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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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들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 말에는 공동체는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개인은 있지만 사회는 없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아니다. 각자도생의 사회는 어쩌면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일 것이다.


내 삶을 공동체가 보살펴주지 않는데, 어떻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 아닌 남들은 모두 내 삶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하여 우리는 복지제도를 통해서 각자도생의 사회를 극복하려고 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내가 모든 것을 만들고 쓰고 할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므로,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나아가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 복지제도가 만들어졌고, 한 사람의 삶을 그 사람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최소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런 제도.


각자도생의 문제는 이렇게 풀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은 각자도생이 아니다. 각자도사다. 세상에 죽음만큼 개인적인 어디 있을까 싶은데,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각자도사의 사회라니...


죽음에 이르러서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죽음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더라도 죽을 때는 홀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죽음이 홀로 겪어야 하는 일일까? 이 책은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누가 돌봄을 책임졌는가? 아니 누구에게 돌봄을 전가했는가? 그런 돌봄을 하는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돌봄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은 또 어떤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해지는 온갖 치료들이 과연 사람답게 죽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또 노인들을 사회 부담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이 바람직한가?


수치로,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늙은 세대는 늘어나, 젊은 세대의 부양 부담이 가중된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부양해야 할 덤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1부는 이런 노인들의 죽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의학적 치료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환자와 보호자, 의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또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섬뜩하기도 하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1부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부 각자 알아서 살고, 각자 알아서 죽는 사회

집, 노인 돌봄, 커뮤니티 케어, 호스피스, 콧줄, 말기 의료결정, 안락사


'집'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집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누가 돌보겠는가? 노인 돌봄과 커뮤니티 케어가 대두가 되는데, 이 책에서 노인 돌봄이 생명 유지와 연결이 되어 '콧줄'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존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묻고 있다. 그러니 '말기 의료결정과 안락사'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사회가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쪽으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과 비슷한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커뮤니타 케어'를 들고 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한다.


그냥 노인이 집에 있으면서 방문하는 의료진이나 돌봄 노동자들에게 돌봄을 받는 것으로는 '커뮤니티 케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스피스'와 같이 치료가 아닌 돌봄이 이루어지는 곳이 더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데, 이도 쉽지 않는 일이다. 호스피스와 관련해서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작정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하는 호스피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 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74쪽)


이런 1부에 이어 


2부 보편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상상하다

제사, 무연고자, 현충원, 코로나19, 웰다잉, 냉동 인간, 영화관


을 통해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제사 풍경이 바뀌어야 하고, 다양한 죽음들을 이야기하면서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되는데...


죽음에도 차별이 있었음을 명심하고, 그런 차별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각자도사 사회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우리가 함께 하는, 그런 실질적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고 이야기 하는 듯하다.


다만 이 책의 1부가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면 2부는 좀 약한 감이 있다. 1부에서 의사들이 지닌 문제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요즘 의사 정원 확충과 관련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는 글들도 꽤 있다.


죽음과 의료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므로... 하여간 각자도생의 사회도 각자도사의 사회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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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평범하다는 것, 두드러지지 않다는 얘기인데, 두드러지지 않다는 말은 곧 사회에서 어떤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통한다.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제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질문을 하면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물 흐르듯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물이 흐르는 것을 막는 댐, 보를 설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물 흐르듯 산다는 말이 행복한 삶과 연결이 되겠는가.


지리산 주변에 골프장, 케이블카가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겨들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멍청이들'(75쪽)


이번 호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예술가 케테 콜비츠 이야기가 있다. 아들과 손자를 전쟁에 잃은 케테 콜비츠. 약자들과 연대하고, 약자들이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예술로 보여줬던 작가, 케테 콜비츠.


그에 관한 글(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을 읽으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는 모 정치인이 생각났다. 힘에 의한 평화, 그래서 나치가 평화를 유지했던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힘으로 인해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정치인들로 인해서 평화가 오는가? 오히려 긴장과 불안... 케테 콜비츠는 이런 상황을 이미 자신의 예술로 보여줬는데, 과거에서, 예술에서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다 나도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정부 예산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맞다. 정부 예산이 우리 세금이지. 그렇다면 정부 예산은 우리 돈인데... 왜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여할 수가 없지 하는 문제의식.


<2024년 정부 예산, 656.9조 원 속 노동자>라는 글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금은 내가 낸 돈이다. 내게도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어디에 쓸지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정부나 국회가 전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많은 돈에 내가 돈은 일부라고? 허어, 돈의 액수로 따지면 안 된다. 돈의 출처,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그러면 국민 개개인은 세금의 주인이다. 주인이니 주인답게 세금을 쓰는 용처, 즉 정부 예산에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게 지나친 발상일까 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힘든 현대에,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단체를 통해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디인가. 세금을 쓰는 일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단 얘기잖은가. 


'남아공 헌법은 정부예산안을 이중적으로 한다. 하나는 행정부가 마련하는 예산안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예산위원회가 만드는 예산안이다. 민중예산위원회는 남아공의 NGO, NPO,노동조합총연맹,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다. 공공재정이 담아야만 할 국민의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남아공에서는 이 두 가지 예산안이 마련되면, 서로 조정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에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20쪽)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 최근에 정부는 노조들에게 회계공시를 고용노동부의 노동조합회계공시시스템을 통해서 하라고 했다. 민간(그들이 말하는) 단체를 정부 시스템을 통해서 돈의 사용처를 공개하라고 한 것. 하지 않을 때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특히 하지 않는 단체는 기부금 공제를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민간 단체의 회계를 정부가 관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정부의 회계를 국민들이 관리해도 된다는 말이잖은가. 그러니 이 정책을 뒤집으면 바로 남아공에서 하는 예산안 조정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정부 스스로 국민들을 대변하는 민간단체들이 정부예산안을 짜는데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과 그것은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하니...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회계를 정부시스템을 통해서 공개한다. 그렇다면 정부예산, 즉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들의 권리인 정부예산안을 조정하는데,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라고.


그래야만 정부가 노동조합에 회계공시를 하라고 한 일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그런 정부가 되길 바란다고...


[삶이보이는창]13호(2023년 가을호)를 읽으면서, 내년 예산안을 그냥 넘길 게 아니라, 국회심의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계획하는 데서부터 국민들이 참여해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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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동화 -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 FoP Classic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정보라 옮김 / 알마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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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릴 때 동화를 읽고 자란다. 아무리 동화를 읽지 않는다고 해도 이야기로는 들었을 것이다. 기억 속에 있는 동화들이 최소한 한두 편은 있는데...


예전 동화에는 잔혹한 내용도 있었다. 또한 특정 인물을 나쁘게 묘사한 부분도 있었고... '계모' 하면 악인이었는데... 그래서 현실에서도 계모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 물론 동화에 나온 이야기는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데 겪게 되는 과정들을 이야기로 만들어냈다고 하는 베텔하임의 이론을 만나고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어린 시절 아직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할 때,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물로 계모가 나오면, 계모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없다. 현대처럼 이혼을 하는 가정이 30%가 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이런 동화들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동화들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하고, 그런 간접 경험이 계모와 실제 생활하는 데서는 좋은 쪽으로 발현이 될 수도 있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문해력이 걱정되는 요즘 시대에, 이렇게 옛날 이야기를 고수하는 것은 고려해 봐야 한다.


이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 바로 스타니스와프 렘처럼 로봇을 등장인물로 동화를 쓰는 것이다.


그가 쓴 [로봇 동화]에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로봇이라고 삐걱대는 기계들이 아니다. 인간처럼 또는 인간보다 더 지능이 뛰어난, 감수성 역시 뛰어나고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로봇들이 등장한다.


이런 로봇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에 대해서 겪게 되는 온갖 일들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즉 내가 실생활에서 겪지 못할 일들을 이런 동화들을 통해서 경험하게 되고, 이를 다시 현실의 삶으로 갖고 올 수 있게 된다.

 

동화 하면 교훈을 떠올리지만, 교훈보다 먼저 와야 할 것은 재미다. 흥미가 있어야 읽고, 읽어야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다. 생각을 하거나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흥미와 재미. 동화의 기본 요소다. 그렇다면 이 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로봇 동화]는 이 두 가지에 성공했는가? 하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다.


동화라고 하지만, 이 책은 어른들이 읽어야 한다. 우선 과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물들의 이름에서, 또 그들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어느 정도 과학과 기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 동화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하지는 못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우리는 굳이 과학적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 작품이 존재할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과학적 지식이 없는 아이들에게도 이 동화들이 읽힐 수 있다는 것은, 굳이 이 동화에 나오는 내용을 과학적으로 검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 된다. 이런 광활한 세계, 이런 보이지 않는 세계,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 펼쳐내는 다양한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이 동화들은 제 몫을 다하게 된다. 자, 그러면 이 로봇 동화를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에 어떤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을까?


바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고, 자신을 위해서 만들었지만 자신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내용을 지닌 동화들이 있다. 이 책 후반부에 실려 있는 '세상이 살아남은 이야기, 트루를의 기계'에서 그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점 말고도 인간 세상의 모습을 로봇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 동화들도 꽤 있으니... 천천히 한편 한편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에 설재인의 <로봇 동화> 다시 쓰기는 '착각과 말로'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로봇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읽다보면 무슨 로봇들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특히 아이들을 키우는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가 비판하는 로봇의 모습과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솔라리스]와 [이욘 티히의 우주일지], [우주 순양함 무적호]를 읽고 스타니스와프 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이번 [로봇 동화]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지만, 현대에서도 여전히 유용한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그의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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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로운 식탁 - 우리가 놓친 먹거리 속 기후위기 문제
윤지로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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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기후 위기가 우리 식탁에서도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기후 위기 하면 좀더 거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먹는 일에서도 기후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식탁에 오른 음식들은 기후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우리는 기후 위기 하면 화석 연료를 생각하고, 공장과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 가스를 생각하는데 식탁에 오르기까지 음식들은 공장과 자동차를 거치게 된다.


즉,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식품들도 공장과 자동차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만이 아니다. 육식이 기후 위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알려져 있으니, 이 책에 나온 내용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채식 또한 기후 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농업이 기후 위기를 일으키는 요소로도 작용한다고 하는데, 특히 땅을 갈아엎는 농사는 땅 속에 있는 탄소를 대기 중으로 배출한다고 한다. 그 양이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하니 그것 참.


대안으로 땅을 갈아엎지 않는 농사를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농업이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도 지적하고 있고, 대안으로 나온 스마트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경재배도 있는데, 하지만 그 수경재배 역시 많은 에너지를 들여 짓는 농사이기에 기후 위기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축산업과 농업이 나왔으면 이제 어업이다. 어업과 기후 위기를 연결지어 본 적은 없는데, 이 책을 통해 어업 역시 기후 위기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단지, 어획량이 줄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획을 하기 위해서 나가야 하는 배들에 쓰이는 연료가 문제라는 것.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많은 연료를 소비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로 인해 많은 양의 탄소가 배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양어업을 줄이고 양식업을 하면 어떨까? 아니다. 양식을 하는데 전기가 엄청 든다. 그리고 전기는 탄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친환경으로 전기를 생산하면 좋겠지만, 아직도 전기의 많은 양이 친환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기 소비가 많다는 얘기는 탄소 배출이 많아진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 식탁과 관련 있는 농업, 축산업, 어업이 모두 탄소 배출에서 기후 위기와 관련이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육식을 줄이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지금처럼 육류 소비가 많아지면 축산을 하기 위해서 많은 숲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이다.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강화하면 탄소 배출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제도를 뒷받침해야 한다.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때 유기농 비율이 늘었다가 다시 줄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깨끗하고 예쁜 농산물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심리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유기농을 뒷받침할 제대로 된 제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농업이나 어업에서 탄소를 줄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식탁이 기후 위기와도 관련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다음이다. 문제를 알았으니 풀어야 한다.


그 푸는 방법이 문제다. 답은 보이는데, 그 답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과 제도 차원이 함께 가야 하는데, 공업에 관해서는 제도들을 정비하고 있지만, 농,어,축산업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도 정비가 요원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후 위기가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탄소는 계속 배출되고 있고, 배출되는 양을 포집되는 양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연구가 많이 된 탄소 배출에 대해서 '한국의 농축어업이 '3무(無)'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데이터가 없었고, 정책이 없었다. 그리고 정책이 있는 곳엔 감시가 없었다.'(335쪽)고.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공업 분야만큼 농축어업 분야에서도 탄소 배출에 대해서 고민하고,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방법이 실현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까지 탄소 발생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방법이라도 우리는 자꾸 말해야 한다. 미래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를 위해서도.


'소비자로서 저탄소 먹거리를 고르고, 시민으로서 탄소를 줄이는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 그 두 가지가 탄소를 발생시키는 '탄소로운 식탁'을 바꿀 것이다 이제 잘 먹고, 잘 요구하자.'(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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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 혹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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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에 이어 리베카 솔닛이 쓴 이야기다.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솔닛이 바꿔서 쓴.


이 이야기에서는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지만, 곧 시작 부분을 바꾼다. 한 아이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하니, '옛날 옛날 세 옛날에'로 바꾼다. 그러다 과연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이루는 존재들은 더 많다. 요정들도 있고, 다른 등장인물도 있고, 하여 솔닛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라고 한다.


이미 시작부터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로 끝나지 않고 여러 이야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해방자 신데렐라'와 같이 삽화는 아서 래컴의 그림으로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어, 특정 인종을 대변하지 않고 있으니, 그 점도 기억할 만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를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로 바꾸고, 공주도 중세시대의 특권계급인 공주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동생이 있다고 설정하고, 언니가 잠잘 동안 동생이 활동하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왕자가 등장해서 공주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공주는 100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깨어나게 했으며, 또 왕자 대신 불새로 인해 오게 된 아틀라스라는 인물도 만들어 낸다.


여러 이야기가 합쳐져 이 이야기를 이루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강한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그냥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으며, 갇힌 성에서 나올 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나오게 되니, 능동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가장 능동적인 존재는 동생인 마야다. 언니가 잠들어 있을 때 나타난 늑대를 그림을 통해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하는 존재. 아틀라스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솔닛은 이야기를 통해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남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 그리고 남 위에 군림하는 인물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힘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솔닛처럼 시대에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야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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