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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문』이라는 제목은 그의 제자들이 결정한 것으로 나쓰메는 글을 쓰기 시작한 다음이었음에도 “전혀 ‘문’답지 않아 곤란할 따름이지”라고 데라다 도라히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투덜거리고 있다. (377p,『나쓰메 소세키론 집성』 가라타니 고진)
툇마루에 앉아있는 소스케는 “이봐 날씨가 좋은데” 하고 아내에게 말을 걸고 장지문 안쪽에 있는 오요네는 “네에”하는 심드렁한 반응. 평화롭지만 “그들은 아직 그럴 만한 나이도 아닌데”(44p) 조용히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부부처럼 보인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들의 잠잠한 모습은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고 그들 안에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불안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죄책감은 친구의 연인을 빼앗고, 남편과 다름없는 남자를 배신하고, 가족과 친척에게 등을 돌린 과거에서 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참아야지 뭐” 서로를 위로하는 듯하나 체념하고, 인내하는 듯하나 희망은 없는 모습이다. “머지않아 또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 나쁜 일만 계속되라는 법은 없으니까요”하는 아내의 위로가 “자신을 농락하는 운명의 독설처럼 느껴졌다”(51p)는 소스케의 상태는 새삼 이렇게까지 죄책감의 깊이와 인력이 강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아이를 유산하고 더 이상 갖지 못하는 것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계속되는 것도 그 때의 선택 때문이고, 그들 자신은 스스로 행복을 바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죄책감의 주체는 소스케이고 오요네는 이 감정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는 오요네의 고통을 놓치고 있다. 소스케가 잃은 우정, 가족, 재산, 사회적 지위에 집중함으로 오요네의 감정은 대상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소스케를 이 선택과 감정의 주체로 놓고 그가 죄책감을 대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벼랑 밑 집이라는 위태함은 한밤중 울린 소리로 더욱 긴장감을 주고, 벼랑 밑에 떨어진 문갑소리였음을 알게 된다. 그 문갑의 주인인 이웃을 알게 됨으로 그들 부부에게 활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문갑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져온 불안감의 실체는 드러나고, 이 이웃집에 친구 야스이가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소스케의 그 다음 행동이다. 짐을 싸서 수행을 위해 선사로 들어간다. 소스케는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번뇌에서 벗어나고 싶다. 수행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망상으로 인해 실패했고, 선사를 떠나오며 그는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 무능하고 무력하게 남겨졌다. ……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 밖에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날 수 없는 문이라면 일부러 거기까지 가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원래의 길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견고한 문이 언제까지고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문을 지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문을 지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요컨대 그는 문 아래에 옴짝달싹 못하고 서서 해가 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253p)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야스이가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의 머리를 스쳐 가려던 비구름은 간신히 머리에 닿지 않고 지나간 듯했다. 하지만 이와 유사한 불안이 앞으로도 몇 번이고 여러 가지 수준으로 되풀이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것을 되풀이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일이다. 그것을 피해 다닌 것은 소스케의 일이다.”(261p)
선사로 떠난 것은 회피였다. 그는 앞으로 되풀이 되는 상황을 이런 식으로 대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다. 차라리 야스이를 만나서 지나온 시간들이 어떠했고, 과거 잘못한 일로 인해 괴로웠다고 하며 용서를 구하는 편이 그가 되풀이되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그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경우 삶에서 이런 식의 회피를 보게 된다. 나 자신에게서도 그렇다. 특히 소스케처럼 사람에 대한 과오를 종교로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를 자주 보게 된다. 수평적인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 가져가는 것이다.(물론, 구원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죄 사함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타인에게 상처를 준 나의 잘못은 그 당사자에게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아닌가?(성경에서도 예배를 드리다 형제에게 잘못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그와 화해한 후에 와서 예배하라고 쓰여 있다.) 용서의 문제에 있어 이런 회피는 책임을 잊은 이기적인 태도다. 편리한 착각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회피하고 싶다. 불편하지 않으니까.
나쓰메 소세키의 주인공들은 왜 이렇게 미루고 회피하는 태도를 갖고 있을까? 나쓰메 소세키의 자아 중 한 면이라는 생각이다. 유년기 친부모와 양부모 사이에서 겪은 정체성 혼란이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음을 추측하게 된다. 양부모의 친밀한 태도와 거기서 사랑을 느낄 수 없었던 이중적인 감정, 친부모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했던 상처가 그로 하여금 인간관계에서 주저하고 미루는 회피하는 태도를 갖게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자신의 결함을 그대로 작품 속 주인공에게 부여하여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글을 부단히 썼고 그 자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었다. 그가 작품에서 적나라하고 상세하게 자신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음이 그 증거다. 그의 위대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