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의 이유들을 역사에서 찾고 이해할 수 있었던 책이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땅에 살았던 고대인으로부터 역사를 서술한다. 시작은 시바 료타로의 『초원의 기록』에 등장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중 스키타이인에 대한 기술이다. 『역사』를 따로 볼 때는 눈에 띄지 않았던 부분이다. 흑해 북쪽 해안 도시를 그리스가 식민지와 교역항으로 삼았던 사실에만 집중하고 읽어서였는지 여기서 읽고서야 기억이 났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언급된 ‘키메리아인의 땅’은 우크라이나 땅에 대한 문헌상 최초의 언급이라고 소개한다. 그 다음으로는 스키타이인이 등장한다. 그들에 대해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인물은 헤로도토스이다. 실제로 그는 흑해 북안의 식민도시에 머물며 그들을 접했고, 신화와 역사가 접목된 내용을 제 4장에서 기술한다. 왕족 스키타이 집단(유목민), 농경 스키타이 집단으로 나뉘어진다. 이중에 농경스키타이는 슬라브인의 선조라는 학설도 있다. 그들은 매우 뛰어난 전사였고, 용맹했고, 능란한 기마술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르고호의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찾은 곳과 프로메테우스가 묶여 있던 캅카스 산이 있는 해안 도시들은 그리스와의 교역으로 문화적 영향을 받았고, 곡물을 수출했다. ‘스키타이의 땅은 그리스 본토의 ‘빵바구니’가 됐다.‘(35p) 그 후 사르마타이인이 침입해 들어왔고 기원후 3세기까지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번성했다. 이어 게르만계 고트족(3세기 중반~4세기 말), 훈족(4세기 후반~6세기 중엽), 아바르 족(6세기 중엽), 불가르 족(6세기 말 ~7세기 중엽) 등이 이 스텝 초원 지대를 지배했다. 한편 6세기 중반 흑해연안에는 비잔티움 문화가 번성했다.
『러시아의 역사』니콜라스V. 랴자놉스키와 마크D. 스타인버그, 까치
그 후 키예프-루스 공국이 세워진다. 10세기 키예프-루스 공국의 지도를 보면 드네프르강이 관통하는 넓은 지역으로 발트해 연안과 모스크바를 포함하고 있다. 키예프-루스가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영토가 되고, 모스크바 공국은 키예프-루스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했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 이 루스에서 파생된 단어가 ‘러시아’이다. 키예프-루스의 정통계승자가 누구인가는 여전히 논쟁점이다. 키예프 루스를 형성한 것은 현재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의 선조인 동슬라브인이다.
이 책은 『원초 연대기』를 참고로 하고 있다. 동슬라브인 중에서 키예프 주변에 살던 폴랴네 씨족 삼형제가 이 도시를 세웠고 첫째 키이의 이름을 따서 키예프라고 이름 붙였다. 북쪽 스웨덴으로부터 바랴그인이 상륙하고 노드고로브 지역(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포함)에 루스를 세웠다. 이 루스는 키예프를 점령하고 수도를 옮긴다. 실질적으로 키예프-루스 공국을 창시한 것이다. 볼로디미르 성공과 야로슬라프 현공의 황금기에 공국은 기독교화 된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몽골의 침략으로 종언을 맞이하고 몽골지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타타르의 멍에’라고 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제국주의적인 시각을 보게 된다. ‘타타르의 멍에’보다는 ‘팍스 몽골리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해석이다. 몽골의 교역으로 부강해졌다는 것이다.
키예프 루스가 망하고 우크라이나 땅에는 계승할 국가가 없었다는 러시아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할리치나-볼린 공국이다. 키예프 루스 공국의 서남부에 있으면서 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도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다. 1340년에 할리치나는 폴란드에 볼린은 리투아니아에 병합되었다. 그후 300년 동안 이 지역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됐다.
‘변경’이라는 뜻의 ‘우크라이나’는 16세기가 되면서 코사크의 등장으로 드네프르강 양안으로 펼쳐지는 코사크의 특정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코사크(카자크)는 15세기경부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스텝 초원지대에 거주하며 자치적인 무장집단을 형성한 집단과 구성원을 일컫는다. 키예프 루스의 해체 후 무인의 땅이 되어가는 스텝지역으로 폴란드 리투아니아 영내의 가난한 하급지주와 주민들이 이주해왔다. 그들은 타타르인들의 노예사냥에 대비하여 무장 조직을 만들었다. 자포로제 시치(요새)에 거주하는 자포로제 코사크는 그들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17세기 이들의 헤트만(지도자) 사하이다치니는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교육, 정교의 진흥에 힘썼다. 몽골과 리투아니아 지배 아래 완전히 쇠퇴한 시골 마을로 전락한 키예프는 그 덕택으로 우크라이나의 문화, 교육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사하이다치니의 죽음 후 몇몇 헤트만은 폴란드에 대한 반란을 지도했지만 진압된다. 1630년대 이 반란시대의 코사크를 로맨틱하게 그린 것이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인 소지주의 후예 니콜라이 고골이 쓴 『타라스 불바』(1835)다.
18세기까지 우크라이나 지역의 80%는 러시아에 나머지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이들 지역의 코사크들은 크림전쟁에서도 1차 세계대전에서도 갈라져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최초로 국가를 완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폴란드에 대항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비호를 구한 1654년 ‘페레야슬라프조약’에 대해 러시아·소련,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평가는 엇갈린다.
표트르 대제 때 헤트만 마제파에게 영감을 받은 낭만파 작가와 작곡가들은 많은 작품을 탄생시킨다. 바이런 푸시킨 빅토르 위고는 서정시를 썼고, 차이콥스키는 오페라 『마제파』, 리스트는 관현악을 위한 교향시 『마제파』를 작곡했다. 예카테리나 2세 때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방과 동일한 하나의 지방이 됐다. 마지막 헤트만 키릴로의 아들 안드레이 라주모프스키는 18세기말~19세기 초에 주오스트리아 러시아 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베토벤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이름을 붙인 라주모프스키 현악 사중주곡을 비롯하여 5번 교향곡 『운명』과 6번 『전원』이 그에게 헌정됐다.
이 책에서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특별히 발자크의 백작부인과의 사랑과 우크라이나에서의 체류에 대한 기구한 이야기를 츠바이크의 『발자크』에서 소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어 최고의 문학인으로 평가되는 타라스 셰브첸코(1814~1861)는 사후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러시아 혁명 직전에는 신흥 항구 도시 오데사에는 유대인의 수가 점차 증가하여 시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들 중에서 음악가 오이스트라흐, 밀슈타인, 길렐스, 『오데사 이야기』작가 바벨 등이 탄생했다. 쇼렘 알레이헴(1859~1916)의 『우유 배달부 테비에』를 뮤지컬화한 「지붕위의 바이올린」은 남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사회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 조지프 콘래드,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 외에 여러 예술가들을 소개하면서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던 이 땅에서 세계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재가” 많이 탄생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라는 감회를 적는다. 슬라브인들의 예술적 재능과 감성을 다시 보게 된다.
언어, 문화, 경제적 제재 속에서도 독립을 위한 시도들은 지속되어 왔고 근대로 오면서 그 움직임은 더욱 커졌다.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성취하지 못했던 것은 그 지리적인 위치와 주변 국가들 폴란드, 독일, 러시아의 세력다툼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안에서도 볼셰비키와 혁명을 반대하는 집단이 존재해서 내전까지 치달았다.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은 러시아 혁명 당시 백군과 적군이 충돌하는 이 시기 코사크(카작)의 삶과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대항한 파르티잔 활동과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으로 참전한다.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얄타회담을 비중 있게 다룬다. 크림반도의 얄타에 위치한 로마노프 왕가의 리바디아 궁전에서 이루어진 회담에서 우크라이나 전역을 소련령으로 결정했다. 소련은 각 국가의 자치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 정부내각은 아무 힘을 쓸 수 없는 유명무실한 존재였고 중앙 공산당과 레닌과 흐루쇼프, 부르즈네프, 스탈린의 통치를 받게 된다.스탈린의 집단농장은 우크라이나에 유래 없는 기근을 가져오고, 많은 사람들이 아사하게 된다. 그들의 독립은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구테타로 소련이 붕괴되는 시점에서 이루어진다. 독립 후 구체제의 인물들이 독립파로 전향한 상태라 그 체제가 독립국가로 이행되는 상태였다. 그들은 많은 숙제를 떠안고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이야기다.
니콜라스V. 랴자놉스키와 마크D. 스타인버그의 『러시아의 역사』와는 약간의 온도차와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이 참고하고 있는 『원초 연대기』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고대 키예프 루스의 형성 당시 노르만의 유입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에 있는 사학자들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크라이나의 역사가 러시아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포함되어 기술되었던 것과 달리 이 책의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단독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민족주의 역사가들의 입장을 서술하고 있다. 2014년 친러 성향의 반군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돈바스에서의 전쟁에는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 모르겠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유럽 주변 국가의 침묵 내지는 시늉만 내는 지원, 미국의 태도 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자비 없는 힘의 원리 아래서 여성과 아이들은 기차역에서 떨고 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글이 떠오른다.
오래전 읽었던 『고요한 돈강』을 잠시 응시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고골의 『타라스 불바』도 책장에서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