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로운 식탁 - 우리가 놓친 먹거리 속 기후위기 문제
윤지로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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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기후 위기가 우리 식탁에서도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기후 위기 하면 좀더 거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먹는 일에서도 기후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식탁에 오른 음식들은 기후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우리는 기후 위기 하면 화석 연료를 생각하고, 공장과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 가스를 생각하는데 식탁에 오르기까지 음식들은 공장과 자동차를 거치게 된다.


즉,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식품들도 공장과 자동차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만이 아니다. 육식이 기후 위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알려져 있으니, 이 책에 나온 내용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채식 또한 기후 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농업이 기후 위기를 일으키는 요소로도 작용한다고 하는데, 특히 땅을 갈아엎는 농사는 땅 속에 있는 탄소를 대기 중으로 배출한다고 한다. 그 양이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하니 그것 참.


대안으로 땅을 갈아엎지 않는 농사를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농업이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도 지적하고 있고, 대안으로 나온 스마트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경재배도 있는데, 하지만 그 수경재배 역시 많은 에너지를 들여 짓는 농사이기에 기후 위기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축산업과 농업이 나왔으면 이제 어업이다. 어업과 기후 위기를 연결지어 본 적은 없는데, 이 책을 통해 어업 역시 기후 위기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단지, 어획량이 줄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획을 하기 위해서 나가야 하는 배들에 쓰이는 연료가 문제라는 것.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많은 연료를 소비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로 인해 많은 양의 탄소가 배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양어업을 줄이고 양식업을 하면 어떨까? 아니다. 양식을 하는데 전기가 엄청 든다. 그리고 전기는 탄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친환경으로 전기를 생산하면 좋겠지만, 아직도 전기의 많은 양이 친환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기 소비가 많다는 얘기는 탄소 배출이 많아진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 식탁과 관련 있는 농업, 축산업, 어업이 모두 탄소 배출에서 기후 위기와 관련이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육식을 줄이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지금처럼 육류 소비가 많아지면 축산을 하기 위해서 많은 숲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이다.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강화하면 탄소 배출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제도를 뒷받침해야 한다.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때 유기농 비율이 늘었다가 다시 줄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깨끗하고 예쁜 농산물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심리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유기농을 뒷받침할 제대로 된 제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농업이나 어업에서 탄소를 줄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식탁이 기후 위기와도 관련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다음이다. 문제를 알았으니 풀어야 한다.


그 푸는 방법이 문제다. 답은 보이는데, 그 답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과 제도 차원이 함께 가야 하는데, 공업에 관해서는 제도들을 정비하고 있지만, 농,어,축산업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도 정비가 요원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후 위기가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탄소는 계속 배출되고 있고, 배출되는 양을 포집되는 양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연구가 많이 된 탄소 배출에 대해서 '한국의 농축어업이 '3무(無)'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데이터가 없었고, 정책이 없었다. 그리고 정책이 있는 곳엔 감시가 없었다.'(335쪽)고.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공업 분야만큼 농축어업 분야에서도 탄소 배출에 대해서 고민하고,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방법이 실현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까지 탄소 발생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방법이라도 우리는 자꾸 말해야 한다. 미래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를 위해서도.


'소비자로서 저탄소 먹거리를 고르고, 시민으로서 탄소를 줄이는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 그 두 가지가 탄소를 발생시키는 '탄소로운 식탁'을 바꿀 것이다 이제 잘 먹고, 잘 요구하자.'(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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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 - 혹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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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에 이어 리베카 솔닛이 쓴 이야기다. 기존에 있던 이야기를 솔닛이 바꿔서 쓴.


이 이야기에서는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지만, 곧 시작 부분을 바꾼다. 한 아이가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하니, '옛날 옛날 세 옛날에'로 바꾼다. 그러다 과연 이렇게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이루는 존재들은 더 많다. 요정들도 있고, 다른 등장인물도 있고, 하여 솔닛은 '옛날 옛날 열한 옛날에'라고 한다.


이미 시작부터 하나의 이야기는 하나로 끝나지 않고 여러 이야기와 함께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해방자 신데렐라'와 같이 삽화는 아서 래컴의 그림으로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어, 특정 인종을 대변하지 않고 있으니, 그 점도 기억할 만하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이야기를 '깨어 있는 숲속의 공주'로 바꾸고, 공주도 중세시대의 특권계급인 공주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게 동생이 있다고 설정하고, 언니가 잠잘 동안 동생이 활동하는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왕자가 등장해서 공주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공주는 100년이 지나면 자연스레 깨어나게 했으며, 또 왕자 대신 불새로 인해 오게 된 아틀라스라는 인물도 만들어 낸다.


여러 이야기가 합쳐져 이 이야기를 이루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강한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그냥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으며, 갇힌 성에서 나올 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나오게 되니, 능동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다.


가장 능동적인 존재는 동생인 마야다. 언니가 잠들어 있을 때 나타난 늑대를 그림을 통해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하는 존재. 아틀라스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솔닛은 이야기를 통해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남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들.


홀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인물들. 그리고 남 위에 군림하는 인물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의 힘을 통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솔닛처럼 시대에 맞는 이야기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야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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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는 되도록이면 다수가 아닌 소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의문을 가지고 계속 잡지를 만들고 작은 목소리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장의 말. 8쪽.)


  그렇다. 소수가 행복한 사회는 다수도 행복할 수 있다. 가장 약한 사람이 불편함이 없이 살아가는 사회,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 아닌가.


  이제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존재, 청년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대학입시제도를 개편하겠다는 얘기가 최근에 나왔다. 청년들의 미래가 온통 대학에 달려 있는 듯이 대학입시, 대학입시에 목매달고 있다. 누가? 기성세대들이.


기성세대들이 대학이 청년의 모든 것인양 이야기를 하니, 대학에 가지 못한 청년들은 언론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모든 청년들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듯이 대학입시에 대해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그 제도에 대해서 분석하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학에 가지 않는 소수(?소수라고 해야 한다. 대학 진학률이 60-70%대에 해당한다고 하니)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을 위한 정책이 있기는 할까?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것을 마치 실패한 인생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빅이슈 이번 호에서는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청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빅이슈는 소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조앤 K. 롤링이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롤링이 그때 말한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패가 주는 미덕과 상상력의 중요성이다.

(영상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_9-ajTbM838)


빅이슈 이번 호하고도 통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청년 때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늘 성공만 하고 살 수 없기 때문에... 롤링은 이 연설에서 실패로 인해서 자신은 삶의 군더더기를 없앨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고 하고, 그로인해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런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상상력, 그냥 공상이 아니다. 롤링이 말하는 상상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 즉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실패로 인해서 얻게 되는 점과 상상력의 중요성은 청년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빅이슈가 이번 호에서 청년들에 대해서 다룬 것, 롤링의 연설이 떠오른 것도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가연 잘 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말이라도 학원가에 줄지어 서 있는 학원 버스들, 여기에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하니, 상위권 학생들이 의대 지원을 하겠다는 현실, 또 대학입시가 청년들의 전부인 양 떠들어대는 언론들...


대학입시만큼이나 대학에 가지 않는 청년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잘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지 않은 청년들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청년들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빅이슈 이번 호 읽으면서 우리나라 청년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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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정이현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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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정이현이 쓴 '우리가 떠난 해변에'가 있고, 이별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주제로 임솔아가 쓴 '쉴 곳'이 있으며,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로 정지돈이 쓴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있다.


주제는 분명히 다르다. 사랑과 이별이 다르고, 이별과 죽음이 다르다. 하지만 이 셋은 사람이 겪는 일에 속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 또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에 사랑,이별,죽음은 반드시 있다.


어느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이성에 대한 사랑,이별,죽음이든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별,죽음이든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다.


첫소설인 정이현 소설에는 '사랑'이 세 가지로 나온다. 사랑을 종류로 나눌 수는 없지만, 서술자의 사랑은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끝난 사랑에서, 다른 사랑을 인터뷰하러 가는데, 그 사랑 역시 끝나가고 있다. 다만, 서술자의 사랑도 그렇지만 한 쪽에서는 사랑을 끝내지 않으려 한다. 더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랑.


그리고 명확히 표현되지 않지만 또 하나의 사랑이 나온다. 인터뷰 할 대상들의 사랑에 감동받은 사람의 사랑.


하지만 사랑의, 마음을 울리는 그 사랑은 지속되지 못한다. 변하게 된다. 변하는 과정 자체도 사랑이 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인생이 과연 그런가?


좋았던 점이 안 좋은 점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던 점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요소로 작동하지 않는가? 그런 변화까지도 사랑으로 받아들인다면, 사랑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서술자가 병원에서 서성거리며 소설이 끝나듯이.


마음을 울리던 사랑, 이제는 덤덤해진 사랑, 여기서 더 나아가 서로를 견딜 수 없게 하는 사랑, 그래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 그러나 그런 사랑이 과연 다른 사랑인가? 나중의 것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삶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짧을지도 모른다. 순간 순간 변해가기 때문에... 


임솔아의 소설도 그렇다. 짧은 소설이다. 분명한 이별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많은 이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의 나와 이별, 내가 알던 사람들과의 이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이별.


함께 살고 있지만 살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변화를 이별이라고 하자. 관계를 더욱 좋게 만드는 이별도 있지만, 관계를 좋지 않게 변화시키는 이별도 있다. 


소설 속에서는 함께 살지만 너무도 다르게 사는 부부가 나오고, 그들을 가끔 와서 지켜보는 서술자가 있다. 자, 이들은 무엇과 이별해야 하는가? 도시 생활,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견딜 수 없어서 시골로 온 남편과 사람들과 관계맺기를 잘하지 못해서, 오히려 도시 생활에서 일시적인 만남의 기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아내. 그리고 이들에 의해 키워지다시피한 남편의 동생 서술자.

                                                                

하지만 이별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늘상 겪어야 하는 일이다. 소설의 말미에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70쪽)라는 말처럼, 이별 역시 우리 삶에서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그게 삶이다.


정지돈의 소설은 SF적인 요소가 있다. 물론 최근에 읽은 [죽음의 죽음]이란 책에서 이미 냉동인간에 대해서 정보를 얻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꼭 상상에 불과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고 하고 싶다.


세계에서 냉동인간이 있고, 냉동방식이 온몸을 냉동하는 방식과 두뇌(머리)를 냉동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 택하고 있는 방식은 두뇌를 냉동하는 방식이다. 자, 실현불가능한가? 냉동까지는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실현이 안 되는 일은 냉동에서 부활(? 냉동을 죽음이라고 하면 냉동에서 해동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냉동인간을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이다.


뇌-의식만을 되살린다면, 과연 그는 살아난 것일까? 또한 그렇게 육체 없이 깨어난(?참 어떤 말을 써야 할지 헷갈린다) 사람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죽음이란 무엇인가? 아니,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소설의 결말이 반전을 이루고 있어서 이 질문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짧은 내용, 요즘 이루어지고 있는 의과학기술과 관련지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는 소설인데...


살면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짤막한 분량에 담고 있는 소설들이다. 길이는 짧지만 생각하도록 하는 깊이는 길고도 깊은 그런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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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 내 몸에 다른 이가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이의 몸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든 몸에 둘이 있다. 둘은 나와 남이라는 분리 의식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일 수도 있다는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수많은 나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나라는 존재들 사이에 너는 없다. 그러므로 내 몸에 들어온 너는 잘못 들어온 너가 되고, 너 안에 들어간 나는 잘못 들어간 내가 된다.


  과연 그런가? 성적 지향과 몸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 들어간 나, 또는 잘못 들어온 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을 수 있고, 그런 나와 너 중에는 서로 다른 지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너와 나를 어떻게 한몸에서 융합할 것이냐에 있다. 하나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또 하나가 받아들여 다른 하나로 함께 지내는 일.


이번 시집 제목이 된 '슬픈 게이'란 시에서 통합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부만 인용한다.


1

손바닥에 너의 두 눈 / 내 눈을 빼고 그걸 끼운다. / 코와 입 귀를 지우고 / 너의 코와 입 귀를 덮는다. / 머리카락을 뽑고 / 너의 머리카락을 / 씌운다. // 내 얼굴은 사라지고 /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 / 웃는다 너처럼. / 너무나 생생한 예전의 너의 미소 / 그걸 흉내낸다. / 내 생각이 너의 생각이도록 / 반복하고 반복한다.  // 너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냐. /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거지.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슬픈 게이' 중 부분. 86쪽)

 

쉽지는 않은 일이다.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슬프다. 하지만 슬프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 노력한다. 살아가려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힘든 일이지만 너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게이 1'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나타난다.


게이 1


내 몸을 다 / 뒤지고 돌아다녀도 / 내 들 곳은 없어라, 내 몸의 / 벼랑에 서서 생각하느니 / 저 꽃의 몸으로 / 저 바위, 저 파도의 몸으로 / 저 새의 몸으로 /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껏 /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 허공 중에 흩어나는 너의 향기 따라 / 나를 던지느니, 저 포말의 몸으로 태어날 건가 / 벼랑의 컴컴한 틈에 아슬아슬히 /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나를 잡아채니 /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 // 한 꽃 속에 모든 여성이 들어 있고 / 한 여성 속에 모든 꽃이 숨어 있으니 / 나는 내 육체의 경계를 빠져나와 / 네 몸으로의 험난한 벼랑을 기어오른다네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4쪽.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라는 구절을 통해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음을, 그래서 너를 추구하는 일이 결코 나를 잃는 일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를 이루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운 경우가 있다. 스스로도 버거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인은 이를 '게이 4'라는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게이 4


내 몸이 / 내게 맞지 않다 // 몸에 갇혀 /끙끙거리는 / 나 아닌 / 몸 속에 / 다른 이의  / 애타는 / 목소리. // 덜컹거리는 몸에 실려 / 나의 일생을 떠메고 가는 / 잘못 입은 너의 / 몸의 / 쓸쓸한 뒷모습.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8쪽.


여전히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줄 필요가 있을까? 그가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나와 너들을 받아들이고 '너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역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준 채호기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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