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중간 중간 차를 멈추고 일자리가 있는지 물어보면서 이동을 하였다. 마침내 어렵게 일꾼이필요한 목화농장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주인은 목화 따는 일과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앞으로 우리가살 곳은 일렬로 줄지어져 있는 여러 개의 암갈색 텐트 중 하나였다. 일꾼들의 숙소는 마치 군대 막사 같았다. 우리는 차에서 짐을 내리고 더러운 바닥에 두꺼운 마분지를 깔아 그 위에 넓은 매트리스를 놓았다. 밤만 되면 텐트 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어서 너무 추웠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아빠, 엄마, 로베르토, 트램피타, 토리토, 루벤, 그리고 나는 매트리스 위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을 잤다
- P97

새벽에 우리 형제들은 신발 옆에 놓여있는 선물을빨리 보려고 서로 앞다투어 일어났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선물 포장지를 천천히 뜯었다. 거기에는사탕 한 봉지가 들어 있었다. 로베르토 형과 트램피타, 토리토 그리고 나는 슬픈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 형제 모두 사탕 한 봉지를 선물로 받은것이다.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엄마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엄마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가득 고여 있었다. 그 때 엄마 옆에서 담배 연기만 길게 내뿜고 계시던 아빠가 담뱃불을 끄고 일어나셨다.
아빠는 매트리스 한 쪽 귀퉁이를 들어올리시더니 그밑에서 자수가 놓인 흰 손수건을 꺼내셨다. 그리고 엄마에게 건네 주시면서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메리 크리스마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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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문장을 따라가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두 세줄 사이를 계속 오가지만 아무 의미도 읽어낼 수가 없다. 더운 여름이라 베란다 문은 열려있고, 한 시간째 아파트 옆 동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고성 소리에 불안해서 집중을 할 수가 없다. 음악을 틀거나 이어폰을 끼고 책을 읽어도 좋지만 들려오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서 온 신경이 그리로만 향한다. 결국 불안한 마음에 창가로 가서 내다보고 귀를 기울인다. 광기에 가까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중생 정도로 들린다. 저러다 쓰러지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악을 쓰는데 그 목소리의 내용은 10대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욕설이다. 물건을 집어던지는 소리와 악을 쓰는 소리 사이에 간간히 섞여서 어른의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겠지.

 

상황을 잘 모르는 입장이지만, 고성소리가 2시간가량 지속되면서 그 소리에 담겨있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옆에서 보고 있는 부모의 심정이 어떨까하는 생각에 저절로 한 숨이 나왔다. 어쩌다 한 사람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한 사람은 그저 말리는 것 밖에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하기까지 했다. 두 사람의 불안과 고통을 상상하게 되었다.

 

이제 그들의 상황을 떠나 우리 시대 아이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학교에 적응 못하고, 게임 중독에 빠지고, 야단치는 어른들의 말에 귀를 닫는 아이들. 세상은 이 아이들을 부적응이라고 규정짓고 벌써부터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다. 자신의 미래는 없는 것처럼 보이고 지금 빠져있는 상황에서는 점점 헤어 나오기 힘든 아이들.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조차 배우지 못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불안함에 휩싸이게 된다. 실제로 게임 중독에 빠져 물건을 부수고 미친 듯이 날뛰던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던 엄마를 기억한다. 그 아이를 사로 잡았던 감정은 불안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아는데, 끊을 수 없고 그런 자신이 실패한 것 같아서 불안함에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괜찮다고,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무서울 것이다. 맘먹은 대로 안되는 단계를 넘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

 

나도 부모의 입장이라 이런 자식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는 얼마나 지옥 같을까를 생각하며 마음이 내려앉는다. 속마음을 알고 싶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듣고 싶어도 그들 사이에 언어가 없다.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단절된 언어가 되어 버렸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언어로 하고 있어서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방의 언어가 된 것이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소> 김기택 시집

 

김기택 시인에게 소는 시의 소재로서 관찰의 대상이었다. 그는 라는 제목으로 여러 개의 시를 썼다. 어느 날 시인이 소의 눈을 마주하면서 소는 하나의 관찰의 대상이 아닌 말을 하는 주체로서 다가왔다. 그런데 소에게는 시인에게 전달할 언어가 없고 시인에게는 들을 귀가 없다. 결국,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앉는다. 하고 싶은 말을 가득 담은 눈, 그래서 눈물이 떨어질 듯 그렁그렁 하다. 그 그렁그렁한 눈은 말하기를 체념한 것으로 보인다. 침묵하고 되새김질만 하면서.

 

소의 눈을 가진 아이들. 말을 하고 싶은데 들을 귀가 없는 우리 앞에서 질문과 요청 분노 항변을 가득 담은 아이들의 눈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말하지 않고 듣지 못해서 소통은 단절되고, 언어가 사라진 것이다.

비록 그럴지라도 때로는 상황에 맞지 않는 감정과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분절된 단어들일지라도 소리를 냈으면 좋겠다. 두 사람 사이의 언어가 생길 때까지...

 

제발 내가 들었던 소음이 그런 시작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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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드니스 2021-07-10 2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희 집은 층간소음이 심해서 윗집여자 땜에 스트레스 받아요. 맨날 애를 잡거든요.. 거의 매일요.ㅠㅠ

그레이스 2021-07-10 22:39   좋아요 1 | URL
ㅠㅠ

mini74 2021-07-11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쾌락을 담당하는 부위는 다 자라지만, 절제를 담당하는 부위는 늦게 성장해서 사춘기의 열병이 생기는 거란 글을 읽고 아이를 조금 다르게 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도 스스로 어찌 할 수 없어 저러는거겠지싶은 마음 ㅎㅎ 소의 눈을 가진 아이들이란 말이 뭉클하네오. 자신들이 다 자란줄 아는 엉덩이에 뿔 난 송아지들 *^^*

그레이스 2021-07-11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두엽이 다 안자라서 그러겠지 하고 농담처럼 말했던 때가 있었어요^^

희선 2021-07-13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말이 없다 어느 날 아주 이상한 일이 되어 나타나는 게 좋을지, 소리라도 치는 게 나을지... 아무 말 없는 것보다는 소리라도 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러면 왜 그런지 알려고 할지도 모르니... 그레이스 님 바람처럼 엄마와 딸인 듯한 두 사람이 말을 하면 좋겠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07-13 20:11   좋아요 1 | URL
예 맞아요
침묵이 좋을때도 있지만 아이들의 침묵은 건강하지 않다는 싸인이 될 때가 많죠.
희선님!
무덥습니다
건강하세요~♡
 

그의 작품은 제목도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푸코의 마그리트의 그림에 부친 철학적 사유도 인상적이었다.
부유하는 화가의 시선을 포획하는 텍스트!
새로 출간된 마그리트 관련 책을 구매할까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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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7-09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거실 벽면이 도서관!

그레이스 2021-07-09 22:42   좋아요 1 | URL
^^;; 책상도 지저분하고 그나마 정돈된 배경이어서 찍었어요;;;;

scott 2021-07-09 23:43   좋아요 0 | URL
진정으로 그레이스님 집이
광활한 우주점인것 같습니다.

혹쉬 천장 꼭대기를 지탱하고 있는 주황색은 미술사 전집???

그레이스 2021-07-10 07:09   좋아요 0 | URL
올제 시리즈예요^^

서니데이 2021-07-10 0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도 소장도서 많으시군요. 서가가 빽빽하게 꽃혀있어요. 르네 마그리트 책 사진도 잘 봤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07-10 07: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서니데이님도 ~

다락방 2021-07-1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배경이 너무 근사합니다! ㅜㅜ

그레이스 2021-07-14 11:00   좋아요 0 | URL
사는 사람은 가끔 숨막혀요
덜어내야 하는데 책마다 다 사연과 이유가 있어서...ㅎㅎ
 

"...단어는 마치매우 지적인 듯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는 듯하지만, 더 많은 것을 알려는 욕망에서 뭘 말하고 있는지 글에게 물어 보면 되풀이해서, 아니영원히 똑같은 것만을 이야기할 뿐이야."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읽혀지는 텍스트는 기호와 의미가 당혹스러울 만큼 정확하게 포개지는 단어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해석, 주석, 주해, 요지 설명, 연상, 반론, 그리고 상징적 · 우화적 의미 등은 텍스트 자체에서가 아니라 독서가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텍스트는 화가에 의해 그려진 그림처럼 ‘아테네의 달 만 말할 뿐이다. 그 달을 상앗빛 얼굴과 시커먼 하늘, 소크라테스가 한때 걷기도 했던 길에 널브러진 고대의 폐허 따위로 장식하는 것은 독서가의 몫이었다.
- P91

읽혀지고 기억되는 하나의 텍스트는, 구원이라 이름할 수 있는 그런반복 독서에서는 마치 내가 오래 전에 기억했던 그 시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 대지만큼이나 단단해서 독서가의 횡단을 받쳐 줄 수 있다 같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텍스트의 유일한 존재의 터가 마음 속이기 때문에 글자들은 마치 호수의 물 위에 쓰여진 것처럼 늘 불안정하고 유동적이다.
- P100

아득한 옛날 성 금요일에 콘스탄티누스가 발견한 것은 한 텍스트가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텍스트를 대할 때 독자는 그 텍스트의 단어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역사적으로 그 텍스트나 저자와는 전혀 관계 없는 의문을풀어 주는 메시지로 바꿔 버릴 수 있다. 이런 식의 의미 변질은 텍스트자체를 확장시키거나 퇴보시킬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텍스트에 독서가 자신의 환경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무지, 맹신, 지성,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 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다시 말해 그것을 재창조해 내는 것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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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은 미해결로 남았다. 유클리드와 갈레노스의 이론처럼 우리 독서가들이 책장에 적힌 문자로 다가가서 가을 포획하는 것인가, 아니면 에피쿠로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언것처럼 문자들이 우리의 감각에 와닿는 것인가?  - P52

올리버 색스 박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언어 구사 자연 그대로의 언어 구사는 단어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발표-단어에 의미를 충분히 실어서 입 밖으로 내뱉는 것-로 이뤄지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단어 인식 이상의 수많은 것이 포함된다."
독서에 대해서도 거의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텍스트를 따라가면서독서가는 이미 알고 있는 텍스트의 취지와 사회적 합의, 축적된 독서량, 개인적 경험과 개인적 취향 등으로 복잡하게 뒤얽힌 방법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한다.  - P60

검정과 흰색의 기호 체계에서 메시지를 뽑아내기 위해 나는 먼저 깜박거리는 눈으로 그체계를 파악하고 이어서 나의 뇌에서 뉴런들의 체인 이 체인은 내가읽는 텍스트에 따라 달라진다 을 통해 기호들의 암호 체계를 재구축하고, 내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런 존재가 되었는가에 따라 그 텍스트에 뭔가 감정, 육체적 감각, 직관, 지식, 영혼 를불어넣는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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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8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굉장히 관심 가는군요 :-)
이런책 넘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