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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마가 사랑한 화가 들라크루아 - 별난 화가에게 바치는 별난 그림에세이
카트린 뫼리스 글.그림, 김용채 옮김 / 세미콜론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 1864년 12월 10일 파리, 들라크루아 작품 전시회.
들라크루아가 사망한 후 1년, 그의 절친한 친구 뒤마는 들라크루아를 기리는 연설을 부탁받게 된다. 좋은 친구로서 재미있는 이야기꾼으로 뒤마는 들라크루아에게 알려지지 않는 숨은 에피소드와 그의 성격을 이야기해 준다. 삼총사, 몬테크리스토백작 등으로 뛰어난 대중작가였던 뒤마가 풀어내는 들라크루아 이야기는 재미있으면서 감동적이고 잠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잠깐 뒤마의 이야기를 들어보실까요?
# 에피소드로 듣는 들라크루아의 인생.
다사다난했던 어린시절, 부모님께 유산을 받았지만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검소하게 산 이야기. 액자를 맞출 돈이 없어서 목수와 도움과 직접 색을 칠해서 액자를 갖춘 이야기, 그의 작품들을 둘러싼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재미난 이야기와 독특한 그림과 함께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신사숙녀 여러분, 여러분께 들라크루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두둔하기 어려운 결점을 지녔던 만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장점을 가진 사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그를 찬양하든 폄하하든, 누구든 거리낌없이 그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은 다사다난했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세살 나던 해까지 장난삼아 말꼴묶는 줄을 자신의 목에 대다가 목이 졸리고 하녀가 촛불을 끄지않고 두었는데 바람이 불어 옷에 불이 번져서 불에 데고, 하녀가 발을 잘못 디뎌 함께 물에 빠지고, 푸른색의 지도의 색을 엷게하는 녹청에 빠져 삼켜버려 독극물에 중독되고 포도를 한 송이씩 먹는대신에 통째로 입에 넣었다가 질식할 뻔했습니다.
부모님의 부유한 유산을 받아지만 하나도 손대지 않고 가난하지만 깨끗한 삶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단테의 조각배]를 완성했습니다. 그림을 살롱에 출품하려면 액자를 끼워야 하는데 액자를 살 돈이 없던 그는 주변의 목수가 액자의 틀을 만들어주고, 그 액자에 아교를 칠하고 금색가루를 뿌려서 전람회가 열리는 루브르 궁에 달려갔습니다. 2주 뒤 결과를 보니 자신의 그림이 멋진 액자속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로 남작이 작품을 보고 멋진 액자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라르와 티에르가 그림을 보고 예술적 감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로 남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방문한 자리에서 남작은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게 되었고, 들라크루아는 그의 작품을 세시간동안 빠져 있었습니다. 3시간 동안 봐준 영광과 다른 화가의 추천으로 프랑스정부는 단테의 조각배를 2천프랑에 구입하게 되었고 그림은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렸습니다.
단테의 조각배를 그린 건 들라크루아였지만 훈장은 앵그로에게 돌아갔습니다. 키오스 섬의 학살을 제작한 것은 들라크루아였지만 미술원을 차지한 것은 앵그로였습니다. 공화국과 제국의 회화의 기존의 기법과 규범, 경직성에 반한 들라크루아의 색채와 구성 시적인 아름다움을 사람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규범과 아름다움을 혼동한 건 아닐까요?
색채를 중요시하는 그 답게 그림을 그리는것보다 팔레트를 준비하는데 더 오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한번 붓을 잡으면 다른 어떤일도 하지않고 그림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제자의 그림이라도 뛰어난 부분은 모사하고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생생한 들라크루아와 메리의 시합이 생각나네요.
자신을 알아주던 제리코가 사망하게 되자 키오스섬의 학살을 팔았던 돈을 제리코의 그림을 사는데 절반, 영국여행에 절반을 할애하였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마리노 팔리에로의 운명, 그는 결국 공작의 요구에도 팔지 않았습니다.
"왕세자와 뒤마가 아니면 절대 팔지않겠소. 사람들의 많은 비난때문에 그가 선하다고 믿게 되었소."
올리브 동산의 그리스도와 니스칠에 얽힌 이야기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던 '사르바나팔루스의죽음' 5년간의 주문을 받지 못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작품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루벤스 사이에 위치하게 된 그림은 6천프랑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1830년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기억하시나요? 그는 공화주의자와는 정반대인 귀족적인 본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3천프랑에 구입하였지만 계속되는 소요로 인해서 창고와 미술관을 되풀이하게 되었습니다. 1855년이 되어야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1833년 가장무도회에서 그린 그의 그림솜씨를 이야기하며 뒤마는 마지막 마무리 연설을 준비한다.
# 세상이 저버린 천재의 재능과 인격을 흠모한 친구 이야기.
죽고나면서 더욱 비중이 커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뒤마는
살아생전에 그를 인정하지 못했던 화단과 작품들의 우여곡절을 재미나게 이야기한다.
그가 슬퍼했던 건 40년간 꾸준하게 12시간씩 그림에 몰두했던 들라크루아가
남긴 재산이 없었다는게 아니라, 동시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던 불행한 천재였다는 것이었다.
그가 죽고난후 그의 작품의 가격보다 붓을 ?는통에 더 많은 값을 지불한 졸부들의 모습을 냉소하고,
정말 열정적으로 인생을 살았고 수 많은 애인과 친구를 두고, 사후에 엄청 유명해진 그가
죽기 직전에 늙은 집사와 가정부의 손에 죽어간 모습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함께 자리를 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과 그의 재능을 소중히 아끼는 모습,
정치적으로 반대의 성향이 있었지만, 서로 멀어지지않고 서로를 인정한 모습은 정말 배울 점이 많았다.
# 뒤마와 들라크루아, 두 사람의 작품이 더 궁금해졌다.
원래 그림과 들라크루아와 뒤마의 그림을 크로키로 독특하게 담아낸 표정이 책을 읽는 재미를
두 배로 만들어주었다. 크로키로 보이는 그림과 실제 그림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빛의 세계를 이끈 낭만주의의 거장 들라크루아, 삼총사, 몬테크리스토백작을 펴낸 뒤마,
둘 다 초창기에 작품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의 비난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던 공톰점이 있었다.
그리고 뒤마는 빅토르 위고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의 시샘과 몰이해에 굴하지 않고 꾸준한 습작과 작품활동을 해낸 그들의 모습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내게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제 그들의 작품과 소설 속에서 그들을 더 알아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