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 소설.영화.방송 삼단합체 크리에이터 이재익의 거의 모든 크리에이티브 이야기
이재익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프롤로그에 <나는 가수다>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일까?'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은 크리에이터라고 말한다. 크리에이터?

 

굉장히 내용이 진지하고 어려울 것 같지만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 책에서 이재익은 크리에이터에 대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오직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를 한다. 그의 경험, 그래서 재미있다. 쉽다. 그렇지만 무언가 남는다.

 

이런 크리에이터에 대해 이재익이 말해주고 있다. 누가 크리에이터이고, 어떻게 해야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으며, 어떤 모습의 크리에이터가 좋은 사람인지를...

 

크리에이터란 말이 귀에 거슬린다면 그냥 우리 식으로 창조자라고 해도 되겠고, 아니면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 정도, 그것도 아니면 그냥 신(神-종교적 의미의 신이 아니고,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뜻에서)이라고 해도 되겠다.

 

21세기가 되면서 우리는 이제는 단순한 정보의 시대도, 지식의 시대도 아닌 창의성의 시대라고, 창의적인 사람이 살아남는 사회가 되리라고 했었다.

 

창의적인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크리에이터라고 해도 좋으리라. 남들이 생각 못했던 것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단지 자신의 생각 속에 가두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또 볼 수 있게 만들어내는 사람이니 말이다.

 

첨단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정보를 몰라서 일을 못한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인터넷이든, 아니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든 우리는 원하는 정보를 쉽게 그리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그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다 아니다를 결정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

 

정보는 이제 평준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고급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서 알기는 힘들고, 또 그러한 정보는 고도의 지적 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정보는 평준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평준화된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 활용의 면에서 창의적인 활용을 하는 사람이 남보다 앞서 갈 수 있게 된다. 이들을 우리는 크리에이터라고 부른다.

 

크리에이터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 책에 나와 있는 이재익이라는 사람으로 한정해서 보면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라디오 피디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광고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영화계에 종사하는 감독 등과 또 다른 예술계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있지만,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크리에이티브하지 않다. (영어가 많이 들어간다. 크리에이티브를 창의적이라고 생각하자.)

 

따라서 이재익은 크리에이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야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는 자신이 이미 어느 정도 크리에이터로 남들에게 인식이 되고 있으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자신이 직접 경험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게 이 책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재익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크리에이터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자신이 소설가로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도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가 경험을 서술하면서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우리는 그가 펼친 세계를 따라가면서 보게 되는데, 단지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직접 자신의 작품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어서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일은 시나리오 작가와 라디오 피디의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그래서 소설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시나리오가 어떻게 구성이 되며 어떻게 영화화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얽힌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냥 재미로만 읽어도 된다. 재미로 읽다보면 흥미를 느끼고 흥미를 느끼다보면 무언가 찾아보려 할테니 말이다.

 

세 가지 크리에이터의 삶을 하나로 통합하여 살고 있는 이재익. 어쩌면 크리에이티브하다는 말은 한 분야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그 분야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통합시켜낼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고 있고, 이를 결과물로 만들어낼 끈기와 실천력이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 점이 이 책에서 이재익이 말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고...

 

일상에 매몰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 매몰돼 더이상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삶은 이거다라고 규정하고 산다. 이는 이미 크리에이터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사람, 크리에이터를 직업으로 갖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유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삶은 창의적인 삶이고, 우리 모두는 창의적인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재익은 세 분야에서 크리에이터로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각자 어떤 분야에서 크리에이터로서의 삶을 살지 이재익의 이야기를 통해 꿈꾸고 실현하려 노력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삶이 훨씬 즐거워질테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약용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을까? 정약용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실학자가 있을까? 아마도 박지원 정도... 서로 다른 길을 간 사람임에 틀림없는데... 왜 이들은 만나지 않았을까 했더니... 이 책을 읽고 만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의 길은 엄연히 달랐으므로...

 

박지원은 에둘러서 시대를 비껴갔다고 할 수 있다면, 정약용은 정면으로 시대를 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명문거족 출신으로 과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연암과, 과거 공부에 폐단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지 위해서는 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과거시험에 임하는 다산.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에 쓴소리를 하던 연암과 세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던 다산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다른 세상에 살던 사람이었으리라. 다산의 집안이 어려웠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오해였다는 사실. 8대 옥당에 오른 집안, 이도 역시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이들은 당시 세를 잃은 남인 계열이었다는 사실이 정약용의 집안을 몰락한 집안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싶었다. 몰락한 집안이 아니라, 정약용 아버지도 벼슬살이를 한 나름 명문 집안인데 말이다.

 

어쩌면 정약용의 삶을 정리하는데는 3부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3부작이 아니라 2부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의 삶은 2부작이고, 나머지 생은 에필로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는 그가 벼슬살이를 하던 때, 이 때를 1부작이라고 한다면 두번째는 유배생활을 하던 때, 이 때가 2부작이다. 그리고 해배가 되어 자신의 고향에서 말년을 보낼 때 이는 인생의 3막이 아니라, 그냥 2막에 이어서 펼쳐지는 뒷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분량을 보아도 그렇고.

 

그렇다면 다산의 삶은 벼슬살이를 하던 젊은시절과 유배생활을 하던 중년의 나이에 절정을 맞이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삶도 이 시기에 걸쳐 있고...

 

그의 벼슬살이는 정조라는 임금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정조가 없었다면 다산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조의 후원하에 승승장구하던 다산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고 한다. 이를 아렌트의 용어로 하면 행위에 나아간 것이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 공적인 장에 나아가는 모습.

 

하지만 우리에게 다산이 다산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행위자로서의 다산이 아니라, 판단자로서의 다산이다. 행위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유,의지의 단계를 지나 판단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정치 행위를 사유하고, 판단하게 되고, 세상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시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유배자로서의 다산이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실학자로서의 다산이다.

 

한 걸음 물러나 있을 때, 무언가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눈이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르익은 사상을 책으로 펴내는 일이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내는 일이다. 이러한 정리는 유배생활 18년이란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유배생활을 통해 농익은 그의 사상이, 그의 책으로 엮어지고, 이 책들이 우리를 다산에게 이끌고 있다. 운명이란 때론 엉뚱한 방향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 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다산의 경우가, 그의 형인 손암 정약전의 경우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정조가 더 오래 살아서 이들이 정치의 영역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과 같은 그들의 저서를 만나보지 못했으리라. 이렇게 우연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그의 유배생활이 지금껏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자양분으로 남아있으니, 이는 그를 행위에서 판단으로 이끈 운명의 바람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다산의 생애를 이토록 자세하게 치열하게 따라가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 부분에서 김남주의 시가 나오는데, 이 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고, 곳곳에 나오는 다산의 글과 시들이 우리를 다산에게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산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다산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학문이라는 사실. 현실로 돌아와야만 다산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맑스가 했다는 말. 세상을 해석하기만 해서는 안되고,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다산이 행위에서 판단으로 나아갔다고 했지만, 이는 순차적인 개념이 아니고, 판단을 통한 행위로 다시 되돌아와야지만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혼돈의 시대. 솔직히 지금, 다산과 같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산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불러내어야 하지 않나?

아니, 다산을 그리워만 하지 말고, 우리가 다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다산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제목은 "김수영을 위하여"지만, 실제 내용은 바로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을 위하여이다. 진정한 삶, 단독자로서의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김수영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어렸을 때였던가, 아니 머리가 조금 커지고 혁명이라는 단어를 마음 속에서 좇아가려고 할 때였으리라.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란 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단어에서 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자유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존재를 걸어야 한다는 사실, 그래서 그러한 자유를 추구하는 혁명은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이 시를 통해서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직도 관념 속에 있는 개념이지만, 김수영의 이 시를 읽으며 격동의 80년대 젊은 시절을 보내는 나는, 관념 속의 자유가 실제로 피를 동반하면서 나타나는 모습을 목격했었고,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독하게 지내야 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자유로운가 하면 아니다, 라고 답해야 한다고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는 말한다. 우리가 표면상 느끼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가장한 통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고, 김수영을 예로 들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은 김수영에 관한 책이지만, 강신주 자신에 대한 책이기도 하리라. 그리고 자유를 꿈꾸는 우리들에 관한 책이기도 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나아갈 때 김수영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되리라.

 

스승을 떠나보낼 때, 이는 스승을 좇는 행위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줄 때, 그 때가 바로 스승을 떠나보낼 때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만나는 김수영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를 떠나보내지 않고, 그를 안고, 흠모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이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인 강신주가 하는 말도 이러리라. 어쩌면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옛선사들의 가르침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언제까지나 스승을 좇으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스승의 그림자로만 살아가게 될테니 말이다.

 

강신주는 "달나라의 장난"을 읽고 위안과 삶의 방향을 찾았다고 하지만, 나는 "푸른 하늘을"이 더 좋았다. 아니 어떤 시보다도 먼저 접했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시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김수영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단독자로서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살 때 그 때서야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으로 이런 김수영에게는 참여시니 순수시니 하는 유파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특히 이 책에서 김수영의 자유를 향한 추구를, 또는 그의 시의 원점을 4.19가 아닌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극도로 자유가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김수영의 모습. 그가 그토록 치열하게 자유를 추구했던 이유는 수용소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자유를 잃은 사람이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사이비 자유주의자들을 향해 진정한 자유는 이것이라고 외치는 모습. 그런 삶이 시로 하나하나 살아나는 모습. 이를 강신주는 이 책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간 많은 문학적 논의가 많은 시인이 김수영이지만, 이렇듯 자신의 삶과 김수영의 삶, 그리고 시를 종합하여 하나의 독자적인 책으로 만들어낸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김수영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성찰이 필요한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윤상인.박이진 옮김, 오자키 마리코 진행.정리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에 겐자부로 하면 일본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두 번째 사람이다. 그의 문학이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다는 얘기다. 그의 일생에 걸친 작품 이야기를 한 책이 이 책이다. 대담 형식으로 그의 삶과 작품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프랑스 어법에 관한 공부와 일본어 어법에 대한 공부를 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러한 문체 덕분에 유럽을 비롯한 서구 여러나라에서도 그의 작품이 읽힐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노벨 문학상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을 탔을 때 그의 반응이 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이 말. 천상 그는 소설가이다.

 

그럼에도 부끄럽지만 나는 그의 소설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또다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음에도 도저히 감동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는 분명 경향이 다른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많이 번역이 되어 있는데...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그에 대해서 모른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수필집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나무 아래서"를 아주 좋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 책으로 인해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후쿠시마 사태에서도 그는 앞장서서 원전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렇게 그가 사회 문제에 참여하게 된 것도 그의 치열한 작가 정신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진실한 친구로 사귀었던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말이다. 그는 일본의 평화 헌법을 지지하는 운동을 하고, 오키나와의 진실을 규명하는 운동도 하며, 요즘에는 원전 반대 운동도 하고 있으니, 그의 이러한 운동은 그가 중심부를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라, 주변인을 자처하는 그러한 경향을 지닌 인물이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주변인이기에 세상의 중심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그럼으로 인해 그의 객관적인 시선이 작품 속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소설로도 유명하지만, 그의 아들 히카리 때문에도 유명하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들, 그러나 그 아들은 음악으로 자신의 세계를 이어가고, 무려 40년이나 아들의 잠자리에 담요를 덮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이 작가의 생활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이 아들을 중심으로 그의 소설이 영감을 얻어 펼쳐지기도 했다는 사실도 빼먹을 수 없는 일이고.

 

무엇에나 신중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는 오에 겐자부로. 그의 문학 활동 50년을 맞이하여 총결산 격으로, 아니 한 시대를 정리하고 다른 시대를 준비하는 격으로 마련된 이 대담에서 우리는 한 작가의 전생애와 전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신비에 휩싸이지도 않고, 또 세상과 절연하지도 않고, 오만에 빠지지도 않고, 자신이 할 일은 작품을 쓰는 일이라는 사실을 굳게 지켜가고 있는 작가. 그의 60주년 작품 정리도 나오길 바란다. 그는 그럴 일은 없겠지요 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문학의 죽음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 시대. 문학은 결코 죽지 않음을 오에 겐자부로는 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을 찾는가 -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대안 노벨상 수상자들 이야기
게세코 폰 뤼프케 & 페터 에를렌바인 엮음, 김시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루쉰이 생각났다. 그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 묵묵히 밀고 나갔던 사람. 그의 말이라고 하는 이 말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곳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에 길이 처음부터 길이 아니듯이, 희망도 처음부터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절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때 나타나게 된다. 그것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쉬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제목이 "희망을 찾는가"다. 물음표가 찍혀 있지 않다. 그래서 "너 희망을 찾고 있니? 그렇다면 우릴를 봐."라고 하는 듯하다. 너는 지금 이 시대에 절망하여 좌절에 빠져 있지 않고, 이 시대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그것은 희망을 찾는 것이다. 희망을 찾는다면, 이미 그 희망을 찾아 떠난 사람들의 길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가라. 그렇다면 그 길은 이제 갓 난 작은 길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는 큰길이 될 것이라고 하는 듯하다.

 

대안 노벨상, 바른생활상이라고 한다. 처음, 이 책에서 바른생활상이 본래는 노벨상으로 주어지길 바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윅스퀼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에게 노벨상 중에서 생태학상이라는 하나의 상을 더 만들어 주면, 자신이 그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그러나 노벨상 위원회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더이상 망설이면 안된다고 생각한 윅스퀼은 대안 노벨상인 바른생활상을 만들어 수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벌써 몇 십년이 지난 얘기다. 이 상 덕택에 바른생활상을 탄 사람들의 활동이 알려지기 시작해 희망의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는 노벨상을 탄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만큼 주류 세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이들의 활동이 그냥 묻혀지지는 않았다. 이것이 윅스퀼이 상을 만들어 수여한 이유이기도 하다. 상을 받은 사람들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의 활동은 사람들의 관심을 자연스레 끌게 된다. 그렇게 하다 보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여기서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하나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길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만든 길들이 서로 연결이 되면 우리는 더 많은 희망의 길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희망의 길들을 연결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해주고 있어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세상을 한 번에 바꿀 수 없다면 천천히 바꾸면 된다. 우공이산이라는 어려운 말을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속담 중에서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 여리고 여린 물방울들이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한 방울... 계속 바위에 떨어진다면 결코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바위에도 어느 순간 구멍이 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희망의 역할이다.

 

루쉰이 말한 길도 이와 같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시작을 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희망이 현실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할 수 있다는, 아니 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사례들을 많이 접해야 한다. 긍정적인 사례들을 자꾸 접하다보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사상가인 그람시는 전면전인 기동전보다는 국지전인 진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들의 참호를 파고, 그 참호를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넓혀가는 진지전. 진지전은 빠른 시간 내에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내심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길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 진지들이 서로 연결이 될 때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순간, 희망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지금 세상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말자. 희망은 있다. 그것을 우리가 찾아야 한다. 그래서 제목이 "희망을 찾는가"다. 희망을 찾는다면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시작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희망을 찾는다면, 희망을 찾아 이미 길을 내기 시작한 사람들의 뒤를 따르면 된다. 이들의 뒤를 무작정 따르기만 하란 얘기가 아니다. 이들처럼 길을 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들의 뒤를 좇기만 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 맞게 길을 내는 일, 그것이 바로 뒤를 좇는 일이다. 그것이 희망을 찾는 일이다.

 

희망을 찾는가. 보라. 이미 희망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을 보면 희망은 늘 우리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힘을 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