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지향과 자본으로 환원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원시상태로 돌아가 근원적 예술을 추구한 예술가의 삶에 대한 소설로 읽었다. 서머싯 몸은 이 소설에서 고갱을 모델로 한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과 예술혼을 그렸다. 런던의 증권 중개인이었던 그는 가족을 떠나 파리의 낡은 여관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그린다. 예술에 대한 충동과 욕망을 불태우던 그를 알아본 화가 더크 스트로브의 지원을 받게 된다. 도시에 대한 염증을 느낀 화가는 타히티로 떠난다. ‘6펜스’가 상징하는 도시와 현실을 떠나, ‘달’이 상징하는 원시와 예술과 욕망을 향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그가 거하던 집의 벽에 불후의 작품을 그리고 죽는다. 이 그림의 모델은 아마도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What do you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일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 1897~1898
“창세의 순간을 목격할 때 느낄 법한 기쁨과 외경을 느꼈다고 할까. 무섭고도 관능적이고 열정적인 것, 그러면서 또한 공포스러운 어떤 것, 그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감추어진 자연의 심연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비밀을 보고 만 사람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신성한 것을 알아버린 이의 작품이었다. 거기에는 원시적인 무엇, 무서운 어떤 것이 있었다. 인간 세계의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마법이 어렴풋이 연상되었다. 그것은 아름답고도 음란했다.”(293p)
스트릭랜드를 찾아갔던 의사가 그림을 본 감상이었다. 어린 아내 아타는 고흐의 유언대로 그 집을 태워버린다. 광기어린 예술혼을 소유한 한 인간의 ‘오디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설과 달리 현실에서 우리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그 그림을 볼 수 있다.
당시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예술가의 삶에 대해 생각했고, 그것은 목표지향적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 작품에 만족할 수 없는, 끝없이 솟아오르는 욕망에 휩싸여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예술혼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이 소설의 화자(서머싯 모옴)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들뿐이고, “소멸해 버린 동물을 뼈 하나만 가지고 그 형상뿐 아니라 습성까지 재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물학자와 같은 입장”(246p)이라고 작가로서의 상황을 말한다. 고갱과 그의 그림을 모델로 했고, 상상에 의한 재구성이라는 것을 화자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일종의 유미주의적 지향점을 갖고 글을 쓰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당시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재미를 위한 글을 쓴다는 그의 말에서 나타난다. 그로인해, 독자로서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타와 타이티의 여성들을 간과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젤다 폴록은 『고갱이 타히티로 간 숨은 이유』에서 고갱의 그림에 나타난 사유를 파헤친다. 그녀의 주장은 고갱의 그림을 무비판적으로 숭배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 흔히들 고갱은 유럽과 유럽 도시의 문명을 거부하고 낙원과 같은 시골에서 원초적인 인간의 감성과 충동을 추구하여 서구미술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타히티로 간 이유부터가 그것과는 거리가 있었음을 자료는 보여준다.
“1891년 4월 1일, 폴 고갱은 프랑스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으며 ‘타히티의 관습과 풍경을 연구하고 그리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 교육부와 미술부처의 서신들을 지니고 고국을 떠났다.…… 그곳에서 2년을 지냈고 이후 프랑스 정부에 자신을 소환해 달라고 탄원하였다. 1893년8월 30일 그는 무일푼으로 마르세유에 도착하였다.
예기치 않은 행운으로 고갱은 숙부로부터 약간의 재산을 상속받아 파리에 있는 작업실에 자리를 잡았고, 그 유명한 폴 뒤랑위엘(Paul Durand-Ruel)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준비하였다. 1893년 11월 9일, 그가 2년 동안 타히티에서 작업한 작품들과 브르타뉴에서 작업한 몇 작품들을 합해 41점의 회화와 2점의 조각을 전시하였다. ……고갱은 우리가 돌이켜 ‘아방가르드’라고 부르는 파리 미술 세계의 분파에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철저하게 계산된 직업 정책으로, 고갱은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전위예술(avant-gardism)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부상하였다.”(20p)
그는 타히티에서도 이혼한 전처에게 편지를 보냈고, 돌아가 그녀와 재결합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은 “타히티에서 제작되었으나 파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타이티 소녀의 신체는 고갱이 자신의 주장을 파리에서 진전시키기 위해 사용한 방편이었다.”(7p) 프랑스의 식민지로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던 타히티 문화에 대한 “식민지적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 어린 테하아마나(Teha’amana)를 부인으로 삼아 결혼을 한 것은 자신의 성적욕구를 채우고 작품활동에 필요한 여성의 몸을 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타히티에는 백인 남성을 위한 매음굴이 존재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매독이 퍼져 있었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직접 어느 타히티 가정을 찾아가 부인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그 가장으로부터 어린 딸을 얻는다. 이러한 관계는 파리의 화가와 모델의 관계와 다르지 않다. 다르다면 그의 작품에 식민주의(colonialism)와 관광주의(tourism)적 시선이 덧붙여졌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관광하듯 문화를 보고, 여성의 몸을 사는 백인 남성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유럽과 그 식민지 타자들(colonial others)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실제적, 사회적, 성적, 그리고 심리적 관계가 작가의 삶에 깊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폴록은 이러한 식민주의와 관광주의가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의 욕구와 관련 있음을 입증하고. 서구 근대화에 내재된 본원적인 충동임을 밝히고자 한다. “폴록은 ‘참조’ ‘경의’ ‘차이’라는 예술적 아방가르드 전략을 해석의 틀로 제시한다.”(45p 『위대한 미술책』 이진숙 )
“참조, 경의, 차이로 이루어지는 3단 구조는 전위예술을 일종의 게임/놀이로 이해하도록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어떤 작가가 아방가르드 집단에 이름을 내려면 과거 역사 속에서 이미 진행된 것들을 자신의 작품과 연관지어야 한다. 이것이 참조(reference)다. 그리고 최근의 동향이나 말, 혹은 공유하는 관심에 대한 결정적 선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대표하는 기존의 지도자, 작품, 혹은 프로젝트에 경의(deference)를 표해야 한다. 끝으로 당시의 미학과 비평의 견지에서 명백한 차이(difference)를 구축하는데 개입해야 한다.”(24p)
<올랭피아> 마네, 1863
<마나오 투파파우>,고갱, 1892
마네의 올랭피아는 전통적인 ‘침대위의 비너스’를 참조했고, 마네는 창녀 올랭피아와 흑인 하녀 ‘로르’를 등장시킴으로 차이를 만들었다. 고갱의 <마나오 투파파우>(Manao Tupap>에는 테하아마나(Teha’amana)가 등장한다. 타히티어로 씌어 있는 이 그림의 제목은 ‘영혼, 사고’를 의미한다. 고갱은 그녀가 어둠 속에 홀로 엎드려 자신을 바라보는 사자(死者)의 영혼을 상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제3 자(고갱)에 꽂혀 있는 점이라든지, 유령의 모습과 그의 그림에 대한 내러티브는 자신의 관음증과 욕망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네의 <올랭피아> 에서는 그동안 보였던 신화적 요소와 오리엔탈리즘의 상투성을 깨는 진전된 차이를 보여주고 있지만, 고갱의 <마나오 투파파우>에서는 그것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누드의 아방가르드적 표현인 마네의 <올랭피아>를 형식적으로 참조함으로써 고갱은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소유자(테후라의 소유자)로서 그림 밖의 유럽인으로서 자신을 주장하고 있다.”(43p)
“이 작품을 탄생하도록 한 조건은 서구의 근대성이었고, 이는 유럽 남성의 시각이다. 그 응시와 그 응시가 침대에서 화가에게 봉사하도록 구매된 타히티 여성의 몸에 각인한 욕망 하에서, 타히티는 단지 고갱이 혼란스럽게 만든 죽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 씻을 수 없는 하나의 ‘알리바이’ 이다.”(122p)
관광주의와 식민주의의 영향 하에서, 예술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성과 인종을 보게 된다. 근대 아방가르드 전략의 근대 미술사는 “미술사의 젠더(성)뿐 아니라 색채(인종)도 노출시키는 유럽 중심적 프로젝트와 연합하고 있다.”(122p)
그리젤다 폴록을 알게 된 것은 이진숙의 『위대한 미술책』을 통해서이다. 절판된 책을 어렵게 중고 책으로 구입했다. 그만큼 저자가 인용한 부분과 책의 메시지가 강력했다. 『위대한 미술책』에서 작가가 미술을 공부하고 강의하면서 읽었던 명저 62권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그리젤다 폴록, 전영백, 존 버거 등의 책을 소개받았다. ‘공부는 남 주려고 한다!’를 모토로 하는 작가는 아낌없이 좋은 책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미 읽은 책들과 인용을 만나 기분 좋은 순간은 짧고, 소장 욕구를 억제하기 어려운 책들이 긴 리스트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