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린 작가의 「시간의 궤적」이라는 소설을 보고 『녹색광선』이라는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녹색광선』은 1986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감독 에릭 로메르 만큼이나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든 작품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리, 스페인 어느 시골, 그리고 프랑스의 해변,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 가운데서 부유하고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외로움과 우울함을 던져준다. 델핀느가 극 중에서 가장 많이 하는 대사는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나는 그래’와 같은 말들이다. 델핀느를 걱정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스페인의 농가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도, 비아리츠 해변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와의 대화에서도 자신을 이해 못하겠다는 뉘앙스의 말에 상처를 받고 울음을 터뜨린다. 카메라 앵글 안의 일광욕과 파도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해변의 풍경은 오히려 그녀의 외로움만을 부각시키고 대비시킨다. 카메라의 시선은 외로움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이다.
그녀는 해변을 지나다 쥘 베른의 『녹색광선』이란 소설에 대한 대화를 듣게 된다. ‘녹색광선’은 해가 수평선 밑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빛의 굴절에 의해 초록빛을 내는 현상이다. 이것은 보기 힘든 현상이어서, 이 녹색광선이 보일 때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쥘 베른의 소설 속에 나오는 녹색광선(Le Rayon Vert)에 대한 이야기이고, 소설은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마음이 끌리는 남자를 만난 델핀은 함께 바닷가를 향하고, 해가 지길 기다린다. 녹색광선을 보고 델핀이 울음을 터뜨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델핀의 울음과 그녀의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항변의 떨림에 공감할 수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리와 해변의 풍경, 사람들의 시시덕거림이 그녀의 외로움을 대비시키기 위한 장치라는 것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 「시간의 궤적」 주인공과 파리에서 만난 언니가 비아리츠 해변으로 여행을 떠났었는지, 그리고 그 곳에서의 추억이 주인공에게 그리움으로 남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녹색광선의 주인공 델핀의 외로움을 공감하는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서로가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외로움에 공명했을 것이다. 델핀느가 외로움에 몸서리쳤고, 녹색광선을 목격했던 그 바닷가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 바닷가는 그들의 사랑, 상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있을지 모를 완벽한 행복도…
주인공이 그리워하는 것은 언니가 아니라, 그때의 바닷가에서 느낀 감동과 자유 그리고 아직 꿀 수 있었던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영화 감상 댓글에 누군가 남겨놓은 것처럼 그녀 역시 델핀느처럼 소극적인 낭만주의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컷 수평선 밑으로 가라앉는 해의 녹색광선 때문에 쥘 베른의 소설 <녹색광선>을 구매했다.
프랑수와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주인공 폴과 로제는 오랜 연인 사이이다. 로제는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고, 폴은 로제의 태도에 상처받고 지쳐간다. 그런 폴 앞에 어린 청년 시몽이 나타난다. 14살 연상인 클라라 슈만을 사랑했던 브람스처럼. 시몽의 젊고 열정적인 사랑에 폴은 흔들린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돌아온 로제에게로 향하고, 시몽은 눈물을 흘리며 뒤돌아선다. 그의 이별은 폴에게 다가올 때만큼이나 젊고 아프다. 그러나 로제에게 돌아가는 폴은 어떤 기대도 떨림도 없는 것 같다. 그저 모든 사랑이 다 그렇다는 듯, 이제는 열정이나 가슴앓이를 하는 불안함에 머무는 것보다 가끔 지치고 위기가 오기도 하지만 서로 익숙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선택한다. 폴은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과 격렬한 슬픔을 느끼는 시몽이 부럽기조차 하다. 격정적인 슬픔에 몸을 휘청거리며 떠나가는 시몽에게 그녀는 말한다.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라고.
사랑의 영원함보다는 금방 끝나버리는 열정을 믿는다는 사강은 사랑의 덧없음을 이야기한다. 격정적인 사랑보다는 익숙함으로 향하는 폴의 불안함은 무엇일까? 차라리 외로움을 선택하는 그녀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절망적인 것일까?
작가 사강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시간의 궤적」의 주인공과 언니는 어디에 끌렸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사랑을 하면서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덧없음에? 폴과 같은 여성들이 익숙함 안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경향성에?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질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시간의 궤적」은 소설 속 화자의 만남과 균열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의 마음 안에서 일어난 불편한 마음들은 관계의 파열을 가져오고 회복하지 못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온 화자는 어학원에서 주재원으로 프랑스에 온 한국인 언니(소설 속에서는 언니라고만 부르고 있다)를 만난다. 그들은 저녁마다 함께 걷고,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서로의 공통점을 발견하는데 그들은 헤어짐의 아픔을 경험했다는 것과 사강의 소설과 녹색광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화 『녹색광선』의 배경이 된 비아리츠 바닷가를 여행하며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두 사람은 서로의 내밀한 마음을 보여주는 사이가 된다. 화자의 불편한 감정과 서투른 말로 언니에게 상처를 주고 멀어졌지만, 그녀는 비아리츠 바닷가를 그리워한다.
그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쉬운 세상도 아닌데, 그런 사람을 만나고 행복하고 즐거웠는데, 그럼에도 우리의 만남들은 파열음을 내고 깨어져 버릴 때가 많다. 내 안의 무엇이 그리고 그의 무엇이 어긋나게 했는지 모르지만 균열이 일어난 사건만은 인지하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