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빨치산의 딸 1~2 세트 - 전2권
정지아 지음 / 필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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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금서였던 책. 금서가 된 이유는 단순하다. 빨치산을 다루고 있기 때문. 빨치산이 누구인가? 북한을 주적으로 하고 있는 지금, 빨치산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었으니,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못하는 존재다.


오죽하면 종북좌빨이라는 말이 상대를 옥죄는 용어로 쓰이겠는가? 그럼에도 예전처럼 금서로 지정해서 판매를 금지할 수는 없다. 형식적 민주주의나마 이루었기 때문인데...


예전에 발간되었다가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다시 시일이 흐른 다음에 발간이 되었다는 소설.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어보지 못했던 소설.


그러다 의문이 생겼다. 이상하네... 소설을 읽다보니 이태의 남부군 이야기가 나오던데, 남부군이야말로 빨치산의 수기 아닌가. 그런 빨치산 수기도 판매가 되었었는데, 어째서 소설인 이 작품은 판매가 금지되었지?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텐데... 하다못해 남부군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지 않은가. 도대체 이 소설과 남부군이 무엇이 다르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런 궁금증은 읽어가면서 해소되겠지 했는데, 그래도 소설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처음 부분은 제목에 걸맞게 빨치산의 딸이 자라면서 겪는 일을 중심으로 서술이 된다.


  빨치산의 딸. 좀더 강하게 말하면 빨갱이의 딸. 1970년대 빨갱이의 딸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서 취업에도 제한이 있었기 때문. 특히 공무원이 되려면 신원조회라는 것을 해서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친척 중에 없어야 했다.


  하물며 아빠-엄마가 빨치산 출신이라면 살아가는데 엄청난 제약을 받을 테다. 그래서 좌절에 빠진 딸의 성장사가 소설의 첫부분을 장식한다. 슬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님에도 자신의 인생을 뜻대로 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그러다 딸은 차츰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의 결과가 소설에서 펼쳐진다. 아빠의 빨치산으로서의 삶과 엄마의 빨치산으로서의 삶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개인의 경험에 기반해서 서술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사실성이 높은 소설이다. 그것도 직접 체험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니.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아산, 백운산 등등 빨치산들이 지내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그럼에도 그들이 지녔던 사상, 희망이 소설 속에서 가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이런 가감없는 표현이 판매금지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지운다고,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빨치산들이 벌였던 일들 역시 우리 현대사의 일부분이다. 그러니 가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산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원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으며, 그렇게 힘든 조건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야 한다.


사상이 다르다고 해도 역사 속에서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소설은 험난한 빨치산 생활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그런 조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지냈던 생활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좌절. 그런 역사가 있었음을 소설은 너무도 잘 보여준다. 소설로 읽어도 되지만 빨치산의 수기로 읽어도 좋을 작품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으면 될 것을... 아직도 남과 북이 나뉘어 있는 이 현실이. 그리고 소설을 다 읽으면 어떤 점에서 이태의 [남부군]과 다른지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남한에 남겨진 빨치산들.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살아갈 수 없게 된 그들이 느꼈던 마음에 대한 서술에서 두 작품은 차이가 있으니...


이 소설을 읽은 다음 같은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 그 후 그들의 삶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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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최후의 심판 + 두 개의 세계 + 삼사라 + 제니의 역 +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한이솔 외 지음 / 허블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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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당선작 1편과 우수작 4편. 작가들은 낯설다. 낯선 만큼 신선한 느낌을 준다.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처럼 소위 SF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소설. 하긴 소설에서 과학적 상상력은 늘 있어왔던 일이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다만 요즘 이런 소설들이 장르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다섯 편의 소설은 내용이 다르지만, 공간을 기준으로 나누어보면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지구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 다른 하나는 지구가 아닌 우주(공간)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


먼저 지구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은 한이솔이 쓴 '최후의 심판'과 박민혁이 쓴 '두 개의 세계', 최이아가 쓴 '제니의 역'이다. 지구가 공간적 배경이지만 사건의 전개는 무척 다르다.


'최후의 심판'이 인공지능을 다루고 있다면, '두 개의 세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들이 나무로 변해가는 디스토피아(등장인물들의 발언에 따라 디스토피아로 또는 다른 세계로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두고는 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나무로 변하는 일은 재앙으로 주로 여겨지니,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제니의 역'은 다문화 시대에 소통을 위해 도입한 로봇(인공지능)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공지능이 판사가 되어 판결을 한다? 이것은 지금도 상상하고 있는 일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하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는데, 소설은 그 점에 착안하고 있다.


하지만 제목이 최후의 심판이다. 누구를 심판한다는 것일까? 소설에서는 인공지능 솔로 3.0을 재판정에 세운다. 인공지능 판사로 탁월한 판결을 하던 솔로 3.0이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선다.


재판정에서는 검사와 솔로 3.0의 논쟁이 전개된다. 결국 인공지능은 파괴되고 마는데, 최후의 심판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말일까? 아니면 인간이 인공지능을 창조해 신의 위치에까지 오르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함일까?


결국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인공지능을 심판하지만, 심판 당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의미로,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배경으로 삼는 장르소설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과 같은 소설은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두 개의 세계'와 같은 소설은 지금도 진행 중인 재앙에 대해서, 그것도 인간이 모두 알 수 없는 질병들이 계속 창궐하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사람이 살아남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서, 다가올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인간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 인간인지가 나타나 있지 않다. 하긴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신이 아닌데...


'제니의 역'은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한다. 다문화 가족이 많은 지역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로봇 제니를 도입했다. 각 가정에 도입된 제니는 여러 언어를 통역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게 한다. 그럼 된 것 아닌가? 아니다. 권력은 활발한 의사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권력은 일방적인 전달을 원할 뿐이다. 자신의 말을 관철하려고 하지 다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의 말에 거역할 수 있게, 의사소통이 잘되는 사회가 되면? 그때는 권력구조가 바뀐다.


따라서 권력자들은 언어를 통제한다. 활발한 의사소통을 막는다. 그 점을 다문화 사회에 도입된 의사소통 로봇(일도 잘하는 로봇이니, 만능로봇이라고 해야겠다)인 제니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제목이 명확하게 해석이 안 되는데, '제니의 역'에서 '역'이라는 말이 역할의 줄임말인지, 또는 수학에서 반대를 뜻하는 '역'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역'은 두 개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이것도 문제다. 다문화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잘 되게 하기 위해 한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이주민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소리는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주해 온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원주민들도 이주민들의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배워서 소통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사람들에게는 제니의 역할이라고 '역'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니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화가 문제 없이 이뤄지도록 해주고 있기 때문에, 다문화 사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제니가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니의 역은 제니의 '역할'이다.


반면에 기존에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제니의 역'에서 '역'은 반대다. 부작용이다. 그들의 권력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온 이 부분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확해진다.


'... 그는 집사람이 제니를 잘 활용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 때문에 자신이 피곤한 일이 많아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평소 같으면 집사람이 모르고 지나쳤을 내용을 이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긴다는 것이다.' (208-209쪽)


의사소통이 원활해 지면서 권력에는 틈이 생긴다. 그동안 알 수 없던 사실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알면 과거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들에게 제니는 '부작용'이다. 이들에게 '제니의 역'은 '제니의 부작용'이다. 그리고 이런 권력 지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 부분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제니를 파괴하는 원주민 남성. 나중에 제니의 부작용만을 보도하는 언론. 그렇게 사회는 다시 한쪽의 언어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누군가의 희생 위에 유지되는 사회가.


장르소설의 장점이 잘 나타난 소설이다. '제니의 역'은. 읽으면서 여러모로 토론이 가능한 그런 소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읽을 만하다. 조서월의 '삼사라'와 허달립의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가 이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이다.


우주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지구가 살기 힘들어져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야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지구가 인간이 살기 힘든 행성으로 변해간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소설들이 창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하려는 인간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삼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윤회를 뜻한다고 한다. 인과응보라고 해도 좋겠다. 즉 지구와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인간들은 다른 행성에 정착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행태를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른 행성에 도달해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음을 이 소설 '삼사라'는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다. 지구를 파괴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우주 행성에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역시 마찬가지다. 선장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들이 다른 행성의 원료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 이는 지구에서 사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결국은 지구로, 인간의 생활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결국 SF라고 하는 장르소설은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다른 소설들과 같이.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소설집이다. 


특히 이 중에서 '제니의 역'은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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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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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페크의 단편소설집인데,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짝을 이룬다. 그냥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해도 되겠는데... 이 작품집에는 사건이 많이 나온다. 주로 형사(경찰)와 범인의 이야기인데...


'푸른 국화'라는 소설은 반전이 재미있다. 합리적인 추리로 푸른 국화를 찾으려 하지만, 찾지 못하게 되는데, 이 합리적인 추리를 막는 것이 바로 '보행 금지' 표지판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이 표지판을 보고 더 이상 가지 않는다.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소녀만이 자유롭게 통행했던 것. 우연히 푸른 국화가 있는 관사를 발견한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그렇게도 찾았던, 온갖 합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찾았던 푸른 국화를 찾을 수 없던 이유가 바로 그들을 합리적으로 교육했던 것에 있었음을... 자신이 지닌 관점을 벗어던졌을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 소설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신만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지... 그것이 사회에서 받은 교육으로 더 얼마나 많이 강화되는지, 이렇게 자신은 합리적이라고 믿고 살지만, 그것 때문에 놓치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집에서 요즘 우리 사회와 관련지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는 소설이 '살인 미수'라는 소설이다.


조용히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유리창이 깨진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다. 다행히 빗나갔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경찰을 부르는 일. 경찰과 대화를 하는 도중, 당연한 말들이 오간다.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이 있는가? 당연히 없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죽임을 당할 만큼의 원한을 사는 일이 거의 없으니... 경찰이 간 다음 곰곰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하지 않았을까?


주인공은 많은 인물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일들이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음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들이 상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경찰에게 가서 없던 일로 해달라는 것.


이 소설을 읽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데, 좀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권력자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잘못을 하고 더 많은 상처를 주고,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데, 그들은 이 소설에 나온 사람처럼 자신을 되돌아볼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 저 사람들 왜 저래 하고 넘어가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권력자들을 향해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을 응징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성찰을 하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다른 말들을 듣지 않으려고 첩첩이 담을 쌓지 않는가. 하다못해 누군가는 차벽을 쌓기도 했으니... 차벽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벽이고, 그런 사람벽보다 더 위험한 것이 바로 자신이 쌓는 마음의 벽 아닌가.


나는 옳다. 남들은 잘못됐다. 나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처벌받아야만 한다. 도대체 왜 내 진심을 몰라줄까?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쌓는 벽. 그 벽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조금만 자신에게 안 좋은 말, 행동이 보이면 더욱 벽을 쌓는다.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곰곰이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귀하다.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푸른 국화'에서 사람들을 가리는 사회적 통념이 개인에게로 오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못하게 막는 벽으로 작동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벽들은 자신 너머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을 틀에 가두게 된다.


이 틀을 부수는 것, 통념을 벗어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고, 반전이 있는 소설이 많지만 이렇게 우리들 삶을 성찰하게 하는 소설들도 있으니 차페크의 소설, 여러모로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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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2024-01-27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책을 엄청 좋아하시는 분인가봐요. 독서량이 엄청 나시네요ㅎ

kinye91 2024-01-28 07:34   좋아요 0 | URL
책읽기를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읽고 있어요.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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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짤막한 소설들이다.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으니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그냥 읽으면 수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엽편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짧은 소설. 그러나 이 짧은 분량에 반전이 들어 있다. 이런 반전으로 인해서 글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주로 범죄에 관한 소설들이 많은데,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도 좋고, 짤막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들의 인생이 이러한 일들이 엮이고 엮어서 이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삶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필연을 만드는 것이 우연들이 아닐까? 우연이 겹치고 겹쳐 우리들의 삶을 필연으로 이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는 유독 도덕적인 도둑(살인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으려고 한다. 이게 정의다.


적어도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알고, 그 행위가 지닌 의미도 인식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그것이 바로 삶임을 생각하게 하는데...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냥 책임을 진다. 어떤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


'결혼 사기꾼'이라는 소설을 봐도 그렇다. 결혼을 빌미로 사기를 치지만, 그는 자신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비용을 제하고 순순히 경찰에게 잡혀간다. 그것도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넘기려고 하니, 꼭 그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라고 하면서 기다리기도 한다.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첫 소설인 '늙은 죄수의 이야기'도 그렇고, '도둑맞은 선인장'도 그렇다. 이들은 행위를 부인하지 않는다. 인정한 다음 그에 걸맞는 처벌을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의 소설들은 무겁다기보다는 가볍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풍자보다는 해학이라고 해야 하나. 슬며시 웃음을 머금게 되는 소설들이 많다. 


소설 속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겨운 피냄새가 아니라 우리들 삶에서 겪지 않았으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불쾌한 일들 정도로 여기면서 읽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그냥 웃음으로만 넘길 수는 없다. 해학이 그렇지 않은가. 웃음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진실들. 그 점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있으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가볍게 읽기 시작해도 좋다. 읽을수록 매력을 느끼게 되는 차페크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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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나라 이야기 세트 - 전7권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스토리 북스)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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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 마법사의 조카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첫권이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를 봤다면, 이 첫권은 좀 생소할 것이다. 주인공이 영화와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그렇지만 첫권은 바로 나니아의 시작이다. 나니아라는 나라가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나니아에서 놀라운 모험을 하는 네 남매의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그러니 이 첫권은 나니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또 마법의 옷장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디고리와 폴리가 등장한다. 디고리의 외삼촌이 만들어낸 반지로 다른 세계로 가게 된 아이들. 이 아이들이 다른 세계에서 아슬란이라는 사자를 만나고,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젊음, 생명의 사과 - 창조와 사과, 또 아슬란은 아담의 아들, 이브의 딸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니, 이 부분만 보면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론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정확히 사과라고는 나오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사과라고 하니, 그 사과가 첫권에 등장하는 것은 기독교 문화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가 나온다.


이 사과를 가지고 와 엄마의 병을 고치는 디고리... 그가 남은 사과 몸통을 정원에 심었더니, 곧 사과나무가 되고, 나중에 사과나무가 쓰러졌을 때 디고리가 그 나무를 가지고 옷장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첫권이 끝난다.


그러니 첫권은 다음에 전개될 나니아 모험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마법의 반지가 아니라 옷장을 통해서 나니아로 가게 될테니 말이다.


아마도 첫권은 나중에 쓰여졌을텐다. 해설을 읽어보면 이 전집 2권이 먼저 쓰였다고 하니 말이다. 2권부터 시작하기에 개연성이 약하니, 아이들이 나니아로 가게 만들기 위해서 옷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왜 디고리 교수의 집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했으리라.


하여 첫권은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다른 아이들로 인한 모험이 시작된다.


2권 --- 사자와 마녀와 옷장


영화로도 만들어진 부분이다. 네 남매의 모험이 그려진 부분. 마녀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 아슬란의 희생과 부활이 나타난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대속하기 위한 아슬란의 행동. 기독교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고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하지만 두려움에 굴복하기 보다는 두려움을 딛고 나아갈 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이번 편이 보여주고 있다.


마녀의 겨울에 맞서는 네 남매의 모험이 자세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마녀로 인해서 고통받는 세계,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네 남매의 모험이라고 하지만 아슬란을 중심으로, 나니아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급상황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는 비버 부인이라든지, 자신에게 온 손님을 환대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3권 ---  말과 소년


  이번에는 나니아가 아닌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에서 나니아로 가는, 정확히는 아첼랜드로 가는 여정이 나온다.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나니아에서 칼로르멘으로 납치된 말이 둘 나오고,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 아라비스라는 소녀도 나온다. 


  샤스타에서 코르가 되는 이야기. 칼로르멘에서 나니아 이웃인 아첼랜드의 왕자가 되는 아이. 그 과정에서 겪는 모험. 그리고 이 모험을 전부 주관한다고 할 수 있는 아슬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샤스타는 배로 강을 따라 내려오다 어부에게 발견이 된다. 버려진 아이, 구출, 그리고 탈출. 이런 과정은 보통 영웅이야기에서 많이 나온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자신을 찾는 이야기. 샤스타가 코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성공이 아니다.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아첼랜드를 구해내는 역할을 하게 되니, 이는 거대한 성장 서사가 된다. 


이런 구절이 있다.


'샤스타는 선한 일을 하면 그 대가로 항상 더 힘들고 막중한 일이 기다리게 마련이라는 걸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170쪽)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선한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더 선한 일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나니아 이야기 3권은 한 아이의 성장으로 끝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우리가 이야기에서 기대하고 있는 결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모세'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 그런 걸까? 아닐 것이다. 첫권이 천지창조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는 대속이 나온다면, 3권은 모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 이야기가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 이야기에서 성경의 이야기, 또는 교훈을 떠올리기는 쉽다.



4권 ---- 캐스피언 왕자


나니아도 세월이 흐른다. 천년 왕국이 있기는 힘들다. 평화롭던 나니아 역시 다른 왕조로 바뀐다. 왕조의 흥망성쇠야 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왕조가 교체되면서 나타나는 차별과 탄압이 문제다.


융합이 되면 모르겠지만, 기존 문화, 관습을 바꾸려는 과정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그 저항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폭력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억압으로 이어지면서 또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다시 왕조 교체가 일어날 시기가 온다. 나니아가 그렇다. 이번 권에서는 나니아가 텔마르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텔마르를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니아 이야기에서는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따지지는 않는다. 그가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나니아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


캐스피언 왕자 역시 텔마르 출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니아의 전통, 문화를 존중한다. 그러니 그는 통치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고난과 성공 과정이 펼쳐진다. 그냥 나니아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으니, 이 과정에서 피터 등이 다시 등장한다. 캐스피언이 성공하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로서. 그리고 이번 권에서는 피터와 수잔이 다시는 나니아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밝힌다. 그들은 나니아로 올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


이번 권을 읽는 아이들에게는 출신보다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자신의 출신을 고집하는 난쟁이가 있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난쟁이도 있으며, 작은 몸집으로도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난장이들이 나오니 말이다. 게다가 텔마르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캐스피언조차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통치자로 받아들인다.


이는 출신이나 신체, 피부색 등이 그 존재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은영 중에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게다가 가장 어린 루시의 눈에 먼저 아슬란이 보이고, 나무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순수한 마음, 열린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또한 이번 권은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점도 있다. 압도적인 무력 우위를 보이는 집단에 대항해 나무들이 함께 하는 것. 반지의 제왕에서는 엔트라고 나오는데, 이 책애서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즉, 순수한 마음, 정의로운 일에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함을 보여준다.


5권 ---새벽 출정호의 항해


  이번 권은 바다 여행이다. 4권에 나왔던 캐스피언 왕자가 숙부에 의해서 쫓겨난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에드먼드와 루시, 그리고 유스터스와 함께하는 과정이 나와 있다.


  모험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번 권에서는 유스터스의 변화가 눈에 뜨인다. 


  남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제 감정대로만 행동하려 했던 유스터스. 그러나 모험을 통해서 남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용으로 변했을 때 이 점을 깨닫게 되는 데, 탐욕이 눈을 가리고,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캐스피언 역시 아버지를 옹호하던 기사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을 겪는다. 가령, 노예제를 알게 되고,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가를 몸소 체험하게 되며, 탐욕으로 금으로 변해버리는 모습도 보고, 두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때 그곳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이번 권은 여기까지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여기까지라는 말은 자신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춘다는 말이다. 이는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자신은 만족해서 잠을 자겠지만, 남들이 보면 더이상 무언가를 하지 않는 상태에 불과하다.


즉 사람들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 새벽 출정호의 모험은 생쥐 리피치트를 통해서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6권 ---은의자


  또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이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세계에 있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질. 그리고 전 권에 나왔던 유스터스


  질은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을 피해 있다가 유스터스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나니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는 사라진 왕자를 찾기 위한 모험.


  사라진 왕자를 찾는 과정에서 아슬란이 준 힌트가 있고, 그 힌트를 잘 따라가야 하는데, 막상 일에 닥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세상 일이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계획한 대로만 일이 되면 좋겠지만, 늘 현실은 계획을 넘어선다. 이들의 모험도 그렇다. 


  나니아 이야기의 전 편들이 그렇듯이, 이번 편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생물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마슈위글이라는 종족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퍼들글럼이다. 셋이서 떠나는 모험.


유혹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들은 지하세계에 갇혀 마법에 걸려 있는 왕자를 만나고, 마녀를 퇴치한 뒤 나니아로 돌아온다. 


거인들에게 잡혀먹힐 뻔하기도 하고, 지하세계를 탐험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위험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위험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음을 '은의자'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질과 유스터스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라고 한다면, 질은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을 이겨낼 힘을 키워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온갖 위험이 있는 모험 이야기. 그런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늘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어려운 지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또는 포기하고 굴복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겨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힘을 얻게 된다.


6권을 읽으면서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7권 --- 마지막 전투


  나니아 나라 이야기 마지막 권. 나니아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나니아의 멸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것은 현세에서 내세로 넘어가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현세가 멸망하기 위해서는 혼란이 계속되어야 한다. 혼란을 부추기는 인물이 나온다. 원숭이 시프트가 그 인물인데, 이 원숭이는 우연히 얻은 사자 가죽을 당나귀에게 씌워 아슬란인 척하게 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얻는다.


  마치 적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그런 발상. 그리고 혼란, 전쟁. 결과는 나니아의 멸망.


  단지, 나니아의 멸망으로 끝났으면 아이들에게 읽히기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으로 끝난다.


그동안 나왔던 인물들이 모두 나와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천년왕국. 그것이 생각난다. 굳이 기독교 식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현세를 벗어난 내세가 펼쳐진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것은 현실이 불만족스러울수록 더욱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현실과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한걸음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상,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 이야기의 힘이다.


7권까지 오면서 많은 모험이 펼쳐지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선(善)이다. 선을 추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7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나니아라는 환상 속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모험. 그 모험을 통해 성숙해가는 아이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될 아이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그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 [나니아 나라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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