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멜리아 모저리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라고 부탁하더군요. 저도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창단 회원이거든요. 
하지만 전 단 한 권의 책만 되풀이해서 읽습니다.
 <세네카 서간집 ,라틴어 원문의 영어 번역서, 부록 첨부>죠. 세네카와 문학회, 이 둘이 있었기에 저는 비참한 주정뱅이의 삶에서 벗어날수 있었습니다. - P138


어쨌든 책이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까도 밝혔듯이 저에게 책은 단 한 권입니다. 세네카 말입니다. 그를 아십니까? 가상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설파한 로마 시대의철학자입니다. 역시 지루할 것 같지요? 하지만 그의 편지는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재기 발랄하지요. 글을 읽으며 웃을 수있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P139

저는 문학회 모임을 무척 아낍니다. 점령기 시절을 견딜힘을 그곳에서 얻었으니까요. 모임에서 안 몇몇 책도 괜찮은 것같았지만 저는 늘 세네카에게만 충실했습니다. 마치 그가 저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어요. 특유의 재치 있고 신랄한 말투로요. 오직 저에게만 말하는 듯했지요. 세네카의 편지들 덕에 저는 훗날 겪어야 한 모든 일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요즘도 문학회 모임은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모두 세네카라면 진저리를 치고 저더러 제발 다른 걸 읽으라고 애원하지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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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다 읽고 난 후 영화도 함께 봐야겠다.
물론 리뷰도 쓰고...^^


친애하는 애덤스 씨,
저는 이제 오클리 스트리트에서 살지 않지만, 다행히 당신의 편지가 절 찾아왔네요. 제 책도 당신을 찾아갔다니 무척 기쁩니다.
《엘리아 수필 선집》과 헤어지는 건 참으로 슬프고 아픈 일이었어요. 물론 같은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었고 책꽂이에 둘 공간도 없었지만, 그 책을 팔 때는 마치 배신자가 된 기분이었죠.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군요.
제 책이 어쩌다 건지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 P20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 P22

독일군이 상륙하던 날에도 이 문장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을 실은 비행기가 연달아 오고 부두에도 배가 쏟아져 들어오는 걸 바라보던 그때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빌어먹을 놈들, 빌어먹을 놈들‘ 하고 속으로 되뇌는 것뿐이었습니다.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라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가 상황에 맞설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심장이 신발아래로 가라앉듯 축 처져 있을 게 아니라요.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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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1-02-22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p22 글 공감갑니다^^

책도 영화도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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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무하는 아버지가 일하는 법원의 서기로 취직하지만… 사건의 명부는 그가 그린 낙서나 장식 무늬, 공소인들의 초상화로 그 가장자리가 메워졌다.” 34p

카프카…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의 그림자를 본다.

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생소한 예술가들과 작품들이 낯설고 헷갈리는 상황을 자주 겪는다. 그런 중에도 잊혀지지 않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날 때가 있다. 무하와 그의 작품도 그 중 하나이다. 알폰스 마리아 무하. 아르누보 화가. 그의 그림을 만난 첫인상은 ‘예쁘다. 예쁜 일러스트 같은데?’ 였다. 다시 자세히 본 그림들에서는 여인의 눈빛과 포즈, 그리고 배경으로 장식된 이미지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게 되었다. 그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붙잡는다.

처음 무하를 알고, 그가 모라비아 태생이라는 것 때문에 끌렸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그 사이를 흐르는 블바타 강, 얀 후스, 30년 전쟁, 합스부르크의 통치, 슬라브인들의 애환의 역사… 아마도 이런 끌림은 내 피에 흐르는 우리 역사 때문인가 싶다.

1860년 체코 모라비아 이반치체에서 태어난 무하의 시대는 아직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모라비아 왕국시절을 기억하는 그 곳은 애국적인 도시였다고 한다. 이곳을 떠나 빈, 뮌헨, 파리, 뉴욕에서 30년 동안 활동하던 무하는 말년에 이곳으로 돌아와 <슬라브 서사시The Slave Epic>를 탄생시킨다. 예술가의 작품 세계의 원형은 고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물 한 살의 무하는 빈에서 극장을 장식하는 화가로 첫발을 내딛는다. 화가 한스 마카르트를 만나 그의 작품에서 많은 인상을 받는다. 당시 많은 재능 있는 작가들이 그렇듯이 그 재능을 알아보는 후원자를 만나고, 그는 뮌헨을 거쳐 파리로 향한다. 그가 만난 벨 에포크의 파리는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예술적 시야를 넓히고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후원이 끊어지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신문 일러스트를 그리면서, 그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재능이 꽃피기 시작한다. 아마도 아르누보 화가로서의 첫 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다.

파리에서 만난 샤를로트 부인의 카페 ‘크레므리’는 ‘탕귀영감’이나 ‘바토 라부아’의 가게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만남과 인연을 제공해주는 곳. 1890년 이 곳에서 고갱을 만난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장소와 시대에 사는가는 예술가들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동시대(1980년 4년후,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이 있었다), 조선에서 살았던 예술가들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무하가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를 그리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아주 극적인 장면이다. 1895년 사라 베르나르를 그린 무하의 포스터는 파리 전역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녀는 무하의 그림을 통해 아르누보 여인의 전형이 된다. 무하는 이 그림들로 쏟아져 들어오는 의뢰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해진다. 그의 광고 포스터는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람들의 욕망을 꿰뚫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영역은 장식 예술, 보석세공, 잡지, 책의 삽화, 조각에까지 넓혀진다.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거둔 큰 성공은 아르누보 장식예술가로서 알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장식예술가로서 규정되는 정체성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고민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게 한다.
그는 뉴욕으로 떠나 그 곳에서 유화 붓을 잡지만 오랫동안 놓았던 작업이라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 못한다. 그곳에서 찰스R 크레인을 만나고 슬라브인들을 위한 작업을 계획하고 있는 무하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할 것을 약속받는다. 크레인의 딸을 모델로 그린 <슬라비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지폐에 사용되기도 한다.

고향에서 20년 동안 6x8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템페라로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했다. 고령의 나이에 이 제작과정은 엄청난 고역이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20개의 에피소드는 그동안 파리에서 보여주었던 작품들하고는 느낌도 메시지도 다르다. 범슬라브인들을 위한 작업. 5개의 알레고리적 테마와 5개의 종교적 테마, 5개의 전쟁 장면과 슬라브 문화에 관한 5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책에 수록된 몇 편의 <슬라브 서사시>를 보면 슬라브인들의 삶을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예술의 놀라운 힘이라고 할 수 밖에…….

톨스토이의 작품들에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슬라브 민족 독립전쟁이 나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과 러시아의 참전에 관한 논쟁, 그 전쟁에 참전한 인물의 인식의 변화만을 읽었을 뿐이었다. 그 곳에 살았던 민족의 오래된 역사와 전통, 30년 전쟁 이래로 아니 그 이전부터 전쟁터의 한복판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작품은 20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피 속에 역사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무하처럼.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 스타일’을 만들어낸 작품만 수록되어 있었다면 알고 있었던 화가를 좀 더 자세히 아는 것에 불과 했을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대의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화가, 당대의 선구적인 길을 걸었던 화가로서도 그 이름과 잊을 수 없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슬라브 서사시>를 통해 그의 영혼 안에 새겨져있는 블바타 강과 모라비아를 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슬라브인들의 역사를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또 하나의 과제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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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2-20 17: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https://m.blog.naver.com/randomhouse1/222249152686
RHK에서 알폰스 무하 그림 핸드폰 배경화면을 제공하네요 다운 받아서 깔았어요~~^^

새파랑 2021-02-20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책 구매하면 주는 북마크도 좋아 보이더라구요. (북마크 때문이라도 읽어야 할 듯)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가랑비메이커 단상집 1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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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 책이다. 독립출판 5년간 베스트셀러, 스태디셀러라는 말에 주저 없이 구입했다.

노래가사처럼 쉽게 읽히는 시(詩)들이었다. 읽다보면 그렇게 쉽게 쓰여 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명료한 말들 앞에서 더 자주 복잡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쓰고야 마는 사람이라고... 그녀가 한 줄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덜어내고 수많은 생각의 층위들을 벗겨내야 했는지를 알려주는 독백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눈이 머문 詩들.

끝이라는 것이 단번에 쿵, 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뒤돌아볼 미련도 없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끝을 잡고 늘어졌다고, 결국 끝이 아닌 끄으으으읕만이 남겨졌다는 표현에 나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그렇지! ‘이제부터 끝이야‘ 하고 뒤돌아선다고,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지. 한 번에 매듭을 지을 수는 없지. 수많은 밤을 뒤척이고 낯익은 거리를 서성거리면서 매듭을 짓다가 풀고 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사이가 한 번에 끝나? 헤어지고 나서도 혼자 오랜 시간이별을 할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이건, 이별한 당신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이들로부터 거부당한다 해도 그것이 온 세상으로부터 내팽개쳐진 것은 아니란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이들은 한 점에 불과하니까. 숨을 고르고 뒤돌아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집중하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발견한 사막을 당당히 외치며 나아가라고 한다.
「관계라는 사막에서」 이건, ‘나 지금 혼자야?’ 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바쁘게 살다가 허기보다는 속이 더부룩한 것이 더 괴롭다는 것을 아는 때가 있다. 출발점에서 멀어진다고 목적지와 가까워지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야 한다. 젊음의 때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채 내달리는 것에 중독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돌아가는 길」 이건, ‘나 제대로 가고 있어?’ 라고 묻고 있는 당신을 위해!


누군가 자꾸만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하루를 밟아보라고 한다. 그 하루에 어떤 표정들이 들어차 있는지. 한숨은 몇 번이나 내쉬고, 푹 파묻은 고개는 몇 번이나 흔드는지. 그 하루를 밟고도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미워지는 사람이 있어 괴로운 당신을 위해!



전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시(詩)들 이다.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고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개인의 연애사나 청춘의 아픔을 담은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헤아린다. 등을 쓸어주고 함께 가자고 한다.

양손 가득 쥐고 달려온 사람들은 모르는 가을이 있다고 한다. 빈 손으로 터덜터덜 걸어온 이들에게는.(「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나 그 연약한 사람들끼리 힘이 되어주기 위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헤아려 보라고 그리고 꼭 안아주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가난이 당신의 부유를 노려 볼 이유는 없다고... 우리는 그저 각자의 식사를 할 뿐이라고……. 반대로 당신의 부유에 내 가난을 조롱할 자격도 역시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접속사가 붙여지며 시원한 감정의 폭로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벅차오르는 착각이 확신처럼 번져,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싶어질 때면 조용히 접시를 들고 일어서면 된다. 내 몫의 식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곳을 향하여.’(「각자의 식사」)
명쾌하기도 하고, 마치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시원하게 한판승을 거둔 것 같다. 저들이 달리고 있는 경주로 밖으로 탈주하는 기분! 이건, 나를 위하여!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진심이 담긴 시들로 작은 책을 채웠다. 그냥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앓고 난 뒤 그 병세를 알려주는 선배 같다고 해야 하나? 의사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세세한 것들을. 마음을 앓은 흔적들이 있다. 감정에 침몰당하지 않고 담담하게, 연약하지만 심지 있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놓칠지 모를 것들에 대하여,
나는 놓쳤지만 당신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놓쳐도 돼. 어쩌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칠거야. 그게 우리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나온 시간에 나를 구겨놓고 사라질 것들을 찾아 헤매지 말라고…….

시들을 읽으며 ‘그래, 그래’ 하고 마음이 말했다.


“허름한 삶을 입은 것 같아도 대화를 나눌 때면
얼마나 근사한 태도와 건강한 미소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장래희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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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는 「해방 전후사」에 관심을 두고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개인사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더 눈길이 갔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 전쟁을 경험했던 이들의 삶과 의식에 더 무게를 두며 읽었다. 분단선, 개성, 서울의 현저동, 사직동, 서대문형무소 등 역사가 훑고 지나간 아픔의 공간들을 찾아보며,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의식에 더 집중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장면에 눈이 머물고, 다른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오래 전 이 책을 읽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나를 훑고 지나가며 흔적을 만들고, 그 흔적들은 마음의 무늬가 되었다. 타인의 마음에 공명하는 무늬!
독서(어슐러 르귄의 표현을 빌자면, 귀 기울이기)와 시간에 의해 짜여진…….

다시 지도를 펴놓고 내가 찾아본 것은 박적골에서 개성역까지 걸었던 길, 서울역에 도착해서 지게꾼에게 짐을 지게하고 현저동까지 걸었던 길, 현저동에서 매동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넘어가야할 산, 숙명고보 가는 길, 그녀가 놀았다던 서대문형무소 앞마당, 피난을 가려면 어디로 해서 한강을 건너야 했을지……. 지도를 찾아봤다기보다 상상을 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더 마음이 갔다.

유년기의 기다림과 서러움, 환희와 비애를 보며 원시적 감정들을 경험했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보며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묵직하게 감정들이 올라왔다. 어느날 유난히 새빨간 노을에 비친 마을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고,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다섯 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노을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보며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감정의 체험들이 그녀의 앞날을 예견하는 것이지 않을까? 작가로서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사건들이다.

그녀가 느꼈다는 환희야 말로 나를 전율하게 했다. 그녀가 자란 넓은 들판이 있는 자연이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축복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 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32p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소나기를 기억했다.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표현은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경험한 소나기의 장막을 떠올리게 했다.

서울로 온 그녀는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 서울의 산에서 싱아를 찾으며 박적골 뒷동산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러한 혼동은 아카시아의 비린 맛이 일으킨 헛구역질 때문이 아니라, 몸에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방학 때마다의 귀향은 싱그러운 들판의 생명을 마음껏 호흡하는 시간이다.
그를 제일 반겨주고 아껴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사랑마루에 서까래로부터 늘어져있는 삼 줄을 남몰래 어루만지며 심장의 균열이 가는 아픔은 내게도 전달되었다. 그 줄을 붙들고 떨리는 다리로 댓돌을 디디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

한편 더 배웠다고 자부하고, 양반이라는 것을 내세우던 할아버지가 오빠의 총독부 취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것, 큰 아버지를 면서기 시키기 위해 역사책에도 기록될 만한 친일 족적을 남긴 먼 친척에게 청탁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며 당시 집안의 근지라는 것이 역사의식을 상실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어머님에게서도 부조리함을 경험한다. 탁월한 감수성과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대학 첫해를 좌우로 갈라져 싸우는 혼란 속에서 맞이한다. 6.25가 터지고 좌익 활동을 전력이 있던 오빠는 의용군이 되어 북으로 간다. 서울이 수복되고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어려움을 겪는다.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를 맞이하며 피난을 떠나야 하는 그때 오빠가 돌아오고, 부상을 입은 오빠와 함께 가족은 서울에 남게 된다. 모두가 떠나고 텅 빈 골목에서 갑작스런 사고의 전환을 경험한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311p

그래서 그녀의 책은 전쟁과 분단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리라. 막다른 골목에서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의 전복, 사고의 전환을 경험한 후,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인식의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일제강점시대 말과 전쟁, 분단의 시대에 대해 공부하고 새롭게 인식 했을 것이고, 그 인식의 창을 통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증언했을 것이다.

박완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작가가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는 생각에 몇 권 읽은 후 전작 읽기를 중단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책장에 꽂힌 작품들을 뒤적이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읽는 모임에서 책을 정하고 보니 ‘박완서 타계 10주기’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이나 특별판 홍보가 인터넷 서점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백기완 선생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그 세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박완서 작가가 이 소설의 말미에서 ‘증언할 책무가 있다’고 깨달은 것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시대에 고해야만 했던 증언자들이 있다. 그들이 한 사람씩 일을 마치고 있다.
2021년 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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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16 1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ㅠ 엄중했던 한 시대를 견뎌냈던 증언자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증언의 촛불을 꺼가니 마음이 무거워지네요!ㅠ 따듯한 저녁시간되십시요!

겨울호랑이 2021-02-16 1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면 지난 2009년에도 시대의 큰 어른들이 많이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요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듯 합니다. 2009년과는 다른 변화이길 바라봅니다 ^^:)

바람돌이 2021-02-17 0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백기완선생님이 타계하신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제게는 백기완 선생님이 제 청춘의 상징같은 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때문에 그리고 이 도시에는 분향소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을 추모하면서 젊은 시절 보았던 그분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네요. 박완서 작가님의 책도 좀 더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이 이 페이퍼를 보면서 또 들기도 하네요.

JK 2021-02-17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친구 신청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 책에서 느낀 바가 적지 않았는데 쓰신 글을 보니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읽으신 것 같네요. 후속작에 해당하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언젠가는 읽겠다 생각만 하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그레이스님의 글을 계기로 삼아 올해 안에는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2-17 16:34   좋아요 2 | URL
후기 기대할께요
함께 읽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기분 좋은 곳이예요~

고양이라디오 2021-02-22 17: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친구추천하고 갑니다^^ 후속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어서 읽고 싶네요.

그레이스 2021-02-22 17:38   좋아요 2 | URL
글로 후기 나누죠~^^
감사합니다~

scott 2021-03-05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 추카!
그레이스님의 다음편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 기대합니다. ^.^

그레이스 2021-03-05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