람들이 한 말과 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


"그냥 본인이 생각했을 때 이 길이다 싶고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으면 밀어붙여서 끌을 보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언젠가는 빛을 봐요." (27쪽. 배우 장서희의 말)


적폐를 청산하는 일도 그렇다. 적폐는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그래서 끝까지 해내야 한다. 하지만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눈 앞에 "자, 이렇게 이루었어!"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성과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어라, 이렇게 되었네." 하고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김현 시인이 말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해야 한다. 내가 큰 것 한방을 날리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저 혼자 뭔가를 다하려는 큰 덩어리의 마음이라기보단 여러 마음에 보탠다, 한 부분을 채운다는 조각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조각이 모여 이루는 큰마음을 생각하면 어딘가에 마음을 쓰는 일이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51쪽, 김현 시인의 말 중에서)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은 남에게 빛이 될 수 있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는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 또한 누군가의 빛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삶이다. 


"우리는 먼 곳일지라도, 심지어 모르는 누군가에게일지라도 조명을 비춰줄 수 있다. 혹 자신이 죽어 있는 상태와 같을지라도 빛을 비추는 게 가능하다. 뜻하지 않은 그 빛이 누군가에게 구명조끼가 될 수도 있다." (56쪽. 윤은성의 글에서)


[빅이슈]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서 다룬 청년들을 다루고 있다. 청년들, 앞이 안 보인다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지금 어떤 일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들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작은 조각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갖지 않은 것을 '실업'이 아니라 '무업'이라고 한 것이 마음에 와닿는다.


무업, 이건 일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다. 일이 없는 상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조각들을 모으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이들에게 [빅이슈] 역시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퍼컷을 날릴 생각은 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어퍼컷을 날리려고 하는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어퍼컷은 적중할 확률이 많이 떨어지니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남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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