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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평점 :
[아파트먼트 리뷰대회]
1996년의 뉴욕, 컬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 문예창작 프로그램, 등단을 꿈꾸는 젊은 작가들의 삶은 잘 모르는 세계다. 그럼에도 20대 주인공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뉴욕과 컬럼비아 대학이 드리우는 명성의 그늘 아래, 누추한 생활과 불안을 감춘 젊은이들의 만남이 관계의 보편성과 존재의 외로움을 그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던 내 젊은 날의 정체성과 상실한 관계들을 떠올리게 한다. 읽는 내내 주인공의 어리숙하고 연약한 마음에 공명했다.
주인공 ‘나’는 맨해튼 ‘임대료규제법 적용 아파트’를 불법 전대해서 살고 있다. 이 임대료와 비싼 수업료와 생활비를 아버지에게서 지원 받고 있다. 오래전 어머니와 자신을 떠난 아버지의 보상이다. 어색한 대화를 피하기 위해 응답기에 ‘금액 청구 메시지’를 남기는 ‘나’의 모습은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성품의 단면을 보여준다. ‘나’는 자신을 “진짜 상류층을 외설스럽게 훔쳐보기에는 돈이 부족하고, 전령을 보내 가난한 이들의 사정을 알아보기에는 지나치게 애지중지 길러진”(20p) 사람들 중 하나라고 평한다. 붙임성 없는 ‘나’는 경청하고 농담하는 법도 남들이 하는 상호작용에서 모방했다. 적발되면 퇴거해야 하는 아파트와 가식적인 사교매너와 차츰 드러나는 재능부족은 자신이 아닌 존재로 살고 있는 ‘나’를 나타낸다.
합평(合評) 시간, ‘나’의 소설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던 동료 수강생들과 달리 호의적인 평을 한 빌리를 알게 된다. 작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빌리는 아직 뉴요커의 세련된 매너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나’는 술집 지하 창고에서 기거하고 있던 빌리에게 아파트의 방을 제공한다. 인생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빌리가 신뢰할 수 있는 단 한명의 친구라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둘이 함께 간 ‘첨리스’에서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꿈꾼다. 한편, 빌리가 일하는 술집 바에 앉아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연상하는 ‘나’에게서 여전히 외로움이 묻어난다. 빌리를 들인 아파트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처럼 ‘나’의 자아도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자의식이 강하고 빌리의 눈치를 지나치게 많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일방적인 관계에서 신뢰는 이루어질 수 없다.
빌리는 임대료를 부담하는 대신 청소를 한다. 노동으로 대신하는 빌리의 당당함은 청소하는 동안 집밖으로 나가 배회하는 ‘나’의 당혹스러움과 대조된다. ‘나’는 빌리의 뛰어난 글에 질투나 열등감보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빌리를 위해 비행기 표를 제공하고, 렌트카 비용을 대신 내고, 여러 가지 경제적 비용을 부담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나’의 모습에 이 관계의 파국을 예감하게 된다.
이렇게 쌓여진 관계의 깨어짐은 예상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냉랭해진 빌리는 ‘나’의 소설에 전과 달리 직설적인 비평을 한다. ‘빌리’는 아파트를 떠나지 않은 채 새로운 그룹을 만들고, 세련된 뉴요커의 모습을 갖춰간다. 결국 ‘나’는 도의를 거스르는 치명적인 행동을 한다.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살리에르의 유령일까? 빌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경계에만 머물고 있는 재능 없는 ‘나’의 외로움에 더 마음이 기운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유(浮游)하던 시절이 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면서도 그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던 시간들이다. 치기와 일탈은 자신의 의지보다는 옆에 있는 누군가를 의식한 과시다. 그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일인 것처럼 느껴졌던 미숙함은 관계를 상실하고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된다. 대자적(對自的) 존재라는 개념이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는 타인의 권력을 느끼고 그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욕망한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과 대등한 관계를 이룰 수 없다. 그 불균형으로 인해 관계는 언젠가 파열음을 낸다. 타인에게 자신을 소모하던 젊은 날의 나를 기억하며, 경험했던 결별들은 당연하기도 했고, 필요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