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는 너에게 갈 수 있을 거야?

기다림, 반가움, 무료함 때론 거북함에 피하고 싶은 것...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전화다. 전화 없는 세상은 상상 속에서도 불가능한 현실이다. 필요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 전화지만 걸려온 전화를 피하고 싶을 때도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 나를 찾아 전화를 하지만 늘 반가운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어느 시인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왔다는 이 소설은 꽤 많은 사람들이 찾으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엄마를 부탁해’이후 출간된 지 제법 지난 신경숙의 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라는 작품을 통해 신경숙과도 만나게 된다. ‘엄마를 부탁해’로 강한 인상을 받았던 작가의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기대된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나에게 성장소설로 읽힌다. 그 중심에 청춘이 있다. 청춘, 청춘을 대표하는 말로 무엇이 있을까? 희망? 불안? 사랑? 무엇 하나로 딱히 정의할 수 없음은 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시대를 관통하는 무엇이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이 무엇일까’을 찾아내는 것이 이 작품의 중심을 관통하는 주제로 보고 싶은 마음이다. 성장소설이라고 하면 대부분 어릴 적부터 시작하지만 이 작품은 20대 초반을 그 시작으로 하고 있다. 바로 청춘들이 세상과 친구 그리고 자신에게 귀결되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번민하며 때론 웃고 기뻐하며 서로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들이 가득하다.

 

엄마의 병으로 인해 일찍 부모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정윤, 그런 정윤과 한 고장에서 나고 자라며 늘 붙어 다녔던 단이와 대학에서 만난 명서와 미루가 주인공들이다. 각자 자신들만의 세계 속에서 튼튼한 성을 쌓고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살며시 고개를 들지만 이내 다시 그 성안으로 몸을 숨기고 마는 청춘들이다. 세대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년령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그 비슷한 것이란 시대적 환경이 중심인 듯싶다. 같은 시대를 사는 같은 또래들이라도 그들 가슴속에 깃든 것들은 다를 수 있다. 이 다름이 기쁨과 아픔, 불안과 희망이 공존하는 근거가 된다. 이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윤교수다. 청춘들 보다 세월의 무게와 성찰의 깊이가 있어 청춘들에게 나침반이 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있다. 명서의 정윤에 대한 마음이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 간절함 보다 더 깊은 마음의 거리가 있다. 곁에 두고 싶지만 그 마음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이 명서의 사랑이다. 윤교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8년 후 다시 만나는 정윤과 명서의 만남에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세상과 스스로를 만나는 지점에서 사랑으로 만나게 된다. 이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마음엔 혼란 보다는 느긋한 무엇이 있어 보인다.

 

삶은 산술적 시간과는 상관없이 기나긴 길이다. 그 길에서 혼란스러운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혼란을 잠재우는 힘은 조금 긋하게 시간과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신경숙의 고백처럼 우리 문학에는 청춘들의 문제를 직시하는 작품들의 부재를 안타까움이 있다. 청춘들의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 청춘들만의 문제가 아니듯 이 작품 또한 나이를 불문하고 공감할 무엇이 있다. 상처를 안고 삶에 도전하는 청춘들의 일상이 처절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가슴 저미는 공감대가 있다. 그것이 힘일 것이다. 이 작품이 회자되는 근본적 힘 말이다. ‘언젠가’라는 기대를 하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뭐냐 - 고은 선禪시집
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 뭘까?

때론,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청춘의 시기를 지날 때는 몰랐다. 모든 것이 이성의 잣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그 이성의 무한한 힘에 기대어 세상을 무서운지 모르고 지났다. 하지만, 하나 둘 나이가 들어가며 그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한계와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렇게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자리에 굳건히 서 있는 것이 아마도 시가 아닌가 싶다. 같은 것을 같은 시간에 함께 보았지만 시인의 가슴에 담긴 세상은 놀라우리만치 다른 세상을 담아내고 이를 시어로 옮겨 놓은 것이 시라는 생각에 시인을 보통의 사람들과는 한 참 거리를 두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성의 잣대로 보는 세상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세상을 보는 것으로 시인의 가슴을 정의한다면 공감하는 분들도 제법 있지 않을까 싶다.

 

현대 시인 중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선후배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 고은 시인이 바로 그 사람이다. 독특한 그의 시에선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다 한 순간을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비로써 이해되는 시들이 많다. 시대의 아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셨던 시인의 시 중 ‘선시’를 모아 놓은 시집 ‘뭐냐’는 어떻게 보면 이성이 모든 기준이 된 세상에서 그 이성을 내려놓고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시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뭐냐’가 담고 있는 감성적 접근은 그리 만만치 않다. 가장 절친한 벗에게, 이웃에게, 세상에게 도대체 ‘뭐냐?’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스스로에게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처절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자책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대개 몇줄 되지 않은 짧막한 시어들로 되어 있다. 세상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 머리와 가슴을 스치는 깨달음의 감정을 시로 승화시켜 낸 성찰의 진수가 아닌가 싶기도 한다. ‘선시’란 사전적 의미로 ‘모든 형식이나 격식을 벗어나 궁극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적(禪的) 사유(思惟)를 담고 있는 불교시’라고 한다. 굳이 종교를 빌려오지 않더라도 이해될만한 대목이다.

 

“오직 선은 마음뿐이다. 이 마음속의 진면목으로만 기존의 세계에 대한 전혀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선의 목적이다. 일체를 부정함으로써 일체의 진실을 획득하는 선은 그 부정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유로운 선문답과 선시를 낳을수 있게 된다.”

 

스님들이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과정에서 또한 깨달은 순간 진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선시와 선문답이라면 일상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도 그 삶 속에서 깨달음의 과정이 분명 잇을 것이다. 물론 이때 깨달음의 순간이 스님들의 그것과 일치한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시인이 시를 낳고 문학가가 작품을 낳는 과정도 이에 못지 않은 깨달음의 과정일 터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에서 얻는 한 순간의 감동도 그에 못지않은 깨달음이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고은의 선시에는 서슬퍼런 칼날이 곳곳에 번뜻이고 있어 사뭇 이성의 그 무엇을 잘라내고 있다. ‘그렇지!’, ‘맞아~’또는 ‘어?’, ‘이럴수가!’와 같은 느낌으로 공감하는 순간 시인의 선시는 어느덧 보통 사람들의 깨달음의 순간과 만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니, 시인의 깊은 속내를 그렇게라도 느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작별

 

잘 있게

잘 가게

 

저 건너

 

어찌 살꼬

너 없이

 

여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삶의 무게에 억지로라도 마음의 여유를 누리는 순간에서야 온전하게 만날 수 있는 시인의 시가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린 이 시대 50대의 인생 보고서
송호근 지음 / 이와우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소리 내 울지는 못하더라도...

나이 50이면 인생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생물학적 수명이 늘어나면서 나이 50이면 마음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몸도 사회적 지위도 마음과는 멀어지면서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20대를 두고 그들이 안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시행되고 각계각층에서 한목소리를 내며 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내세우기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50대, 우리시대에 50대가 안고 있는 문제는 한 둘이 아니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을 위한 시도를 목격하지 못한다. 일부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저런 대안이 제시되고 있긴 하지만 당사자인 50대들에게 얼마나 희망적인 대안이 될지 의문이며 그나마 위안이라도 되 주었으면 싶은데 그마저 여의치 않다.

 

급격한 산업화의 주역으로 당당하게 살아오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시간도 없이 한꺼번에 수 천 명이 끈을 놓치고 사회로 밀려나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제 2인생은 삶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의 첫출발선인 샘인데도 대책 없이 타의에 의해 몰리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가부장적 의식이 지배적인 부모세대와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자유로운 사고 속에서 성장했던 자식세대 사이에 끼어 이 두 세대의 가교 역할을 하지도 못하며 책임만 지고 있는 50대의 현실에 대한 직시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의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시의적절한 문제제기가 아닌가 싶다. 사회학자인 저자 송호근은 자신도 이 문제의 50대 중반으로 대학교수라는 다른 50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호조건에 있으면서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자신의 실재고민을 노출하며 이 시대 50대가 안고 있는 현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우리시대 50대가 안고 있는 현실문제는 가정에선 외로운 아버지로, 후배들 눈치나 보는 선배, 사회에선 보수적인 사람으로 낙인 되어 어느 한곳 마땅히 설자리가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50대도 한때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목청을 높였으며, 사회에선 산업역군으로 든든한 기둥이었고, 따스한 가정을 꿈꾸는 가장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 허물어지며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상실하며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는 슬픈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하필 이런 때 찾아오는 것이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다. 잊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성찰이 이럴 때 찾아와 현실의 문제와 겹쳐 더 암울한 현실을 만들어 낸다.

 

이런 현실을 공감하며 저자가 내 놓은 처방은 독립하자는 것이다. 가족, 친구, 사회로부터 이제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남은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독립을 이야기 한다. 이 독립에는 다가올 죽음을 맞이할 준비이며 달라진 조건에 맞는 일에 대한 준비이며, 가족과 일 때문에 생각도 못했던 취미를 갖는 것으로 시작한다. 하나 둘씩 이런 준비를 하면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자신을 보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길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놓고 속으로 울지라도 가슴에 한을 쌓아 두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소리 내 울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속내에서 스스로를 다독일 힘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50대가 안고 있는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역시 나의 현실이다. 남은 시간, 아니 다가올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보다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송호근 교수의 이 책이 현실에 버거운 걸음걸이를 하고 있는 50대를 비롯하여 아직은 팔팔한 3, 40대에게도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해 주고 있어 미래를 희망으로 안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풍경류행 - 건축과 풍경의 내밀한 대화
백진 지음 / 효형출판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풍경이 삶과 문화를 만들어 왔다

도시 인근 농촌마을로 이사를 한 후 달라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아침저녁으로 달라진 공기가 그것이다. 아침 상쾌한 공기로 싱그러움 속에서 맞이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하루를 살아가는데 분면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지친 하루를 지나고 돌아온 집에서 산에서 내려온 맑은 공기가 피로를 풀어주기에 그만한 것이 없어 보인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삶의 태도가 그것이다. 조금은 느긋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조금은 느린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스스로 그런 삶의 태도를 받아들인 것이 삶의 환경을 바꾼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듯 사람이 살아가는 주변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그러한 생활방식이 이어져 온 것이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현대 사람들 속에 지속된다.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그때와 비슷한 환경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기고 싶어 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사람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활환경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풍경류행'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저자가 유학생활 중 생활의 근거지를 옮기거나 여행지에서 머무는 동안 사람을 둘러싼 풍경이 주는 영향력에 주목하여 풍경과 사람에 대한 관계에 주목한다. 풍경을 삶, 마음, 어울림, 지속이라는 테마로 분류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깊이가 묻어나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소로 습기를 비롯한 온도 등이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풍속을 낳고 그 속에 사람들의 생활태도에 영향을 주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적인 특색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차이는 사람들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쳐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이 아닌 다른 환경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고 때론 동경하지만 결국 익숙한 것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풍경이 전해주는 것이 사람들의 삶 전반에 걸쳐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미 대륙, 일본,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직접 보고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며 자신이 전공한 건축에 한정하지 않고 철학, 미술,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간단하지 않은 저자의 '풍경' 속에는 자연과 인간의 능동적인 관계가 담겨 있다. 아니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정원과 유럽의 정원을 비교하고 건물을 비하하며 사람들의 생활을 비교한다. 또한 광장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우리가 앞으로 모색해야 할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나타내고 있어 주목된다. 열대지역에 사는 사람과 우리나라와 같은 사계절이 분명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차이가 어디에서 오는지도 근본을 살필 수 있다.

 

단순히 지나치는 풍경이 아닌 머무는 동안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풍경을 15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마주한 자신의 경험 속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원형’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눈 덮인 대나무’를 가슴에 간직한 저자의 이야기 속에 현재의 자신을 규정하는 다양한 경험 속에 자연과의 관계를 그 중심에 두고 있어 현대인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 - 한국 역사 인물을 통해 본 인문학 한국사를 바꾼 인물 7
김봉규 글.사진 / 행복한미래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할 때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해 보인다. 보통의 사람들 모습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공인들마저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별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한 시대의 정치를 책임지고자 하는 정치인일수록 이러한 모습은 더 한다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을 떠올리며 그만한 사람 없었다는 그리움의 대상 또한 흔치않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이유를 붙일 수 있겠지만 그 중심에 선 것이 어쩌면 책임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일상의 삶에 대한 책임을 근거로 자신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행하는 행동도 자신이 책임지려고 하는 정신이 부재한 것, 어쩌면 이러한 모습은 이제 한 개인을 넘어 사회 전반의 문제로까지 확산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많은 역사 속 인문들 중 긍정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리워하거나 칭송을 하고 그를 넘어서 따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정치적 치적을 많이 남겼는가 아닌가도 관심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았는가에 초점을 두고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볼 때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책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며 따라 배우려는 마음이 모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을 찾아보고 그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는 책을 발견한다.

 

'한국 역사 인물을 통해 본 인문학'이라는 화두로 출발하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행복한미래, 2013)가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로 후손들이 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기리는 제사를 모시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의 행적과 후손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불천위' 흔히 접하는 말이 아니기에 낯설기도 하다. 불천위란 '나라나 유림에서 그 삶과 업적이 후세인들이 영원히 기리며 본받을 만하다고 인정한 인물을 말한다.'고 저자는 전재하고 있다. 현재까지 후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불천위 제사가 이어지고 있는 사람 51명을 찾아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조망하며 그들의 삶을 살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천위를 선정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와 불천위에 오른 사람이 진정 그만한 인물인가가 관심사가 될 것이다. 죽은 사람도 다시 죽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또한 때론 국가의 권력보다 더 큰 위세를 부렸던 유림에서 선정한 사람들이기에 그 선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삶이 오늘에 비추어 어떤가는 살펴보는 것이 옮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불천위로 우리도 쉽게 알 수 있는 김종직, 김굉필, 이황, 노수신, 이원조, 류성룡, 정탁, 하위지, 장말손, 이언적 등이다. 서슬퍼런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이나 권력에 마음조차 주지 않고 학문과 후학을 위해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불천위 제사는 그들의 신위가 모셔진 사당과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오래전에 지어졌던 사당의 모습을 보는 것도 전통 건축이 사라져가는 현대에 사당을 통해 전통건축을 보는 재미도 함께할 수 있다. 저자가 찾은 불천위가 대부분 한 지역에 치우쳐 있다는 점은 저자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 영남 유림들이 조선의 역사에서 했던 역할을 통해 반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學], 정의[義], 백성[民], 나라[國], 마음[心]으로 분류하여 엮은 불천위 대상자들의 삶을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근본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고 본다. 예전의 사람을 흠모하는 것은 삶의 양태는 달라졌지만 본심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그들을 현 시대에 살아나게 만드는 이유가 될 것으로 본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여전히 삶의 화두라면 그들의 삶에서 여전히 배워야할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