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끌어안는 밤
서로 다른 국적과 인종, 문화,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인생에 파문과 흔적을 남기고 삶에 조용한 변화를 일으키는 내용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유와 쇼코, 나에게 투이, 엄마에게 응웬 아줌마, 순애언니, 한지, 미진선배, 시청광장에서 만난 미카엘라의 어머니... 등- 타자들과의 만남이 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그들과 가까워진다. 환대의 힘이다.
“환대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이다. 이성은 동질화하는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 이성은 친절함을 통해 타자를 그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할 수 있게 된다. 친절함은 자유를 의미한다.”(『타자의 추방』 한병철)
그러나 그들이 각자의 상처에 닿는 거리로 가까워지면 아픔을 느끼고 울타리를 치고 뒤로 물러선다.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서로의 아픔을 꺼내놓지 못해서,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해서, 내 상처만 보여서 마음은 서로 닿을 수가 없다. 그렇게 헤어진 이들은 했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놓아버린 그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뒤늦게 찾아가, 그리워했던 이들에게서 더 아픈 시간들의 흔적들을 발견하지만 그 흘러간 시간의 간격에 무력함을 느낀다. 읽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때 잡았더라면, 그 때 말을 했었더라면, 지금은 달라졌겠지 하고.
뉴스 화면에서만 비치는 아이들을 잃은 부모들이 쳐 놓은 천막은 슬픔의 깊이를 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광장에서 우연히 부딪친 사람의 아픔과 내가 가진 상처가 공명한 순간, 그들 사이로 뛰어들게 된다. 그래 맞다. 타인의 아픔에는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 사회의 환대, 나아가 친절함이다. 화해는 친절함을 뜻한다.”(『타자의 추방』 한병철)
우연히 잠깐 만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에게 나만큼의 아픔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 간격은 사라지게 된다. 타인의 아픔을 인식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언어나 문화와 같은 환경의 이질성 때문이 아니다. 나의 상처를 감추느라 꽁꽁 싸매고, 울타리를 친 마음이 건너가지 못한 때문이다.
먼 타국의 사람들, 나와는 무관했던 타자들이 스쳐가듯 만난 사이에서도 상처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아픔과 후회를 가져온다. 『쇼코의 미소』에서의 관계는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좀 더 가깝고, 오래 지속되고, 친밀한 관계로 좁혀진다. 서로 사랑했던 친구, 옆집에 살던 친구, 자매들, 통신으로 만나 알게 된 청춘들, 친구들, 막연한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두 사람…. 언어가 같다고, 좀 더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그 아픔의 깊이를 헤아리지는 못한다. 헤아리고 공감해도 무기력한 상황을 맞이하기도 한다. 여전히 서로를 오해하고 착각하기도 한다.
무해한 사람이라고 착각한 친구와 비교해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나’는 그에게 감정을 말하기 바빴고, 그 친구가 받아주기만 했다. 그 친구에게도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시들어가는 친구를 보며, 그만큼 지치고 식어버린 마음으로 대하고 있던 주인공이 몸을 떨었던 것은 추위가 아니었다.
“그 장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애를 보내면 마냥 후련하기만 할 것 같았던 마음이 어떤 두려움으로 바뀌던 순간을, 버스가 떠난 뒤에도 나는 터미널에 가만히 서서 모래가 탄 버스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찬바람에 몸을 떨었다.”(183p)
그렇게 흘러가버리도록 놓아 둔 마음은 온기를 잃은 파편이 되어 남아있다. 친구의 죽음에 죄책감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고,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자매에게로부터 지나온 고단한 삶을 듣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가정폭력의 희생자인 친구를 도울 수 없는 무력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짐을 지운 무게와 환자를 돌보는 일에 지쳐 괴물로 변해 갔다던 고백,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결국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서도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강을 사이에 두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찾아가 말을 하게 되고 고해소를 나오듯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209p)
그렇게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지만 다시 상처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제 그 고해는 4대에 걸친 여인들의 이야기로 옮겨져 간다. 이야기를 끝낸 후, 다시 상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 혹은 여성들의 고통의 근원을 찾고, 다른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을 내딛게 하는 이야기다. 현대를 살고 있는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의 근원에는 사회로부터 덧입혀진 의미들이 있고, 그 의미는 그들에게 체념을 강요하는 굴레가 되었다. 가장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여성이라는 타자로서 살아낸 시간은 전쟁과 폭력의 시대였다. 그런 시절은 주인공의 증조모에게 체념을 요구했고, 할머니에게 대물림 된다. 그 삶을 벗어나려는 엄마의 방식은 왜곡되고, 오히려 더 많은 포기와 침묵 속으로 자신을 가둔다. 현재를 살고 있는 주인공도 그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4대에 걸친 역사를 듣는 시간들, 발화자나 청취자나 모두 그 설화 속에서 치유를 받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아직 변화가 더딘 세상 속으로 나아간다.
작가는 긴 호흡으로 전작에서 진전된 의미들을 던지고 있다.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상처 때문이다. 그 상처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부터 치유는 시작된다. 근원은 자신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도, 살아온 역사, 정신적인 유산에도 있다. 내가 왜 이 상처 안에서 꼼짝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가? 가족뿐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아픔을 주고받는가? 근원을 찾아가는 대화가 필요하다.
또한 4대의 여자들이 각자의 아픔을 나눌 친구들로 인해 매서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그 사람!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사람이다. 아픈 사람을 안아주는 또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 그들이 서로의 눈물을 받아주고 싸매어 줄 때 우리의 밤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