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 한국 역사 인물을 통해 본 인문학 한국사를 바꾼 인물 7
김봉규 글.사진 / 행복한미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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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할 때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해 보인다. 보통의 사람들 모습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공인들마저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별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한 시대의 정치를 책임지고자 하는 정치인일수록 이러한 모습은 더 한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을 떠올리며 그만한 사람 없었다는 그리움의 대상 또한 흔치않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이유를 붙일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선 것이 어쩌면 책임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일상의 삶에 대한 책임을 근거로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행하는 행동도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는 정신이 부재한 것, 어쩌면 이러한 모습은 이제 한 개인을 넘어 사회 전반의 문제로까지 확산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역사 속 인문들 중 긍정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리워하거나 칭송을 하고 그를 넘어서 따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 치적을 많이 남겼는가 아닌가도 관심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았는가에 초점을 두고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볼 때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책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며 따라 배우려는 마음이 모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찾아보고 그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 책을 발견한다.

 

'한국 역사 인물을 통해 본 인문학'이라는 화두로 출발하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행복한미래, 2013)가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 후손들이 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기리는 제사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의 행적과 후손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불천위' 흔히 접하는 말이 아니기에 낯설기도 하다. 불천위란 '나라나 유림에서 그 삶과 업적이 후세인들이 영원히 기리며 본받을 만하다고 인정한 인물을 말한다.'고 저자는 전재하고 있다. 현재까지 후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불천위 제사가 이어지고 있는 사람 51명을 찾아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조망하며 그들의 삶을 살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천위를 선정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와 불천위에 오른 사람이 진정 그만한 인물인가가 관심사가 될 것이다. 죽은 사람도 다시 죽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또한 때론 국가의 권력보다 더 큰 위세를 부렸던 유림에서 선정한 사람들이기에 그 선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삶이 오늘에 비추어 어떤가는 살펴보는 것이 옮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불천위로 우리도 쉽게 알 수 있는 김종직, 김굉필, 이황, 노수신, 이원조, 류성룡, 정탁, 하위지, 장말손, 이언적 등이다. 서슬퍼런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이나 권력에 마음조차 주지 않고 학문과 후학을 위해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불천위 제사는 그들의 신위가 모셔진 사당과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오래전에 지어졌던 사당의 모습을 보는 것도 전통 건축이 사라져가는 현대에 사당을 통해 전통건축을 보는 재미도 함께할 수 있다. 저자가 찾은 불천위가 대부분 한 지역에 치우쳐 있다는 점은 저자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 영남 유림들이 조선의 역사에서 했던 역할을 통해 반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學], 정의[義], 백성[民], 나라[國], 마음[心]으로 분류하여 엮은 불천위 대상자들의 삶을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근본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예전의 사람을 흠모하는 것은 삶의 양태는 달라졌지만 본심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그들을 현 시대에 살아나게 만드는 이유가 될 것으로 본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여전히 삶의 화두라면 그들의 삶에서 여전히 배워야할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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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문답 - 시대의 이상과 운명에 답한 조선의 자화상
이종수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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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담긴 조선의 자화상

한 시대를 바라볼 때는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어느 하나의 측면만을 중요시한다면 자칫 편협 된 시각으로 그 시대를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비교적 가까운 조선사회는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통해 접근한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대중매체를 통해 비교적 자주 접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이 흥미를 넘어선 무엇이 되자고 한다면 역사의식을 가진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시대 조선의 역사를 바라보는 중주요한 시각으로 왕조사를 중심으로 한 권력의 향배에 집중된 경향이 있다는 점은 어쩜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에서 권력이 가지는 시대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만 조선의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온전히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으로 조선을 이해하기 위한 바탕을 제공해 주고 있어 반갑기 그지없다. 그 중 한 분야로 조선 선비와 화원들에 의해 구축되었던 그림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림은 시대를 반영한 화가의 정신과 열정에 의해 완성된 문화이기에 그림을 통해서 한 시대를 바라본다면 그 시대의 다양성이 함축된 바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학을 전공한 저자 이종수의 '그림문답'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주목받을 만한 책으로 생각된다. 먼저 '이야기 그림 이야기'(돌베개 I2010)로 만나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에 공감했던 터라 이 '그림문답' 역시 기대를 가지고 대했다. 그는 '그림이 시대의 정신을 담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조선 사회를 대표할 만한 시대를 선정하고 그 시대에 대표적인 그림을 통해 그림에 반영된 화가와 시대상황을 면밀히 추적하여 한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저자의 시각을 사로잡았던 그림으로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작가미상의 '독서당계회도', 윤두서의 '자화상', 김홍도의 '소림명월도', 조희룡의 '홍백매팔폭병'에 이어 장승업의 '귀거래도'까지 이른다. 각기 그림들은 조선 500년의 역사에서 큰 흐름을 대표하는 시대에 그려졌던 그림들이다. 그림이 시대의 정신을 담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매개로 활용할 만한 대표성을 가진 그림으로 선정하여 그림을 대상화시켜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이 아닌 그림을 그린 화가의 시각으로 시대와 그림을 바라본다는 독특함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어느 책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그림을 별지로 하여 본문에 삽입해 그림에 담긴 화가의 정신을 느끼도록 기획한 점이 돋보인다.

저자는 본문에서 그림에 대한 편중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학문을 하는 학자로써 자신의 학문영역에서 애정을 달리 쏟는다는 어색함은 그림을 학자이전에 진정으로 좋아하는 저자의 심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그림에 주목하여 다양한 책을 구해보고 있는 독자로써 그런 저자의 고백이 반갑다. '그림문답'에는 좋아하는 그림이 몇 작품 있다. 그중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를 좋아한다. 조희룡의 매화도 좋지만 그 '홍백매팔폭병'에는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지만 '소림명월도'에는 한없는 친금감을 느끼기에 가까이 두고 자주 보고 싶은 그림이다. 당대 화원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있던 김홍도가 그런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화가의 심정을 따라가는 저자의 시각이 그래서 더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 중 무엇 하나 역사성을 거부하지 못한다. 자신을 만들어온 시대와 그 시대의 전재가 되는 과거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함께하기에 개인은 온전히 개인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 하여, 조선의 그것이든 현대의 그것이든 시대정신을 은연중에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점의 그림이 가지는 힘은 그림뿐 아니라 사람의 흔적이면 무엇이든 동일한 힘을 가질 것이며 이는 지난 것 뿐 아니라 우리시대 우리가 만들어가는 그 모든 것도 마찬가지리라.

 

'그림문답',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 개인의 열정을 모아 완성했던 그림과 그 그림을 통해 한 시대를 살피고자 하는 노력이 엮어낸 조선시대 자화상으로 이끌어가는 통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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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림 한 편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참 많구나
    from 책으로 책하다 2013-09-16 16:58 
    [서평] 그림을 통해 문화를 읽는다 (아트북스)이라는 책이 있다. 화가와 미학자의 대화를 통해 그림 감상 비법을 알려준다는 기획이었다. 내용과 서술적인 측면에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시대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새롭게 다가왔다. 아마도 '그림'이라는 예술작품을 맞대면하면 그림 자체에 압도되어 그림 안에서 허우적대고 말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겨우 빠져나오면 '왜' 이런 그림을..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김해자 지음 / 아비요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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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 이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경우는 한 사람의 삶에서 그 사람만의 특성을 담아내는 공통의 모습을 찾았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때나 다른 사람에 의해 보이는 모습에서 유추되는 한 사람의 삶의 태도가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으리라 짐작된다. 이러한 모습이 때론 고지식하거나 답답해 보일 때도 있겠지만 그 역시 그 사람으로썬 어쩔 도리가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리라 짐작한다.

 

여기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 듯 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립공 미싱사로 전전하며 시를 쓰고, 생계를 위해 학원 강사를 비롯해 다양한 일을 직접 겪으며 사회의 약자들과 소통하다 어느 날 훌쩍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겨 초보 농사꾼으로 살며 이웃 친구들에게 농사를 배우고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다. 미싱사, 노동운동가, 미술치료사, 강사, 초보 농사꾼, 책 읽는 사람, 놉 파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는 시인 김해자다. 그가 자신의 삶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의 소통에서 얻는 삼ㄹ의 교훈을 일상의 언어로 옮겨 놓은 책을 발간했다. 아비요 출판사 간행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가 그 책이다.

 

시인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생활의 근거지를 옮긴 후 만난 할머니들과 친구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과 학생들이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살아오며 문제제기했던 다양한 삶의 의문들을 확인하며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고 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인 글쓰기, 미술치료나 바느질과 같은 방법을 동원하지만 방법이 주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만나는 자세가 중심이 되고 있다.

 

"가장 나다운 내가 가장 당신다운 당신을 만날 때 우리는 꽃으로 피어납니다.”시인 김해자는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꺼내놓은 주제다. 이는 나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인정할 때 에야만 할 수 없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저자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한 그 사람만의 삶을 인정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은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시인은 그렇게 닫힌 가슴을 스스로 열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재주가 탁월함이 있어 보인다. 이는 재주가 아닌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오기에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 모두가 이상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이상한 사람들 속에 자신도 포함됨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 한다. 그 이상함이 바로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끔 만드는 핵심 요인이기 때문이리라. 삶의 근거지를 옮긴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부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의 부정은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아야 한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바로 그 지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삶의 근거지가 달라지면 많은 부분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 달라진 것의 핵심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 즉, 자연과 사람들을 대하는 시각의 변화가 핵심이지 않을까? 그렇게 달라진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자신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가능해지리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인 저자의 이야기는 한 층 진실성을 더해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에는 삶에 지쳐 현실이 힘들 때 살그머니 힘내라고 손잡아주는 벗을 만나는 싱그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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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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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이다

자연인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로 무엇이 있을까? 다양한 인간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말로 '권력'에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권력'을 매개로 인간관계를 설명한다면 애매모호하여 잘 이해하지 못했던 다양한 인간관계를 설명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는 점을 새롭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하여, 역사를 보는 대부분이 바로 '권력'에 집중하여 벌어진 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이미 지난 사건이기에 비교적 자유롭게 인간관계를 추적할 수 있으며 다양한 해석 또한 가능해 지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간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인간관계를 분석하고 각 사건을 관통하는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그 결과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조선 왕 독살사건', '누가 왕을 죽였는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조선왕을 말하다' 등과 같은 저작물로 살펴온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이 새로운 책 '왕과 나' 역시 비슷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저자의 시각을 볼 수 있다.

 

'왕과 나'는 왕은 스스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을 전재로 '권력'을 사이에 두고 왕의 권력의 동반자로 볼 수 있는 '참모'에 주목한다. 이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기존 시각 즉, 왕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기술한 시각에 보충적으로 그 왕을 있게 한 다른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왕권이라는 무소불휘의 권력을 사이에 두고 왕과 신하가 어떤 관계를 보일 때 권력의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으로 살핀 역사적 사실로는 김유신, 신숭겸·배현경·복지겸·홍유, 소서노, 정도전, 황희, 김육, 천추태후, 강홍립, 박자청, 인수대비, 홍국영을 살피고 있다. 결정적 순간에 왕을 있게 한 킹메이커에 주목하여 '권력'의 본질적 측면을 통해 인간의 관계와 왕이 왕으로 바로 서고 참모가 참모로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왕과 참모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왕을 만들고 그 왕의 자리를 튼튼하게 만들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경우와 왕의 권력에 참여해 그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경우가 그것이다. 이 두 경우 전자는 정도전 후자로는 홍국영을 그 대표적인 예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홍국영처럼 왕의 권력을 자신이 대신하고자 했던 경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일까? 권력의 정점에 서고자 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라면 그들 역시 그 속성에 충실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경우 권력이 가지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 지를 망각하거나 왜곡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권력이 필요한 이유는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이 필요한 것이다.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이 권력이라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그런 권력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치이기에 정치가 가지는 가치 또한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정치 역시 이러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세력을 규합하고 이합집산을 하며 때론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의 편에 붙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을 정당화 할 수 있으려면 권력의 진정한 가치인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현할 힘을 가지는 것에 지향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정치인이 권력의 중심부로 향하는 이유가 이 경우에 해당할지는 의문이다. 이 점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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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 - 다산과 연암 라이벌평전 1탄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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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과 다산, 누구에게 주목해야 할까?

한국 지성사를 대표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조선 후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이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며 그 가치를 높여가고 있는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다. 이 둘은 조선 후기 정조 왕이 치세하던 시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자신의 발자취를 뚜렷하게 남겼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기에 이 두 사람에 대한 관심 역시 주목하는 시기와 관심사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선, 열하일기와 목민심서라는 두 사람의 저작에 대한 관심 역시 그것이 주목받는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될만 하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어쩜 당연한 것이고 우리의 고전문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 역시 이 두 사람의 저작에 주목할 기회가 많을 것이다. 고전 평론이라는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 책 '두개의 별 두개의 지도'의 저자 고미숙 역시 연암의 열하일기를 자신의 눈으로 해설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책을 통해 연암과 다산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었다. 저자가 주목했던 두 사람에 관한 관심이 심화되어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책으로 보인다.

 

저자 고미숙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두 거장의 평전을 쓰면서 기존 평전들이 보여주는 바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출발한다. 일대기를 쫓아가는 평전이 아닌 저서라는 굵직한 삶의 흔적에서 출발하는 점이 그것이며 한 사람이 아닌 동시에 두 사람을 비교분석한다는 점이다. 크게는 연암과 다산에 대해 '열하일기'와 '목심심서'를 중심으로 시문, 척독, 묘지명 등과 같은 저작물을 통해 그 저작물이 담고 있는 형식과 내용에 비추어 두 사람의 세계관과 삶의 방식을 비교분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함께 고려되는 사람이 두 사람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던 바로 정조 왕이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통해 살펴보는 것 역시 흥미로운 일이다.

 

연암과 다산은 그들이 살았던 당시에 만났을까? 라는 매우 흥미로운 가설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이 책이 이 가설이 가지는 의미성에 주목하여 다양한 경로로 두 사람의 삶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물과 불로 표현될 만큼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연암과 다산은 학문영역뿐 아니라 삶의 모습에서도 차이를 나타내고 있으며 그러한 생활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모아진 것이 그들의 저작이라는 시각이다. 하여, 저작물에 대한 관심이 그들이 살았던 당시뿐 아니라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둠 속에서 갈 길을 밝혀주는 별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여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고미숙의 연암과 다산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통상적으로 이 두 사람을 각각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다. 어떻게 보면 기존의 시각을 종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지만 한 사람은 끊임없이 주류를 향한 마음을 보였다면 한 사람은 방외지사 격이다. 이 둘을 한 가지 기준으로 묶어내고자 한다면 많은 부분에서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여, 저자 역시 다양하게 비슷한 점을 찾아보지만 그 속에는 차이를 인정하며 비교하고 있다. 비교하여 차이를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은 비교하는 대상들의 우열을 판가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독특함을 드러내 우뚝 세우고자 함이 전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저자가 두 사람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의 라이벌이 아닌 동반자로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현실의 혼란함과 불투명한 미래가 우리가 사는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라면 이 두 사람 중 누구에 주목해야 할까? 연암과 다산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한다면 두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이런 시도가 의미 있는 것은 우뚝 선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하여 그 속에 담긴 가치를 찾고 이를 통해 현대인이 살아가야 할 삶의 지침을 밝히고 있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나 문학을 통해 자신이 서 있는 현재 위치를 밝히고 앞날을 살아갈 방향을 찾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연암과 다산에 대해 기획하고 있다는 두 사람의 라이벌 평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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